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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빠꾸 人生’ 김경율이 사는 法 “내 삶에 後悔란 없다”|신동아

2022年 7 月號

‘老빠꾸 人生’ 김경율이 사는 法 “내 삶에 後悔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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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記者

    mrfair30@donga.com

    入力 2022-06-1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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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와 結婚하고 싶어 會計士 擇해

    • 삶의 分岐點 ‘曺國 事態’

    • 너희가 沈默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나는 언제나 進步… 민주당은 進步 標榜 勢力

    • 하나님과도 같던 아버지

    • 아들아, 그저 자유롭게 살아라



    6월 3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만난 김경율은 “‘노빠꾸’라는 말이 자신의 삶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6月 3日 서울 西大門區 동아일보 忠正路 社屋에서 만난 김경율은 “‘老빠꾸’라는 말이 自身의 삶을 代辯한다”고 말했다. [조영철 記者]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다. ‘會計士’란 職業에 對한 이미지가 그랬으니까. 事務室에서 ‘어마무시한’ 羊의 書類 속에 파묻혀 자릿數가 몇 個인지 世紀도 어려운 數字와 씨름하는, 迅速·正確이 生命이라 한 치의 誤差도 容納하지 않는 冷徹한 사람이리라고.

    까칠할 거라고 생각했다. 只今까지 보인 行步는 마치 ‘송곳’과도 다름없었으니까. 雙龍車, 세모그룹, 다스, 미르財團, 三星바이오로직스, 삼성물산, 三星火災…. 참여연대에 몸담은 時節 그가 찔러 피를 낸 곳이 어디 한 둘이던가. 게다가 2019年 ‘曺國 事態’ 以後론 이른바 進步 陣營의 ‘내로남不’에 앞장서 批判의 목소리를 내며 온갖 진흙탕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5月 9日 한동훈 當時 法務部 長官 候補者 人事聽聞會에서 보인 ‘싸움닭’ 같은 모습은 또 어땠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觀點으로 가득한, 끊임없이 問題를 提起하는 ‘不便한’ 사람이겠거니했다. 김경율(53·經濟民主主義21 共同代表)에게 가졌던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뷰 날을 잡기 위해 첫 電話를 걸었을 땐 유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이얼이 돌아갈 때 ‘已往이면 천천히 받기를…’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 마음 있지 않은가. 避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當場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은 그런 것. 바람과는 달리 10秒도 되지않아 들리는 말. “네, 김경율입니다.”



    그런데 웬걸? 疏脫한 웃음이 이어진다. 禮儀도 깍듯하다. 普通 通話할 때 “네” 或은 “예”를 2番, 많아야 3番 程度 反復하지 않나 싶은데, 大體 몇 番을 하는 건지. “예, 예, 예, 예” 最小 4番은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卑屈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니다. 堂堂하고 시원시원하다. 日程 調律에 1分도 안 걸렸다.

    “네, 뭐, 인터뷰 얼마든지 하시죠. 6月 3日은 比較的 日程이 여유롭습니다. 제가 거기로 찾아뵙죠.”

    6月 3日 서울 西大門區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에서 만난 김경율은 通貨 때의 느낌과 다를 게 없었다. 잘 웃고, 깍듯이 禮儀를 차리고, 行動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近 2年間의 ‘셀럽화(化)’ 德分인지 寫眞 撮影 때 제법 익숙하게 포즈를 取했다. 그래도 아직 完璧히 適應한 건 아닌지 웃는 表情은 조금 語塞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니 자연스러운 웃음을 볼 수 있었다. 하얀 이가 드러나며 두터운 눈 밑 살에 밀려 눈이 初生달 模樣으로 變한다. 싸움닭 같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퍽 純粹해 보인다. 課長을 조금 보태자면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다. 特히 家族에 對해 이야기할 땐 영락없는 ‘淳朴한 아저씨’다.

    그렇다고 ‘順한’ 사람은 決코 아닌 것이, 어떤 對象을 批判할 땐 假借 없다. 여러 次例 보여왔던 ‘戰鬪 本能’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거 못 내보겠네’ 싶은 水準의 ‘센 말’을 쏟아낸다. 火가 난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바짝 선다. 隨時로 바뀌는 두 가지 모습 中 어느 것이 眞짜일까 궁금해하다 부질없단 생각에 이내 접었다. 사람은 元來 꽤나 多彩로운 存在니까. 어떤 모습이 眞짜든 분명한 건 김경율 이 사람, 퍽 재미있는 人物이다. 一旦 말에 ‘필터’가 없다. 말주변이 뛰어난 게 아닌데도 이야기하면 時間이 今方 간다. 꽤나 吸入力 있는 ‘콘텐츠’를 가진 사람이랄까.

    ‘해壞死’가 된 危險한 復學生 오빠

    相當히 까칠할 줄 알았어요.

    “까칠하진 않을 거예요. 이미지하고 다르다는 말 많이 들어요. 學校 다닐 때부터 쭉 그랬죠. 親舊들이 저에 對해 回想할 때마다 하는 말이 ‘警율이는 恒常 장난치고 있었어’ 거든요.”

    장난氣가 많았나 보네요.

    “많이 쳤죠. 弄談도, 장난도(웃음).”

    ‘장난氣’는 페이스북에 잘 나타난다. 揭示物을 자주 올린다. 하루에 大槪 5~6個, 많으면 10個씩 쓴다. 諷刺의 妙味가 도드라진다. 例를 들다면 崔康旭 議員의 性戱弄 發言 疑惑에 對해 6月 3日 午前 7時께 다음과 같이 썼다.

    “正말 崔康旭 議員‘님’께서 그렇게 나불대시다가 沈默 中인 게 넘 안타깝습니다. 그깟 性戱弄이 머라고, 民主黨에 계시는 女性運動 出身 錚錚한 議員ㄴ 들도 單 한마디도 안 하시는 그런 일로 崔康旭 議員ㄴ 발목을 잡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저 한마디면 됩니다. 崔康旭 議員ㄴ이 한 말은 딸딸이였다 이 한마디면… 아 아닙니다 罪悚 짤짤이였다 이것으로 모든 게 解決됩니다.”

    이런 모습 때문일까. 페이스북 知人들은 그를 ‘會計士’가 아닌 ‘駭怪社’라고 부른다. 퍽 어울린다. 김경율度 이 別稱이 마음에 드는지 經濟民主主義21 유튜브 채널에 ‘김경율 해壞死의 일해라 절해라’로 명명한 映像을 週期的으로 업로드하고 있다. 會計 知識에 根據해 政治·經濟 非理 疑惑을 꼬집는 코너다. 좀 駭怪하긴 해도 그의 本業은 亦是 會計사니까. 그런데 會計士가 된 理由도 좀 駭怪하다. 只今 아내와 結婚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단다. 연세대 哲學科에 入學하자마자 勞動運動에 投身했다가 스물일곱 나이에 復學했다. ‘化石’李 된 채 課外로 生活費를 버는 哲學徒였던 그에겐 CPA(公認會計士·Certified Pubilc Accountant)가 뭘 뜻하는 弱者인지조차 生疏했다.

    只今 아내 때문에 會計士가 됐다고요.

    “그런 셈이죠. 試驗 準備하기 前까진 會計士가 뭐 하는 職業인지도 몰랐거든요. 사귀던 땐데 어느 날 묻더군요. ‘父母님한테 뭐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느냐’고요. 當時 生業이 課外였어요. 그래서 ‘課外 敎師라고 하면 되지’라고 했더니 ‘그러면 딸을 주겠어?’라고 그러더라고요. 뭘 해야 할지 苦悶했죠.”

    왜 많은 職業 中 會計士였나요.

    “雄大한 뜻이 있던 건 全혀 아니었어요. 그냥 가장 빨리 合格할 수 있는 試驗을 생각했죠. 周邊에 會計士 工夫하는 親舊가 많기도 했고, 數學엔 조금 自身이 있어서 始作했어요. 1995年 工夫를 始作해 1998年 合格했죠. 3年 걸렸네요.”

    아내와는 어떻게 因緣이 닿은 건가요.

    “1988年에 入學한 뒤 어쭙잖게 勞動運動한답시고 工場에서 生活하고 그러다 1995年 3月 復學했어요. 學校 다니다 아내를 만나게 됐죠.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아내는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元來 이대 後門에서 下宿했어요. 그러다 下宿집이 연세대 正門 西쪽 附近으로 移轉했고, 그때 같은 집에 살게 된 거죠. 다섯 살 車이거든요. 처음엔 男女 感情 그런 거 없었어요. 下宿집 사람끼리 자주 술판 벌이고, 밥 먹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情이 들었죠.”

    大學街에 ‘復學生 오빠’를 操心해야 한다는 格言이 있는데(웃음).

    “그렇죠. 딱 그런 거죠(웃음).”

    勞動運動은 왜 했나요. 그것도 入學하자마자.

    “海南에서 태어나 光州에서 쭉 자랐는데, 아무래도 ‘光州’의 影響이 컸겠죠. 學業에 邁進해 席·博士 해야겠다는 생각은 全혀 없었어요. 1學年 때부터 거의 集會만 나갔죠.”

    이른바 ‘586世代’의 끝자락에 位置했네요.

    “맞아요. 特히 光州 出身 中에 저 같은 境遇는 흔했어요.”

    會計士가 된 뒤에는 제법 ‘坦坦大路’였다. 첫 職場이 삼정會計法人(現 KPMG), 다음 職場이 三逸會計法人이었다. 두 곳은 안진회계법인과 함께 ‘會計法人 3大將’으로 꼽힌다. 會計法人系의 ‘金앤張’ ‘太平洋’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김경율은 ‘駭怪하게도’ 좋은 條件을 내려놓고 會社를 나와 只今 그의 生業이기도 한 1인 事務所 ‘未來 稅務會計 事務所’를 차렸다. 會計士 試驗에 合格한 直後 參與連帶에도 加入했다.

    좋은 職場을 왜 나왔나요.

    “月給쟁이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事實 三逸에서 나온 後 한 벤처企業 專門會計法人에 들어갔어요. 當時 ‘벤처 붐’이 일었거든요. 두 番씩이나 ‘들이받아서’ 그만두게 됐죠. 뻔히 보이는 粉飾(粉飾)을 그냥 넘어가자고 하는데, 죽어도 못하겠더라고요. 쌍辱海 가며 싸웠어요. 이럴 바엔 혼자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더 剛해졌죠.”

    참여연대에 加入한 理由는요. 그곳도 組織이잖아요.

    “辯護士는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모임(民辯)’, 醫師는 ‘人道主義實踐醫師協回(引醫協)’가 있는데, 會計士는 그런 게 없었어요. 제가 勞動運動을 했던 사람이잖아요. 함께한 사람 中 當時는 勿論이고 아직까지도 投身한 狀態인 분들이 계세요. 未安한 마음이 들었어요. 1998年에 少額株主運動이 活潑한 때를 맞아 加入했죠.”

    2019年 9月 29日, 그날

    김경율은 2019년 9월 29일 페이스북 글을 올리기 이전 약 21년간 참여연대를 대표하는 회계사로 활약했다. 사진은 2014년 11월 17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 관련 긴급좌담회에서 김경율이 대법원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는 모습. [뉴스1]

    김경율은 2019年 9月 29日 페이스북 글을 올리기 以前 約 21年間 참여연대를 代表하는 會計士로 活躍했다. 寫眞은 2014年 11月 17日 서울 종로구 參與連帶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雙龍自動車 整理解雇에 對한 大法院 判決 關聯 緊急座談會에서 김경율이 大法院 判決의 不當性을 指摘하고 있는 모습. [뉴스1]

    物質的인 部分은 어느 程度 내려놔야 했겠네요.

    “큰 欲心 버리면 生活엔 그리 支障이 되지 않아요. 會計法人에 繼續 몸담고 있었다면 참여연대 活動은 決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後悔 없고요. 市民運動 좀 안 한다고 三星이 저의 顧客이 되겠어요, 現代家 저의 顧客이 되겠어요. 가늘고 길게 가는 거죠(웃음).”

    참여연대에 加入한 김경율은 雙龍車 粉飾會計, 제일모직·삼성물산 合倂, 三星바이오로직스 事件 等을 執拗하게 파헤치며 참여연대를 象徵하는 會計士로 떠올랐다. 2019年 9月 29日은 이런 그의 삶을 바꾼 ‘運命의 그날’이다. ‘曺國 事態’가 한창이던 이날 午前 그는 21年間 몸담았던 참여연대에 事實上 ‘訣別’을 宣言했다. 辛辣한 批判으로 가득한 페이스북의 글과 함께. 僞善者, 個XX, 嘔逆질 난다, 權力 豫備軍….

    이때부터다. 김경율이 本格的으로 世間의 注目을 받은 건. 오래된 순대로 포털 ‘네이버’ 記事檢索에 ‘김경율’을 檢索해 봤다. 2007年 12月 技士가 처음이다. 當時 김상조 經濟改革連帶 所長, 沈想奵 民主勞動黨 議員과 함께 金融監督院을 訪問해 三星商用車·三星重工業 粉飾會計 疑惑 關聯 監理要請書를 提出했다는 內容이다. 이를 始作으로 2019年 9月 29日까지 그의 이름으로 檢索되는 記事는 約 1100個다. 그마저도 30%쯤은 歌手 소찬휘의 男便인 베이시스트 ‘로이’가 檢索된다. 그의 本名도 김경율이라서 그렇다. 2019年 9月 29日부터 올해 6月 2日까지 檢索되는 記事는 約 4700個다. 김경율은 2019年 9月 29日 以前의 12年보다 以後 3年 동안 훨씬 더 有名해진 셈이다. 近來 그를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김경율을 ‘참여연대 代表 會計士’보단 ‘셀럽’ 或은 ‘論客’으로 여기곤 한다.

    ‘曺國 事態’가 삶의 分岐點이 된 걸로 보이네요.

    “네. 充分히 그렇게 볼 수 있죠. 2019年 9月 29日 以前엔 ‘김경율’ 하면 聯關 檢索語에 大槪 三星이 나왔을 거예요. 저와 關聯된 事件도 主로 經濟·金融 部分에 限定돼 있었고요.”

    어쩌다 참여연대와 갈라서게 된 건가요.

    “참여연대의 長點은 누가 뭘 하든 아무런 干涉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各自의 所信과 自由를 尊重해요. 例컨대 經濟金融팀, 社會福祉팀, 司法監視팀 等 여러 팀이 있는데, 各自의 意見을 100% 尊重하고 干涉하지 않는 거죠. 어떤 懸案에 對해 立場을 낼 때 ‘터치’하지 않는 게 當然했고요. 그런데 ‘曺國 事態’ 때는 달랐어요. 論評을 내려고 하는데 막더라고요.”

    참여연대가 變한 건가요.

    “一旦 제가 變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監視해야 할 財閥 權力, 國家權力에 對한 態度는 그대로니까요.”

    예전에는 이른바 ‘進步 言論’의 照明을 많이 받았죠. 그런데 이젠 다르잖아요. 事實上 ‘保守의 스피커’ 役割이 됐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進步 人士’로서 不快함이나 꺼림칙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全혀요. 제가 野球를 좋아하는데, WAR(Wins Above Replacement·代替選手 對備 勝利寄與度) 指標를 보자고요. 그間 約 5年 內地의 期間을 돌이켜 볼 때 權力에 對한 批判 機能에 있어 이른바 ‘朝中東’보다 WAR가 높은 言論社가 있느냐는 거죠. 한겨레, 傾向, MBC, KBS, 오마이뉴스 等 進步 言論 스스로가 되돌아봐야 하는 問題 아닐까요. 聖經에 이런 句節이 있어요. ‘너희가 沈默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참 와닿아요. 살면서 只今까지 政治的인 事案에 對해 立場을 밝힌 적이 거의 없었어요. 누가 要求하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이렇게 注目을 받게 된 理由는 社會的 要求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沈默하니까 저의 입을 빌려 一般 國民의 要求가 噴出되는 거죠. 제가 하는 말이 곧 누군가 하고 싶었던 말일 거라고 생각해요.”

    “變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只今도 相當히 ‘왼쪽’이에요. 只今 우리 社會에 많은 人士들이 스스로 ‘進步 人士’ 或은 ‘進步 改革 人事’라고 하는데, 그中 몇이나 自身에게 붙인 그 修飾을 堪當할 수 있을까요. 宏壯히 懷疑的으로 봐요. 민주당이든, 正義黨이든 그들이 報酬보다 知的·道德的으로 더 앞서는가? 아니거든요. 進步는 報酬보다 조금 더 知的·道德的 義務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 스스로 제가 ‘進步’라고 말하기가 참 부끄럽지만 그래도 전 通念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고 생각해요.”

    通念?

    “글쎄요. 事實 韓國의 進步와 保守, 나아가 左派와 右派라는 것도 참 戱畫化·形骸化(形骸化)됐다고 느끼거든요. 민주당의 ‘처럼회’ 人士들이 改革, 進步를 말하는 걸 보면 正말 부끄럽잖아요. 報酬보다 하나 나을 거 없고요. 홍세화 先生님이 ‘民主 乾達’이라는 말을 쓰셨던데, 宏壯히 純化된 表現이라고 생각해요. 전 그냥 ‘양아치’라고 봐요. 進步를 ‘標榜’하는 양아치요. 이것 말고는 代替할 表現이 없네요.”

    그렇다고 保守가 進步보다 더 낫다고 壯談할 순 없잖아요. 政權交替를 支持한 理由가 있나요.

    “個人的으론 ‘尹錫悅’에 對한 一抹의 期待가 있었죠. 文在寅 政權 出帆 以後 ‘積弊淸算’ ‘財閥 改革’ 成果를 보면 서울中央地檢長으로서 尹錫悅의 役割이 相當했거든요. 살면서 얼마나 많은 財閥 關聯 告發·告訴를 해왔겠어요. 다른 檢察들은 뜨뜻미지근했지만 尹錫悅은 달랐어요. 誇張하는 게 아니에요. 事實이 그랬으니까. 大統領이 된 後로 漸漸 右傾化되는 모습, 財閥 親和的 모습이 보이는 것도 분명해요. 언젠간 다시 날을 세워야 될 때가 分明히 올 거고, 그때를 위해 準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로남不’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요.”

    有名해진 後로 달라진 건 없나요. 長點, 短點 다 있을 것 같은데.

    “事實 外向的인 性向이 全혀 없어요. 大學生 時節 集會할 때도 앞장선 적은 한 番도 없었고요. 남 앞에 서는 걸 즐기지 않아요.”

    김경율이 지난해 10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판교대장동 개발사업 사례의 문제점과 향후 전망 세미나’에서 발제하고 있다. 그는 20대 대선 국면에서 회계 지식을 활용해 ‘대장동 의혹’을 공론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동아 DB]

    김경율이 지난해 10月 11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板橋大庄洞 開發事業 事例의 問題點과 向後 展望 세미나’에서 發題하고 있다. 그는 20代 大選 局面에서 會計 知識을 活用해 ‘大庄洞 疑惑’을 公論化하는 데 影響을 미쳤다. [東亞 DB]

    老빠꾸 人生

    只今 모습을 생각하면 좀 意外네요.

    “이른바 ‘키보드워리어’ 性向은 있었어요. 온라인 空間에서 날뛰는 거죠. 1990年代 末 ‘千里眼’ ‘하이텔’ 等 온라인 空間이 생겼잖아요. 그때부터 그런 性向이 좀 드러났죠. 온·오프라인 性向이 全혀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좀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只今도 페이스북으로 ‘이 지랄’을 하고 있고요. 只今 인터뷰도 率直히 부담스러워요. 안 하고 싶어요. 그래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죠(웃음).”

    政治는 못 하겠네요(웃음).

    “‘政治 細胞’가 있는 사람은 全혀 아니죠(웃음). 政治를 勸誘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2020年 總選 때 이곳저곳에서 提案이 있었죠. 民主黨은 아니고요(웃음). 堪當하지 못할 듯해 拒絶했어요. 앞으로도 안 할 생각이에요. 저랑 안 맞아요. 그리고 只今도 全 市民社會 領域에서 政治하고 있다는 생각이고요. SNS 空間에서의 政治가 제 長點이라고 믿어요.”

    지난해 7月 1日 민주당은 大選 豫備競選 關門인 ‘國民面接’에서 김경율을 ‘國民面接官’으로 涉外했다가 當時 李洛淵 前 民主黨 代表, 정세균 前 國務總理 等 黨內 豫備走者들의 反撥로 2時間 만에 撤回했다. 이날 午後 이재정 議員은 페이스북에 김경율을 向해 “低級한 시궁창 日베 單語 쏟아내는 이”라고 猛爆했다. 김경율은 같은 날 밤 페이스북에 “財政아, 내가 바빠서 一一이 答信 못 보내는데 참여연대에서 너 國會議員 됐다고 하니 나오는 소리가 ‘참여연대에서 춤만 추다 가네’였다. 밥 먹고 伴侶動物 聲帶模寫하는 버릇 좀 고쳐라”라고 맞받아쳤다. 이재정 議員은 民辯 出身 辯護士로서 參與連帶 公益法센터 運營委員을 지낸 바 있다.

    이재정 議員과 거친 攻防을 주고받았죠. 같은 參與連帶 出身이잖아요.

    “이재정 議員은 核心 멤버는 아니었어요. 參與連帶를 스펙으로 使用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參與連帶, 民辯 等 典型的 코스 있잖아요. 率直히 이젠 關心도 없어요. 하찮게 보여요. 가볍게, 그냥 똥 치우듯이 생각하고 있죠.”

    當時 國民面接官 役割을 쭉 맡았다면 민주당이 바뀌었을 거라 보나요.

    “아뇨. 事實 別일 아닌 이벤트잖아요. 그래서 저도 應했고요. 아주 조그만 일을 크게 만들어버린 건 民主黨의 호들갑이었어요. 公的 政黨이라고 부르기도 憫惘한, ‘阿闍梨판’이에요. 大權 潛龍들이 나서서 저를 人格的으로 貶下했는데, 웃긴 노릇이죠.”

    5月 9日 한동훈 法務部 長官 候補者 人事聽聞會 때 보인 態度가 注目받았어요. “민주당은 ‘大庄洞 主犯이 尹錫悅’이라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지껄였다’”고 했는데, 꽤 激昂했었나 봐요.

    2019년 9월 29일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때 김경율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경율은 이 날, 이 글이 자신의 삶에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김경율 페이스북]

    2019年 9月 29日 ‘曺國 事態’가 한창이던 때 김경율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경율은 이 날, 이 글이 自身의 삶에 ‘分岐點’이 됐다고 말했다. [김경율 페이스북]

    “事實 저를 挑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操心해야지’ 다짐했거든요. 그런데 ‘曺國 前 法務部 長官은 進步 陣營의 形骸化에 責任이 있다’고 말했더니 金南局 議員이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었어요. 氣分이 나빴죠. 하나 더 있어요. 민형배 議員이 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僞裝 脫黨’이라는 用語를 썼어요. ‘發作 버튼’李 눌린 건지 繼續 저를 노려보더라고요. 以後엔 繼續 제 答辯 동안 騷亂을 피우며 妨害하고요. 感情을 억누르기 힘들었어요.”

    좀 참으면서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過去 會計法人에 있을 때나 참여연대에 있을 때도 그렇고요. 참으면 紛亂도 없을 텐데요.

    “後悔는 全혀 없어요. 저는 後悔를 안 해요. 苦悶도 그다지 없고요. 人間 自體가 얕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웃음). 2019年 9月 29日에 글을 쓸 때도 苦悶 하나도 안 했어요. 술 먹고 쓴 것도 아니고요. 그때 靑瓦臺에서도 削除 要請이 왔었고, 社會 元老 人事도 찾아와 지워달라고 했어요. 알겠다고 했죠. 對答만요. 於此彼 지울 생각 없는데, 뭐 하러 실랑이해요.”

    頑固하네요.

    “그때 글이 言論에 報道되면서 댓글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달렸어요. 그 中 하나가 記憶이 남아요. 全國民主勞動組合總聯盟의 한 高位職 人事가 ‘난 一旦 이 사람 믿어보겠다. 김경율은 老빠꾸다’라고 썼어요. 제 삶을 잘 表現해주는 單語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도 後悔되는 일이 없긴 힘들지 않나요.

    “음….”

    “警율아, 學校 가지 마라”

    김경율의 말이 멈췄다. 對談 내내 보이지 않던 망설임이다. 記憶을 反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걸까. 조금 語塞했던 靜寂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딱 하나 있어요. 아는 사람만 아는, 別로 안 알려진 이야기예요. 그間 이야기할 必要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中2 때 좀 아파서 6個月 間 學校를 쉬었는데, 몸 狀態가 回復이 안 돼서 그런지 成績이 나빠졌거든요. 高2 때 아버지가 成績表를 보시더니 ‘學校 가지 마라’고 하셨어요. ‘예. 그만둘게요’ 하고 다음 날부터 學校 안 나갔어요. 檢定考試로 高等學校를 卒業했는데, 좀 不便하더라고요. 왜 學校를 관뒀는지 묻는 사람이 많아서 說明하기 귀찮아요.”

    둘 다 좀 異常한데요. 成績이 좀 나쁘다고 學校를 관두라고 하는 분이나 그렇다고 眞짜 관두는 사람이나(웃음).

    “제가 늦둥이예요. 아버지가 마흔다섯 살에 절 낳으셨고, 제가 大學校 2學年 때 돌아가셨어요. 建設業에 從事하셨는데, 建築技士라곤 하지만 事實上 ‘세미 노가다’셨어요. 말數도 別로 없으시고 外向的인 분은 아니셨죠. ‘淸掃해라’ 같은 그 흔한 잔소리 한番 안하셨고요. 그런 분이 ‘學校 가지 마라’고 하시니 前 받아들인 거죠. 이런 걸 보면 아버지 性格을 이어받은 것 같아요. 아버지를 참 좋아했어요. 아니 正말 尊敬했어요.”

    尊敬한 理由가 있나요.

    “폴 오스터의 小說 中에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인 줄 알았다’가 있어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딱 그거 같아요. 하느님 같은 存在였죠. 體格이 크셔서 커 보였던 存在도 아니고, 學歷이 높으신 것도 아니었지만 뭐라 말씀下視든 全部 믿고 따랐어요.”

    아버지에게만은 ‘老빠꾸’가 아니었네요.

    “그랬죠(웃음). 아버지가 잔소리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다면 오히려 잘 안 따랐을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아버지가 ‘하느님’이었기에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웃음).”

    김경율이 말한 ‘하느님 같은 아버지’의 意味를 곱씹었다. 어린 時節 아버지란 存在는 絶對的이다. 願하는 걸 사준다. 모르는 걸 알려준다. 無限한 사랑을 준다. ‘슈퍼맨’ 같다. 그러나 몸이 자라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家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스로 많은 걸 할 수 있게 된다. 世上이 아버지에게 배운 것과는 꽤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나의 아버지’가 생각보다 그리 잘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平凡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렇게 아버지의 權威는 漸次 빛이 바란다.

    김경율은 1男 1女를 뒀다. 첫째가 2000年生으로 軍隊에 있다. 인터뷰 前날(6月 2日) 休暇를 나왔다고 했다. 둘째는 2003年生이다. 지난해 修能을 보고 올해 財數 中이란다. 김경율은 씁쓸한 表情으로 “나는 아이들의 하느님과는 距離가 멀다. 權威가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마냥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조영철 기자]

    [조영철 記者]

    子息들에게 未安한 아버지

    하느님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섭섭한가 보네요.

    “음…. 가끔 생각해 봤어요. ‘내가 아버지에게 느낀 感情을 왜 내 아이들은 못 느낄까’ 하고요. 아버지가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에게 弄談도 자주 하고 장난도 많이 쳐요. 神祕感이 없다고 해야 할지(웃음). 스마트폰의 影響도 있는 것 같고요. 檢索만 하면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잖아요. 애들이 現實 認識이 빨랐던 거죠(웃음). 전 애들한테 未安해요.”

    왜요?

    “政治的 懸案에 목소리를 내고 注目받은 게 아이들에게도 影響을 미쳤어요. 참여연대 活動을 할 때는 제 삶에 對해 아내가 이렇다 저렇다 關與한 적이 없지만 얘기가 달라진 거죠. 아내가 文在寅 前 大統領 支持者라 저와 葛藤이 생겼어요. 아이들에게 많은 스트레스가 됐죠. 또 曺國 事態가 한창일 때 아들이 저에게 ‘아빠, 힘내세요’라는 文字를 보냈는데, 이게 참….”

    울컥했나요.

    “그런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단 ‘애가 댓글을 다 보는구나’ 싶었죠. 참 未安하더라고요. 傷處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反省하는 게 하나 있는데, 저는 제 아버지가 저에게 그랬던 것과 달리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이것도 참 未安해요. 하느님 같은 아버지로 남고 싶다는 생각보단 未安함이 크네요.”

    權威는 없지만 便安한 아버지도 괜찮잖아요.

    “內心 子息들에게 제 아버지처럼 認識되길 바란 걸 수도 있죠. 그런 게 未安해요. 저는 運動圈 世代예요. ‘自由’라는 말은 禁忌語 中 하나였거든요. 마르크스가 ‘자유로운 個人들의 聯合體’라는 表現을 썼는데, 그 말을 되새길 때나 쓰곤 했죠. 이젠 ‘自由民主主義’라는 말을 便安하게 해요. 自由가 人間에게 있어 眞正한 價値처럼 여겨지거든요. 아들이 자유롭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제가 自由를 많이 해쳐서 未安하고요.”

    10時 30分께 始作한 인터뷰를 마치니 어느새 12時 40分이 돼 있었다. 點心時間이라 近處 食堂에 食事를 하러 갔다. 김경율은 리조토를 시켰다.

    “元來 面을 좋아하는데 健康 생각해서 일부러 밥을 먹어요.”

    먹는 것도 ‘戰鬪的’이다. 速度가 빨랐다. 채 10分도 되지 않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러곤 重要한 約束이 있다고 했다. “2時에 仁川 靑羅에서 ‘決定的 提報者’와 만나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만나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事實을 알려준다고 했어요. 社會的으로 꽤나 큰 이슈가 될 것 같아요.”

    김경율은 ‘송곳’이다. 參與連帶든 經濟民主主義21이든, 變節한 것이든 아니든, 進步든 保守든 相關없다. 如前히 눈에 불을 켜고, 날을 세운 채 찌를 곳을 찾는다. 부리나케 밥을 먹고 나와 各自의 方向으로 등 돌려 길을 갔다.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봤다. 앞만 보며 나아간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서두르는 그의 모습이 마치 突進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무언가를 들이받으려는 듯이.



    인터뷰

    이현준 기자

    이현준 記者

    大學에서 保健學과 英文學을 專攻하고 2020年 東亞日報 出版局에 入社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新東亞로 왔습니다. 政治, 社會, 經濟 全般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世上에 關心이 많습니다. 設令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價値 있는 記事를 쓰길 願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責任感을 잊지 않고 옳은 記事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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