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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는 私學改革, 文은 檢察改革에 지나치게 올인”|新東亞

2022年 5 月號

“盧는 私學改革, 文은 檢察改革에 지나치게 올인”

民勞總 代辯人→孫鶴圭 補佐官→李在明 公約 設計…손낙구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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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2-04-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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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가난한 家長

    • “只今부터 나는 生計型 補佐官이다”

    • ‘작은 租稅國家’의 植民地的 起源

    • 不動産 價格 暴騰, 民心 離叛 불러

    • 민주당 主流의 認識, 民心과 間隙

    손낙구 보좌관이 4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손낙구 補佐官이 4月 6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홍태식 客員記者]

    1986年 京畿 안산시 半月工團 僞裝就業. 1999年 民主勞總 代辯人. 2004年 민주노총 政策局長. 2004年 沈想奵 民主勞動黨 議員 補佐官. 2008年 민주노동당 代辯人. 2011年 孫鶴圭 民主統合黨 代表 補佐官. 2022年 李在明 더불어民主黨 大選候補 選擧對策委員會 政策本部 副室長.

    손낙구 補佐官(金正浩 民主黨 議員室)은 1962年生이다. 그를 修飾하는 單語 사이에는 妙한 異質感이 있다. 特히 2011年을 起點으로 斷切線이 또렷하다. 그는 民主勞總 時節 文才(文才)를 갖춘 代辯人으로 名聲을 얻었다. 단병호 (當時) 委員長보다 有名하다는 말이 돌 程度였다. 그런 그가 巨大 政黨인 민주당으로 籍을 옮겼으니 그 自體로 뉴스거리였다.

    ‘勞動界 ‘입’ 손낙구, 孫鶴圭 브레인으로’(한겨레), ‘孫鶴圭 政策補佐官에 민주노총 出身 손낙구’(中央日報), ‘孫鶴圭로 間 손낙구’(경향신문), ‘進步 補佐官 任命…孫鶴圭 더 左로?’(매일경제), ‘孫鶴圭, 補佐官에 前 民主勞總 代辯人을 選任’(朝鮮日報), ‘孫鶴圭, 勞動界 ‘입’ 出身 孫 補佐官 拔擢’(韓國經濟).

    그에게는 愉快한 回顧가 아니다. 4月 6日 國會에서 만난 그는 過去를 淡淡히 되뇌었다.

    “20代 中盤에 勞動運動을 始作해 40代 後半을 進步政黨 一線에서 맞이했던 가난한 家長(家長)李 막다른 골목에서 穩全히 月給 받는 職業 中 하나를 選擇한 것이었어요. 只今 다시 돌아봐도 그 理由였죠. 또 심상정 議員과 끝까지 민주노동당 分黨을 막으려 애써 봤는데 잘 안됐잖아요. 事實上 민주노동당이 門 닫게 되면서 運動가로度 지쳤죠. 내 딴에는 그런 事情으로 就職한 건데, 言論에 記事가 많이 나서 心理的으로 宏壯히 힘들었어요.”



    2011年 6月 26日 박상훈 후마니타스 代表는 한겨레에 ‘손낙구의 選擇’이라는 칼럼을 썼다. 核心은 “그는 才能이 있는 사람이고 意志도 굳고 專門性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進步의 世界 안에서 삶을 維持할 方法을 찾긴 쉽지 않았다”는 거다. 손낙구가 말했다.

    “상훈이度 自己 나름에는 나를 생각해서 쓴 건데, 저는 힘들었어요. 말하자면 힘들고 부상당해서 運動을 더 못하고 後方으로 가는데, 막 關心을 받으니 힘들더라고요.(웃음).”

    ‘代表 없이 課稅 없다’

    事實 그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契機는 따로 있다. 그 얘기부터 해보자. 그는 2008年 ‘不動産 階級社會’, 2010年 ‘大韓民國 政治社會 指導’를 냈다. 最近에는 ‘租稅 없는 民主主義의 起源’(以下 ‘起源’)을 出刊했다. 脚註만 1000個가 넘는 大作이다. 읽다 보면 經濟 規模에 비해 租稅 負擔率이 낮은 ‘작은 租稅國家’의 根本 바탕이 日帝强占期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2015年 건국대에 提出한 博士學位 論文 ‘日帝下 稅務官署의 設置와 運營’李 뼈대다.

    勞動運動家가 租稅 問題를 파고드는 歷史學者가 됐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졌던 問題意識은 民主化가 됐는데 普通 사람들한테 切迫한 勞動·住居·福祉 等 社會經濟的 問題가 왜 民主主義에서 重要한 問題로 다루어지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美國 市民革命 때 슬로건이 ‘代表 없이 課稅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예요. 英國·프랑스의 市民革命도 類似한 性格을 지녔죠. 卽 租稅 問題를 契機로 民主主義가 成立하고, 그 뒤에는 租稅의 支出이라 할 수 있는 福祉가 民主主義의 中心 議題가 됩니다. 租稅로 韓國 近代國家 形成 過程을 살펴보면 韓國 民主主義의 구멍을 들여다볼 수 있고 代案도 摸索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硏究를 始作했어요.”

    勞動運動家로서 가졌던 關心이 이어지는데, 다만 렌즈가 달라진 거네요.

    “租稅로 民主主義를 들여다보면 實質的 內容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國會에 補佐官으로 들어와서 企劃財政委員會에도 있다 보니 苦悶이 깊어졌죠.”

    勞動運動을 했으니 최장집 고려대 名譽敎授가 提案한 ‘勞動 없는 民主主義’의 틀로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勞動 없는 民主主義’는 勞動이 重要한 議題로 안 다뤄지는 民主主義와 勞動者 階級을 基盤으로 하는 政黨이 없이 保守만의 獨占的인 政治 體制라는 두 가지 點을 問題 삼잖아요. 그러면 解答은 勞動者 階級 基盤 政治勢力을 만드는 거예요. 一見 너무나 正當한 얘기지만 現實的으로 우리 社會에서 너무 먼 길이에요. 제가 민주노동당 活動도 해봤잖아요. 勞動階級 基盤 政黨을 만들면 다 解決된다? 國會 와서 보니까 아닌 것 같은 거예요. ‘勞動 있는 民主主義’가 먼 後날 實現된다 해도 그 以前에 ‘租稅 있는 民主主義’를 實現하면 훨씬 나은 民主主義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했고요.”

    ‘技員’에는 所得調査委員會라는 植民 統治 機構가 紹介된다. 所得調査委員會는 프로이센과 日本에서 納稅者의 投票로 選出된 代表들이 獨立的으로 課稅標準을 決定할 수 있는 制度를 일컫는다. 日帝는 이를 植民地 朝鮮에 移植하면서 性格을 180度 바꿔버린다. 그는 ‘技員’에 “所得調査委員의 社會的 背景을 分析한 結果 이들의 役割은 ‘代表 없는 課稅’ 體制의 脆弱性을 補完하는 外形的 展示行政 裝置이자, 地域有力集團을 租稅行政의 파트너로 組織하여 制限的 範圍에서나마 同意의 基盤을 擴大하려는 手段이었다”고 썼다.

    所得調査委員會는 저를 包含해 一般 讀者들이 처음 接해 봤을 것 같습니다.

    “宏壯히 흥미로웠어요. 日本에서 이 制度를 直接選擧로 運營한 게 더 흥미로웠고요. 日本은 後發 資本主義 國家였는데도 近代民主主義 出發이라 할 수 있는 稅金納付者選擧體制를 일찍 始作해요.”

    勞動·住居·福祉가 政治의 中心에서 빠지다

    朝鮮總督은 立法 命令을 통해 個人所得稅를 導入했다. ‘技員’의 說明대로라면 “日本에서는 政府가 提出한 所得稅法 改正案이 帝國議會에서 番番이 否決되거나 大幅 修正된 데 비해 朝鮮에서는 納稅者의 同意나 修正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日帝가 남긴 ‘代表와 同意 없는 强壓的 課稅’라는 遺産은 納稅者에게 稅金을 收奪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歷史와 現實을 連結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韓國 社會에 存在하는 ‘稅金爆彈’ 談論과의 連結고리가 있을까요.

    “納稅者들이 直接選擧로 代表를 選出해 그들의 同意 아래 租稅를 어떻게 거둘지, 누구에게 더 많이 거둘지, 무엇을 위해 어디에 쓸지를 決定하는 게 民主主義의 胎生的 原理죠. 韓國 民主主義는 이 過程이 없던 거예요. 거기다 福祉 經驗도 一天하기 때문에 ‘强制的으로 뺏겼다’거나 ‘내봤자 나한테 돌아오느냐’는 意識이 澎湃할 수밖에 없죠. 同意가 안 되는 거죠.”

    ‘代表와 同意 없는 强壓的 課稅’는 市民의 自律性과 權利를 强調하는 自由主義가 韓國 現代史에 뿌리내리기 힘들게 한 고리처럼 느껴집니다.

    “政治學에 自由化 段階를 거쳐 民主化로 나아간다는 理論이 있어요. 自由化 段階의 核心은 政治的 反對의 自由가 社會的으로 定着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自由化가 없는 狀態에서 一擧에 普通選擧權이 女性에게까지 주어졌죠. 普通選擧權이 民主化의 指標거든요. 反面 유럽에서는 民主化 以前 自由化 段階 때 ‘租稅 있는 民主主義’가 成立해요. 卽 社會經濟的 問題가 民主主義의 核心 議題가 돼 있는 狀態에서 普遍的 選擧權의 民主化 段階로 넘어간 거죠.”

    社會經濟的 問題는 그가 世上을 理解하는 核心 키워드다. 그는 ‘技員’ 序文에 이렇게 썼다.

    “10年 民主政府도 거쳤는데 왜 普通 사람들의 삶은 如前히 고단하고 팍팍한가? 民主化運動 勢力 中 相當數가 政治를 변화시킬 수 있는 實質的 地位에도 올랐는데, 왜 平凡한 普通 사람들의 社會經濟的 問題에 對해 解決 能力이 脆弱하고 甚至於 무심하기까지 한 것일까.”

    小確幸과 ‘脫毛藥 健康保險 適用’

    손낙구 보좌관은 최근 ‘조세 없는 민주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읽다 보면 경제 규모에 비해 조세 부담률이 낮은 ‘작은 조세국가’의 근본 바탕이 일제강점기에 있음을 알게 된다. [후마니타스 제공]

    손낙구 補佐官은 最近 ‘租稅 없는 民主主義의 起源’을 出刊했다. 읽다 보면 經濟 規模에 비해 租稅 負擔率이 낮은 ‘작은 租稅國家’의 根本 바탕이 日帝强占期에 있음을 알게 된다. [후마니타스 提供]

    韓國 政治는 社會經濟的 問題와 關聯 없는 이슈로 對立하는 境遇가 많습니다.

    “民主政府 時期에도 DJ(김대중 前 大統領) 때는 南北關係, 노무현 政府 때 私學改革과 地域感情 問題, 文在寅 政府 때 檢察改革 等에 지나치게 올인(all in)韓 面이 있죠. 勿論 김대중 政府의 IMF(國際通貨基金) 經濟危機 克服이나 文在寅 政府의 코로나 防疫, 또 노무현·文在寅 政府 때 不動産 投機에 對한 對策 等 社會經濟的 이슈가 重要한 談論이 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意圖했다기보다는 狀況이 닥치니까 달라붙었던 거죠. 民主 政府가 努力해서 勞動·住居·福祉 等의 問題를 政治의 中心 議題로 삼아보지는 못했어요. 冷靜히 보면 그렇죠.”

    民主黨 政治人들에게 ‘檢察改革이 먹고사는 問題와 무슨 關聯이 있느냐’ 質問하면 ‘窮極的으로는 먹고사는 問題와 連結된다’는 答이 돌아옵니다.

    “民主化 勢力을 外形的으로 主導하고 惠澤도 더 많이 본 민주당의 主流, 卽 민주당 一群의 勢力이 가진 認識이 그런 쪽(社會經濟的 問題가 아닌 이슈)으로 조금 더 傾倒돼 있다고 생각해요. 民主化 以後에도 그쪽으로 자꾸 沒入하고 지나치게 힘을 集中하다보니 이쪽 領域(社會經濟的 問題)李 휑해지죠. 그러다 보니 民心과 間隙이 생기고 뒤에 가서는 자꾸 주저앉게 되고요. 民主化 勢力에 ‘租稅 없는 民主主義’에 對한 認識이 조금 不足했지 않나 싶어요. 그런 생각을 前부터도 했는데, 冊을 쓰면서 繼續 했죠.”

    그는 ‘技員’에 “韓國은 近代國家 形成 以來로 租稅를 둘러싸고 政治的 反對 勢力을 說得하거나 妥協하는 政治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며 “福祉制度 擴充을 위한 症勢를 說得하거나 妥協하려는 試圖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썼다.

    增稅 公論化에 關한 한 巨大 兩黨과 正義黨 等 어떤 政治勢力도 자유롭지 못한 셈 아닙니까.

    “민주노동당이나 正義黨은 兩黨만큼 權限을 갖지 못했으니 責任을 묻기 어렵죠. 政權을 번갈아가며 擔當했던 巨大 兩黨은 症勢에 對한 意欲을 거의 내지 못했고, 甚至於 減稅 基調까지 내건 責任이 있죠. 正義黨은 一旦 名分上으로는 민주노동당 때보다 症勢 談論을 積極的으로 내세우려 했죠. 그러나 議席數도 없고 權限을 갖지 못해 그 以上의 힘을 보탤 수가 없었죠.”

    복지는 主張하면서 症勢에 對한 公論化를 하지 않는 것은 韓國 進步의 限界 아닙니까.

    “政治가 積極的으로 福祉 談論을 形成하다 보면 이를 위해 財源이 必要하다는 얘기가 나올 겁니다. 福祉를 위한 症勢 協商이 議會에서 이뤄지고, 여기서 協約이 締結될 때 突破口가 생기죠. 그런데 韓國에서는 福祉 選擧가 繼續 안 이뤄지잖아요. 지난 大選도 不動産政策 失敗에 對한 選擧이자 文在寅 政府 審判 選擧가 되면서 福祉 選擧가 되지 못했죠.”

    지난 大選에서 李在明 민주당 候補는 ‘小確幸(小小하지만 確實한 幸福)’ 시리즈를 통해 生活密着型 公約을 大擧 내놨다. 이 中 ‘脫毛藥 健康保險 適用’ 公約이 代表的인 히트 아이템으로 꼽혔다. 손낙구는 小確幸 시리즈의 實務 責任者였다.

    增稅를 위한 說得에 自信이 없으니 劃期的 福祉國家 談論 代身 小確幸이라는 이름으로 자잘한 福祉政策을 통해 票를 얻으려는 것 아닙니까.

    “小確幸은 福祉國家 談論과 짝을 이루는 거예요. 福祉國家라는 큰 談論을 皮膚에 와닿는 細部的인 內容으로 具體化한 거죠. 그러니 福祉國家 談論과 小確幸을 對比시키는 건 適切치 않다고 봐요. 巨大 公約도 많이 냈어요. 20個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國民들이 거기에 옛날만큼 關心을 안 가져요. 記者들도 小確幸에 對해서만 取材하는 거예요.”

    이番에는 特히 公約 選擧가 아니었죠.

    “李在明 候補는 症勢를 說得할 福祉國家 構想 代身 基本所得과 國土保有稅를 내놨는데 말하자면 잘 안 먹혔죠. 다음 選擧에서는 福祉國家 解法으로 큰 그림을 提示하고, 이를 細部的으로 具體化하는 小確幸 公約을 짝지어 내놓으면 意味가 있겠죠.”

    不動産 6階級의 利害關係

    前作은 不動産 不平等을 다뤘고 이番 冊은 租稅를 다뤘습니다. 마침 민주당의 政權 再創出 失敗를 不動産 租稅 政策에 對한 抵抗이라고 解釋하는 視角이 있는데요.

    “‘不動産 階級社會’에서 不動産 6階級을 提案했어요. 1階級은 不動産 富者예요. 住宅 水路는 여러 채를 가진 階級이죠. 6階級은 地下房이나 考試院 같은 데 사는 사람들이에요. 暴騰하면 1階級은 資産이 늘어나니 無條件 좋죠. 2階級은 집을 한 채 가진 사람인데, (喜悲가) 갈리죠. 江南에 한 채 갖고 있는 사람은 좋고, 江北이나 시골에 한 채 갖고 있는 사람은 長期的으로 損害죠. 6階級은 價格이 暴騰하면 ‘폭亡’하죠. 不動産 價格이 暴騰해 6階級부터 2階級 多數까지 고통스러워진 게 民心 이반을 불러왔죠. (다만) 不動産 價格 上昇에 따른 租稅 抵抗은 部分的인 現象입니다. 거기에 該當하는 有權者는 少數죠. 그러나 不動産政策 失敗, 나아가 大多數 普通 사람이 가진 切迫한 삶의 問題를 政治에서 重要하게 다루지 못한 點에 對한 民心 離叛이 大選의 失敗로 이어진 건 事實이죠.”

    지난 大選에서 正義黨이 慘敗했습니다. 심상정 議員과 함께 일하기도 했는데, 어떤 所懷가 듭니까.

    “아쉽죠. 2010年에 ‘大韓民國 政治社會 指導’를 쓰면서 分析했을 때도 (當時) 민주노동당이 支持 基盤을 正確히 찾지 못한 狀態였어요. 正義黨도 그 狀態를 못 벗어나니 選擧 構圖에 따라 支持率의 浮沈이 甚해요. 민주당이 確實히 이기거나 確實히 질 것 같은 選擧에서는 (成跡이) 잘 나오죠. 有權者들이 未來 投資 槪念으로 票를 주니까요. 薄氷 構圖로 가면 有權者들이 進步政黨의 未來에 投資할 餘力이 없으니 支持率이 낮아져요. 어려운 條件에서 沈 議員이 進步政黨의 짐을 외롭게 여태까지 짊어져 왔고, 이番에도 苦生이 많았죠.”

    進步論客 홍세화 氏는 ‘신동아’ 2021年 1月號 인터뷰에서 民主化運動 世代(86世代)를 두고 “제대로 工夫를 한 것도 아니고 實際로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民主乾達”이라고 指稱했다.

    86世代의 知的 不誠實함을 指摘하는 홍세화 氏의 評價에 對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韓國 近現代史를 工夫해 보니 1920年代와 1980年代에 知識人 集團이 大擧 農民과 勞動者 속으로 들어가요. 世界史에서도 보기 드문 現象인데, 以後 30~40年의 時代精神을 만드는 값진 滋養分이 됩니다. 이것이 韓國 近代 100年의 값진 知性史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民衆 속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런 마음으로 韓國 社會에 對해 工夫한 사람들도 있죠. 洪 先生님이 指目한 一群의 對象이 있겠죠. 그러나 그들이 이 값진 知性史를 代辯할 수는 없다고 봐요.”

    밥벌이의 지겨움

    1월 19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강남구 업비트라운지에서 열린 가상자산 거래소 현장 간담회에 앞서 ‘이재명 소확행 공약 1호’를 NFT로 발행하는 시연을 하고 있다. [뉴스1]

    1月 19日 李在明 當時 더불어民主黨 大選候補가 서울 江南區 업비트라운지에서 열린 假想資産 去來所 現場 懇談會에 앞서 ‘李在明 小確幸 公約 1號’를 NFT로 發行하는 試演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는 學者型 達辯家다. 말을 듣다 보면 讀書의 넓이와 깊이가 느껴진다. 홍세화式 分類法을 빌리자면 ‘民主乾達’에서 가장 距離가 먼 民主化運動 世代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籍을 옮긴 뒤 大衆的으로 가장 뚜렷한 存在感을 發散한 때는 2012年이다. 그해 民主統合黨(現 民主黨) 大選 競選에 나선 손학규 候補의 슬로건이 ‘저녁이 있는 삶’이었는데, 그 企劃者가 손낙구다. 이때를 契機로 그는 민주당에 더 깊이 着近해 갔다.

    只今은 ‘민주노총 손낙구’보다 ‘民主黨 손낙구’가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勞動運動을 마무리한 지가 올해로 18年이 됐으니 ‘민주노총 손낙구’라는 表現은 자연스럽지 않은 게 當然하죠. 손학규 代表 補佐官을 始作하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한 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番째는 ‘只今부터 나는 生計型 補佐官이다. 穩全한 月給을 繼續 받는 게 매우 重要하다’는 것이었어요. 두 番째는 젊은 날 勞動運動을 選擇해 40代까지 보람 있게 했는데, 그 時間을 後悔하지 않을 狀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勞動運動韓 걸 後悔하면 내 人生 全體가 不幸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으려면 經濟的으로 더 狀況이 惡化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면 後悔해 버릴 거 아니에요? ‘뭐 한다고 勞動運動해서 末年이 이렇게 悲慘해지는 건가’ 생각할 수 있으니…. 민주당에 와서 그 두 가지는 나름 지켜왔고 現在까지는 그 앞의 삶을 後悔하지 않아요.”

    가장(家長)의 밥벌이는 神聖하면서도 고단한 일이다. “밥에는 對策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中) 손낙구는 낯선 政黨에서 고단한 밥벌이를 하는 속에서도 어떻게든 意味를 찾는다. 그가 가진 美德 같기도 하다.

    “生計로 왔지만 前에는 못 하던 걸 할 수 있게 되더군요. 민주노총에서는 組合員 力量을 갖고 大衆組織의 役割까지만 할 수 있었고, 민주노동당 때는 議員 10名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했는데, 민주당에 오니 議席도 많고 또 그때는 黨代表室에 있었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았죠. 當時 ‘協同組合 基本法’을 發議해 通過까지 됐는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있었으면 못 할 일이었죠.”

    11年 前에는 민주당에 入黨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黨員이 아닙니까.

    “生計를 위해 補佐官이 되는데 入黨을 必須的으로 해야 한다는 게 (理致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손 代表께도 說明했죠. ‘信念을 위해 민주당에 왔거나, 나중에 民主黨에서 國會議員 出馬할 計劃으로 온 게 아니라 就職을 위해 왔는데 入黨하는 것은 勞動運動을 함께 했던 同僚들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했죠. 손 代表가 ‘그럴 수 있겠구먼. 그렇게 해’라고 말씀하셔서 (入黨하지 않고) 그냥 있었어요. 그러다 雰圍氣가 變했어요. 國民의힘 系列 政黨과 激突이 심해지면서 入黨에 對해 以前보다 (基準이) 타이트해졌죠.”

    朝鮮勞動黨 黨員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는 “그런 건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過去 同志들에 對한 未安함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그가 入黨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契機가 생긴다. 現在 同志들에 對한 未安함이 주된 理由다.

    “補佐官이 當然職 代議員이 되는 거예요. ‘補佐官님 當然職 代議員 올립니다’ 하면 내가 ‘黨員이 아니야’ 說明해야 하고, 다른 親舊한테 하라고 付託해야 하고…. 그 뒤에는 補佐官 職責 黨費가 생기더라고요. 그러니 (入黨하지 않은 狀態로) 그렇게 있는 게 不便해지고 다른 保佐陣들한테 未安해졌죠. 繼續 補佐官으로 일하려면, 卽 生計를 위해 黨員이 돼야 하는 狀況이 됐죠.”

    生計를 위해 補佐官이 됐고 生計를 위해 黨員도 된 셈이네요.

    “元來도 (入黨이) 重要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무슨 朝鮮勞動黨 黨員이 되는 것도 아니고.(웃음).”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다시 밥벌이의 現場인 補佐官 冊床으로 돌아갔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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