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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 바닥에 깔렸던 下皮첩, 7億5000萬 원에 落札|新東亞

리어카 바닥에 깔렸던 下皮첩, 7億5000萬 원에 落札

[名作의 祕密]

  • 이광표 西原大 휴머니티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2-06-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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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에겐 下皮첩, 딸에겐 매照度

    • 아들, 딸에게 남긴 多産의 애틋한 筆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전남 강진 유배 시절에 쓴 두 편의 글 ‘정효자전(鄭孝子傳)’과 ‘정부인전(鄭婦人傳)’. [국립중앙박물관]

    茶山 丁若鏞(茶山 丁若鏞·1762~1836)李 全南 康津 流配 時節에 쓴 두 篇의 글 ‘정효자展(鄭孝子傳)’과 ‘貞夫人展(鄭婦人傳)’.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은 4月 28日~8月 28日 ‘어느 蒐集家의 招待-高(故) 李健熙 會長 寄贈 1周年 記念展’을 열었다. 그 가운데 ‘어느 家族의 이야기를 茶山 丁若鏞이 傳합니다’라는 코너가 있다. 茶山 丁若鏞(茶山 丁若鏞·1762~1836)李 强震 流配 時節에 쓴 두 篇의 글 정효자展(鄭孝子傳)’과 ‘貞夫人展(鄭婦人傳)’을 展示한 코너다. 이番 展示는 李健熙 會長이 2021年 4月 寄贈한 文化財와 美術品 2萬3000餘 點 가운데 355點을 선보이는 자리. 有名한 名作이 櫛比한데 여기 丁若鏞의 글씨가 包含됐다는 事實이 多少 異色的이다. 國立中央博物館은 ‘정효자展’과 ‘貞夫人戰’을 두고 “유배기 정약용 書藝 作品의 銓衡”이라고 評價했다.

    茶山이 쓴 家族 이야기

    强震 流配 時節, 丁若鏞은 마을 사람 정여주(鄭汝周)의 付託을 받고 두 篇의 글을 써주었다.‘정효자전’은 서른 살에 世上을 떠난 그의 아들 정관일(鄭寬一)의 孝行을 記錄한 것이고, ‘貞夫人展’은 정관일의 夫人이 홀로 아들을 키운 이야기를 記錄한 것이다. ‘정효자展’은 1811年에 썼고, ‘貞夫人展’은 1814年에 썼다. 丁若鏞이 强震 茶山草堂(茶山草堂)에 起居할 때였다.

    일찍 世上을 떠난 사랑스러운 孝子 아들, 그 어려운 與件에서도 孫子를 잘 키워낸 며느리. 정여주는 아들의 죽음과 며느리의 삶을 오래도록 記憶하고 싶었다. 方法을 찾던 中 康津에 流配 와 있던 丁若鏞을 떠올렸다. 丁若鏞의 學識과 品性을 빌린다면 아들과 며느리를 제대로 記憶할 수 있으리라. 1811年 먼저 아들에 關한 글을 付託해 받았고, 3年 뒤인 1814年 며느리에 關한 글을 付託해 받았다. 丁若鏞은 정여주의 아들과 며느리에 關한 內容을 그의 特有의 書體(書體)에 담아 담백하게 적었다.

    그런데 事實 이 두 作品은, 書藝 作品이 으레 그런 것처럼, 첫눈에 확 와 닿지는 않는다. 따분하고 지루하다. 그래도 좀 끈氣를 갖고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글씨가 多少 特異하다는 느낌이 든다. 妙한 끌림 같은 것이 있다. 뭐라고 할까, 어떤 律動感 같은 것이 하나둘 밀려온다.

    丁若鏞이 記錄한 孝子의 行跡엔 이런 대목이 있다. “몇 年 後에 그의 아버지가 멀리 장사하러 나갔을 때 便安히 지낸다는 便紙를 집에 보냈다. 孝子는 그 便紙를 품에 안고 울었다. 어머니가 怪異하게 여겨 까닭을 물으니 孝子가 對答했다. 아버지께서 病을 앓고 계시나 봅니다. 글字의 劃이 떨렸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니, 果然 그때 病이 危篤하였다.”(後數年其父遠服賈 寄家書曰平安孝子抱書泣其母怪而問之曰家君殆有疾乎字·其不顫乎及歸而問之病則危矣) 아들 정관일의 孝心이 참으로 담백해 感動이 밀물처럼 찾아든다.



    ‘정효자展’의 內容을 알게 되면, 丁若鏞의 글씨體가 좀 더 달리 보인다. 다시 한番 有心히 글씨體를 들여다보니, 반듯하고 精誠이 가득하다. 정갈하면서도 透明해 보인다. 淸純하고 輕快해 보인다. 丁若鏞의 글씨體가 정관일 夫婦의 담백한 心性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들은 그림이 아니라 글씨다. 그런 글씨의 魅力이 여기 담겨 있다. 이런 點이 流配 時節 정약용 글씨의 特徵이자 魅力이다.

    ‘정효자展’ ‘貞夫人戰’을 써주면서 丁若鏞은 南楊州에 두고 온 아들과 딸, 夫人을 떠올렸을 것이다. 流配 時節이었기에 정관일 夫婦의 스토리는 丁若鏞에게 더욱 實感 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精誠껏 글을 써주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丁若鏞의 글씨로 表現됐다. 참으로 絶妙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정효자展’ ‘貞夫人展’은 이렇게 글의 內容과 글 쓰는 사람의 마음과 글 쓰는 사람의 書體가 完璧하게 調和를 이룬 作品인 셈이다.

    두 아들을 위한 메시지, 下皮첩

    하피첩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두 아들에게 남긴 서첩이다. [국립중앙박물관]

    下皮妾은 丁若鏞이 强震 流配 時節 두 아들에게 남긴 書帖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정효자展’ ‘貞夫人戰’을 써줄 무렵, 丁若鏞은 아들과 딸을 爲해 書帖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强震 流配 生活 10年째인 1810年, 南楊州에 있는 夫人 洪氏가 다산초당으로 6幅짜리 빛바랜 치마를 보내왔다. 媤집 올 때 가져온 붉은 明紬 치마였다. 茶山은 15歲 때인 1776年 풍산 洪氏 洪畫報의 딸과 結婚했다. 그러니 1810年에 아내가 强震으로 보내온 치마는 35年 된 것이다. 그 치마를 받아 든 流配客 丁若鏞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丁若鏞은 치마를 오려 두 아들 學緣(1783~1859)과 學諭(1786~1855)를 위해 작은 書帖 4卷을 만들어 ‘下皮첩(霞?帖)’이라 이름 붙였다. ‘정효자展’을 쓰기 1年 前이다. 여기서 下皮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下皮첩’ 1妾의 머리말을 보자.“내가 耽津(康津)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幅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 가져온 薰染(??·시집갈 때 입는 붉은 활옷)이다. 붉은빛은 이미 바랬고 黃色마저 옅어져 書帖으로 쓰기에 安城맞춤이었다. 이를 잘라 마름질하고 작은 妾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訓戒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傳한다. 後날 이를 보고 感懷가 일어 어버이의 자취와 痕跡을 생각한다면 뭉클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下皮妾이라 이름 붙인 것은 ‘붉은 치마’라는 말을 바꾸고 숨기기 위해서다.”(余在耽津謫中 病妻寄?裙五幅 蓋其嫁時之?? 紅已浣而黃亦淡 政中書本 遂剪裁爲小帖 隨手作戒語 以遺二子 庶幾異日覽書興懷 ?二親之芳澤 不能不油然感發也 名之曰霞?帖 是乃紅裙之轉?也)

    流配 生活을 하면서 丁若鏞이 가장 걱정한 것은 廢族(廢族)이었다. 西學(天主敎)을 믿었다는 理由로 죽어야 했고 流配를 가야 했던 丁若鏞 兄弟들. 이로 인해 집안마저 風飛雹散(風飛雹散) 난다면 이보다 더 큰 逢變이 어디 있을까. 이를 막을 수 있는 唯一한 方法은 두 아들 學緣과 學諭가 熱心히 工夫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늘 勤勉과 修養, 學問을 督勵하는 便紙를 보냈고 이렇게 ‘下皮첩’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下皮첩’에서 丁若鏞은 이렇게 訓戒했다. “卿(敬)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라. 내가 너희에게 田畓을 남겨주지는 못하지만 平生을 살아가는 데 財物보다 所重한 두 글字를 주겠다. 하나는 近(勤)이요, 또 하나는 檢(儉)이다. 勤勉과 儉素, 이 두 가지는 좋은 田畓보다도 나아서 限平生 쓰고도 남는다. 布木 몇 字 銅錢 몇 닢 때문에 잠깐이라도 良心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士大夫家의 法度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바로 山기슭에 居處를 얻어 處事(處士)의 本色을 잃지 않아야 하고, 萬若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定해 세련된 文化的 眼目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야말로 流配客 아비의 切切함이었다.

    딸을 向한 그리움, 매照度

    정약용은 딸과 사위에게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이 담긴 서화 ‘매조도’를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

    丁若鏞은 딸과 사위에게 直接 그린 그림과 글이 담긴 書畫 ‘매照度’를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

    ‘下皮첩’을 만들고 3年이 지난 1813年, 丁若鏞은 明紬 치마 남은 것으로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매照度(梅鳥圖)’다. 梅花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작고 端正한 새 두 마리. 丁若鏞은 畫幅 맨 위에 雅淡하게 그림을 그리곤 그 아래 큼지막한 글씨로 詩를 쓰고 그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事緣을 적었다.

    辭緣을 먼저 보자. “康津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夫人 洪氏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돼 붉은色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書帖 4卷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아이에게 傳하노라. 佳境(嘉慶) 18年 癸酉年(癸酉年) 7月 14日에 熱수옹(冽水翁)李 茶山동암(茶山東菴)에서 쓰다(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候裙六幅 歲久紅琥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嘉慶十八年癸酉七月十四日冽水翁書于茶山東菴).”

    ‘下皮첩’의 머리말과 內容이 恰似하다. 丁若鏞은 왜 이렇게 딸을 위해 그림을 그린 걸까. 丁若鏞은 元來 6男 3女를 두었다. 그러나 天然痘 等의 疾病으로 인해 4男 2女가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고 2男 1女만 살아남았다. 丁若鏞이 1801年 强震으로 流配를 떠날 때 막내딸은 여덟살이었다. 그런 딸을 두고 귀양살이 떠나는 아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丁若鏞은 康津에서 늘 딸에게 未安한 마음이었다. 그런 딸이 잘 자라 1812年 드디어 媤집을 갔다. 귀양살이 12年째, 딸의 나이 열아홉. 新郞은 丁若鏞의 親舊 윤서유의 아들이자 弟子인 윤창모였다. 아비의 處地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딸을 위해 그린 것이 바로 ‘매照度’다. ‘정효자展’을 써주고 2年 後, ‘貞夫人戰’을 써주기 1年 前이다.

    이番엔 그림에 적힌 詩를 鑑賞해 보자. “저 새들 우리 집 뜰에 날아와/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매화향 짙게 풍기니/그 香氣 사랑스러워 여기 날아왔구나/이제 여기 머물며/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주렁주렁 梅實도 열리겠지(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其實).” 結婚한 딸과 사위가 子息 많이 낳고 幸福하게 잘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면서도 따스하다. 그림 속 참새 두 마리는 딸과 사위를 象徵한다.

    그런데 이 ‘매照度’는 그림인지 書藝인지 多少 헷갈린다. 글씨가 畵面의 大部分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림보다 글씨가 더 눈에 확 들어온다. 글씨는 全體的으로 端雅하고 깔끔하다. 글씨가 큼지막해 기우뚱한 모습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 기우뚱한 모습에서 아련함이 묻어난다. 畵面 위쪽의 梅花와 참새 그림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글씨는 보는 이를 더 슬프게 한다. 朝鮮時代 그림과 글씨 가운데 이보다 더 보는 이의 가슴을 아련하게 적셔주는 作品이 또 어디 있을까. 이 ‘매照度’의 雰圍氣는 그림보다 글씨體가 이끌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매照度’의 書體는 ‘정효자展’ ‘貞夫人展’의 書體와 恰似하다. 정갈함, 담백함, 애틋함 그리고 물결치듯 다가오는 律動感까지 말이다.

    下皮妾의 流轉

    丁若鏞은 ‘매照度’를 그려 딸과 사위에게 주었다. 그림은 以後 사위와 外孫子의 집안(윤창모 家門)을 거쳐 고려대 博物館으로 들어갔다. 下皮妾은 丁若鏞의 後孫들이 南楊州의 丁若鏞 生家 與猶堂(與猶堂)에 保管했다. 그러던 中 1925年 乙丑年 大洪水가 일어났다. 漢江 周邊은 모두 汎濫했다. 漢江 便 與猶堂에도 물이 넘쳤고 그 危機 속에서 丁若鏞의 4代孫이 千辛萬苦 끝에 ‘下皮첩’을 지켰다. 하지만 6·25戰爭 때 또다시 危機가 찾아왔다. 丁若鏞의 5貸損은 精誠 들여 ‘下皮첩’을 避亂 褓따리에 싸고 수원역으로 避亂길에 올랐으나,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그만 ‘下皮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以後 ‘下皮첩’의 存在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2004年 어느 날 水原의 住宅 撤去 現場 쓰레기 더미. 인테리어業을 하는 姨母 氏는 廢紙 줍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의 리어카 바닥에 깔려 있는 古文書 세 卷이 눈에 들어왔다. 李氏는 古文書에 對해선 아는 바 없었지만 或是나 하는 마음에 할머니에게 “廢止를 내줄 테니 그 古文書를 달라”고 했다. 李氏는 그렇게 古文書 세 卷을 손에 넣었다. 그는 2006年 4月 KBS ‘眞品名品(珍品名品)’에 鑑定을 依賴했다. 그 過程에서 이것이 丁若鏞의 ‘下皮첩’이라는 事實이 世上에 알려졌다. 李氏는 鑑定價로 15萬 원 程度 豫想했지만 鑑定委員들은 1億 원을 提示했다.

    얼마 後 ‘下皮첩’은 김민영 當時 부산저축은행 代表에게 넘어갔다. 金 代表는 有名한 古書全的類(古書典籍類) 컬렉터였다. 김민영 代表가 購入한 뒤 2010年 ‘下皮첩’은 寶物로 指定됐다. 그러나 問題가 생겼다. 2011年 釜山貯蓄銀行이 破産하면서 金 代表의 財産 가운데 하나인 ‘下皮첩’李 예금보험공사에 押留된 것이다. 迂餘曲折 끝에 結局 下皮妾은 2015年 9月 서울옥션 美術品 競賣에 나왔다. 熾烈한 競合 끝에 國立民俗博物館이 7億5000萬 원에 落札받았다.

    尹持忠의 殉敎와 정약용

     정약용이 유배 시절 머물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이광표]

    丁若鏞이 流配 時節 머물던 全南 康津의 茶山草堂. [이광표]

    2021年 9月 놀라운 뉴스가 報道됐다. 6個月 前인 2021年 3月 全北 完州郡의 超남이 聖地를 造成하는 過程에서 우리나라 最初의 天主敎 殉敎者인 윤지충(1759~1791)의 遺骸와 白瓷 沙鉢 墓誌銘(墓誌銘)李 發掘됐다는 消息이었다. 放射性炭素年代측정과 DNA 檢査 結果, 尹持忠이 殉敎한 1791年과 一致했다. 목뼈엔 斬首刑의 끔직한 痕跡이 鮮明하게 남았다. 白瓷 沙鉢 墓誌銘엔 尹持忠의 이름과 人的 事項 等이 쓰여 있었다.

    이 같은 消息이 알려지고 얼마 뒤인 2021年 10月, 정민 漢陽大 敎授는 白瓷 沙鉢에 쓰여 있는 글씨가 丁若鏞의 글씨라는 見解를 내놓았다. 白瓷 沙鉢 墓誌銘의 글씨와 丁若鏞의 生前 筆體를 比較 分析한 結果, 丁若鏞의 楷書體(楷書體)와 恰似하다는 것이다.

    丁若鏞 兄弟들은 天主敎와 깊은 關係를 맺었다. 그래서 丁若鍾은 殉敎를 했고, 丁若銓과 丁若鏞은 流配를 갔다. 丁若鏞의 어머니가 尹持忠의 姑母였으니, 丁若鏞은 尹持忠과 4寸 사이였다. 尹持忠의 斬刑에 丁若鏞은 매우 슬퍼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哀悼의 마음을 담아 白瓷 沙鉢에 글씨를 써주었을 것으로 정민 敎授는 推定했다. 이에 對한 硏究는 더 進行돼야겠지만 정민 敎授의 主張이 關心을 끈다. 해서체는 强震 時期의 정약용 글씨體와는 좀 다르다. 좀 더 格式을 갖추고 있다고 할까. 이런 事實은 丁若鏞의 流配 時節 글씨體가 매우 特徵的이라는 點을 示唆한다.

    丁若鏞의 그리움

    南楊州의 夫人 洪氏는 왜 流配客 男便에게 自身의 치마를 보냈을까. 丁若鏞은 南楊州 時節부터 緋緞으로 冊 表紙를 種種 만들었다고 한다. 오래된 천이나 치마에 글씨를 쓰고 이를 雅淡한 書帖으로 만들어 種種 知人들에게도 膳物하기도 했다. 그래서 夫人이 强震 流配地로 自身의 해진 치마를 보낸 것이 아닐까. 男便의 글쓰기 習慣을 잘 알고 있던 夫人은 글쓰기로 試鍊을 견디는 男便을 위해 빛바랜 치마를 보낸 것으로 推定해 볼 수 있다.

    丁若鏞은 그 치마를 오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1810年 ‘下皮첩’을 만들고 ‘매照度’를 그렸다. 아들과 딸이 무척이나 그리웠을 것이다. 그 사이사이 1811年과 1814年, 丁若鏞은 康津 사람 정여주의 아들과 며느리에 對한 글을 써주었다. 정여주의 子息에 對한 그리움을 글로 옮겨준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丁若鏞의 글씨體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렇기에 ‘下皮첩’ ‘매照度’ ‘정효자展’ ‘貞夫人展’의 글씨體 雰圍氣는 恰似할 수밖에 없다. 丁若鏞의 글씨는 담백하고 애틋하다. 어떤 글씨는 假分數 같기도 하고 어떤 글씨는 뒤뚱거리는 오리 같기도 하다. 多少 힘겨운 듯 보이지만 그런 글字가 여럿 모여 있으니 愉快한 律動感으로 다가온다. 妙한 魅力이다. 氣分이 좋다. 싱그럽다. 보고 또 보노라면 丁若鏞의 삶과 恰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强震 流配 時節 丁若鏞의 글씨엔 妙한 魅力이 있다. 그 魅力은 그리움, 未安함 같은 것이리라.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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