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마른 龍이 漢江물 마시러 가는 形勢’ 龍山, 제자리 찾기 始作됐다|신동아

2022年 6 月號

‘목마른 龍이 漢江물 마시러 가는 形勢’ 龍山, 제자리 찾기 始作됐다

빼앗긴 땅 龍山, 빼앗긴 이름 둔지산을 찾다

  • 金賢美 記者

    khmzip@donga.com

    入力 2022-05-29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共同墓地, 日本軍 駐屯地, 龍山 阿房宮

    • 청계천에서 漢江으로, 龍山은 21世紀 서울의 心臟部

    • 日帝가 지워버린 둔지산, 쫓겨난 鈍智美 마을

    • 옛 老人들이 朝鮮용산, 日本용산 區別한 理由

    • 大統領室 以前은 歪曲된 歷史 復元의 始作

    서울 용산구 부군당 역사공원에서 내려다본 용산기지 메인포스트 지역. 멀리 왼쪽으로 전쟁기념관이 있고 오른쪽은 해방촌이다. [박해윤 기자]

    서울 龍山區 府君堂 歷史公園에서 내려다본 용산基地 메인포스트 地域. 멀리 왼쪽으로 戰爭記念館이 있고 오른쪽은 解放村이다. [박해윤 記者]

    5月 10日 尹錫悅 政府가 出帆했다. 2021年 3月 4日 檢察總長職을 辭退한 지 433日 만에, 그해 6月 29日 大選 出馬를 宣言한 지 316日 만이다. 尹 大統領은 就任 첫날인 5月 10日 0時 龍山 大統領室 廳舍(옛 國防部 本館) 地下 國家危機管理센터에서 軍統帥權을 移讓받고 合同參謀本部로부터 對備 態勢를 報告받는 것으로 公式 業務를 始作했다. 3月 20日 當選人 身分으로 大統領 執務室의 龍山 移轉을 發表한 지 53日 만에 龍山 時代가 開幕됐다.

    汚辱의 歷史냐, 主權 完全 回復이냐

    電擊的으로 進行된 大統領 執務室 移轉에 對한 反撥은 적지 않았다. 더불어民主黨은 不通과 獨善, 强壓的인 拙速 移轉에 따른 安保 空白을 指摘했고, 隣近 住民들은 當場 高度制限 等 規制로 인한 집값 下落을 憂慮했다. 송영길 前 더불어民主黨 代表는 “民主黨이 再執權하면 靑瓦臺로 다시 갈 것”이라며 大統領室 以前 自體를 否定했다.

    歷史 論爭도 이어졌다. 尹昊重 더불어민주당 非常對策委員長이 3月 17日 KBS 라디오 ‘최경영의 最强時事’에서 “龍山 땅은 大韓民國 國民 立場에서 汚辱의 歷史가 있는 곳으로 우리 大統領이 淸나라 軍隊, 日本 軍隊가 駐屯하던 곳에 꼭 가야겠느냐”고 꼬집자,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는 “그런 式으로 따지면 靑瓦臺 敷地는 朝鮮總督官邸가 있던 곳”이라고 應酬했다.

    ‘한겨레’는 김천수 龍算學硏究센터腸이 2014年 日本 防衛性 文書庫에서 發掘한 ‘韓國 龍山 軍用 수用地 明細도’(1906년 日本이 軍事基地 造成을 위해 만든 地圖)를 根據로 “용산동 3街 三角紙 바로 옆 들머리 언덕배기의 國防部 廳舍 땅은 不過 100餘 年 前까지만 해도 集團 墓域이었다”고 報道했다(3월 22日子 ‘國防部 廳舍 땅의 歷史-尹錫悅이 찜한 龍山 언덕, 元來 共同墓地였다’).

    덧붙여 이 記事는 1907年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주車君司令官(朝鮮 駐屯 日本軍司令官)李 現 國立中央博物館 西쪽에 官邸를 지었으나 1910年 8月 初代 朝鮮總督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總督官邸로 바꿔버린 事實을 擧論하며 “元來 軍 將星 施設이던 것을 굳이 最高統治者가 自己 官邸로 삼겠다고 해서 몰아낸 것이다. 只今 國防部 廳舍를 大統領 執務室로 바꾸려는 것과 닮은 셈”이라고 꼬집었다. 日帝强占期 ‘龍山 阿房宮’이라 불렸던 이 總督官邸는 6·25戰爭 때 爆擊으로 破壞됐고, 後날 이 자리에 駐韓美軍을 위한 121病院이 세워졌다.



    共同墓地, 日本軍 駐屯地, 總督官邸, 龍山 阿房宮 等 개운치 않은 過去事는 龍山 時代 開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反戰 論理도 있다. “大統領室의 國防部 廳舍 移轉은 神의 한 수”라며 龍山 移轉 計劃을 積極 贊成해온 建築家 兪炫準 敎授는 “外國 占領軍이 차지했던, 汚辱의 歷史가 많은 땅에 國民을 代表하는 大統領의 空間이 들어선다면 主權을 完全히 回復하는 意味가 있다”며 “過去 朝鮮 漢陽의 中心軸이 淸溪川이라면 大韓民國 서울의 中心軸은 漢江이다. 首都圈이 擴張된 21世紀 서울의 中心部는 龍山”이라고 했다.

    한 世紀 넘게 記憶喪失症에 걸린 땅

    尹錫悅 大統領은 5月 3日 ‘龍山 르네상스’를 主題로 ‘每日經濟’가 開催한 ‘32次 비전코리아 國民報告大會’에 當選人 資格으로 參席해 “無限한 潛在力을 지닌 용산, 그리고 서울이 市民의 幸福은 勿論이고 經濟와 文化가 살아 숨 쉬는 力動的인 都市로 발돋움해서 더 많은 世界人의 사랑을 받는 都市가 되기를 期待한다”고 했다.

    그러나 ‘龍山 르네상스’를 외치기 前에 記憶喪失症에 걸린 이 땅의 歷史成果 場所性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主張이 나왔다. 最近 김천수 龍算學硏究센터腸을 中心으로 寶覃歷史文化硏究所, 서울環境運動聯合, 城郭길歷史文化硏究所, 龍山驛舍火社會的協同組合, 統一安保戰略硏究所, 韓國땅이름學會, 韓國文化遺産政策硏究所가 ‘龍山 둔지산 제자리 찾기 市民連帶’를 結成했다.

    김천수 氏는 “龍山 美軍基地 안에는 龍山(龍山)이 없다. 따라서 世間에 떠도는 용산의 地脈, 龍의 기운이 모이는 名當 云云하는 것은 只今의 용산과 無關하다”면서 “용산基地 터는 元來 朝鮮時代 漢城府 南部 鈍地方 內 둔지산과 鈍智美 마을이 있던 地域으로, 이곳에 있던 나지막한 山 이름이 둔지산이고, 山을 뜻하는 우리말 ‘米’가 붙어 鈍智美라는 固有 이름을 갖게 됐다”고 說明했다. 그러나 1905年 러일戰爭에서 勝利한 日本은 둔지산 一帶를 强制 受容해 韓國 駐車軍司令部를 設置하고 제멋대로 龍山이라고 바꿔 불렀다.

    朝鮮時代 首都인 漢城府는 漢陽都城과 城底十里(都城 밖 10里, 4㎞)까지 管轄區域이었는데 城底十里 人口가 繼續 增加하자 英祖 때 南部에 두模倣·漢江房·鈍地方을, 西部에 龍山房·西江房을 新設했다. 新設된 5個 房은 모두 漢江邊에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서도 龍山放은 西部, 鈍地方은 南部에 屬하는 儼然히 다른 區域이었다. 當時 鈍地方은 西氷庫1係, 西氷庫2係, 枳敔屯溪, 梨泰院界, 청파界, 前生內界, 前生外界로 나뉘었는데 지어둔계가 現 용산基地에 該當된다.

    市民連帶 側은 100餘 年 넘게 慣行的으로 불러온 용산이라는 地名을 當場 바꿀 수는 없지만, 둔지산이라는 固有 名稱이 있었음을 밝히고 둔지산 자락에 자리 잡았던 鈍智美 마을(정자동, 新村, 大村, 院內村)의 正確한 位置와 地名을 알리는 努力이 必要하다고 했다. 이러한 名稱 回復과 함께 日帝强占期에 잘못 지어졌거나 歪曲된 歷史的 地名을 바로잡아 달라고 要求했다.

    그렇다면 眞짜 龍山은 都大體 어디에 있을까. 용산의 東西를 가르던 만초천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南山 아래 둔지산이 갑자기 용산으로 遁甲한 理由는 무엇일까. 러일戰爭을 빌미로 日本 軍隊가 占領한 後 한 世紀 넘게 異邦人의 땅이었던 용산基地는 어떻게 記憶되고 保存돼야 하는가.

    龍山, 빼앗긴 異邦人들의 땅

    最近 日本軍 兵營地 一帶의 變遷史, 龍山練兵場과 남영동의 地名 由來, 龍山驛 設置 沿革, 日帝强占期와 光復 以後 時期 孝昌園 區域의 受難史 等을 整理한 冊 ‘龍山, 빼앗긴 異邦人들의 땅 1·2’權이 出刊됐다. 이 冊의 著者인 이순우 民族問題硏究所 責任硏究員은 大學과 大學院에서 政治外交學을 專攻했지만 卒業 後 10年間 金融人으로 살다 20年 前부터 日帝强占期 以後 文化財 受難의 痕跡을 찾고 記錄하는 데 注力해 온 獨特한 履歷의 歷史學者다. 2013~2019年 서울市 文化財委員會 標石分課委員을 지냈고, 2021年 6月부터 只今까지 두 番째 任期를 보내고 있다.

    이순우 氏는 이 冊에서 “近代時期 以後 용산 一帶는 植民 支配 體制를 實質的으로 支撐하던 日本 軍隊가 直接 駐屯했던 곳이고, 解放 以後에도 如前히 駐韓美軍의 核心 駐屯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空間”이라며 “오랜 歲月 異邦人들의 手中에 놓이게 되면서 日帝 侵奪과 分斷 時代의 苦痛과 傷處가 고스란히 겹쳐진 地域으로 남게 됐다”고 한다.

    김천수 센터長 또한 용산 地域學 硏究에서 獨步的 人物이다. 2009年부터 5年間 韓美聯合司令部에 勤務하며 本格的으로 龍山 硏究를 始作해 용산基地와 용산 地域史 硏究에 集中해 왔다. 이를 土臺로 ‘우리가 잘 몰랐던 용산의 歷史를 찾아서’(2014), ‘용산基地 內 사라진 鈍智美 옛 마을의 歷史를 찾아서’(2017), ‘6.25戰爭과 龍山基地’(2021) 3部作을 잇따라 發表했다. 또 신주백 敎授와 함께 美國 國立文書記錄保管廳(NARA)에서 용산基地 옛 寫眞과 各種 設計圖面을 確保해 2017, 2019年 두 次例 寫眞展을 열고 ‘寫眞과 地圖, 圖面으로 본 용산基地의 歷史’를 펴냈다.

    김천수 氏는 “大統領室이 移轉하는 國防部 땅은 世間에 膾炙되듯 外勢 駐屯의 歷史와 汚辱의 歷史로만 點綴된 것은 아니다”라며 “한 世紀 前만 해도 이곳은 木覓山과 漢江을 벗하며 만초천을 품은 둔지산 丘陵地帶로 先祖들의 삶의 터전이자 死後의 居處(共同墓地)였다. 只今은 이 一帶를 용산으로 알고 있지만, 日帝가 100餘 年 前 용산基地를 만들기 以前부터 數百 年間 둔지산 또는 鈍智迷路 불렸다”고 한다.

    1908年 初 鈍智美 新村과 정자동에 살던 사람들이 强制 이주된 곳은 現在 보광동 4統과 5統 地域으로, 鈍智美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 ‘새말’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後날 ‘龍山 阿房宮’이라고 불린 總督官邸가 들어서게 된다.

    용산의 頂上에 있는 용산聖堂

    1860년대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 경조(京兆)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한성부를 가리킨다. 지도에서 ‘용산(龍山)’과 ‘둔지산(屯之山)’이 각각 다른 위치에 표시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

    1860年代 金正浩가 그린 ‘경조오부도’. 慶弔(京兆)란 人口가 가장 많은 都市라는 뜻으로 朝鮮時代 漢城府를 가리킨다. 地圖에서 ‘龍山(龍山)’과 ‘둔지산(屯之山)’이 各各 다른 位置에 標示돼 있다. [서울大 奎章閣]

    흔히 龍山이라고 하면 龍山 美軍基地를 中心으로 三角紙, 龍山驛, 이태원을 떠올리지만 元來 龍山은 麻浦 바로 上流에 位置한 浦口 一帶를 가리키는 地名이었다. 朝鮮時代 行政區域 單位인 房(坊)을 基準으로 ‘龍山房’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에 걸쳐 있었다.

    용산이라는 地名도 北岳山, 仁王山, 南山과 같이 山 이름에서 由來했다는 事實은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러나 1860年代 金正浩가 漢陽都城과 城底十里(都城 밖 約 4㎞) 一帶를 그린 ‘경조오부도’를 보면 都城 西쪽 仁王山과 무악(安山)에서 뻗어나간 山줄기가 만리현과 孝昌墓를 거쳐 漢江邊으로 向하는 것을 確認할 수 있다. 오늘날 만리재에서 孝昌公園과 새창고개를 거쳐 산천동, 청암동 一帶에 이르는 긴 丘陵地가 形成돼 있다. 이 山줄기 形勢가 龍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용산이 됐다. 或者는 목마른 龍이 漢江물을 마시러 가는 形勢라고도 한다.

    김천수 氏는 “1970年代부터 急速한 都市化와 開發로 용산의 山줄기가 高層아파트와 聯立住宅으로 뒤덮여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仔細히 보면 용산의 山줄기는 現在도 그 모습을 維持하고 있다”고 했다. 現在 산천동 天主敎龍山聖堂이 자리한 곳이 용산의 正常이라고 한다.

    1451年 編纂된 ‘高麗史’를 보면 高麗 肅宗 6年(1101)에 首都 男警의 候補地를 物色하던 中 “노원역, 해村, 용산 等에 가서 算數를 살펴보았다”는 記錄이 나온다. 1454年 發刊된 ‘世宗實錄地理志’는 “용산강은 崇禮門 밖 西南쪽 9里에 있다. 배로 실어 온 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 君子江監(軍資江監·軍糧米를 管理하던 倉庫)과 風저江倉(豊儲江倉·宮闕에 올리는 쌀을 管理하는 倉庫)이 있다”고 했다.

    當時 용산강은 全國 8度 物資의 集結地이자 戰略的 要衝地였고, 그 一帶 絶壁(只今의 용산구 청암동, 산천동 西쪽 地域으로 漢江을 끼고 있음)은 오늘날로 치면 漢江 眺望權이어서 風光이 좋기로 所聞이 나 歷代 權力者들이 이곳에 樓閣, 亭子, 別莊을 짓고 風流를 즐겼다. 朝鮮時代 正祖는 이곳 별營倉(訓鍊都監 軍兵의 給料를 管理하던 곳으로, 俗稱 벼랑창이라고 불렸다) 옆에 邑靑樓를 짓고 樓閣에서 軍事訓鍊을 參觀하며 詩를 읊었다고 傳해진다.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2009년부터 5년간 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서울 남영동 연구실 옥상에 서면 용산기지가 발밑에 있는 것처럼 가깝다. [김도균 객원기자]

    김천수 龍算學硏究센터腸은 2009年부터 5年間 韓美聯合司令部에서 勤務했다. 그의 서울 남영동 硏究室 屋上에 서면 용산基地가 발밑에 있는 것처럼 가깝다. [金度均 客員記者]

    朝鮮용산, 日本용산 뒤죽박죽된 地理的 位相

    邑廳루 뒤 언덕에는 大韓帝國 末期 總稅務司로 政府 財政을 左之右之한 英國人 맥리비 브라운(德壽宮 石造殿 建築 推進)의 別莊이 있었다. 元來 朝鮮時代 안평대군(世宗의 셋째 아들로 兄 首陽大君에 依해 죽임을 當함)의 亭子 ‘淡淡情’이 있던 자리로, 安平大君이 죽자 申叔舟의 別墅로 쓰이다 어느 時點에 사라졌다. 그 터에 稅關監視署가 세워졌고, 이 집은 다시 브라운의 別將이 됐다가 日帝强占期 政務總監 別莊으로 使用됐다. 光復 直後 歸國한 李承晩 博士가 이화장으로 옮기기 前 이곳에 暫時 머무르며 ‘마포장’으로 言論에 登場했던 波瀾萬丈한 歷史가 서린 場所다.

    하지만 용산과 麻布의 境界에서 漢江 쪽으로 툭 튀어나온 이 언덕이 往來에 支障을 주자 日帝强占期에 江邊道路를 開設하면서 邑靑樓를 비롯해 별營倉 一帶 痕跡이 모두 사라졌다. 이순우 氏는 오늘날 淡淡情 터를 마포동 419-1番地로, 별營倉 邑廳루 터를 청암동 168-53番地로 考證한다.

    1992年 11月 政府가 龍山 美軍基地 一部를 返還받아 용산家族公園을 造成할 무렵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용산公園 名稱고(名稱考)’라는 題目의 글이 실렸다.

    “本來의 용산은 이처럼 원효로와 接한 漢江邊 一帶였는데 只今은 龍山 하면 漢江 인도교에서 國防部나 옛 陸軍本部 옛 美軍基地에 이르는 一帶를 聯想하게 된다. 龍山은 용산이지만 이쪽 용산은 日本 사람들이 侵略 時節에 大規模 兵營을 짓고 저희네 集團 聚落地를 만들면서 신용산으로 명명한 倭色 용산인 것이다. 옛 老人들이 本來의 용산을 朝鮮용산이라 하고 신용산을 日本용산으로 불렀던 理由가 이에 있는 것이다.”(조선일보 1992年 11月 15日子)

    옛 老人들이 朝鮮용산, 日本용산을 따로 부른 것은 當然했다. 어제까지 둔지산이던 곳을 어느 날 갑자기 日本軍이 차지하더니 이제부터 용산이라 부르라 하고, 自己들도 헷갈리니 구용산, 신용산으로 區分하는 行態가 어처구니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世代가 떠나자 용산이 살아남고 둔지산이 잊혔다. 現在는 新용산 地域을 용산으로, 구용산 地域은 相當 部分 麻浦路 認識되고 있다. 朝鮮時代 麻布는 龍山房의 一部였음을 떠올리면 歲月 따라 指名에도 浮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우 氏는 애初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1899年 12月 南大門에서 용산으로 가는 電車가 처음 開通됐을 때 終着點이 원효로 끝자락인 漢江邊이었다는 事實에서도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다 1910年 龍山驛 方向으로 電車線路가 附設되자 從前의 용산역과 區分하기 위해 ‘신용산’ 終點이 생겨났고, 旣存 龍山 浦口 쪽 驛은 ‘구용산’ 終點이라는 억지스러운 이름이 붙었다. 李氏는 “龍山 周邊의 地理的 位相 關係가 完全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全的으로 러일戰爭 直後 日本軍 兵營地 建設에 따른 結果物이라고 봐도 無妨하다”고 했다.

    鈍地方에 外國 軍隊가 駐屯한 歷史는 1882年 壬午軍亂 때 淸나라 廣東水師提督 吳長慶이 軍事 5000名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南端(南壇), 梨泰院, 鈍智美, 下都監, 마두산 等地에 陣營을 꾸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當時 興宣大院君이 둔지산 一帶에 駐屯限 淸나라 軍營을 訪問했다가 中國 톈진으로 押送되는 恥辱의 歷史도 있다. 以後 1894年 淸日戰爭 때도 日本軍 兵力이 이곳에 駐屯했지만 本格的인 軍事基地化가 進行된 것은 러일戰爭 以後였다.

    “日帝가 이른바 ‘韓日議定書(1904年 2月 23日)’에 根據해 서울 地域에서 日本軍 駐屯을 위한 對象地로 定한 곳은 갈월리, 梨泰院, 鈍智美, 西氷庫 一帶였다. 이곳은 元來 鈍地方에 屬한 地域이었으나 便宜上 ‘용산軍領地’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日本軍影池는 곧 ‘龍山’이라는 等式이 成立된 것이다.”(‘용산 빼앗긴 異邦人들의 땅’ 1卷)

    만초천을 境界로 西쪽은 龍山房, 東쪽은 鈍地方

    배경식 歷史問題硏究所 副所長도 只今의 龍山基地 一帶가 日本軍 軍事用地로 收容되기 前 龍山房 地域과 場所的으로 歷史的으로 一致하지 않음을 指摘했다.

    “鈍地方이라는 行政區域 名稱은 朝鮮王朝 開創 以來 둔지산과 그 山자락에 기대어 살아온 鈍智美 마을의 名稱에서 由來됐다. 1751年 漢城府 行政區域 改編을 통해 仁王山에서 흘러 내려와서 只今의 龍山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漢江으로 들어가는 만초천을 境界로 그 西쪽은 漢城府 西部 龍山房으로, 그 東쪽은 漢城府 南部 鈍地方으로 行政區域을 區分했다. 以後 두 地域은 行政的, 空間的으로 분명하게 區分되는 地域으로 認識되고 維持돼 오다가 日本軍 軍事基地로 收用되면서 그러한 歷史成果 場所性이 消滅돼 鈍地方의 名稱은 歷史 속으로 사라지고 용산이라는 地名으로 굳어졌다.”

    光復 後 美軍이 駐屯하면서 ‘鈍智美’의 이름을 되찾을 機會가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캠프 西氷庫’로 命名됐고, 1953年 8月 동숭동 서울대 文理大學에 있던 美8軍 司令部가 이곳으로 移轉하면서 只今까지 龍山 美軍基地로 通用됐다.

    이는 지난해 初 龍山公園造成推進委員會가 國家公園 名稱 公募展을 열어 9401件의 市民 提案을 받았음에도 最終 選定된 이름이 다시 ‘龍山公園’이라는 웃지 못할 事件과도 關聯이 있다. 委員會 側은 “旣存 名稱인 용산公園은 100餘 年間 使用돼 國民들에게 친숙하고 부르기 쉬우며 直觀的으로 그 對象이 떠오른다는 强點이 있다”고 選定 理由를 밝혔다. 이에 對해 一部 市民들은 “말은 맞지만 뭔가 異常하다”는 反應을 보이기도 했다.

    배경식 氏는 龍山文化院 學術세미나(2021年 8月 27日)에서 “單純히 固有한 行政區域 名稱이 消滅되는 것에 對한 노스탤지어적 아쉬움이 아니라 國家公園 名稱으로 確定된 ‘龍山公園’李 歷史性과 場所性을 無視한 잘못된 名稱임을 指摘하고, 返還되는 龍山基地 一帶의 歪曲된 歷史成果 場所性을 復元하는 公論의 場이 提供돼야 한다”고 主張했다.

    언덕의 ‘둔’일까 兵營의 ‘晉’일까

     광복 직후 미군 정찰기가 촬영한 옛 일본군 용산기지 일대 전경(1945년 9월 4일). 김천수 씨가 신주백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과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찾아낸 사진이다. [김천수]

    光復 直後 美軍 偵察機가 撮影한 옛 日本軍 龍山基地 一大 前景(1945年 9月 4日). 김천수 氏가 신주백 前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長과 함께 美國 國立文書記錄保管廳(NARA)에서 찾아낸 寫眞이다. [김천수]

    朝鮮時代 畫家이며 金弘道의 스승인 豹菴 강세황(1713~1791)은 末年에 둔지산에 亭子를 짓고 ‘頭韻指定(逗雲池亭·구름이 머무는 蓮못이 있는 亭子라는 뜻)’이라고 명명했다. 實際 이 地域에는 亭子가 많다 해서 ‘정자동’이라는 地名이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姜世晃이 頭韻指定에 앉아 冠岳山과 동작나루를 마주하고 疊疊의 봉우리가 屛風을 친 듯하고 흰 모래가 緋緞을 펼쳐놓은 듯한 風景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頭韻지정기’라는 글을 남겼다. 그中 둔지산이란 名稱에 對한 興味로운 解釋이 나온다.

    “都城의 南大門을 나서 꺾어져 조금 東쪽으로 10里 못 미친 곳에 둔지산이 있다. 봉우리와 바위, 골짜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山이라는 名稱이 있고 屯田(屯田)을 둔 땅은 없지만 屯田의 땅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는 正말 따져 詰難할 것은 되지 못한다. 들길이 구불구불하고 보리밭 두둑이 높았다 낮아지는데, 마을 數百 氣가 있다.”

    ‘屯田’이란 軍糧을 充當하기 위해 邊境이나 軍事 要地에 設置한 土地다. 姜世晃이 보건대 周邊에 兵營이나 屯田이 없음에도 둔지산 또는 鈍智美(마을)라고 부르는 것이 多少 疑訝했던 模樣이다. 다만 “따져 詰難할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문상명 誠信女大 硏究敎授는 둔(屯)을 陳(鎭)으로 解釋했다. 現 龍山基地 一帶가 예전에 넓은 모래밭이어서 孝宗 以後 訓鍊都監, 御營廳, 摠戎廳 軍士들이 陣法을 演習하거나 觀兵하는 場所로 活用됐다는 것이다. ‘동국與도’ 中 ‘警강부임珍島(京江附臨津圖)’를 보면 軍隊를 訓鍊하는 校長(敎場)과 鷺梁津(鎭), 漢江鎭(鎭)李 三角形으로 配置돼 있고, 그 사이에 鈍智美 마을이 位置해 있다. 이를 根據로 文 敎授는 둔지산 一帶는 平常時 屯田으로 부치던 밭이 있는 마을이지만, 有事時 重要한 陳永(鎭營)으로 쓰였을 可能性을 提示했다. 文 敎授는 “軍事都市로서 적합한 環境을 갖춘 곳에 日本은 自身들의 軍事都市를 設計했고, 美軍은 日帝가 떠난 자리에 다시 自身들의 歷史를 重疊했다”고 했다(‘둔지산의 由來와 空間的 特性’, 2021年 8月 龍山文化院 學術세미나 發表 論文).

    反面 배우리 韓國땅이름學會 會長은 둔지산이라는 이름을 ‘담’ ‘돔’ ‘둠’과 같은 土박이 우리말과 連結시켜 외따로 떨어져 있는 山 또는 平地에 오똑 솟은 언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解釋했다. 배경식 副所長도 둔지산 앞의 漢江은 서울에서 가장 넓은 白沙場이 펼쳐진 곳으로 四方이 뻥 뚫린 白沙場이 防禦陣地로서 적합하지 않아 鈍智를 둔덕(언덕)으로 解釋하는 쪽에 손을 들었다. 김천수 氏도 둔지가 地形的 特徵과 關聯 있는 名稱으로 보고, 둔지산이 ‘그리 높지 않은 둔덕 같은 山’이라고 할 때 姜世晃이 描寫한 “들길이 구불구불하고 보리밭 두둑이 높았다 낮아지는” 것과 合致된다고 했다.

    只今도 용산基地 內 ‘드래곤힐’ 호텔 언덕에 가면 樹齡 200年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群落地가 둔지산의 歷史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三南 가는 옛길은 끊기고…

    둔지산 一帶는 崇禮門을 나와서 동작나루와 西氷庫나루를 통해 嶺南으로 가는 主要 길목인 만큼 둔지산 北쪽 기슭에 공용자에게 宿食을 提供하는 이태원이 있었다. ‘옛길 위의 朝鮮通信使’의 著者인 양효성 氏는 朝鮮通信使들이 南大門 밖 南廟를 지나 典牲署 隣近을 지나 둔지산과 富어치(버티고개)를 넘어 漢江을 건너갔던 射倖길의 主要 루트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日帝에 依해 둔지산 一帶가 强制 收用되면서 朝鮮通信使의 길도 끊겨버렸다.

    日帝强占에 사라진 또 다른 交通要地가 청파 배다리다. 朝鮮時代 漢陽에서 南쪽을 向해 漢江으로 이어지는 行路는 동작나루를 건너는 8臺로(해남 方向), 西氷庫로 넘어가는 4臺로(동래 方向), 鷺梁津으로 連結되는 7臺로(수원 方向) 세 가지가 있었다. 이들 모두 崇禮門을 벗어나면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을 거쳐 석우참(돌모루참)에 이르러 各各 길이 갈라진다. 이순우 氏는 當時 청파 배다리와 청파역은 오늘날 京釜高速道路 양재톨게이트나 만남의 廣場 같은 곳이었다고 말한다. 正祖가 火星 遠行에 나서거나 孝昌墓에 行次할 때도 이 길을 利用했다.

    청파 배다리가 있는 것은 만초천이 흘렀기 때문이다. 高宗 初期 編纂된 ‘동국餘地備考(東國輿地備攷)’에 따르면 萬初라 불리는 넝쿨풀이 많이 자라서 붙은 이름으로 너秋內, 넝쿨內, 舞樂千, 萬千이라고도 했다. 게가 많이 잡혀 ‘만초천의 게 잡는 불빛’이 ‘龍山八景’에 꼽히기도 했다.

    만초천은 京城 西쪽 모악(무악)에서 發源해 性을 감싸고 돌아 南쪽으로 흐르며 청파 南쪽의 主敎(배다리)를 거쳐 西南으로 흘러 용산강으로 들어갔다. 現在 位置로 보면 仁王山 기슭과 무악산(安山) 南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기 始作해 西大門 四거리의 적십자병원~이화여고 附近~西小門公園~청파로~용산전자상가~원효대교 北端에서 漢江(용산강)과 合流하는 7.7㎞에 이르는 물줄기다.

    朝鮮 太宗 때에는 만초천 물줄기를 利用해 용산강에서 들어오는 배를 崇禮門 앞까지 끌어올리는 이른바 ‘만초천 大運河 프로젝트’가 推進됐다. 左議政 河崙의 아이디어로 大部分의 臣下들이 贊成했지만 開局 以來 많은 工事가 進行되고 있는데 追加的인 百姓 動員에 負擔을 느낀 太宗이 保留했다고 한다.

    都城 안 淸溪川, 南大門 밖 만초천

    만초천 本流 外에도 南山 후암동에서 내려오는 후암千 支流(現 용산高等學校에서 숙대入口驛 方向)와 現 經理團길에서 용산基地를 지나 三角紙 附近에서 合流하는 支流가 있는데 이 두 支流는 鈍地方 住民들의 젖줄이었다. 都城 안에 청계천이 있다면 南大門 밖에는 만초천이 흘렀다.

    그러나 1902年 京釜鐵道를 着工하면서 崇禮門에서 靑파·돌모루·당고개 方向으로 이어지는 旣存의 삼남대로가 閉鎖됐고, 경인철도 直線化와 道路 開設 過程에서 만초천 물길度 큰 變化를 겪었다. 光復 以後 1962年부터 서울驛 뒤에서 원효로에 이르는 만초천 2㎞ 區間에 對한 覆蓋工事가 始作돼 1979年 覆蓋工事가 完了되면서 만초천 물길은 大部分 땅속으로 사라졌다. 서대문구 忠正路驛 있는 西小門 아파트도 만초천을 覆蓋한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나마 물길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만초천 代身 ‘욱천(旭川)’으로 記憶한다. 日帝强占期에 日本式 地名인 욱천으로 바뀌었고, 1990年代 中盤까지 줄곧 이 名稱을 使用했기 때문이다. 1995年 서울市는 日本式 이름을 버리고 元來의 만초천으로 바꾸기로 했으나, 淸派路에서 용산電子商街로 이어지는 高架車道는 如前히 ‘욱천’으로 불리고 있다.

    서울市內에서 만초천의 痕跡을 찾기 어렵지만 뜻밖에도 용산基地 메인포스트 區域에서 복개되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만초천을 確認할 수 있다. 이 개川은 現 경리단길 隣近 옛 梨泰院 마을에서 용산基地의 韓美聯合司 뒤를 지나 三角紙 附近으로 흐르고 있다. 日葬强占期에는 塑造千(小早川), 卽 고바야카와로 불렸는데, 壬辰倭亂 當時 倭將 고바야카와가 말에게 물을 먹인 場所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씁쓸한 歷史지만 이 또한 만초천이 간직한 歷史인 셈이다. 사라진 鈍地方과 만초천의 이야기는 김천수 氏가 쓴 ‘용산基地 內 사라진 鈍智美 옛 마을의 歷史를 찾아서’(개정판 2021)에 收錄돼 있다.

    둔지산의 歷史性 回復할 마지막 機會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의 공식 임기가 시작된 5월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태극기와 함께 봉황기가 게양돼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尹錫悅 第20代 大統領의 公式 任期가 始作된 5月 10日 서울 龍山 大統領室에 太極旗와 함께 鳳凰旗가 揭揚돼 있다. [大統領室寫眞記者團]

    大統領 執務室 龍山 移轉과 함께 駐韓美軍이 旣存 國防部 廳舍 앞 50萬㎡ 規模를 早期 返還하기로 하면서 龍山基地 公園化에도 加速이 붙고 있다. 全體 200萬㎡(국립중앙박물관, 戰爭記念館, 旣存 龍山公園 包含하면 300㎡) 가운데 25%가 返還되는 셈이다. 올해 9月 中 一般에게 臨時 公開할 豫定이다. 이와 함께 龍山 大統領室 建物에서 直線으로 250~300m 떨어진 헬기場과 그 一帶를 잔디廣場으로 만드는 計劃도 잡혀 있다. 白堊館 잔디밭을 벤치마킹해 이곳을 大統領과 市民의 疏通 空間으로 만들고 大統領室의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國民들이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世紀 以上 記憶喪失症에 걸렸던 이 땅의 歷史成果 場所性을 回復하고 眞正한 國民 疏通 空間으로 만들고자 하면 이제 速戰速決, 電擊 推進 같은 말들은 내려놓아야 한다.

    “오랜 歲月 外國 軍隊의 駐屯地로 刻印되어 있는 용산 地域에는 軍營地 內部는 말할 것도 없고 周邊 一帶가 온통 日帝 侵奪과 分斷 時代의 遺跡地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殘存物들은 그 自體가 日帝 侵略의 有力한 證據品이자 植民支配의 苦難을 상기시켜 주는 歷史敎育資料이기도 한 것이다. 植民地 時節에 겪었던 苦痛과 傷處를 담아내고 또한 解放 以後의 治癒過程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地域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이순우, ‘龍山 빼앗긴 異邦人들의 땅’ 1卷)

    김천수 氏는 大統領室 以前과 함께 基地 返還이 앞당겨지고 國家公園이 造成되는 只今이 둔지산의 歷史性과 場所性을 되찾을 마지막 機會라고 말한다.

    “용산基地(龍山公園 敷地)는 朝鮮時代부터 近現代史에 이르기까지 歷史的 時間과 空間을 重層的으로 담고 있는 場所로서 特히 ‘東아시아와 韓國 近現代史의 縮小版이자 거울’이다. 따라서 이곳이 單純한 近隣公園으로서가 아니라 또한 權力 中心의 땅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歷史에 對한 省察과 敎訓을 담아낼 수 있는 空間이어야 하며, 나아가 韓半島 分斷을 克服하고 平和의 價値를 담아낼 수 있는 方向으로 公園이 造成돼야 한다. 또한 未來 世代가 이 땅에서 힐링, 休息과 더불어 歷史性과 場所性을 꼭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公園이 돼야 한다. 여기는 美國 白堊館이나 센트럴파크 公園과 根本的으로 다르다는 것을 認識해야 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