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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武鉉 키드 20%, 尹錫悅로 暫時 離脫하다|신동아

2022年 6 月號

盧武鉉 키드 20%, 尹錫悅로 暫時 離脫하다

‘脫民主黨-非國民의힘’ 80年代生 大解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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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2-06-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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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희연의 弟子가 尹에게 投票한 理由

    • 10年 새 國民의힘 19.1%P↑, 民主 19.5%P↓

    • 40代는 ‘갭 投資’ 世代, 30代는 賃借人 世代

    • “30代 中盤부터 絶壁 무너져 내리는 느낌”

    • 盧, 80年代生의 反權威主義 레테르

    • “우리 슬로건은 ‘한총련 NO, 뉴라이트 NO’”

    • “北, 怨讐도 同胞도 아닌 그냥 ‘못난 나라’”

    • 官製 流行語 K, 先進國 콤플렉스 발로

    2002년 12월 15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젊은 세대가 운집한 서울 서대문구 신촌현대백화점 앞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DB]

    2002年 12月 15日 노무현 當時 민주당 大選候補가 젊은 世代가 雲集한 서울 서대문구 신촌현대백화점 앞에서 遊說를 하고 있다. [東亞DB]

    제20대 대통령선거 선거벽보 제출 마감일인 2월 17일 서울 종로구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직원들이 이날까지 제출된 후보 14명의 벽보를 기호순대로 정리하고 있다. [동아DB]

    第20代 大統領選擧 選擧壁報 提出 마감日인 2月 17日 서울 鍾路區 選擧管理委員會에서 職員들이 이날까지 提出된 候補 14名의 壁報를 記號巡대로 整理하고 있다. [東亞DB]

    두 名의 1984年生이 있다. 2019年 8月 박대근(38)은 오랜 慣性에 마침標를 찍었다. 더불어민주당에 對한 支持를 撤回했다. ‘曺國 事態’의 破片이 이곳저곳으로 튀던 때다. 그는 14年 前 民主政策硏究院 傘下 大學生 組織에서 事務局長으로 活動했다. 進步性向 敎授가 大擧 布陣한 聖公會大를 卒業했다. 社會學·政治學을 專攻했다. 신영복 敎授와 조희연 敎授(現 서울特別市 敎育監), 정해구 敎授(前 文在寅 大統領 直屬 政策企劃委員長)의 授業에 特히 興味를 느꼈다. 2012·2017年 大選에서 文在寅 候補에게 투표했다. 10年間 冊을 다루는 職業을 가졌다. 敎保文庫, 알라딘, 예스24에서 일했다.

    只今은 온라인 쇼핑몰을 運營한다. 이番 大選에서 尹錫悅 國民의힘 候補를 찍었다. “민주당의 再執權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服朞한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나이가 들어 保守化한 걸까. 事業을 하게 돼 ‘資本主義의 尖兵’으로 變해 버렸을까. 여러 番 되새김질한다. 些少한 變化까지 억지로 더듬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직 進步”라고 그는 되뇐다. “只今의 민주당이 大體 누구를 代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도 尹錫悅을 찍는 行爲는 하지 않았다.” 서혜영(38·假名)李 呪文처럼 읊조린다. ‘찍는 行爲’라는 表現이 오랫동안 입가에 맴돈다. 넘어서는 안 될 또렷한 레드라인처럼 느껴진다. 서울市內 私立大에서 政治學을 工夫했다. 大學 때부터 페미니스트를 自處했다. 페미니즘의 歷史와 理論을 줄줄이 꿰고 있다. 내로라하는 페미니스트 敎授들과 交遊했다. 스스로 非主流라고 생각한다. 젠더 이슈를 對하는 韓國 社會의 態度에 자주 落膽했고 때로 諦念했다. 只今은 硏究者다. 保守政黨에 票를 주지 않는 것은 그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李在明에게 투표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는다. 代身 “민주당의 集團主義的 文化가 싫다”고 한다. 正義黨 或은 다른 群小政黨을 擇했거나, 投票를 하지 않았다고만 斟酌할 뿐이다.

    海溢이 밀어닥치기 前

    이 글에는 11名의 取材源이 登場한다. 애初 11名 모두 實名으로 摘示하겠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에 對한 ‘사이버 嫌惡’가 橫行하는 탓에 老婆心에 서혜영의 이름만 假名으로 적었다.



    1980年代生은 變心했다. 10年의 時差를 두고 열린 18代 大選과 20代 大選을 比較하면 分明 그렇다. 18代 大選과 20代 大選은 마땅한 제3후보 없이 ‘兩强 構圖’로 치러졌다.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 事態 以後 치러진 19代 大選에서는 多者 構圖가 짜였다.

    KBS·MBC·SBS 放送 3社가 發表한 出口調査에 따르면 20代 大選 當時 30代에서 李在明 민주당 候補 支持率은 46.3%로 나타났다. 尹錫悅 國民의힘 候補(現 大統領)는 48.1%를 얻었다. 20代, 40代, 50代에서는 李 候補가 尹 候補를 앞섰다. 30代 男性에서 尹 候補(52.8%)와 李 候補(42.6%) 間 隔差가 컸다. 30代 女性의 境遇 尹 候補(43.8%), 李 候補(49.7%)로 結果가 뒤집혔다. 다만 尹 候補는 20代 女性(33.8%)과 40代 女性(35.6%)에 비해 30代 女性 사이에서 눈에 띄게 높은 支持를 받았다. 30代의 折半 가까이는 民主黨에 反感을 드러냈다.

    2012年 放送 3社 出口調査 樣相은 달랐다. 當時 20代(只今의 30代)의 65.8%는 文在寅 民主統合黨 候補를 支持했다. 朴槿惠 새누리당 候補는 20代에서 33.7%를 얻었다. 隔差가 두 倍에 肉薄했다. 性別로는 20代 男性의 62.2%, 20代 女性의 69.0% 等 壓倒的 多數가 文 候補를 支持했다. 犯(汎)1980年代生(1983~1992年生)에 限定하면 10年 사이에 國民의힘 系列 政黨 候補는 19.1%포인트를 더 얻었다. 민주당 系列 政黨 候補는 19.5%포인트를 까먹었다.

    犯1960年代生(1963~1972年生)과 犯1970年代生(1973~1982年生)에서는 눈에 띄는 變化가 나타나지 않았다. 40代 以上 민주당 支持層에서는 殘留 性向이 剛했다. 30代에서는 또렷한 離脫 性向이 엿보였다. 全 世代를 통틀어 30代의 變化 幅이 가장 컸다. 大選의 成敗는 0.73%포인트 差로 갈렸다. 조금 誇張해서 30代 때문에 李在明 候補가 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20代(1993~2002年生)는 10年 前에 投票權이 없어 同一線上에서 比較하기 어렵다.

    이 글은 이런 궁금症에서 出發한다. 2012年 20代(1980年代生)는 민주당의 强力한 支持層이었다. 여기서 約 20%가 둥지 밖으로 나갔다. 2000年代에 大學에 다니고 2010年代에 社會生活을 始作한 世代에서 脫民主黨 樣相이 나타났다.

    海溢이 밀어닥치기 前까지 知識人과 言論은 애써 살피지 않았다. 世上의 눈이 86世代와 X世代, Z世代로 쏠린 사이 1980年代生은 視野에서 사라졌다. 與黨 代表가 1985年生인데 그의 世代는 아무런 政治的 意味도 없는 集團처럼 規定됐다. 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世代論은 歷史的 經驗이나 文化的 共通點 等을 抽出해 特定 世代를 틀 짓는다. 一理 있는 讀解法이지만, 먹고사는 問題가 輕視되는 傾向이 있다. 여기서는 社會經濟的 構造의 變化가 미친 影響을 먼저 提示하고 이를 補完하기 위해 歷史·文化的 變數를 끌어온다. 世代 間 葛藤을 助長하고 바리케이드를 치려는 게 아니다. 그間 無視된 어떤 世代의 情緖를 解釋하기 위해 묻고 듣고 본 대로 記錄할 뿐이다.

    이 글에서는 1980年代生을 理解하는 키워드로 不動産 資産 不平等, 結婚 不能, 非正規職, 노무현, 脫(脫)NL, 先進國 콤플렉스 解放, 半(半)디지털 네이티브 等 7가지를 提示한다.

    “進步的으로 살지 못한다면 ‘進步팔이’”

    2020년 10월 19일 서울 송파구의 한 공인중개사무소에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포스터가 게시돼 있다. [뉴스1]

    2020年 10月 19日 서울 송파구의 한 公認仲介事務所에 政府의 不動産政策을 批判하는 內容의 포스터가 揭示돼 있다. [뉴스1]

    金融社에 다니는 전명선(32)은 2012年에 文在寅, 2022年에 尹錫悅을 擇했다. 投票權이 생긴 後 처음으로 國民의힘 候補에게 票를 던졌다. 커다란 決心일 듯싶었는데 “周邊 知人의 多數가 尹 候補를 찍어 별다른 反應은 없다”고 했다. 政權交替의 必要性 때문에 ‘2番’을 찍었지만 自身은 無黨派라고 했다. ‘10年 前에는 왜 文在寅 候補를 찍었느냐’는 質問에 “人權辯護士 出身이고, 盧武鉉 前 大統領의 祕書室長을 했기 때문”이라 答했다. 安定的인 職場에 다니지만 未來를 樂觀的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오늘날 30代에게 불어닥친 變化의 흐름을 온몸으로 感知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金수저’가 아닌 以上 住宅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結婚을 하더라도 平生 집 한 채 못 살 것 같다. 1960~70年代生에 비하면 出發線부터 不平等하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힘든 時期였겠지만, 그래도 일하며 住宅을 購買하는 게 只今보다 쉬웠으니까.”

    이동수(34)는 靑年政治크루 代表다. 2015年에 團體를 結成한 뒤 主로 민주당과 協業했다. 스스로를 ‘汎進步 系列’이라고 紹介한다. 올해 2月 冊 ‘캐스팅 보트’를 냈다. 副題는 ‘MZ世代는 어떻게 政治를 움직이는가’다. 그는 “1980年代 中後半 世代가 民主黨에서 많이 離脫한 理由는 不動産 때문”이라고 했다.

    “1980年代 中後半 世代가 社會生活을 始作한 지 몇 年이 지났다. 돈도 어느 程度 모았을 때고 結婚을 생각할 時期다. 그런데 文在寅 政府 時期 30代를 보내면서 집값이 急騰했다. 아예 집을 갖겠다는 꿈조차 못 갖게 된 거다. 30代 初中盤 男性들의 境遇 20代 男性과 통하는 구석도 있는데, 젠더 葛藤 때문에 文在寅 政府 페미니즘 政策에 反感을 갖고 있는 것 같다.”

    1980年代生의 中尉 값에 該當하는 1985年生은 文在寅 政府 時期 32~37歲였다. 軍服務 期間 때문에 男女 間 差異는 있겠으나, 이동수_ 말처럼 “結婚을 생각할 時期”다. 結婚을 막는 障壁은 不動産이다. 30代는 月給을 모아 安定된 住居를 確保하는 게 不可能한 世代다.

    文化産業 分野에서 일하는 1985年生 김아영은 文在寅 前 大統領 任期 終了를 約 2週 앞두고 結婚했다. 그는 “文在寅 政府 不動産政策으로 돈 없는 사람이 더 힘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世代 間 資産 不平等이다.

    “1960~70年代生들은 只今보다 機會가 많았다. 周圍에 있는 1960~70年代生들은 꽤 풍요로운 삶을 營爲하고 있다는 印象이 든다. 나이가 들면 나도 그런 삶을 營爲하게 될까 생각해 보는데, 내가 그때 갖고 있을 資産이 그들보다 훨씬 적을 것 같다. 그런 윗世代의 相當數가 民主黨 支持 性向이 强하고 이를 어필하지만, 進步的으로 살지 못한다면 ‘進步팔이’일 뿐이다.”

    2020年 10月 29日 靑瓦臺 國民請願 揭示板에 ‘文在寅 政府 不動産政策으로 結婚을 抛棄하기에 이르렀다’는 題目의 글이 올라왔다. ‘來年 初 結婚을 앞둔 30代 職場人’이라고 紹介한 請願人은 “文在寅 政府의 不動産政策이 番番이 失敗하는 것을 數年間 바라만 보며 그래도 적게나마 月給을 모아 어떻게든 집을 사보려 努力했다”면서 “올해 中旬 靈끌을 해서라도 살 수 있던 서울 第一 끝자락 아파트마저 暴騰해 아예 抛棄 狀態에 이르렀다”고 썼다.

    서울 30代 55.5%, 尹을 擇하다

    漠然한 印象 批評이 아니다. ‘世襲 中産層 社會’와 ‘全羅디讞議 굴레’를 쓴 조귀동은 經濟學의 렌즈로 이 現象을 說明한다. 그가 보기에 40代의 堅固한 民主黨 支持勢는 經濟的 利害關係에 뿌리를 두고 있다. 30代의 민주당 離脫은 不動産 資産 不平等에 對한 不滿이 投票라는 行動으로 나타난 結果다. 그는 4月 9日 ‘한겨레21’에 쓴 ‘민주당을 支持한 不惑의 理由들’에서 이런 統計를 紹介했다. 조귀동은 1982年生 以下부터 狀況이 크게 달라졌다고 診斷했는데, 이 글이 다루는 犯1980年代生(1983~1992年生)과 겹친다.

    “2020年 住居實態調査 마이크로데이터를 가지고 出生年度에 따른 住居 狀況을 分析했다. 者가 居住 比率이 1982年生(52.0%)을 起點으로 急激히 下落했다. 代身 月貰 居住가 늘어났다. 1986年生의 境遇 10分의 3이 月貰 賃借人이다. 多住宅者 比率은 1980年生(9.9%)까지 10% 안팎을 維持했다. 하지만 1983年生은 5.9%로 뚝 떨어졌다. 40代는 傳貰를 끼고 住宅을 買入하는 ‘갭 投資’를 비롯해 資産 增殖 機會가 있었지만, 30代에게 勤勞所得으로 自家를 買入하기란 여간해서 어려워졌다.”

    1986年生 小說家 杖流陣은 長篇 ‘달까지 가자’에서 이름난 企業에 入社하고도 單칸房을 벗어날 수 없는 ‘흙수저 女性 3人坊’을 描寫한다.

    “이른바 分離型 원룸이나 투룸에 살 수 있기를 늘 바라왔다. 熱心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正말로 그런 곳에 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라고 漠然히 希望 섞인 期待를 해본 적도 있었고, 때로는 그날이 오긴 올까? 서른 될 때까지는 그른 것 같고 마흔쯤 되면 可能한 걸까? 하고 아득한 氣分에 빠지기도 했다. 實은 그런 날이 더 많았다.”(72쪽)

    지난해 9月 27日 統計廳이 發表한 ‘2020年 人口住宅總調査’에 따르면 30代 男性 未婚者는 173萬8000名으로 全體 30代 男性의 50.8%로 集計됐다. 2015年(44.2%)과 比較해 6.6%포인트 늘면서 史上 처음 50%를 突破했다. 30代 女性 未婚者는 107萬7000名으로 未婚率은 33.6%로 나타났다. 5年 前과 比較해 5.5%포인트 늘었다. 10年 前 登場한 ‘結婚不能世代’(金大鎬·윤범기)라는 낱말은 只今도 有效하다.

    ‘2020年 人口住宅總調査’가 公開된 後 동아일보는 就業 사이트 잡코리아에 依賴해 10月 12∼15日 30代 未婚 男女 548名(男性 295名, 女性 253名)을 對象으로 設問調査를 實施했다. 이에 따르면(복수 應答 可能) 結婚 計劃이 없는 理由로 30代 男性의 54.1%는 “혼자가 便해서”라고 答했다. 바로 이어 “집값이 너무 올라서”(50.4%), “就業難 때문에”(40.7%)가 뒤를 이었다. 30代 女性에서는 70.5%가 “혼자가 便해서”라고 答했고, 이어 “配偶者를 찾지 못해서”(42.4%), “집값이 너무 올라서”(36.0%) 順이었다.

    이 調査만 놓고 보면 相對的으로 30代 男性이 經濟的 制約 狀況에 더 敏感했다. 韓國 社會에 남아 있는 ‘新婚집은 男子가 마련해야 한다’는 認識이 反映된 結果로 보인다. 30代 男性(52.8%)은 30代 女性(43.8%)에 비해 尹錫悅 候補를 支持한 比率이 높았는데, 그 理由를 間接的으로나마 說明해 주는 現象으로 풀이된다.

    不動産 資産 不平等, 結婚 不能 問題는 얽히고설켜 있다. 文在寅 政府 出帆 前 不動産 資産을 確保한 40代라면, 2017~2022年 사이의 不動産政策으로 惠澤을 입었을 것이다. 不動産 資産을 確保할 準備를 하던 30代 사이에서는 민주당에 對한 反感이 커질 蓋然性이 높다. 집값이 높은 地域일수록 이런 傾向이 더욱 짙어진다.

    放送 3社 出口調査에 나타난 地域別 30代 得票率을 보자. 尹錫悅 候補는 서울에서 55.5%를 얻어 39.6%에 그친 李在明 候補를 크게 앞질렀다. 尹 候補가 서울의 30臺에게서 얻은 55.5%는 大邱의 30代(71.0%)와 慶北의 30代(67.3%)에 이어 全國에서 세 番째로 높은 數値다. 지난해 치러진 4·7 서울市長 補闕選擧에서도 吳世勳 國民의힘 候補가 朴映宣 민주당 候補를 18.32%포인트 差로 이겼다.

    1980年代生은 保守化했나? 아니다. 暫時 ‘脫進步’ 或은 ‘脫民主黨’했을 뿐이다. ‘尹錫悅 大統領이 職을 잘 遂行한다면’이라는 前提條件을 달고 말이다. 1980年代生은 國民의힘의 堅固한 支持層이 아니다. 그들은 戰略的으로 保守 政治勢力을 活用했다. 이 問題를 注目해 온 조귀동과 나눈 問答이다.

    “敗者로서 集中的으로 打擊 입은 世代”

    왜 30代의 20%가 離脫했다고 보나.

    “30臺가 딱히 민주당을 支持할 理由가 없다. 一旦 가장 큰 건 不動産이다. 1980年代 初盤 出生부터 不動産 者가 居住 比率이 急激히 낮아진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서 勞動所得을 蓄積해 不動産을 取得할 수 있었는데, 그 사다리가 完全히 崩壞됐다. 두 番째로 볼 대목이 結婚이다. 흔히 低出産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事實 더 根本的인 問題는 婚姻率이다. 婚姻率 低下는 宏壯히 社會經濟的인 이슈다. 돈이 없으니까 結婚을 못 하는 것인데, 特히 男子들의 境遇가 甚하다. 이런 現象들이 極大化한 게 文在寅 政府 時期다. 그런 問題는 解決해 주지 못하면서 한便에서는 ‘曺國 事態’ 같은 게 터진 거지. 거기서 40臺와 30代의 (민주당에 對한) 支持率이 갈리는 原因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30臺가 保守化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尹錫悅 政府에 失望하면 언제든지 支持를 거둬들이겠지. (다만) 1980年代生의 ‘라이프사이클’로 보면, 30代 中盤 程度부터 뭔가 絶壁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資産을 얻을 수 없다는 絶望感이랄까….

    “그렇다. 傳貰값도 오르고 結婚도 못 하고. 文在寅 政府의 政策 自體가 勝者와 敗者가 明確히 나눠지는 傾向을 띠었는데, 30代는 敗者로서 集中的으로 打擊을 입었다. 文在寅 政府 審判이라기보다는 不滿 投票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과 民主黨이 싫다기보다는, 문재인과 민주당이 推進한 政策의 結果物이 싫은 것이다.”

    反面 40代는 唯獨 民主黨 支持 性向이 强한데.

    “40代는 ‘갭投資’ 世代니까.”

    經濟的 變數를 하나 追加한다면 非正規職이다. 2007年 8月 禹晳熏과 박권일은 20代(1980年代生)의 上位 5%만이 韓國電力·三星電子·5級 事務官 以上의 단단한 職場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平均 賃金 88萬 원 程度를 받는 非正規職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썼다. 實際로 1980年代生이 社會에 進出하기 始作할 時點인 2000年代 中盤부터 非正規職 規模가 急增했다. 統計廳에 따르면 國內 非正規職 勞動者 規模는 2005年 548萬 名, 2007年 570萬 名, 2009年 575萬 名 等 꾸준히 上昇했다. 이어 2014年 607萬 名으로 앞자리 數字가 바뀌었다. 1980年代生은 勞動市場의 出發線부터 普遍的 雇傭 形態의 하나로 非正規職을 經驗한 첫 番째 世代다.

    ‘신동아’ 2019年 11月號 ‘88萬원 世代 8人의 悲鳴’에는 서울대를 卒業한 1986年生 取材源이 건넨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正規職 轉換 後 事實을 父母님께 말씀드렸더니 ‘正말 多幸이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라고 激勵해 주셨다. 父母님이 勤勞條件에 對해 걱정하고 계셨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大學院 指導敎授님은 그해 送年會 祝杯辭를 ‘朴ㅇㅇ 正規職 轉換 祝賀’로 해주셨다. 난 事實 이게 그렇게 祝賀받을 일인가 했거든? 年俸이 크게 오른 것도 아니고, 잘나가는 大企業에 入社한 것도 아니고, 그냥 18個月을 契約職으로 다니다 正規職으로 轉換된 것뿐이었는데. 이때 비로소 ‘正規職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會社 業種이 뭐든, 月給이 얼마든, 어떤 業務를 맡든 一旦 ‘正規職이면 祝賀한다’는 거잖아.”

    非正規職에서 正規職으로 올라가다

    2020년 8월 1일 인천국제공항공사 노조원들이 서울 종로구 서린동 광통교 인근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2020年 8月 1日 仁川國際空港公社 勞組員들이 서울 종로구 서린동 광통교 隣近에서 非正規職의 正規職 轉換 反對 集會를 열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記者]

    1980年代生 앞에는 일자리가 없던 게 아니다. 그들이 期待하는 ‘좋은 일자리’가 적었을 뿐이다. 2017年 韓國職業能力開發院 報告書 ‘지난 10年間 4年制 大卒者 勞動市場의 變化’를 보면 4年制 大卒者의 雇傭率은 4.6%포인트, 正規職 就業率은 10.6%포인트, 大企業 公企業 等 羨望職場 就業率은 9.3%포인트 下落했다. 全體 雇傭率 減少値보다 正規職과 大企業·公企業 等 質 좋은 일자리 就業率 減少値가 두 倍 以上 높았다.

    ‘좋은 職場’을 두고 서바이벌 게임이 始作됐다. 正規職과 非正規職은 계급화됐다. 1990年代生보다 1980年代生이 먼저 겪은 일이다. 1985年生인 李俊錫(國民의힘 代表)은 지난해 6月 10日 記者와 만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非正規職이 正規職이 되는 過程을 說明하면서 “올라가다”라는 述語를 썼는데, 오늘날 1980~1990年代生의 情緖를 代辯하는 單語다.

    “우리 윗世代는 就業에 對한 苦悶이 없었기 때문에 ‘더 잘살기 위한 競爭’을 했다. 처음에 就業할 때 年俸 5000萬 원 會社에 가느냐, 3000萬원 會社에 가느냐에 對한 競爭이지. 只今은 ‘하느냐’냐 ‘마느냐’의 問題다. 過去라면 非正規職의 正規職化에 對해서도 배가 아플 수는 있겠지만 그로 인해 내가 나빠지는 件 없거든. 그런데 仁川國際空港 事態에서 나타나듯 이제 非正規職의 正規職化度 絶對善으로 보지 않는다. 非正規職 空港 勞動者들이 正規職으로 올라가게 되면 내 公採 人員이 줄어드는 건 自明하니까. 掠奪的 狀況이 된 것이다. 文在寅 政府가 停滯시켜 놓은 經濟 現實 속에서는 남의 幸福은 나의 不幸이다.”

    非正規職으로 職場에 들어갔고, ‘내 집’ 마련엔 失敗했으며, 結婚은 抛棄했다. 統計上 1980年代生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文在寅 政府 때 狀況이 더 深刻해졌다. 角度를 달리해 보면 다른 궁금症이 딸려온다. 그런데도 30代의 46.3%는 大選에서 민주당을 支持했다. 政策과는 別個의 層位에 共通 코드가 있을지 모른다. 05學番인 記者는 그것이 노무현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은 2002年 12月 大統領에 當選됐다. 2003年 2月부터 5年間 在任했다. 2009年 5月 逝去했다. 2000年代 學番, 아니 學番 없는 1980年代生徒 20代 때 노무현의 ‘成功과 挫折’을 함께했다.

    1980年代生은 盧武鉉의 國政 運營을 支持한 게 아니다. 한나라黨(現 國民의힘)을 支持하는 産業化 世代 父母(1950年代生)에 對한 뾰족한 反撥心 같은 것이다. 노무현은 1980年代生에게 反(反)權威主義의 레테르다.

    進步性向이 剛할수록 노무현 政府 政策(韓美自由貿易協定, 이라크 派兵)을 批判했다. 그런 이들조차 노무현을 “政治人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라 稱했다. 05學番인 記者와 03學番인 박대근이 나눈 對話다.

    盧武鉉의 ‘成功과 挫折’

    2008년 7월 5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서울시청 앞 태평로를 가득 메운 채 행진하고 있다. 당시 20대이던 1980년대생은 이 집회의 중추였다. [동아DB]

    2008年 7月 5日 狂牛病 國民對策會議가 主催한 촛불示威 參加者들이 서울市廳 앞 태평로를 가득 메운 채 行進하고 있다. 當時 20臺이던 1980年代生은 이 集會의 中樞였다. [東亞DB]

    노무현 政府 時節에 論難도 많았는데.

    “노무현 政府의 勞動法 改正에 對해 데모도 했고 다른 政策에도 反對 많이 했다. 支持率도 낮았고 政治的으로 엄청나게 시끄러워서 失敗한 大統領이라고 생각했다. 時間이 지난 뒤 人間的으로 評價할 대목이 있는 거지.”

    우리 世代에는 노무현 個人에 對한 愛憎 같은 게 있던 것 같다.

    “影響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事實 李明博 政府 時節에 對해서도 큰 記憶은 없지 않나. 狂牛病 촛불示威 程度만 기억나지. 우리 世代에 政治人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分明 노무현이다. 政治 諷刺도 流行했고, 2004年 彈劾 集會에도 한 番 씩은 參與하면서 政治參與의 意味에 對해 苦悶해 봤고. 우리는 綜合的인 意味에서 盧武鉉 世代라고 생각한다.”

    政策에 對한 贊反을 떠나, 感情的·情緖的으로 노무현 世代라는 印象도 들고.

    “그렇다.”

    2012年 문재인을 찍었던 것도 노무현에 對한 鄕愁 때문이었나.

    “우리는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社會的 權威主義에 對한 抵抗感 같은 게 있었다. 민주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한나라黨보다는 낫지 않으냐’는 情緖도 있었다. 다만 그 强度는 弱했다. 우리 世代는 民主化가 이뤄진 뒤 學校를 다녔는데, 이것이 ‘한나라당은 守舊獨裁 勢力’이라는 프레임에 크게 中毒되지 않은 理由일 수도 있지. 다만 只今의 國民의힘이 過去 한나라당式 權威主義 政黨에서 脫皮했느냐고 누가 물으면 自身 있게 ‘예스’라고는 答을 못하겠다.”

    如前히 進步를 自處한다면 지난 大選 때 沈想奵이라는 選擇肢도 있었는데.

    “20代 때는 政治社會的 이슈 中心으로 進步를 생각했지만 只今은 다르다. 會社도 다니고 株式도 하고 집도 求해야 한다. 經濟 領域에서 때로 保守的 政策이 必要할 때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保守 政權이 再開發·再建築 規制 緩和를 適切히 活用해 집값을 잡은 적도 있다고 생각한다. 對北政策의 焦點은 北韓을 强力히 抑制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勞動政策이나 少數者 保護에서는 進步的 接近法을 選好한다. 그러니 正義黨을 擇할 만한 誘引이 不足했고, 公約도 새로울 게 없다. 무엇보다 沈想奵 候補가 새롭지 않은 人物 아닌가.”

    盧武鉉의 民主黨과 文在寅의 民主黨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親文이 中心인 民主黨은 彼我 識別, 善惡 區分, 갈라치기, 陣營 論理, 反對意見 默殺로 說明된다. 그런 생각을 뻔뻔하게 페이스북에 올린다. 노무현뿐 아니라 김대중의 민주당과도 完全히 다르다. 民主黨의 遺産은 脫權威主義인데, 只今은 그런 모습이 없다. 오랫동안 민주당을 支持했던 사람으로서 慘澹하다. 投票에 꼭 參與해서 民主黨에 警鐘을 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尹 大統領의 行步에 따라 언제든 支持를 撤回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것이 민주당을 强固하게 支持하는 40代나 國民의힘만 찍는 老年 世代와 우리의 差異다. 그들은 自己便이라 생각하면 設使 잘못해도 끝까지 擁護한다. 尹錫悅이 (文在寅 政府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支持를 撤回할 것이다.”

    1970年代生徒 盧武鉉 世代다. 그들은 X世代로 불리며 華麗하게 出現했다. 1990年代는 大衆 消費文化가 開花한 時期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X世代의 아이콘이었다. 한便에서 이들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主役이기도 했다. 1993年 고려대에서 열린 한총련 出帆式에는 10萬 名이 모였다. 언젠가 칼럼니스트이자 便宜店主人 鳳달호에게 ‘1990年代에도 自主統一運動이 學生運動의 中樞 아니었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1974年生으로 大學 時節 總學生會長을 했다.(신동아 2021年 1月號 ‘‘한때 左派’ 4人의 快刀亂麻 文在寅 時代 解剖’)

    冷戰이 사라진 世界에서 成長하다

    “1980年代 學生運動은 그나마 苦悶이 있던 것 같다. 1990年代 學生運動은 注入式이었다. 김정일이 쓴 ‘主體思想에 對하여’는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1990年代 中盤이 되면 正統을 따지면서 北韓에서 나온 願書가 아니면 보지도 않았다. 1990年代 大學에는 相反되는 勢力이 共存했다. 全體主義 文化를 가진 運動圈이 있던 反面, 서태지와 아이들에 빠진 大學生들이 있었다.”

    한총련으로 대표되는 NL(民族解放)은 1990年代 學生運動의 主流였다. 1996年 연세대 占據 籠城을 契機로 헤게모니가 損傷됐지만, 世紀末까지 勢(勢)가 이어졌다. 狀況은 2000年부터 바뀌었다. 그해 全國 280個 大學에서 非運動圈이 總學生會長에 當選된 곳이 130餘 個로, 한총련 主流인 NL 系列이 當選된 數字(110餘 個)를 처음으로 넘어섰다.(중앙일보 2001年 11月 21日 ‘總學生會長 選擧戰 ‘班運動卷·反政治’ 바람’)

    2000年代 中後半에는 實用的인 이슈가 前面에 登場했다. 非運動圈은 自主와 統一이 아니라 福祉 擴大와 就業 博覽會 開催 公約을 내걸고 學生 票心을 刺戟했다. 1984年生 백경훈은 2006年 전북대 總學生會長을 했다. 그는 非運動圈을 標榜하면서 ‘여러분의 밥숟가락을 責任지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백경훈은 지난해 國民의힘 大選 競選 當時 元喜龍 캠프 代辯人을 지냈다. 最近까지 尹錫悅 大統領職引受委員會 實務陣으로 活動했다.

    “總學生會長 때 就業 問題가 社會的으로 불거지기 始作했다. 學生들의 關心事가 일자리에 集中돼 關聯 公約을 集中 開發했다. 1990年代 學番은 運動圈 끝물에 있던 世代다. 2000年代 初·中盤 學番은 달랐는데, 民主化 以後 1990年代에 幼年期를 보낸 影響도 있을 거다.”

    1982年生 金炳玟은 尹錫悅 大統領의 候補 時節 代辯人이다. 그는 2007年 경희대 總學生會長을 했다. 非運動圈을 自處했다. 경희대는 서울대, 고려대와 함께 2000年代 中盤까지 NL 運動圈의 歲가 剛한 大學으로 꼽혔다. 當時 大學街에는 運動圈도 싫고 保守 政治色을 앞세운 勢力도 싫다는 氣流가 흘렀다. 金炳玟은 ‘둘 다 싫다’는 點을 强調해 選擧 戰略을 짰다.

    “非運動圈을 찍는다고 保守를 支持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슬로건으로 ‘한총련 NO, 뉴라이트 NO’를 앞세웠다. 2000年代 學番은 非運動圈 學生會를 보고 자란 體驗을 갖고 있다. 그런 世代가 30代가 되고 나서 運動圈 政府의 ‘내로남不’에 批判的인 게 어찌 보면 當然하다.”

    李在明 민주당 常任顧問은 지난해 7月 1日 “大韓民國이 다른 나라의 政府 樹立 段階와 달라서 親日 淸算을 못 하고 親日 勢力들이 美 占領軍과 合作해서 支配體制를 그대로 維持했지 않은가”라고 했다. 典型的인 NL 運動圈의 敍事다. 冷戰 解體 戰後에 成人이 된 1970年代生의 相當數는 共感했을 지도 모르겠다. 蘇聯이 사라진 後 學窓 時節을 보낸 1980年代生에게는 딴 나라 敍事다. 1983年生 노정태(經濟社會硏究院 專門委員)의 分析이다.

    “1980年代生은 冷戰이 사라진 世界에서 成長했다. 反美를 熱心히 해야 좋은 世上이 될 것이라는 게 冷戰時代의 思考方式인데 脫冷戰 世代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1960年代生의 世界觀, 그러니까 永遠히 끝나지 않는 ‘守舊 保守와의 戰爭’ 談論이 1980年代生에 먹히지 않는 理由이기도 하다.”

    스타 리그의 宗主國

    脫冷戰의 洗禮를 받은 1980年代生은 統一에 無關心하다. 北韓은 領土를 맞댄 다른 나라일 뿐이다. 2000年代에 NL 運動圈이 大衆性을 잃은 까닭은 同時代 主流와 코드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脫NL은 浪漫的 對北觀으로부터의 脫皮다. 1980年代生에게 進步와 統一은 반드시 共存해야 할 價値가 아니다. 文在寅 政府가 險한 말을 들으면서도 南北關係 改善에 나서는 게 이들의 눈에는 理解 못 할 現象이다. ‘北韓을 때려잡자’는 철 지난 反北(反北)도 촌스럽다. 1988年生 이동수(靑年政治크루 代表)가 말했다.

    “1980年代生은 北韓에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사이에는 文在寅 政府가 너무 低姿勢를 보였다는 認識이 있다. 過去에는 進步·補修를 나누는 基準 中 하나가 對北觀이었다. 1940~50年代生은 北韓을 쳐부숴야할 怨讐로 보고, 1960~70年代生은 北韓을 同胞로 보면서 ‘우리 民族끼리’를 외친다. 1980年代生은 北韓을 怨讐도 同胞도 아닌, 옆에 붙어 있는 ‘못난 나라’ 程度로 생각한다. 朴槿惠 政府는 너무 敵으로만 對하고, 文在寅 政府는 너무 同胞로만 對하니 共히 反感을 갖는 것이다. 1980年代生에게 北韓은 關心 對象조차 아니다.”

    ‘K’는 文在寅 政府 時期 管制(官製) 流行語다. K-防疫, K-백신, K-드라마, K-푸드 等 K타령이 橫行했다. 지난해 11月에는 서울 코엑스에서는 文化體育관광부를 비롯해 政府 部處 6곳이 準備한 ‘2021 K-博覽會’가 열렸다. 韓流 콘텐츠와 有關 産業을 弘報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當時 大統領도 現場을 찾았다.

    誇張된 矜持는 콤플렉스의 發露다. 缺乏이자 아웃사이더 意識이다. 先進國이라는 유토피아를 設定해 永遠히 따라잡아야 할 것만 같은 뉘앙스가 담겨 있다. K의 유니버스에서 韓國은 永遠히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다.

    노정태는 “나는 ‘오징어 게임’이 世界的으로 잘나간다는 말을 들어도 感動的이지 않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지만 처음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年代生은 韓國 文化도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일 수 있음을 어릴 적 깨달은 世代다. 그들에겐 先進國 콤플렉스가 없다. 노정태의 말이다.

    “1980年代生에게 1990年代 大韓民國은 後進國 티를 벗기 始作한 나라다. 1970年代生에게 1980年代 末~1990年代 初 大韓民國은 北韓과 別 差異가 없는 나라다. 그 윗世代는 (國家로부터) 反共 映畫·反共 漫畫를 보라고 강요받았다. 멋지고 洗練된 海外 文物에 對한 憧憬心 같은 게 컸다. 이들에게 韓國 文化는 宏壯히 촌스럽고 暴力的인 것일 수밖에 없다. 1980年代生은 인터넷을 통해 世界가 넓어지는 經驗을 했다. 이들의 成長期에 스타크래프트와 스타 리그가 出現했다. 스타크래프는 블리자드가 만들었지만 스타 리그는 韓國이 만들었다. 따라서 1980年代生은 外國의 무언가를 힐끔거리지 않고 우리가 宗主國으로 즐길 수 있는 게 나왔다고 느낀 世代다. 이런 經驗을 일찌감치 한 世代와 억눌렸다고 생각한 世代는 다를 수밖에 없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看破했듯 밀레니얼 時代의 “世界는 平平하다(The World is Flat).” 네트워크와 소프트웨어가 地球上 國家를 이웃집처럼 連結했다. 1980年代生은 PC通信의 끝물과 인터넷의 첫물을 交叉해 經驗했다. 1970年代生은 成人이 돼 디지털에 入門했다. 1990年代生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機器를 갖고 놀았다. 1980年代生은 10代 時節 디지털의 領土로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1990年代生이 디지털 네이티브라면, 1980年代生은 半(半)디지털 네이티브다. 온라인으로 連結하고 오프라인으로 剪夷한다. 1980年代生이 즐겼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아이러브스쿨은 온라인으로 學校 同門을 찾아주는 서비스였다. 2008年 狂牛病 촛불集會는 1980年代生의 온·오프라인 橫斷 能力이 共同體에서 活用된 結果다. 1980年代生은 1970年代生보다 個人을 强調하나, 1990年代生에 비해 共同體에 關心이 많다.

    장민지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學科 敎授는 1984年生이다. 그는 1980年代生을 “디지털 네이티브로 가는 過程을 겪은 世代”라고 定義했다.

    “1980年代生은 온라인上의 親密感과 오프라인上의 親密感을 同時에 追求한다. 1980年代生은 必要할 境遇 오프라인 空間에서 物理的으로 連帶하고 다시 흩어진다. 一種의 게릴라다. 1990年代生은 온라인上에서 假想敵으로만 連帶한다. 1980年代生은 集團主義에 反對해도 共同體에 對한 連帶 感受性을 갖고 있다. 1990年代生은 더 個別的인 分子(分子)의 느낌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20代 大選에서 尹錫悅·李在明 두 候補는 30代에서 가장 적은 隔差(1.8%포인트)를 記錄했다. 그間 우리가 公論章의 助演쯤으로 생각했던 이 獨特한 世代는 一瞬間에 與野가 가장 熾烈하게 衝突하는 激戰場이 됐다. 民主黨이 區劃한 舊秩序는 끝났으나 새로운 秩序는 到來하지 않았다. ‘世代包圍론’ 따위의 轟音이 들려오지만, 이 世代가 호락호락 激戰場을 내어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이 空間을 說明하는 낱말은 ‘탈(脫)민주당-비(非)국민의힘’이다. 줄타기를 통해 微妙하기 짝이 없는 均衡點을 찾아내는 世代. 다음은 어느 쪽 손을 들어줄까. 處地가 같은 洞世代로서 그것이 알고 싶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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