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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豹범 브로치’로 名聲 높인 ‘名家’ 까르띠에|新東亞

‘豹범 브로치’로 名聲 높인 ‘名家’ 까르띠에

[럭셔리 스토리] 유럽 王室이 사랑한 保釋·時計 名家

  • 이지현 서울디지털대 패션學科 敎授

    入力 2022-06-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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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르띠에(Cartier)는 寶石商에서 出發해 時計로 分野를 넓히며 成長해 온 프랑스 名品 브랜드다. 반클리프 아펠, 불가리, 티파니 等과 함께 4大 名品 寶石 브랜드로 꼽힌다. 롤렉스, 오메가와 함께 世界 3代 名品 時計 브랜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올해 3月 大韓民國은 ‘까르띠에’로 시끄러웠다. 흰色 몸통에 點박이 무늬까지 寶石으로 裝飾된 豹범 브로치가 話頭에 올랐기 때문. 이 豹범 브로치는 名品 브랜드 ‘까르띠에’의 代表 製品 가운데 하나인 ‘팬더 드 까르띠에’다.

    까르띠에를 있게 한 寶石의 歷史는 約 100年 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30年代 世界에서 가장 優雅한 女性으로 불리며 파리 社交界를 사로잡은 데이지 펠로스 夫人의 特別 注文을 받아 製作한 華麗한 寶石 목걸이(1936), 映畫俳優 비비언 리가 所藏했던 것으로 外部는 金과 루비, 內部는 파우더 함과 거울로 構成된 파우더 케이스(1946), 사랑을 위해 英國 王位를 抛棄한 윈저 共의 아내 윈저 孔雀夫人이 所有했던 152.35캐럿의 카슈미르 사파이어, 물방울型 옐로 다이아몬드와 플래티넘, 화이트 골드 等으로 製作한 팬더 브로치(1949) 等 世界 有名 人士들의 사랑을 받은 製品들은 只今도 膾炙된다.

    까르띠에는 世紀의 戀人들과도 함께했다.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王世子 레니에 3歲의 10.48캐럿 約婚斑指, 映畫俳優 리처드 버턴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膳物해 有名해진 69.42캐럿 半指와 목걸이 亦是 까르띠에 製品이다.

     2011년 윌리엄 왕세손과 결혼 당시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비가 착용해 화제가 된 헤일로 티아라. [뉴시스]

    2011年 윌리엄 王世孫과 結婚 當時 케이트 미들턴 王世孫妃가 着用해 話題가 된 헤일로 티아라. [뉴시스]

    까르띠에는 유럽 王室의 사랑도 받았다. 1936年부터 英國 王室의 家寶로 傳해 내려오다 2011年 英國 케임브리지 孔雀夫人(케이트 미들턴 王世孫妃)李 머리에 裝飾하면서 다시금 話題가 된 ‘헤일로’ 티아라를 製作했다.

    寶石뿐만 아니라 2009年에는 워치 메이커인 바쉐론 콘스탄틴, IWC 等 全 世界 7個 브랜드만이 保有한 제네바실 認證을 獲得해 까르띠에의 技術力을 立證했다. 제네바 마크는 스위스 聯邦政府가 直接 認證하는 것으로, 完璧한 時計의 象徵이다. 까르띠에의 代表 時計 컬렉션은 ‘산토스’와 ‘탱크’다.



    創業主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Louis Francois Cartier)는 1819年 프랑스 파리에서 火藥 製造者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있었던 그는 1830年代 中盤 파리의 寶石 細工子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의 아틀리에에서 收拾 生活을 始作했다. 집안의 家業인 火藥 製造가 아닌 寶石 細工의 길을 選擇한 것은 當時 프랑스의 ‘아름다운 時節’을 의미하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時期를 反映한 卓越한 選擇이었다.

    남다른 努力과 才能으로 寶石 細工 分野의 一流 디자이너가 된 그는 1846年 28歲에 自身의 이름 앞 自認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 文樣을 製作해 프랑스 商業登記所에 登錄했다. 1847年 아돌프 피카르가 死亡하고 29歲의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가 그의 아틀리에를 引受했다. 그는 自身의 性(姓)을 붙여 ‘메종 카르티에’로 이름을 變更했고 이것이 브랜드 ‘까르띠에’의 始作이 됐다.

    창업주 루이 카르티에. [까르띠에]

    創業主 루이 카르티에. [까르띠에]

    프랑스 王室 納品 許可받은 까르띠에

    1856年 나폴레옹 3歲의 四寸이자 프랑스 社交界의 아이콘이던 마틸드 公州(Princess Mathilde)가 메종 카르티에를 訪問해 메종 카르티에의 카메오와 브로치를 主로 購買했다. 事業 初期 메종 카르티에는 그를 통해 파리 上流層에게 브랜드 認知度를 높여나갔다.

    1850年代 末 메종 카르티에는 마틸드 公主의 支援으로 프랑스 王室의 公式 주얼리 納品業體가 됐다. 以後 마틸드 公主의 紹介로 나폴레옹 3世의 婦人인 외제니(Empress Eugenie) 皇后가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에 寶石 細工을 依賴하면서 메종 카르티에는 더욱 有名해졌다. 英國의 에드워드 7世는 그를 ‘王의 寶石商, 寶石商의 王’이라고 稱頌했을 程度다.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子女가 메종 카르티에로 家業을 이어가길 願했다. 1872年 그는 아들 알프레드 카르티에(Alfred Cartier)에게 寶石 細工을 가르쳤고, 1874年 아들 알프레드 카르티에에게 經營權을 完全히 물려준 後 隱退했다. 1890年代 末에는 結婚半指에 플래티늄(白金)을 最初로 導入해 各國의 王族과 貴族에게 큰 關心을 받았다.

    1899年 메종 카르티에 攻防은 當時 파리의 優雅함과 高級스러움의 中心部이며 現在 까르띠에 本店이 자리한 뤼드라페 13番地로 移轉했다. 그 무렵 알프레드 카르티에는 맏이 루이 조제프 카르티에에게 프랑스 파리, 둘째 자크 테오뒬 까르띠에에게 英國 런던, 셋째 피에르 카미유 카르티에에게 美國 뉴욕에 各各 카르티에 부티크를 오픈할 수 있도록 經營權을 나눠줬다. 海外 經營을 맡은 그의 세 아들은 메종 카르티에를 國際的으로 跳躍시켰다.

    에드워드 7世는 카르티에에 1902年 自身의 戴冠式을 위한 27個 티아라 製作을 맡겼고, 1904年 그는 카르티에에 最初로 英國 王室 納品 許可證을 授與했다. 카르티에는 英國 王室의 寶石商으로 任命받은 以後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泰國,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 王室과 오를레앙 一家, 모나코로부터 그와 비슷한 資格을 附與받았다.

    손목時計 大衆化를 일으킨 ‘산토스’

    19世紀에는 懷中時計(포켓워치)와 라펠 핀에 매다는 샤틀렌 워치가 流行하고 있었다. 時計 歷史에 懷中時計에서 한 段階 더 發展한 손목時計가 登場한 건 19世紀 後半이다. 손목時計가 처음 紹介된 19世紀 當時에는 主로 女性用 時計로 認識됐다고 한다. 점잖은 男性의 必需品으로 여겨진 건 오직 懷中時計뿐이었고 손목時計는 女性의 액세서리에 不過하다는 것이 一般的 認識이었다.

    산토스 시계. [까르띠에 홈페이지]

    산토스 時計. [까르띠에 홈페이지]

    알베르토 산토스-뒤몽(Alberto Santos-Dumont)과 같은 參戰 軍人들이 實用的이면서도 멋진 손목時計를 차기 始作하자 이런 認識이 바뀌었다. 時計를 손목 위에 얹은 形態를 처음 開發한 건 스위스 時計 브랜드 파텍 필립으로 알려져 있다. 손목時計에 對한 最初의 言及은 1888年 까르띠에의 記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까르띠에는 20世紀 初에 손목時計를 大衆에게 本格的으로 알린 브랜드로 評價받는다.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가 1904年 산토스-뒤몽의 이름을 따 製作한 時計 ‘산토스’가 손목時計 大衆化의 첫 主人公이다.

    元來 時計 製作에 關心이 많았던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까르띠에만의 寶石 디자인, 細工을 應用해 壁時計와 卓上時計를 만들었다. 까르띠에의 時計는 大部分 王室, 貴族, 大富豪를 爲한 것이었으므로 最高의 디자이너, 時計 技術者, 鑑定社, 細工 專門家, 光澤 專門家의 技術과 最上의 素材가 使用됐다.

    時代를 한발 앞선 時計 ‘탱크’

    그러던 中 1904年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親舊이자 飛行士였던 산토스-뒤몽을 위해 ‘산토스’를 開發했다. 이는 飛行 時 時間을 便利하게 確認할 수 있도록 時計 케이스에 스트랩을 連結해 現代式 손목時計를 完成한 것으로 까르띠에가 선보인 첫 番째 손목時計다. 1911年에는 산토스 손목時計를 ‘산토스 데 까르띠에’ 컬렉션으로 발전시켜 市場에 론칭했다. 산토스는 實用性과 美學的 優秀性까지 兼備해 100年이 넘은 只今까지 같은 모델名으로 繼續 生産되고 있다.

    1906年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베젤(Bezel·時計板의 테두리 部分)李 술桶 模樣인 ‘土노(Tonneau)’ 손목時計를 開發했다. 1907年 스위스의 時計 브랜드인 에드몽 例擧(Edmond Jaeger)와의 共同 作業으로 特許權을 받은 손목時計 버클은 時計 製造 歷史에 커다란 貢獻을 했다.

    베누아 워치. [까르띠에 홈페이지]

    베누아 워치. [까르띠에 홈페이지]

    1912年 傳統的 圓形 時計에 싫症을 느낀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새로운 形態의 時計를 만들고 싶었다. 긴 苦悶 끝에 平凡한 圓形 時計를 楕圓形이 돋보이는 優雅한 時計로 誕生한 것이 ‘베누아(baignoire)’다. 프랑스語로 ‘浴槽’라는 뜻인 베누아는 루이 프랑스와 까르띠에가 浴槽 模樣에서 靈感을 얻어 선보인 最初의 楕圓 形態 時計다. 當時 沐浴은 貴族 文化로 자리 잡았고, 베누아 時計는 貴族 文化의 象徵 및 貴族의 專有物로 여겨졌다. 이는 日常的인 物件의 놀라운 變身에 對한 禮讚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1950年代 末까지 많은 修正을 거쳐 1958年 楕圓形의 다이얼에 아라비아 數字나 로마 數字가 새겨진 베누아 時計가 製作됐다. 그러나 이 時計에 ‘베누아’라는 이름이 붙은 건 1973年이다. 까르띠에는 이 時計를 ‘品位, 才致, 敎養을 갖춘 세련된 趣向의 女性을 위한 時計’로 定義하고, 까르띠에를 代表하는 女性 時計 컬렉션으로 進行했다.

    1912年 當代 最高의 時計 專門家들과의 共同 作業을 통해 技術的인 完成을 더하던 까르띠에는 時計 專門家인 모리스 쿠에(Maurice Couet)와 함께 케이스 안의 무브먼트가 보이지 않는 것이 特徵的인 미스터리 클록의 性能을 開發하고 向上했다. 1923年 손목時計는 아니지만, 루이 카르티에가 魔術師인 腸-外製 로베르-우댕의 硏究에서 靈感을 얻어 디자인한 ‘포르티크 미스터리 클록’은 特許權을 받았다.

    1914~1919年 사이의 유럽은 第1次 世界大戰을 겪었고 以後 産業革命으로 技術이 發達하면서 生産이 增加해 現代 文明이 急速度로 發展했다. 이런 社會的 흐름을 肯定的으로 바라본 藝術家들은 機械의 附屬品처럼 幾何學的 均衡美를 追求한 디자인이 特徵인 ‘아르데코(Art Deco)’라는 새로운 디자인 傾向에 心醉했다. 그러나 新思潮인 아르데코 移轉 프랑스 파리의 裝飾 美術界에서 가장 影響力이 큰 것은 ‘아르누보(Art Nouveau)’였다.

    탱크워치. [까르띠에 홈페이지]

    탱크워치. [까르띠에 홈페이지]

    1917年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는 프랑스의 르노 FT-17 탱크의 실루엣에서 디자인 靈感을 받고 아르데코 傾向을 反映한 탱크 模樣의 時計 디자인 ‘탱크(Tank)’를 完成했다. 이는 아르데코란 新思潮가 널리 알려진 1925年보다 8年이나 앞선 時期로 社會 全般에 流行하는 ‘아르누보’와 다른 果敢한 試圖였다.

    탱크 손목時計의 테두리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알파벳 H 模樣을 닮은 긴 直四角形으로 탱크를 위에서 본 模樣을 본뜬 것이다. 時計 板에 보이는 分針은 鐵道 線路를 聯想케 하는 幾何學的 무늬로 裝飾돼 있다. 이처럼 탱크는 새로운 世紀에 새로운 藝術 思潮를 反映해 完成한 時計 모델이다.

    메종 까르띠에의 象徵 ‘팬더’

    프랑스語로 豹범을 뜻하는 ‘팬더(Panthere)’는 까르띠에 創業者인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의 첫 孫子 루이 조제프 카르티에가 아프리카 旅行 中 마주친 팬더에서 靈感을 받아 디자인됐다. 팬더 디자인은 다이아몬드 사이로 豹범의 斑點을 聯想시키는 오닉스를 세팅한 것이 特徵이다.

    1914年 루이 조제프 카르티에는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의 紹介로 戀人이 된 盞 偸生(Jeanne Toussaint)을 위해 女性用 손목時計를 디자인했다. 이 손목時計는 寶石으로 裝飾된 팬더 裝飾이 特徵的이며 女性用 時計에 플래티늄, 오닉스, 다이아몬드가 처음 使用됐다. 같은 해 프랑스 畫家 조르주 바르비에(George Barbier)가 眞珠 목걸이를 着用한 女性과 검은 팬더를 이오니아식 기둥 사이에 그려 넣은 아르데코風의 그림 ‘팬더와 女人’을 그렸고, 以後 이 그림은 까르띠에 廣告에도 活用됐다.

    팬더 브로치(1949)(왼쪽). 팬더 시계. [까르띠에, 까르띠에 홈페이지]

    팬더 브로치(1949)(왼쪽). 팬더 時計. [까르띠에, 까르띠에 홈페이지]

    1920年代 初 메종 까르띠에에 盞 偸生이 合流하면서 팬더의 强靭함과 野生性을 浮刻하는 한便 까르띠에의 모티프로 生動感 넘치는 팬더 形象을 積極的으로 活用하기 始作했다. 盞 偸生은 1933年 까르띠에 歷史上 最初로 女性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任命돼 37年 동안 메종 까르띠에를 이끌었다. 남다른 獨創性과 審美眼을 지닌 그는 팬더를 더욱 立體的이고 섬세하게 表現했다. 그를 통해 不滅의 動物로 再誕生한 팬더는 목걸이, 팔찌, 브로치를 비롯해 時計, 라이프스타일 小品에 이르기까지 까르띠에의 全 製品 라인에서 사랑받고 있다.

    2012年 까르띠에의 가장 아이코닉한 팬더의 신비로운 旅行記를 담아낸 映像 프로젝트 ‘오디세이 드 까르띠에’를 선보였다. 이는 팬더를 主人公으로 童話的 스토리텔링으로 構成했다. 2014年에는 팬더 브레이슬릿 워치 出市 100周年을 맞아 56點의 新製品으로 構成된 ‘팬더 드 까르띠에’ 컬렉션을 出市하기도 했다. 調香師 마틸드 로랑이 製作한 ‘꽃과 野生動物의 만남’을 테마로 調香한 鄕愁 ‘팬더 오 드 퍼퓸’ 케이스에도 팬더 얼굴이 새겨져 있다.

    2019年 製作한 4篇의 短篇 映像 시리즈 ‘까르띠에의 冒險’ 中 첫 映像은 盞 偸生의 年代記와 팬더의 이야기를 다뤘다. 2020年 1月에는 팬더와 關聯된 키워드를 A부터 Z까지 紹介하는 알파벳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였다. 같은 해 까르띠에는 팬더를 비롯한 野生動物 福祉 및 保護를 위한 캠페인에 꾸준히 寄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팬더는 1914年 誕生 以後 끝없이 進化를 거듭하며 메종 까르띠에의 象徵으로 자리 잡았다.

    69.42캐럿의 ‘버턴-테일러 다이아몬드’

    버턴-테일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Gettyimage]

    버턴-테일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着用한 映畫俳優 엘리자베스 테일러. [Gettyimage]

    映畫俳優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平生의 사랑인 리처드 버턴에게 膳物로 받은 까르띠에의 69.42캐럿 半指는 긴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1966年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미어 鑛山에서 發見된 240.8캐럿의 原石에서 69.42캐럿의 물방울 다이아몬드로 細工된 半指가 競賣에 나왔다. 競賣 前부터 保釋 愛好家로 有名한 리처드 버턴은 이 다이아몬드 半指에 큰 關心을 보여 競賣에도 參席했으나 다이아몬드로는 當時 最高價를 記錄한 105萬 달러에 까르띠에가 落札받았다.

    이 69.42캐럿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半指를 꼭 所有하고 싶었던 리처드 버턴은 까르띠에의 다이아몬드를 뉴욕 5番街에 位置한 까르띠에 賣場에 며칠間 陳列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條件으로 110萬 달러에 購入했다. 以後 이 다이아몬드는 ‘버턴-테일러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世紀의 로맨스’인 리처드 버턴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러브 스토리는 그들을 이어준 ‘버턴-테일러 다이아몬드’로 이어져 大衆의 關心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半指로 끼기에는 너무 큰 이 다이아몬드를 까르띠에 목걸이로 만들어달라고 依賴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모나코 王妃 그레이스 켈리의 40番째 生日 파티에 처음으로 이 목걸이를 着用했고, 以後로도 그는 1979年 이 다이아몬드를 팔기 前까지 자주 着用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리처드 버턴과 離婚한 뒤 1979年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病院 建立基金을 마련하기 위해 이 다이아몬드를 뉴욕의 한 寶石商에게 500萬 달러에 팔았다.

    友情의 象徵 ‘트리니티’ & 永遠한 사랑 ‘러브’

    1924年 루이 조제프 카르티에는 親舊인 詩人 張 콕토(Jean Cocteau)를 위해 화이트골드, 옐로골드, 핑크골드가 調和를 이루는 ‘트리니티’ 半指를 製作해 膳物했다. 各各은 사랑, 믿음, 友情을 意味한다. 以後 ‘트리니티’ 半指는 까르띠에의 심벌이자 뮤즈로 자리 잡았다.

    1969年 디자이너 알道 치풀로(Aldo Cipullo)는 眞正한 사랑을 表現하는 男女 共用 팔찌를 製作했다. 이 팔찌는 特殊 製作한 스크루 드라이버로 螺絲를 조이는 方式으로 사랑의 拘束力을 表現하는 ‘러브’ 팔찌다. 專用 드라이버가 있어야만 着用이 可能한 ‘러브’ 팔찌는 혼자서는 着用할 수 없다. 팔에 팔찌를 끼운 다음 特殊 製作된 스크루 드라이버를 利用해 永遠히 빠지지 않도록 固定한다. ‘러브’ 팔찌의 人氣에 힘입어 ‘러브’ 半指도 誕生했고 ‘러브’ 半指 亦是 까르띠에의 代表的인 文樣인 스크루 文樣이 새겨져 있다. 까르띠에의 ‘러브’ 시리즈는 全 世界 戀人들의 永遠한 사랑을 象徵한다.

    레드박스. [까르띠에 인스타그램]

    레드박스. [까르띠에 인스타그램]

    寶石 브랜드 티파니 앤 코를 象徵하는 티파니 블루 박스만큼이나 有名한 까르띠에를 象徵하는 레드 박스가 있다. 世紀의 러브 스토리에 빠질 수 없는 레드 박스 안 까르띠에 다이아몬드 半指는 女性들의 로망이다. 까르띠에는 레드 박스 안 웨딩 半指로 수많은 戀人을 이어주고 있다. 까르띠에는 탱크, 베누아, 발롱 블루 等으로 대표되는 워치 컬렉션과 러브, 트리니티, 저스트 앵 끌루 같은 주얼리 라인으로 아이코닉한 디자인과 섬세한 細工 技術로 오늘날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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