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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平生 學人(學人), 善防(禪房) 아닌 ‘衆生의 日常’李 깨우치는 자리였다”|신동아

“나는 平生 學人(學人), 善防(禪房) 아닌 ‘衆生의 日常’李 깨우치는 자리였다”

[單獨인터뷰] 曹溪宗 새 宗正 盛波스님

  • 오명철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寺)우리글振興院 拷問

    omc1215@naver.com

    入力 2022-01-11 17: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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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年 12月 滿場一致로 任期 5年 宗正 推戴

    • 曹溪宗 神聖(神性) 象徵, 宗通(宗統) 承繼하는 最高 權威者

    • “曹溪宗 宗正은 禪僧 몫” 慣行 깬 創造的 轉換

    • 월하스님 恩師로 出家 後 通度寺 住持·方丈 歷任

    • 陶瓷三千佛·16萬 陶瓷大藏經 造成한 藝術家

    • “韓國 佛敎史에서 元曉(元曉), 磁場(慈藏) 다음에 오실 분”

    • 眞際 宗正 任期 끝나는 2022年 3月 任期 始作

    조계종 종정 성파스님. [박해윤 기자]

    曹溪宗 宗正 盛波스님. [박해윤 記者]

    慶南 梁山 영축산 通度寺 方丈(方丈) 盛波(性坡)스님이 韓國 佛敎 宗家 曹溪宗의 第15代 宗正(宗正)으로 推戴됐다.

    曹溪宗은 2021年 12月 13日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第15代 宗正 推戴會議를 열고 盛波스님을 滿場一致로 推戴했다. 이날 會議에는 元老會議 議員들과 曹溪宗 行政 首班 格인 總務院長, 國會議長 格인 中央宗會議長, 大法院長 格인 호계院長 等 22名이 參席했다. 2012年 推戴돼 한 次例 連任하며 10年間 在任한 現 宗正 眞際(眞際)스님 任期는 2022年 3月 25日 끝난다. 以後 盛波스님이 正式 就任한다. 韓國 佛敎 最高 精神的 指導者인 曹溪宗 宗正은 任期가 5年이고 한 次例 連任할 수 있다.

    曹溪宗 神聖의 象徵, 宗通 繼承하는 最高 權威者

    曹溪宗 終獻에 따르면 宗正은 宗團 神聖(神性)을 象徵하며 宗通(宗統)을 承繼하는 最高 權威와 地位를 갖는다. 1700年間 이어 내려오면서 韓國人의 삶과 思想에 큰 影響을 끼친 韓國 佛敎가 盛波스님을 새 宗正으로 모신 것은 韓國 佛敎 歷史上 가장 ‘破格的인 選擇’으로 記錄될 일이다. 盛波스님은 出家 後 通度寺 住持를 마치고 境內 영축산 자락 서운癌(瑞雲庵)에 註釋한 以來 그림과 글씨, 陶藝와 民畫, 옻漆과 染色 等에 穿鑿해 왔다. 佛敎界 一角에서는 그래서 “宗正스님이 되시기엔 參禪과 修行이 多少 不足한 것이 아니냐”는 意見도 있었던 게 事實이다.

    그러나 筆者는 韓國 佛敎界 代表的 修行僧이던 ‘無所有(無所有)’의 法廷(法頂)스님(1932∼2010)과 船員 首座들의 推仰과 尊敬을 받은 ‘无涯(無碍)道人’ 雪嶽 霧散(雪嶽 霧山)스님(1932∼2018)의 俗家(俗家) 弟子로서, 두 恩師 스님이 生前에 “通度寺 盛波스님은 如法(如法)하게 참 잘 사시는 분”이라고 높이 評價하는 말씀을 여러 番 들었다.

    성파스님(왼쪽)이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종정(宗正)에 추대된 2021년 12월 13일, 서울 조계사에서 종단의 주요 소임자 스님들이 삼배를 올리고 있다. [박해윤 기자]

    盛波스님(왼쪽)李 大韓佛敎曹溪宗 新任 宗正(宗正)에 推戴된 2021年 12月 13日, 서울 曹溪寺에서 宗團의 主要 소임자 스님들이 三拜를 올리고 있다. [박해윤 記者]

    盛波스님은 韓國 佛敎가 輩出한 수많은 ‘큰스님’ 系譜에서 가장 獨特한 遂行 方式으로 法臘(法臘)을 쌓은 분이다. 曹溪宗 統合 宗團 出帆 後 宗正을 지낸 招待 효봉(曉峰), 2代 淸潭(靑潭), 3·4代 고암(古庵), 5代 서옹(西翁), 6·7代 性徹(性徹), 8代 서암(西庵), 9代 월하(月下), 10代 혜암(慧菴), 11·12代 法典(法傳), 13·14代 眞際(眞際)스님들과는 결이 다르다. 過去 宗正스님들에게 傳說처럼 따라다닌 看話禪(看話禪) 隨行 履歷, 破格과 奇行, 傳說이나 일화가 盛波스님에게는 없다. 이분은 ‘藝術과 創作을 通한 遂行과 參禪’, ‘謙遜과 河心(下心)’으로 一貫한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盛波스님의 宗正 推戴는 韓國 佛敎의 創造的 轉換이자 엄청난 挑戰인 셈이다.



    佛敎界 革新派들은 “‘禪僧(禪僧)만 曹溪宗 宗正을 할 수 있다’는 외곬 信念을 가진 이가 曹溪宗 主流를 차지하는 現實에서 韓國 佛敎界가 盛波스님을 새 宗正으로 모신 것은 로마 가톨릭이 아르헨티나 出身 프란치스코 樞機卿을 敎皇으로 모신 것에 맞먹는 絶妙한 選擇”이라고 말한다.

    2021年 12月 13日 盛波스님이 曹溪宗 宗正으로 推戴됐다는 消息을 接하고 다음 날 서둘러 通度寺로 내려갔다. 筆者는 스님과 1991年 東亞日報 宗敎擔當 記者 時節부터 30年間 交分을 쌓았다. 當時 盛波스님은 通度寺 境內 17個 庵子 中 하나인 서운癌의 住持로 살면서 16萬 陶瓷大藏經 佛事를 하고 계셨다. 그때 여러 先輩 記者들과 함께 내려가 取材한 것이 因緣이 됐다. 1939年 7月 1日生으로, 2022年 基準 稅收 83歲 法臘 62年이신 스님은 例의 天眞佛(天眞佛) 또는 童子僧(童子僧) 같은 맑고 환한 얼굴로 筆者를 맞아주셨다.

    漢學과 外國語 獨學한 學僧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실에는 역대 방장들의 사진이 모셔져있다. 왼쪽부터 경봉 성해 구하 월하 스님.

    영축총림 通度寺 方丈室에는 歷代 方丈들의 寫眞이 모셔져있다. 왼쪽부터 경봉 性海 九夏 월하 스님.

    - 于先 減縮드립니다. 佛門(佛門)에 들어오신 以來 宗團 最高 자리에 오르겠다는 생각이나 欲心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이고, 무슨…. 중노릇이나 올바르게 하면 됐지, 駐지니 房長이니 宗正 같은 자리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佛敎를 뜯어고치겠다거나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巨創한 抱負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時節 因緣이 있어 宗團 元老들과 堤防 僧侶, 信徒들이 제가 敢히 꿈도 꿔본 적이 없는 높은 자리에 저를 앉히는 것을 보면서 부처님의 加被(加被)를 느낍니다. 이제껏 그래왔듯 宗正 職責도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盛波스님은 參禪과 隨行, 經典과 學問 가운데 參禪을 最優先으로 치는 曹溪宗의 ‘禪僧(禪僧)’ 系譜를 代表하는 분은 아니다. 하지만 1998年 鳳巖寺 太古船員 安居(安居) 以來 40餘 安居를 姓만(盛滿)한 隨行 履歷을 갖고 있다. 2000年 4月 그가 住持로 있던 서운癌에 武威船員(無爲禪院)을 연 데 이어 通度寺 方丈 就任 後에도 영축산 자락에 寶光船員(普光禪院)을 新築 開園했다. 獨學으로 中國語와 日本語를 깨쳐 水準 높은 對話가 可能하며, 漢詩를 짓고 草書를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는 水準의 漢學 實力도 갖고 있다. 하지만 自身은 이런 實力을 全혀 내세우지 않는다.

    - 單刀直入的으로 묻겠습니다. 왜 出嫁하시게 됐습니까?

    “慶南 陜川 海印寺 隣近에서 中農의 4男妹 中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初等學校를 마치고 中學校에 進學하지 않은 채 書堂에 들어가 儒敎 經典을 배웠는데 途中에 發心(發心)했습니다. 遺書(儒書)를 깊이 읽으면 佛敎에 入門하게 되는 境遇가 있습니다. 그래서 工夫가 깊은 儒學者들이 佛門(佛門)에 들어오는 事例가 많습니다. 出家 後 江原道 쪽 절을 巡歷하다가 通度寺에서 월하(月下)스님을 뵙고 1960年 가을 沙彌戒를 받았습니다. 比丘戒를 받은 건 10年 뒤인 1970年 4月입니다.”

    스님의 俗名은 조봉주(曺鳳周). 盛波(性坡)는 法名이고, 法號는 重峯(中峰)이다. 스님은 그동안 절집 時間表에 따라 午前 3時 半 일어나 參禪과 禮佛로 하루 日課를 始作했다. 5時 半 아침 供養을 마치고 暫時 休息을 取한 뒤 8時頃 서운癌 隣近 山中에 있는 作業室로 向한다. 四重(寺中)에 自身이 參席해야 하는 行事가 없는 한 허름한 倉庫 같은 그곳에서 저녁 무렵까지 글씨 쓰고, 그림 그리고, 陶瓷器 굽고, 옻漆하고, 染色하고, 다음 作品을 構想하며 하루를 보낸다. 國內外에서 특별한 손님이 通度寺를 訪問하는 境遇에는 方丈室로 내려가 맞는다. 이때 3000倍는커녕 108倍도 要求하지 않는다. 佛子가 아닌 境遇에는 ‘절 한 番만 하라’고 하거나 맞절을 한다.

    “중노릇 하나만 옳게 하면 된다”

    - 恩師이신 월하 宗正스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으며, 出家 以後 줄곧 지켜온 遂行 原則은 무엇입니까?

    “오늘(2021年 12月 14日·陰曆 11月 12日)李 마침 恩師스님 祭祀날입니다. 宗正에 推戴되고 曹溪寺 大雄殿에서 古佛式(告佛式)을 가진 뒤 不足한 저를 宗正으로 推戴해 준 元老 스님들에게 人事도 제대로 못 드린 채 서둘러 밤길을 달려 通度寺로 내려왔습니다. 1962年 大韓佛敎 曹溪宗이 統合 宗團으로 出帆한 以來 出家로 因緣을 맺은 스승과 弟子가 둘 다 宗正이 된 것은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큰 榮光이 아닐 수 없습니다. 仁慈하고 寡默했지만 遂行에서만큼은 斷乎했던 恩師스님 가르침은 한마디로 ‘중노릇 하나만 옳게 하면 된다’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노릇을 제대로 하고자 하루하루 最善을 다했습니다. ‘日常(日常)에 道(道)가 있고, 天地四方이 學校’라는 것이 제 깨달음이고, ‘民衆이 스승’이라는 것이 제 神心(信心)입니다.”

    盛波스님의 藝術的 探索은 곧 그의 構圖 旅程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傳統 甕器 5000餘 個에다 國産 콩으로 메주와 간醬을 담아 自給自足으로 절과 船員 살림을 解決하고, 不辭(佛事) 費用을 充當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卽 ‘하루 일하지 않으면 그날은 먹지 않는다’는 不可(佛家)의 가르침을 일찌감치 實踐했다.

    通度寺는 開山祖(開山祖)인 新羅 高僧 慈藏律師(慈藏律師)가 唐나라에서 모셔온 부처님 眞身舍利(眞身舍利)와 金襴袈裟(金?袈裟)를 保有한 佛寶종찰(佛寶宗刹)이다. 절 全體가 유네스코 登載 世界文化遺産이기도 하다. 韓國 佛敎에서는 通度寺를 비롯해 부처님 八萬四千法門을 간직한 法寶(法寶)종찰 海印寺, 16國師를 輩出한 僧寶(僧寶)종찰 松廣寺를 三寶寺刹이라 한다. 이 中에서도 通度寺는 自他가 認定하는 ‘佛家의 宗家이며 나라의 큰 節(佛之宗家 佛之大刹)’이다.

    通度寺 殿閣(殿閣) 大部分은 最小 100年 以上 된 遺書 깊은 木造建物이다. 2022年 改刪(開山) 1377年을 맞았으며, 信徒 數가 10萬 名에 이른다. 또 國內外에서 年間 300萬 名의 巡禮者가 찾아온다. 名品 庵子 磁場癌(慈藏庵) 等 17個 庵子를 거느리고 있으며, 常住하는 스님만 200餘 名이 넘는 巨刹(巨刹)이다. 海外 文化藝術 知識人이나 國內 駐在 外國 大使들은 通度寺를 訪問하면 韓國 傳統 査察의 빼어난 風光과 深奧한 位置 選定 및 空間 配置, 親環境的 建築 技術에 感歎을 禁치 못한다.

    盛波스님이 타고난 文化藝術的 才能을 갖고 있거나 出家 後 바로 藝術 世界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스님은 出家 初期 禪院에서 參禪 修行에 精進했다. 그의 運命이 바뀐 것은 1980年 新軍部에 依해 發生한 10·27 法難(法難) 以後부터다. 이 일로 當時 曹溪宗 살림을 맡던 스님들이 大擧 一線에서 밀려나고 盛波스님을 비롯한 禪房 首座들이 空白을 채우게 됐다. 盛波스님은 曹溪宗 總務院 要職인 社會敎務部長과 通度寺 住持 等을 마쳤다. 任期를 마쳤을 때 나이는 40臺로, 새로운 所任을 堪當하기에는 經歷이 있으나 뒷房으로 물러나기엔 이른 年輩였다. 盛波스님은 그때 새 길을 摸索했다. 스님은 한 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이 時期를 ‘출출가(出出家)’라고 表現했다. 첫 出家 當時의 마음을 잊지 않고, 이제껏 가지 않은 새 길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또 다른 出嫁를 했다는 意味로 새겨진다.

    “발길 닿은 곳이 곧 遂行處요, 學校”

    성파스님이 경남 양산 통도사 서운암 인근 산중 작업실에서 휘호를 쓰고 있다. 한국 수묵화 거장 소산 박대성 화백은 성파스님 글씨를 ‘성파체’로 칭하며 “스님은 마음과 붓과 종이가 하나 되는 경지를 아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서예가”라고 평했다. [오명철 제공]

    盛波스님이 慶南 梁山 通度寺 서운癌 隣近 山中 作業室에서 揮毫를 쓰고 있다. 韓國 水墨畫 巨匠 所産 박대성 畫伯은 盛波스님 글씨를 ‘性破砌’로 稱하며 “스님은 마음과 붓과 종이가 하나 되는 境地를 아는 當代 最高 水準의 書藝家”라고 評했다. [오명철 提供]

    성파 스님이 평소 작품을 위해 쓰는 붓들.

    盛波 스님이 平素 作品을 위해 쓰는 붓들.

    通度寺 庵子인 서운癌에 註釋한 스님은 傳統 甕器 蒐集과 된醬·간醬 담그기부터 始作해 옻漆, 陶瓷器 및 韓紙 製作 等으로 關心 領域을 넓혀나갔다. 우리 固有 문학인 時調가 잊혀가는 現實이 안타까워 1984年 ‘盛波 時調文學賞’을 制定하기도 했다. 以後 봄에는 全國 時調 白日場을 열고, 가을에는 旣成 時調 詩人에게 賞을 줘 激勵했다. 盛波스님은 그 自身이 뛰어난 選試와 時調 詩人이기도 하다.

    - 스님이 남다른 方式으로 절을 꾸려가고, 우리 傳統 飮食과 文化藝術에 功力을 쏟을 때 佛敎界 안팎에서 “念佛과 參禪은 안 하고 절집에서 된醬과 간醬을 팔며 쓸데없는 趣味生活이나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 걸로 압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全혀 介意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名人과 高手가 계시는 곳은 不遠千里 찾아가 배움을 請했습니다. 내 발길 닿은 곳이 바로 遂行處(修行處)이고 學校였습니다. 가방끈이 짧으니 젊을 때부터 ‘宇宙 無限 大學生’이라고 自處하며 國內外 가리지 않고 스승을 찾아다녔지요. 나는 始作도 學人(學人)이고, 마치는 것도 學人인 ‘平生學人(平生學人)’이 될 겁니다. 善防(禪房)이 아니라 ‘衆生의 日常’이 나의 깨우치는 자리였습니다.”

    - 그렇다면 스님의 깨우침은 무엇입니까

    “그건 말로 하는 게 아니고, 日常을 통해 보여줘야 합니다. 道를 깨우쳤다고 하는 어른도 계시는데, 혼자만 알고 깨우치고 즐기면 무슨 所用이 있겠습니까. 다른 例를 들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一生을 보면 압니다. 부처님은 平生 千村萬落을 누비며 때로는 같이 웃고 같이 울었습니다. 이를 大慈大悲라고 합니다. 佛敎의 核心은 大慈大悲의 實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修行者는 반드시 모든 功德을 衆生과 나눠야 합니다. 이웃과 나누지 않는 道는 道가 아닙니다.”

    스님은 이 대목에서 異例的으로 斷乎하게 말씀했다. 스님의 斷乎함을 지켜보면서 몇 해 前 江原道 有名 寺刹 元老스님으로부터 “韓國 佛敎는 깨우쳤다는 老長 스님들의 ‘甲질’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던 記憶이 떠올랐다.

    소산 박대성 화백이 성파스님 종정 추대를 축하하며 제작한 작품. 제목은 원융무애(圓融無礙)다.

    蘇産 박대성 畫伯이 盛波스님 宗正 推戴를 祝賀하며 製作한 作品. 題目은 圓融無礙(圓融無?)다.

    盛波스님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은 사람들은 스님의 수많은 創作 藝術品을 “재주가 若干 있는 閑暇하고 仁慈한 큰 절 권승(權僧)의 여기(餘技)” 程度로 생각하는 傾向이 있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錯覺이거나 無知의 所産이다. 韓國 水墨畫 巨匠인 所産 박대성(77) 畫伯 얘기다.

    “盛波스님이 이룬 16萬 陶瓷大藏經, 옻漆과 天然染色, 民畫와 傳統 韓紙(韓紙) 復元 및 工藝, 傳統 甕器 蒐集과 된醬·간醬 담그기, 傳統 韓紙(韓紙) 復元 等은 民衆의 삶과 藝術을 선(禪)의 境地로 끌어올린 偉大한 構圖 行脚이다. 내 이름을 걸고 自身 있게 말하건대, 盛波스님은 절집에서 일찌감치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富貴榮華를 누리지 않고 民衆 속으로 들어갔다. 民衆의 藝術과 우리 美風良俗을 끌어내 繼承 發展했다. 또 民衆의 言語로 말하고 하심(下心)으로 衆生 속으로 들어가셨다. 韓國 佛敎史에서 元曉(元曉·617~686), 磁場(慈藏·590年~658) 다음에 오실 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所産은 特히 盛波스님 글씨를 ‘性破砌’로 稱하면서 “盛波스님은 마음과 붓과 종이가 하나 되는 境地를 아는 當代 最高 水準의 書藝家”라고 높이 評價했다.

    韓國 佛敎美術의 새 境地를 開拓해가고 있는 光州 無各司 住持 청학스님度 한 대목 거든다.

    “오래 前 프랑스 파리 吉祥紗 開院을 準備하던 時節이었다. 갑자기 乘用車 한 臺가 절 앞에 멈추기에 疑訝했는데 盛波스님이 내리시더라. 고명은 들었지만 平素 親分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절집 人事를 나누고 德談을 들었다. 스님을 모시고 온 분이 ‘파리에서 열리는 世界的인 패션쇼에 最高 아티스트이자 VVIP로 招待를 받아 오신 것’이라고 해서 그런가 했다. 그런데 며칠 뒤 節에 나오는 韓國 留學生들이 盛波스님과 韓國 傳統文化에 關한 記事가 프랑스 權威紙 르몽드에 大書特筆 됐다며 ‘韓國人으로서 自負心을 느낀다’고 하더라. 나중에 들어보니 르몽드 記者가 韓國에 取材를 왔다가 盛波스님의 藝術 世界와 隨行 履歷에 魅了돼 며칠을 通度寺에서 지내면서 샅샅이 取材를 해 特輯記事를 실었다고 했다. 國內에서는 사람들이 盛波스님 藝術 世界를 잘 모르던 時節인데, 藝術 都市 파리에서 열리는 世界的인 패션쇼에 VVIP로 招待되고, 프랑스 權威紙에 크게 紹介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韓國 文化藝術界 뛰어난 鑑識眼(鑑識眼) 中 한 名인 정양모(88) 前 국립중앙박물관長은 “盛波스님이 修行僧이 아니었다면 偉大한 藝術家나 名匠 名人이 되셨을 분”이라고 했다. 鄭 前 館長은 “오래前 盛波스님 作業 空間을 訪問했을 때 素朴하고 儉素한 모습에 큰 感銘을 받았다”면서 “多樣한 分野에 걸쳐 너무 많은 作品을 하시는 것이 念慮돼 作品을 選別해 드리면서 ‘아주 좋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까운 이들에게 주시라’고 했더니 그대로 實踐하셨다”고 傳했다.

    “修行者에게는 오늘이 있을 뿐 來日은 없다”

    최근 통도사를 내방해 성파 스님을 알현한 사이먼 스미스 전 주한영국대사 부부.

    最近 通度寺를 來訪해 盛波 스님을 謁見한 사이먼 스미스 前 駐韓英國大使 夫婦.

    女性 最初로 週(駐)英國 大使를 지낸 박은하 釜山市 國際關係大使와 金怨讐 前 유엔 事務次長 夫婦는 두 달餘 前 通度寺 迎賓館 格인 弗素원(佛笑院)에서 머물며 1泊 2日間 通度寺 곳곳을 둘러봤다. 盛波스님은 이들을 接見하며 親筆 揮毫와 直接 만든 스카프를 膳物했다. 朴 大使는 “盛波스님이 曹溪宗 宗正 자리에 오르신 것은 英國으로 치면 캔터베리 大主敎가 되신 것이나 다름없는 傾斜다. 스님이 韓國 佛敎契뿐 아니라 大韓民國 全體의 ‘精神的 支柱이자 스승’이 되신 것”이라고 意味를 附與했다.

    3年餘 동안 韓國에서 勤務하고 2022年 1月 本國으로 돌아가는 사이몬 스미스 駐韓英國大使 夫婦도 2021年 11月 韓英協會 會員 25名과 함께 通度寺를 訪問했다. 이 모임 會長을 맡고 있는 민선식 시사영어사 會長은 “大使 夫婦가 韓國 傳統 査察의 魅力과 深奧한 空間 配置, 盛波스님의 藝術的 眼目과 疏脫함에 깊은 感動을 받았다”고 傳했다.

    盛波스님 法語는 잔잔하고 平凡하지만 깊이가 있다. 어렵고 難解한 法文을 하자고 들면 當代 最高 善知識(善知識)처럼 할 수 있겠으나, 大衆 눈높이에 맞춰 누구나 알아듣고 한두 대목은 記憶할 수 있도록 쉽고 平易한 口語體(口語體) 法文을 하신다. 또 盛波스님은 다른 高僧들과 달리 法語와 法文을 모두 直接 作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通度寺 方丈으로서 辛丑年 冬安居 때 내린 決濟 法語 ‘일 마친 大丈夫의 길’을 보자.

    “목숨을 아끼지 말고 조사의 公安을 參究하되 來日을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修行者에게는 오늘이 있을 뿐 來日은 없다. 來日을 기다리는 者는 泄瀉 彌勒이 涅槃하더라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사람 몸 받았을 때 一大事를 마쳐야 한다. 出家者로 今生에 이 일을 마치지 못하면 市銀(施恩)을 갚지 못한 罪로 地獄에 떨어질 것이니 힘쓰고 또 힘쓸지어다.”

    2021年 11月 通度寺에서 내는 ‘月刊 通度地’에 보낸 法文은 더욱 알기 쉽다. 하지만 奧妙하다.

    “山에 올라가 보지 않고는 다리 힘을 모르듯이 물의 水深을 재지 않고는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遂行精進을 直接 經驗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天地 差異입니다. 革凡聖性(革凡成聖)이라! 凡夫를 바꿔서 成人이 되는 것이라, 衆生이 따로 없고 成佛이 따로 없습니다. 衆生이 成佛하면 部處입니다. 忍苦의 遂行 過程을 겪고 훌륭한 結果를 이룬다면 그가 바로 部處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과 모친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왼쪽)이 2021년 11월 2일 경남 양산 통도사를 방문해 주지 현문스님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통도사 제공]

    李在鎔 三星電子 副會長(오른쪽)과 母親 홍라희 前 리움美術館長(왼쪽)李 2021年 11月 2日 慶南 梁山 通度寺를 訪問해 주지 玄文스님과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通度寺 提供]

    2021年 11月 初 李在鎔 三星電子 副會長과 母親 홍라희 前 리움美術館長이 通度寺를 訪問했다. 두 사람은 方丈 盛波스님과 주지 玄文스님을 親見하고 茶啖을 나눴으며, 16萬 陶瓷대장경을 모신 藏經閣, 玄文스님이 註釋하고 있는 磁場癌과 다실(茶室) 等을 두루 둘러보며 感歎을 禁치 못했다. 그런데 이 帽子가 무슨 因緣으로 通度寺에 찾아와 盛波스님과 玄文스님을 親見하고 寺中을 둘러보고 간 걸까?

    通度寺와 三星 高位 關係者들을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2021年 가을, 大統領 夫人 金正淑 女史가 大統領의 海外巡訪 時期 通度寺에 들렀다. 文 大統領 夫婦가 退任 後 移徙할 目的으로 짓는 私邸가 通度寺 隣近에 있다. 그 工事 現場을 둘러본 뒤 通度寺에 들러 方丈스님과 住持스님을 만난 것이다. 이 자리에서 盛波스님은 金正淑 女史에게 “이제 그만 됐으니 아무런 條件 없이 李在鎔 副會長을 釋放해 나라 經濟를 살리고 民心을 收拾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大統領께서 歸國하시면 꼭 이 말씀을 傳해주십시오”라고 當付한 것으로 알려졌다. 金正淑 女史는 “大統領이 돌아오시는 대로 ‘큰스님’ 말씀을 꼭 傳達해 올리겠다”고 和答한 것으로 傳해진다.

    - 마지막으로, 어떤 覺悟로 宗正의 자리를 堪當해 내시겠습니까?

    “이제껏 살아온 그대로일 겁니다. 중노릇을 옳게 하려고 全力을 다해 온 것처럼 宗正 노릇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 熱과 誠을 다하겠습니다. 절집 堤防 스님들과 佛者들이 계셔서 決코 외롭지 않은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분들과 ‘더불어 같이’ 가고 싶습니다.”

    韓國 佛敎는 悠久한 歷史 동안 韓國人의 精神과 意識은 勿論 生活을 支配해 왔다. 曹溪宗 宗正은 佛敎界에서 犯接할 수 없는 權威와 地位를 누려왔다. 하지만 몇몇 超人的인 遂行과 法力을 가진 큰스님의 ‘幕行幕式(莫行莫食)’과 ‘無愛行(無碍行)’李 깨우침과 成佛의 證票인 것처럼 여기는 風土가 韓國 佛敎界를 支配하면서 弊害를 남긴 것도 事實이다. “중노릇 하나만 옳게 하면 그게 바로 遂行이요 成佛”이라는 마음으로 淸淨比丘로 一貫하면서 오직 韓國 傳統 藝術과 民衆 生活 復元·再創造·發展에 勇猛精進(勇猛精進)해 온 盛波 새 宗正 스님에게 韓國 佛敎界와 社會 全體가 類달리 큰 期待를 걸고 있는 理由다. 曹溪宗 總務院長 遠行스님은 “貴하고 좋은 어른이 滿場一致로 새 宗正으로 推戴되셨다. 熱과 誠을 다해 잘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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