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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인텔도 神이 아니구나, 우리도 神이 될 수 있구나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新東亞

아, 인텔도 神이 아니구나, 우리도 神이 될 수 있구나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世界 制霸恨 英 蒸氣機關 같은 걸 만들자”던 湖巖의 遺言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2-04-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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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設計는 美國에서, 生産은 韓國에서

    • 湖巖이 골프靴 신고 달려온 理由

    • 痲藥하는 사람들로 誤解받기도

    • 인텔 이기다니, 想像조차 못했다



    이임성 博士는 일찍이 美國 留學을 떠나 스탠퍼드대에서 博士學位를 받고 GE와 IBM에서 일하다 日本 샤프의 顧問을 맡았다. 이 會社의 사사키 博士(副社長)는 技術 導入에 도움을 請해온 강진구 會長과 만난 자리에서 李 博士를 바로 連結해줬다. 三星 職員들을 위한 技術 硏修도 해주겠다고 했다. 姜 會長은 回顧錄에서 當時 느꼈던 고마움을 이렇게 傳하고 있다.

    “사사키 副社長은 ‘家電用 IC(集積回路) 事業을 하다가 갑자기 超大規模集積回路(VLSI) 事業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記憶素子는 아니지만 計算器에 들어가는 IC인 마이콤(Micom, Micro computer Chip)을 샤프 社에서 生産하고 있으니 三星 職員들을 보내면 技術 硏修를 시켜드리겠다’고 했다. 當時 우리 狀況은 自轉車 타는 걸 겨우 배운 사람이 하늘을 날아야 하는 挑戰에 直面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 참으로 漠漠한 狀況에서 사사키 博士의 助言과 도움은 가뭄 끝 단비처럼 고마운 것이었다.”

    1982년 기공식을 가진 경기 부천반도체 연구소. 호암은 이듬해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동아DB]

    1982年 起工式을 가진 競技 富川半導體 硏究所. 湖巖은 이듬해 三星이 半導體 事業에 進出한다는 爆彈宣言을 한다. [東亞DB]

    銃彈만 없는 血鬪

    三星 半導體의 出發이 日本 샤프와의 協力 關係에서 비롯했다는 點은 韓日 産業社(史)에서 重要한 意味를 갖는다.

    勿論 三星이 世界 最高가 될 때까지 韓日 間에 半導體를 둘러싼 戰爭은 銃彈만 없는 血鬪나 다름없었다. 日本 業體들은 三星이 尖端 半導體 開發에 있어 奇跡이라고 할 만한 成就를 이룰 때마다 破格的인 덤핑 攻勢를 펴 三星을 괴롭혔다. 오죽했으면 三星은 새로운 技術開發을 할 때마다 日本의 牽制가 두려워 發表하지 않으려 한 적도 있다.



    그러나 三星이 처음으로 半導體를 始作했을 때 샤프 사사키 博士의 助言은 거의 決定的이었다. 湖巖度 ‘湖巖自轉’을 통해 샤프에 對한 고마움을 言及하고 있다.

    “日本 半導體 業界는 韓國에 對한 超大規模 集積回路(VLSI) 技術 提供에 不應했지만, 샤프 社의 각별한 好意로 그 技術을 導入할 수 있었다. 日本으로서는 外國에 對하여 半導體 技術을 처음으로 提供하는 것이었고, 韓國으로서는 日本으로부터 半導體 技術을 처음으로 導入하는 것이었다.

    當時 日本 業界 中에서는 샤프 社를 國益을 해치는 國籍(國賊)이라고 酷評하는 業者도 있었다. 그러다가 不過 3個月도 안 되어 히타치가 IBM 技術을 훔치는 스파이 事件이 滿天下에 드러나자 샤프 社를 先見之明이 있는 훌륭한 會社라고 激讚했다.”

    湖巖은 1983年 글로벌 半導體 産業의 最强者 日本을 따라잡는 것을 目標로 定했다. 그는 ‘尖端 半導體를 日本보다 먼저 開發하자’는 비전을 품었다. 이 비전은 한때 世界를 號令했던 파나소닉, 도시바, 샤프 等이 三星에 밀려 半導體 事業에서 撤收하거나 關聯 事業을 臺灣 半導體 業體에 賣却하면서 結局 現實이 됐다. 三星에 半導體 技術을 傳授한 샤프는 2016年 臺灣 홍하이에 賣却됐다.

    진대제의 記憶

     호암은 독자적 반도체 기술 개발을 통해 일본을 이기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것은 현실화됐다. 1983년 삼성이 낸 신문 광고. [동아DB]

    湖巖은 獨自的 半導體 技術 開發을 통해 日本을 이기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것은 現實化됐다. 1983年 三星이 낸 新聞 廣告. [東亞DB]

    生前에 湖巖이 얼마나 切齒腐心하며 讀者 技術을 開發해 日本을 이기려 했는지 보여주는 象徵的인 에피소드가 있어 紹介한다.

    情報通信部 長官을 지낸 진대제 前 三星前者 社長이 쓴 回顧錄 ‘熱情을 經營하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晉 前 社長은 스탠퍼드대에서 電子工學 博士學位를 받고 美國 IBM에서 일하다 1985年 三星에 迎入됐다. 鬐興半導體硏究所에서 4MD램과 16MD램 開發責任者로 일하던 그는 1987年 가을 어느 날 豫期치 않게 湖巖과 만난다.

    韓國으로 돌아와 일을 始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月 末의 어느 날 아침, 서울에서 부리나케 連絡이 왔다. 이병철 會長이 車를 타고 只今 南쪽으로 내려가고 있으니 南쪽에 있는 任員들은 全部 待機하라는 거였다. 어디로 간다는 얘기도 없이 無條件 南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平常時처럼 일을 했다. 當時 이병철 會長은 肺癌으로 몸이 많이 편찮아서 事業現場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저 安養 골프場이나 龍仁 자연농원에 바람을 씌러 가끔 들르는 程度였다. 그래서 이番에도 자연농원에 가나 보다 했다. 그런데 多急한 목소리로 速報가 繼續 날아들었다.


    “嶺東高速道路 通過! 그 아래 任員들은 자리 뜨지 말고 待機!”


    그 아래라면 水原 工場이든가, 아니면 鬐興綜合硏究所(現在의 技術院)든가, 그것도 아니면 半導體였다. 조금 있자니 또 緊急連絡이 왔다.


    “어? 水原톨게이트 通過!”


    그렇다면 綜合硏究所 아니면 半導體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綜合硏究所와 半導體 工場 任員들은 모두 모일 準備를 하라는 連絡이 왔다.


    “鬐興 톨게이트에서 나오셨다. 어? 綜合硏究所 正門 通過…. 앗! 半導體로 가신다, 卽時 會長室로 集合하시오!”


    事務室이 있었던 硏究所 3層에서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는 데 벌써 會長이 탄 벤츠가 착 지나갔다. 나는 어리둥절한 表情으로 그 앞에다 꾸벅 人事를 하고 會長室이 있는 빌딩 앞으로 달려갔다.


    이병철 會長이 천천히 車에서 내렸다.


    우리 事務棟 앞에는 層階가 세 個 있었는데 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會長이 그 層階를 다 오르지 못하고 中間에 넘어진 것이었다. 발목이 까져서 피까지 났다.


    會長은 肺癌 末期여서 그랬는지 起動이 많이 不便한 듯했다. 會長室에서 隨行員들이 會長의 구두를 바꿔 신겨주었다. 異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신는 구두와 室內에서 신는 구두가 따로 있나?


    많은 任員들이 出張을 가고 없어서 當時 會長室에 集合한 사람은 이윤우 工場長(當時 專務), 硏究所長, 나 程度였다.


    한참 지난 後, 서울에서 내려온 祕書室長이 헐레벌떡 따라 들어와 陪席했다. 會長이 平素와는 달리 行先地를 밝히지 않고 갑자기 내려오는 바람에 消息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길이었다.


    會長은 若干 거칠게 숨을 들이 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랜 沈默이 흘렀다. 暫時 後 會長이 입을 열며 조용히 말했다. 차분했지만 怒氣가 섞인 목소리였다

    “봤제?”

    사람들이 움찔했다. 우리는 대번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아무도 對答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있다가 이윤우 工場長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對答했다.


    “아, 예 봤습니다.”


    그날 아침 朝刊에 난 新聞記事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記事를 보고 우리도 깜짝 놀랐었다.


    ‘우리나라 半導體는 全部 다 日本 것을 베꼈다’는 內容이었다. 記事가 다 事實은 아니었지만 部分的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三星을 비롯한 韓國 半導體 業體들은 後發走者로서 日本 것을 많이 參考하고 있었다. 先進業體들을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가 日本 것을 베꼈다는 게 事實인가? 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려고 平生을 건 半導體 事業을 始作한 줄 아나? 英國은 蒸氣機關 하나를 開發해서 世界를 制霸했다! 우리 半導體도 그런 役割을 하라고 始作한 것 아닌가?”


    이병철 會長이 半導體事業을 始作한 趣旨와 目標는 英國처럼 韓國이 獨自的으로 開發한 技術로 世界의 頂上에 올라서는 것이었다. 모두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이 工場長이 急히 對答했다.


    “근데 그게 三星더러 하는 소리가 아니고 다論 會社들이 하도 베끼니까 하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會長의 憤怒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 工場長과 나는 獨創的인 製品을 만들어 다시는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約束했다.


    “반드시 16M D램을 獨自開發해서 模倣을 했다는 얘기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程度의 悲壯感마저 섞여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고간 뒤에야 會長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始作했는지 내게 이렇게 물었다.


    “進軍, 그래 開發팀은 만들었나?”


    “예, 조그마하게 만들어 始作을 했습니다.”


    “그래? 여러 人材를 모아오라고.”


    그러고 나서 會長은 그 時點에 着工한 3工場 用水나 電氣가 제대로 確保되었는지, 市場狀況과 技術開發 等에 對해 여러 가지를 一一이 메모까지 하면서 點檢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병철 會長이 器興 會長室에 到着하자마자 갈아 신은 신발은 골프靴였다. 安養 골프場에 하루 쉬러 갔다가 아침新聞을 보고 골프靴를 신은 채 그대로 달려온 것이었다. 祕書室長을 帶同하지 않은 것도 그런 理由였다. 생각해 보니 그때 입었던 옷도 골프服裝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가 會長과의 두 番째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約 한 달餘가 지난 11月에 他界했기 때문이다. “우리 技術로 讀者 開發한 半導體로 世界를 制霸하라”는 말씀이 事實上 마지막 遺言이었던 셈이다.


    只今 계시는 곳에서 얼마 받으십니까?

    다시 강진구 會長이 사사키 博士와 만났던 場面으로 돌아가 보자. 姜 會長은 그와의 面談內容을 湖巖에게 卽時 報告하고 湖巖의 指示에 따라 이임성 博士를 만난다. 李 博士는 姜 會長을 만난 자리에서 “美國에 있는 韓國人 科學者들을 注目하라”면서 이렇게 助言했다.

    “美國으로 留學 가서 電子工學 博士學位를 받은 韓國人들 中에는 歸國을 選擇하려다 막상 韓國에 일할 곳이 없다보니 그대로 눌러 앉게 된 境遇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機會가 되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愛國心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高級 頭腦들을 모아 美國에 硏究所를 만들고 韓國에 工場을 세워 美國 博士들이 設計한 것을 보내 韓國에서 만들면 어떨까요.”

    한마디로 設計는 美國에서, 生産은 韓國에서 해보자는 二元化 戰略이다. 그의 提案은 現實性이 있어 보였다. 姜 會長은 바로 그에게 스카우트를 提案한다. 姜 會長의 回顧다.

    “마음이 多急했던 나는 單刀直入的으로 물었다. ‘博士님이 直接 三星에 와서 도와줄 意向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오신다면 三星半導體通信 顧問으로 于先 모시겠습니다.’ ‘좋습니다.’ ‘只今 계시는 곳에서 報酬를 얼마나 받으십니까?’ ‘年俸 20萬 달러로 契約했습니다.’ ‘그보다 厚하게 드리겠습니다. 當場에 在美 韓人 科學者들을 모아 주십시오.’”

    1983年 初여름의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博士로부터 連絡이 왔다. 같이 일하겠다는 韓國人 메모리 開發 專門 技術者들을 모았다는 거였다. 이상준, 이일복, 이종길, 박용의 博士가 모였다. 이들은 인텔, 허니웰, 者日錄, 내셔널 洗米컨덕터, 웨스턴 디지털 等 美國 最尖端 半導體 會社와 硏究所에서 일하던 人材들이다.

    湖巖은 美國 硏究所의 靑寫眞이 얼추 그려지자 서울의 精銳 要員 6名을 추려 美國으로 보낸 뒤 本格的인 事業 計劃을 세우라고 指示했다. 이때 開發室長 資格으로 出張 팀에 包含돼 간 사람이 이윤우 前 副會長이다. 그를 直接 만나 當時 狀況을 들어봤다.

    이윤우 前 副會長과의 對話

    호암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서 미국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사람을 구할 수 없던 상황에서 미국에 체류하던 고급 두뇌를 모아 연구소를 만들고, 한국에 공장을 세워 미국 박사들이 설계한 것을 생산하는 이원화 전략이었다. 결과적으로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사진은 1980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삼성반도체연구소 전경. [삼성전자 제공]

    湖巖은 半導體 事業을 始作하면서 美國에 있는 韓國人 科學者들에 注目했다. 韓國에서 사람을 求할 수 없던 狀況에서 美國에 滯留하던 高級 頭腦를 모아 硏究所를 만들고, 韓國에 工場을 세워 美國 博士들이 設計한 것을 生産하는 二元化 戰略이었다. 結果的으로 매우 現實的이고 지혜로운 選擇이었다. 寫眞은 1980年 美國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三星半導體硏究所 前景. [三星電子 提供]

    李 前 副會長은 隱退 以後는 勿論 現業에 있을 때도 業務的인 理由 外에는 言論 露出이 적었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默默하게 일하는 性格이다. 그러다보니 지나온 履歷에 비해 자취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三星맨들의 傳言이다.

    서울 江南에 있는 그의 事務室에 들어서면 李健熙 會長 얼굴을 鐵製로 만든 彫刻 作品이 于先 눈에 들어온다. 三星의 初期 半導體 歷史와 李健熙 會長의 業績에 對한 質問으로 對話를 始作했지만 그는 먼저 前提할 것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머리를 꺼냈다.

    “李健熙 會長은 團地 半導體 事業을 성공시켰다 程度로 意味 附與를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세 가지 側面에서 故人의 業績을 봅니다. ①게임의 룰을 完全히 바꿨다. 卽 以前과는 完全히 다른 판을 만들었다는 點에서 ‘眞正한 게임 체인저’였다고 생각합니다. ②單純한 ‘革新’ 程度가 아니라 트랜스포메이션, 다시 말해 굼벵이를 나비로 만들 程度로 以前에는 없던 形態의 進化와 革新을 이룬 企業人이었다는 겁니다. ③內需 市場만 바라보던 全 産業의 地形圖를 名實相符 글로벌 스탠더드로 擴張한 뒤 우리도 世界 1等이 될 수 있음을 行動으로 보여줬습니다.

    저는 인텔 創業者 앤디 그로브를 冊으로 工夫한 사람입니다. 三星이 인텔과 ‘맞짱’을 뜨고 더 나아가 인텔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自體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半導體 業界에서 인텔은 거의 神(神)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런데 李健熙 會長 德分에 아, 인텔도 神이 아니구나, 우리도 神이 될 수 있구나 하는 自信感을 갖게 됐습니다. 只今 韓國의 유니콘 企業들도 그런 精神이 있었기에 可能했던 것 아닐까요. 李健熙 會長 前에는 國內 市場만 보고 싸우는 거였지만 以後는 企業人들의 視線이 글로벌 컴퍼니가 되자는 쪽으로 擴張되었으니까요.

    湖巖께서 ‘半導體는 産業의 쌀’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時間이 좀 걸렸는데 이 過程에서 李健熙 會長의 役割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3年 歷史的인 ‘도쿄 宣言’을 하면서 그룹의 存亡을 걸고 事業을 始作했지만 湖巖은 數千億 赤字 나는 것만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이걸 키운 분이 바로 이 會長이지요.”

    그와 本格的인 對話를 始作했다.

    美國에서 韓國人 人材를 끌어 모으고 硏究所를 만드는 日부터 關與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當時 狀況을 좀 듣고 싶습니다.

    “半導體란 게 結局 技術力 싸움이니까 最高 中心地인 실리콘밸리에서 가져와야겠다는 게 湖巖의 決心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開發 據點을 만들고 博士級 硏究員들을 採用해서 나중에 이들을 韓國으로 옮기겠다는 構想이었던 거죠. 매우 賢明하고 現實的 아이디어였다고 봅니다.

    저는 先代會長 오더에 따라 실리콘밸리에 開發 據點 마련을 위한 初期 세팅을 하러 간 거였죠. 湖巖은 ‘第一 重要한 게 사람이다, 專門家를 찾아 모시라’는 特命을 내렸습니다. 于先 이임성 博士를 軸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오는 計劃을 세웠습니다.

    실리콘 밸리 서니베일에 머물면서 現地 調査에 들어갔는데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情報 用役會社와 大學 硏究所 等을 다니며 最新 技術 資料를 入手했고 다른 한 팀은 이 博士 等과 함께 事業計劃書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時間이 갈수록 自信感이 떨어지고 漠漠함만 들었습니다.”

    왜죠?

    “D램 技術이란 게 생각보다 훨씬 尖端이었습니다. 우리가 韓國에서 했던 생각이 얼마나 낡고 單純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자 덜컥 怯부터 났습니다. 國內에서 만들어간 報告書는 休紙조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始作해야 하는 狀況이었어요.”

    事務室에 美國 警察이 들이 닥쳤던 일도 있었다면서요.

    “낮에는 現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밤에는 서울로 報告하느라 거의 쉬지 못하는 狀況이었어요. ‘제발 잠 좀 잤으면’ 하는 생각이 懇切했습니다. 라면물이 끓는 동안 엎드려 쪽잠을 잤던 記憶도 있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地獄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程度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美國 警察이 들이닥쳐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24時間 事務室에 불이 켜져 있으니까 住民들이 무슨 痲藥 製造하는 사람들 같다고 申告한 거죠. 當時 실리콘밸리 타블로이드판 地域新聞에 ‘옐로우 인베이더(Yellow invader 黃色 侵入者)’라는 記事가 났을 程度였어요. 勿論 모두 無嫌疑로 풀려나왔지만요.

    어떻든 우리들은 앞으로 半導體 市場 狀況은 어떻게 될 것인지, 開發은 어떻게 할 것인지, 人力 採用은 어떻게 할 것인지 等等을 論議했죠. 마이크론, 샤프 社와 技術契約度 맺고요. 그러다 現地에서 理事 發令을 받게 됐습니다.”

    마침내 美國 팀은 ‘1983年 가을부터 韓國에 VLSI 量産 工場 建設에 着手하며 美國에는 硏究開發센터와 試製品 生産設備를 갖춘 現地法人을 設立한다’는 計劃을 세워 湖巖에게 報告했고 湖巖은 이를 卽刻 承認했다.

    李 前 副會長은 美國 現地에서 鬐興 半導體 工場 建設 總 責任者로 歸國하라는 指示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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