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回 移住民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移住民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發刊일 2022年 1月 18日
孫子만은 ‘工場 일’ 안 하는 게 마지막 所願이다.
26年을 熱心히 살아도 未登錄이 代물림된다.
移住民 3代 家族에게 韓國은 사다리 없는 곳이다.
이들은 사다리를 찾으려 奮鬪한다.
“熱心히 工夫해서 좋은 大學에 가서 저에게 맞는 科를 찾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安定的인 會社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지난해 12月 어느 날, 京畿 安山市 先일中學校. 一般系 高等學校 願書를 쓴 뒤 進路 相談을 하던 허가이 이고리(16)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졌다. 平素 愉快하고 自信感 넘치는 모습과 달랐다. 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高麗人 4歲다. Asset 1 러시아語와 韓國語에 能通한 長點을 살려 通譯家를 꿈꾼다. 目標 大學도 定했다. 韓國外大나 서울대 露語路文學科. 러시아語를 잊지 않으려 집에선 엄마와 러시아語로 對話한다. 마우스 아이콘이 있는 文章 Asset 1 을 클릭하면 追加 說明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꿈도 外三寸을 생각하면 사그라든다. 外三寸은 우즈베키스탄 現地 大學에서 韓國語學科를 나와 韓國에서 러시아語 通譯士로 活動했다. 하지만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에 外國人 入國이 急減하며 일감이 끊겼다. 只今 宅配 配送을 하고 있다. ‘大學을 나와도 한 職場에서 安定的으로 일하는 게 어려운데 卒業狀조차 없으면… 나도 三寸처럼 될 수 있겠구나.’ 이고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韓國의 좋은 大學에 가리라고 마음먹는다. “할 수 있어. 러시아語를 完璧하게 하잖아. 러시아와 中央아시아, 地球의 6分의 1을 네 땅으로 만들 수 있어.” 相談을 해주던 임미은 先生님은 이고리를 激勵했다. 하지만 이고리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고리가 果然 좋은 大學에 가 일감 끊길 걱정 없는 職場에 就職할 수 있을까.
안산시에서 主催한 줄넘기大會에서 받은 賞狀을 들고 있는 이고리. 이고리 提供

이고리 같은 海外同胞 子女는 特性化高 進學을 選好하는 便이다. 經濟的으로 넉넉하지 않은 境遇가 많아서다. 特性化高 卒業 뒤엔 바로 就業 前線에 뛰어들 수 있다. 韓國語 實力이 不足해 實習 中心인 特性化高를 擇하는 아이들도 있다. 外國에서 살다가 韓國에 온 中道入國 靑少年들이 主로 그렇다. 선일中에서도 지난해 移住背景 學生 52名 中 24名은 特性化高를 志望했다. 特性化高 志望生은 例年보다 줄긴 했다. 京畿道 內 一般高度 學費가 無償이 됐기 때문이다. 經濟的 負擔 때문에 망설이던 移住背景 學生들도 一般高에 志願하게 됐다.

“移住背景 아이들은 高等學校 登下校 交通費조차 負擔으로 느끼는 境遇가 많아요. 學校 工夫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不透明하죠. 一旦 高等學校만 卒業하면 外國人銓衡으로 大學 가긴 比較的 수월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그 以上의 努力이 必要해요.”(임미은 先生님) 이고리는 그럼에도 一般高에 가기로 일찌감치 決心을 굳혔다. 이고리가 1志望으로 쓴 高等學校는 中上位圈 成跡의 學生들이 志望하는 學校다. 事實 擔任先生님은 다른 學校를 推薦했었다. 이고리가 內申에서 不利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學習 雰圍氣가 좋은 環境에서 工夫해 願하는 大學에 合格하기 위해서다. 이고리는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大學에 가고 싶다. 엄마 金 옥사나 氏(42)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엄마는 이고리에게 늘 말한다. “너는 힘든 일 하며 살지 말아라.” 擔任인 將軍휘 先生님은 이고리의 타고난 言語 感覺과 승부욕을 稱讚했다. 언젠가 그 資質이 빛을 發할 것으로 믿는다. “韓國도 單一民族國家에서 多人種國家로 變化하고 있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겠죠. 이고리의 二重言語 能力, 活潑한 性格은 先入見 없는 社會를 만드는 데 寄與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4年에 걸친 ‘韓國人 되기’
이고리는 세 살 되던 해인 2009年 엄마를 따라 韓國에 왔다. 韓國에서 올해 13年째를 맞는다. 家族들과는 러시아語를 使用한다. 韓國 生活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러시아語가 語塞하다. 家族들이 놀릴 程度다. “이고리, 러시아 發音 語塞해졌네.” 이고리는 겉보기엔 韓國人이지만 法的 韓國人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出身 엄마는 海外同胞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로 韓國에 들어온 뒤 韓國人 아버지와 再婚했다. Asset 1 엄마가 再婚한 뒤 韓國에서 낳은 동생도 韓國人이다. “前 우리 집에서 돌 같은 存在였어요. 아버지와 동생은 韓國人이죠. 엄마도 同胞비자가 있어 韓國人이나 마찬가지고요. 저만 外國人이었죠.”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고리 같은 中央아시아 出身 高麗人 4世는 滯留 資格이 不安定했다. 經濟 活動을 할 수 있는 F4비자를 받으려면 韓國 高等學校를 卒業하거나 大學을 나와야 했다. 이고리는 이 條件을 채우지 못해 10年 넘게 어머니의 同伴 家族 資格(F1婢子)으로 韓國에 머물렀다. 中學校에 入學한 뒤 便宜店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F1비자는 就業 等 經濟 活動이 禁止되기 때문이다. Asset 1 이고리는 1年 마다 出入國事務所에 가서 비자를 更新해야 했다. 그러던 그에게 올해 膳物같이 滯留 資格이 주어졌다. 法務部가 이달 3日부터 國內 初·中·高校를 다니는 中國 및 高麗人 同胞의 未成年 子女들에게도 F4비자를 附與하기로 했다. F4 비자로는 이고리가 願하던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 滯留 期間도 3年마다 延長할 수 있다. 旣存에는 러시아 國籍의 高麗人에게만 나이와 相關없이 F4街 주어졌다. 이고리와 같은 中央아시아 國籍의 未成年 高麗人은 韓國 高等學校를 卒業해야 F4비자가 나왔다. 法務部는 러시아 國籍 同胞에게는 經濟規模가 크고 新規 不法滯留者 發生 比率이 낮다는 理由로 F4비자를 주고 있다. 이고리는 多幸히 滯留 資格을 얻었지만 運이 좋은 境遇다. 未就學 兒童이나 言語 또는 經濟的 問題로 學校 밖으로 밀려난 移住 兒童들은 이 惠澤을 못 받는다. 法務部는 滯留 資格을 주며 條件을 달았다. ‘國內 初·中·高校에 在學해야 F4비자를 받는다.’
京畿 安山市 선일中學校에서 籠球를 하고 있는 이 學校 3學年 아딜벡(왼쪽)과 이고리.
安山市 高麗人志願센터 ‘너머’의 金英淑 센터長도 이 點을 안타까워한다. “韓國語 實力 不足으로 學業을 따라가지 못해 學校를 그만둔 學校 밖 高麗人 靑少年들이 正말 많아요. 똑같은 同胞인데 國籍에 따라 滯留 資格을 달리 주는 것은 差別이에요.” 法務部는 F4비자를 附與할 中央아시아 國籍 高麗人 範圍를 漸次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고리는 艱辛히 滯留 資格을 얻었지만 여러 偏見과 싸워야 한다. 法的 韓國人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 넌 軍隊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 親舊들은 嫉妬 半, 부러움 半이 담긴 弄談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 마음에는 다짐이 생긴다. ‘반드시 떳떳한 韓國人이 되고 말아야지.’ 이고리는 F4비자를 받아 兵役義務가 생기면 꼭 海兵隊에 갈 생각이다.
허가이 이고리(16歲).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高麗人 4歲. F1비자를 받아 韓國에 왔고, F4 비자를 받을 豫定이다.
金 옥사나(42歲). 이고리의 어머니로, 우즈베키스탄 國籍의 高麗人 3歲다. F4 비자를 받아 韓國에 왔다.
이 로자(62歲). 이고리의 外할머니로, 우즈베키스탄 國籍의 高麗人 2歲다. H2 비자를 받아 韓國에 왔고, 60歲가 되면서 F4 비자를 取得했다.
金 게오르기(65歲). 이고리의 外할아버지로, 우즈베키스탄 國籍의 高麗人 2歲다. H2 비자를 받아 韓國에 왔고, 60歲가 되면서 F4 비자를 取得했다.
舊수빈(4歲). 이고리의 女同生. 金 옥사나 氏가 韓國인 男便과 再婚한 뒤 낳은 딸이다.
이고리의 할아버지인 高麗人 2歲 金 게오르기 氏(65)도 孫子의 苦悶을 알고 있다. 平凡한 韓國人으로 좋은 職場, 좋은 家庭을 꾸리려는 孫子의 奮鬪를 理解한다. 게오르기 氏도 故鄕에선 ‘엘리트’였지만 韓國에 온 뒤 바닥부터 始作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 氏는 이고리가 韓國에 오기 1年 前인 2008年 韓國 땅을 밟았다. 51歲, 남들은 隱退를 꿈꿀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李 로자 氏(62)가 糖尿로 한쪽 눈의 視力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제대로 治療하기 어려운 狀況이었다. 게오르기 氏는 먼저 韓國으로 留學 간 아들의 生計도 돕고 싶었다. 結局 큰 決心을 했다. 타슈켄트 國立師範大 歷史學科 卒業張, 校長까지 지낸 敎育者로서의 커리어, 房 4個짜리 아파트, 自動車, 別莊까지 모두 家族을 위해 버렸다. 그렇게 韓國으로 떠나왔다. ‘할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첫 일터는 釜山의 한 造船所였다. 午前 8時부터 午後 9時까지 하루 13時間 동안 20kg 가까운 裝備를 들고 일했다. 每日 밤 손이 저렸다. 게오르기 氏는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 하지만 不足한 韓國語로는 변변한 일을 求하기가 힘들었다. 쌀 農場, 간醬 工場, 建設 現場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食用 개 畜舍에서 일하던 時節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 肉體的 苦痛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무너진 自尊心이었다. ‘校長先生님’은 ‘移住勞動者 金 氏’가 됐다. 造船所 일자리를 그만두고 일했던 總角무 農場에서는 農場 主人이 퍼붓는 辱說을 견뎌야 했다. “韓國語를 못 하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韓國에 오기 前엔 내가 高麗人, 韓國人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 아니었어요.” 막상 韓國에 오니 徹底한 異邦人임을 實感한 게오르기 氏. 그래도 그는 故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韓國에서 반드시 成功하고 말겠어.’ 그는 어렸을 때부터 ‘韓國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家族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子息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가르치곤 했다. “韓國이 우리의 未來다.”
이고리의 할아버지 金 게오르기 氏(왼쪽)와 할머니 이 로자 氏(왼쪽 寫眞). 함께 旅行을 떠난 이고리의 할아버지와 이고리 四寸동생, 할머니 그리고 이고리(왼쪽부터). 이고리 提供
딸 옥사나 氏에게도 ‘未來의 땅’ 韓國은 碌碌지 않았다. 獄舍나 氏는 우즈베키스탄 現地 大學에서 心理學을 專攻했다. 하지만 韓國語가 能熟지 않은 그가 韓國에서 求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工場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F4婢子 所持者는 經濟 活動은 可能하지만 淸掃, 包裝, 廚房補助 같은 單純 勞務에는 從事할 수 없기 때문이다. 人力事務所를 數十 군데 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의 事情을 딱히 여긴 安山의 한 工場 代表가 몰래 일을 줬다. 獄舍나 氏는 3年間 製品에 필름 附着하는 單純 作業을 하며 지냈다. 出入國事務所에서 未登錄 勞動者 團束을 나왔을 땐 倉庫에 숨어야 했다. 摘發되면 비자가 取消돼 出國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時節은 아직도 그에게 傷處로 남아 있다. 어느 날 工場에서 上司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當場 쫓아가 소리를 질렀다. “나도 熱心히 일해요. 내가 外國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警察에 申告해요.” 게오르기 氏와 옥사나 氏 父女는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린 이고리를 먹이고 입히고, 로자 氏 病院費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네 家族은 入國한 뒤 5年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氏가 工場 同僚였던 韓國人 男便과 2013年 再婚한 뒤로는 分家를 했지만 月貰로 산다. 이고리는 집에서 工夫할 空間도 변변찮다. 이고리의 房엔 冊床과 寢臺를 놓을 空間이 없다. 이고리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 작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全部다. 집에서 工夫할 空間이 없어 이고리는 試驗 期間에 學校에 남아 工夫를 한다. 그래도 이고리는 肯定한다. “오히려 現在 狀況을 肯定的으로 받아들여요. 每日 바닥에서 工夫하다 보면 나중에 ‘眞짜 冊床’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感謝하겠어요.” #1. 韓國語가 서툴러 出身國 經歷을 살리지 못한 채 單純 勞務에 從事한다. #2. 劣惡한 勞動 環境에 지쳐 韓國語를 배우지 못한다. #3. 韓國語가 不足하니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惡循環을 이고리 家族은 充分히 經驗했다. 熱心히 努力해도 經濟的 어려움을 벗어날 ‘사다리’가 없었다. 機會가 없진 않았다. 獄舍나 氏는 法務部의 ‘社會統合프로그램(KIIP)’을 履修하면 榮州비자(F5婢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韓國語, 韓國文化, 韓國社會 理解 敎育으로 構成된 프로그램을 履修하기엔 버거웠다. 465時間假量 敎育을 받고 試驗에서 一定 點數를 取得해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낮엔 工夫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力不足이었다. 當場 生計가 너무 急했다. “일하고, 이고리 밥 주고, 그러면 週末에 工夫할 時間 딱 4時間 있었어요. 그래서 工夫 잘 못 했어요. 4段階까지는 合格했는데 5段階에서 떨어졌어요. 5段階 붙으려고 夜間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工夫했는데…. 그래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옥사나 氏) 金英淑 센터長은 移住民들이 社會經濟的 地位를 대물림받는 現實을 안타까워했다. “高麗人들은 現地 同和 政策으로 韓國語가 서투르고 韓國文化에 익숙지가 않아요.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죠. F5비자를 받으려면 授業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時間이 없는 高麗人이 大部分입니다.” 高麗人 比重이 높은 安山의 한 高等學校 敎師도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高麗人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工場에서 일하며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境遇가 많아요. 아이들은 父母가 하는 일을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것이죠.”
年度別 外國 國籍 同胞 現況(單位: 名)
그래프 위 點에 마우스를 올리면 具體的인 數値를 보실 수 있습니다.
資料: 法務部
지난해 11月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동생 수빈이까지 온 家族이 모여 外食을 했다. 할아버지는 氣分이 좋아져 목소리를 높였다. “난 結局 成功했어요. 아들도 잘 살고 있고, 딸도 韓國人 男便이랑 結婚해 韓國에서 살고 있잖아.”
지난해 11月 함께 競技 안산시 원곡동의 한 食堂에서 外食을 하고 있는 이고리네 家族. 왼쪽부터 이고리 엄마, 할아버지, 이고리, 그리고 할머니.
게오르기 氏에게 成功은 그런 것이다. 子息들이 ‘穩全한 韓國人’李 돼 韓國 땅에서 堂堂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13年 동안 부드럽던 敎師의 손을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勞動者의 손과 바꿔 얻어낸 成功이다. 그에게 孫子 이고리는 成功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다. “아들, 딸이 便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餘恨이 없어. 내 딸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工夫를 잘하고 좋은 職場을 가져야 돼.”(게오르기 氏) “이고리는 大學校를 꼭 한 個는 가야 해. 하나라도 붙어서 工夫해야 해. 그래야 쓰레기 줍는 힘든 일 안해.”(로자 氏) “나중에 우리 아들 工場 일 하지 말고 通譯 일 같은 거 하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會社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우리 아들 大學 工夫해서 나중에 成功하면 좋잖아요.”(옥사나 氏) 이고리만은 單純 肉體勞動이 아닌 ‘便한 일’을 하기를. 成功하기를. 그게 이고리 家族이 ‘사다리’를 오를 唯一한 機會다. 家族들 말을 듣던 이고리가 말했다. “제가 우리 家族의 마지막 남은 希望인 거죠.”
26年을 異邦人으로 살다
26年間 3臺가 韓國에서 살았다
如前히 딸과 孫子, 孫女는 追放 危機
이고리의 家族처럼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臺가 韓國에서 誠實하게 살아도 不安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低所得層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母國에서는 學事, 碩士를 取得한 엘리트與도. 韓國에서 20年 넘게 事故 없이 熱心히 일해도…. 26年째 異邦人처럼 韓國에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氏(60) 家族이 그렇다. 1996年 몽골에서 韓國에 와 家庭을 이뤘다. 그는 多幸히 滯留 資格을 維持하고 있지만 딸, 손주들은 모두 未登錄(不法滯留) 身分이 될 危機다. 어티겅도야 氏는 지난해 10月 28日에도 어김없이 出入國事務所를 찾았다. E7婢子 延長을 위해서다. Asset 1 每年 찾는 곳이지만 事務所 앞 橫斷步道를 건널 때부터 손이 떨린다. “10月 30日이 지나면 내가 不法 되는 거야. 出入國事務所는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갈 때마다 벌벌 떨면서 가.”(어티겅도야 氏) 함께 온 몽골學校 先生님 2名까지 無事히 비자 期間 延長을 마쳤다. 이들은 出入國事務所 밖으로 빠져나와 비로소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었다.
지난해 10月 서울 陽川區 서울 出入國·外國人廳에서 비자 滯留期間 延長을 마친 뒤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어티겅도야 氏(오른쪽)와 몽골學校 先生님들.
韓國에서
어티겅도야 氏의 26年
△1996年 觀光비자로 韓國 入國 서울 광진구 구의동 미싱工場에서 勤務
△1997年 서울外國人勤勞者宣敎會 通譯 業務
△1999年 몽골로 出國, 두 딸을 데리고 觀光비자로 韓國 再入國 災旱몽골人學校 健康과 家庭 先生님으로 勤務 始作
△2005年 災旱몽골人學校가 서울市敎育廳 認可 받으며 E7 獲得
어티겅도야 氏는 1996年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韓國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師範大를 卒業하고 大學 講師로 일했다. 하지만 月給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産業硏修生 制度도 있었지만 門이 좁았다. 어티겅도야 氏는 가난을 脫出하려 無作定 觀光비자만 믿고 韓國으로 건너왔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미싱工場에 就業했다. 번 돈은 月貰와 두 딸을 위해 몽골로 父親 生活費로 다 나갔다. 觀光비자 延長을 위해선 3個月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지만 飛行機票 살 餘裕가 없었다. 結局 觀光비자를 延長 못 해 未登錄 身分이 됐다. 每日 머리를 맞으며 일해야 했다. 工場 앞 公衆電話에서 두 딸과 通話하는 時間이 唯一한 樂이었다. 어티겅도야 氏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是非를 거는 韓國人 同僚들의 텃勢를 버티지 못하고 6個月 만에 工場을 나왔다.
미싱工場에서 일하던 時節 어티겅도야 氏(오른쪽). 어티겅도야 氏 提供

일할 곳을 찾던 그를 救援한 건 逆說的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月 40萬 원을 받으며 서울外國人勤勞者宣敎會에서 通譯 奉仕를 始作했다. 2年 동안 宣敎會議 권성희 牧師와 全國을 돌았다. 賃金滯拂을 겪는 外國人 勞動者, 男便에게 맞은 結婚移住 女性들의 通譯을 맡았다. “當時 移住勞動者 10名 中 9名은 賃金滯拂을 겪었어요. 어티겅도야 本人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移住民 身分이었지만 自身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왔죠. 韓國語를 못 하는 移住勞動者를 代身해 工場까지 찾아갔어요. 賃金을 주지 않는 工場主와 싸웠어요.”(권 牧師)

正義感 剛한 그에게 未登錄이란 身分은 늘 목에 걸린 가시였다. 1999年 宣敎會가 災旱몽골人學校를 세우면서 그도 先生님으로 일할 機會를 얻었다. 安定的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몽골로 떠나 觀光비자를 再發給 받은 뒤 韓國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3個月마다 入國과 出國을 反復하다 2005年 E7비자를 받게 됐다. 災旱몽골人學校에서 外國人 先生님으로 일하며 비자 發給 對象인 外國人 專門人力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韓國에 산 지 10年 만에 어렵사리 未登錄 身分을 벗어났다.

어티겅도야 氏는 F4비자는 받았지만 이보다 더 安定的인 永住權을 取得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現實의 壁은 높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所得이다. F5(榮州)비자를 取得하려면 年 所得이 前年度 1人當 國民總所得(GNI) 以上이어야 한다. 2021年 F5비자를 申請할 境遇 年 所得은 3萬1881달러(藥 3788萬 원)를 넘어야 한다. 移住民들은 韓國語 實力이 不足해 單純 勞務에 從事하는 境遇가 많다. 榮州비자 發給에 必要한 所得 要件을 갖추기 어려운 게 事實이다.

몽골學校 學生들과 어티겅도야 氏(아래줄 가운데). 어티겅도야 氏 提供
몽골學校를 세운 서울 廣津區 나섬교회의 유해근 牧師는 어티겅도야 氏가 安定的인 身分을 갖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몽골學校 先生님 中 韓國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됐고, 韓國語가 유창해 가장 永住權을 딸 可能性이 높은 분이에요. 하지만 敎師 月給으로 榮州비자가 要求하는 所得 要件을 맞출 수 없죠.”
代물림되는 未登錄 굴레
지난해 12月, 비자 更新 以後 한 달餘 만에 만난 어티겅도야 氏는 왼쪽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넘어져 왼쪽 네 番째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 서울 地下鐵驛 광나루驛에서 대로 사이 골목으로 굽이돌아 15分 程度 걸어 그의 屋塔房에 到着했다. 階段은 欄干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程度로 가팔랐다. 어티겅도야 氏는 學校에 出勤을 했다가 孫女까지 어린이집에서 下院시켜 오는 길이었다. 그는 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屋塔房 階段을 힘겹게 올랐다. 屋塔房 外壁은 初겨울 찬바람을 막아내기엔 力不足이다. 헐거운 틈 사이로 바람이 새고, 파이프가 얼어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올 때도 있다. 바람이 많이 불면 天障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氏에게 이 집은 韓國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 같은 집’이다. “16坪 程度 될까. 그래도 男便이랑 살기에 넓어. 房도 세 個야. 저쪽 放은 손주 놀이房이야. 옛날엔 地下房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 未登錄에서 E7비자로, 地下房에서 屋塔房으로, 미싱工場에서 몽골學校로. 어티겅도야 氏는 피나는 努力과 忍耐로 滯留 資格을 얻어냈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氏의 얼굴에 진 그늘은 如前하다. 自身이 26年間 겪은 不安과 苦痛의 電鐵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와 孫子, 孫女 때문이다. 자야 氏는 몽골 現地 大學에서 中國語를 專攻하고, 美國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經營學 碩士를 받았다. 韓國에 定着한 엄마와 女同生을 따라 2016年 韓國에 들어왔다. 韓國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을 제대로 工夫해 보겠다는 꿈이 컸다. “K팝, K스타가 世界的으로 有名하잖아요. 韓國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을 工夫해서 나중에 몽골의 엔터테인먼트 産業에 그대로 椄木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첫째 딸의 비자 變更 過程
2016年 觀光비자
Asset 4
2016~2017年 D4(語學硏修)비자
Asset 4
2017年~2019年 D2(儒學)비자
Asset 4
2019~2021年 D10(求職)비자
자야 氏가 韓國 入國을 위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方法은 觀光비자였다. 于先 觀光비자를 받아 2016年 男便, 아들과 함께 韓國 땅을 밟았다.
자야 氏가 韓國 入國을 위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方法은 觀光비자였다. 于先 觀光비자를 받아 2016年 男便, 아들과 함께 韓國 땅을 밟았다.
韓國語를 工夫하기 위해 서울 구로구의 한영대 韓國語學堂에 入學했다. 語學硏修者는 D4비자를 받을 수 있다.
韓國語學堂을 卒業하고 留學費自認 D2비자를 받았다. 2017年 禮願藝術隊 엔터테인먼트經營學科 碩士課程에 入學하며 取得했다.
碩士 卒業 뒤인 2019年 最大 2年 期限의 D10비자를 받았다. D2, D4비자로 韓國에서 工夫한 뒤 國內 就業을 願하는 外國人이 받을 수 있다.
자야 氏가 韓國 入國을 위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方法은 觀光비자였다. 于先 觀光비자를 받아 2016年 男便, 아들과 함께 韓國 땅을 밟았다.
어티겅도야 氏(오른쪽)와 그의 첫째 딸. 어티겅도야 氏 提供

美國 留學까지 마친 자야 氏는 碩士 卒業 뒤 2年間 韓國에서 求人求職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志願書를 넣었다. 貿易, 마케팅, 通譯 等 職群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外國人인 그를 받아주는 會社는 없었다. 올해 初에야 스마트폰을 輸出하는 貿易會社가 그를 採用했다. 이제 外國人 專門人力이 받는 E7비자를 받을 資格이 됐다. 安定的으로 國內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야 氏는 이제야 몽골, 美國, 韓國의 言語와 文化를 두루 涉獵한 人材로 認定받는 瞬間이 오나 싶었다.

하지만 꿈은 瞬間 물거품이 됐다. 자야 氏가 E7비자를 發給 받으려고 出入國事務所에 過去 所得 資料를 提出할 때였다. 事務所 職員은 자야 氏가 D2비자를 所持한 채 아르바이트한 事實을 問題 삼았다. D2婢子 所持者는 單純 아르바이트도 當局에 申告해야 하는데 申告 없이 일한 點이 不法이란 說明이었다. 結局 자야 氏는 첫 出勤도 못한 채 職場을 그만뒀다. 그의 비자가 滿了되면서 男便과 두 아이의 同伴비자(F3)까지 剝奪됐다. 자야 氏 夫婦와 아이들 모두 未登錄 危機에 處한 것이다. 그는 現在 滯留 資格을 얻으려 行政訴訟을 進行 中이다. “이 나라에 해 안 끼치고 合法的으로, 平凡하게 살고 싶었어요. 未登錄이 안 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데….” 딸에 이어 孫子와 孫女까지 未登錄 危機에 處하며 어티겅도야 氏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자야 氏가 行政訴訟에서 敗하면 비자를 延長 받지 못한다. 손주들도 몽골로 가야 한다.

孫子 유루티츠(宇宙라는 뜻의 몽골語)가 特히 걱정이다. 유루티츠는 세 살 때 韓國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 됐다. 孫女는 2020年 韓國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애들은 韓國이 自己 나라나 다름없어. 自己 엄마랑 얘기할 때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韓國에 있고 싶어요’라고 한대. 그래서 每日 밤 제가 하나님한테 祈禱해요. ‘하나님, 너무 欲心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2, 3年 만이라도 韓國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

어티겅도야 氏(왼쪽)와 그의 孫子 유루티츠. 어티겅도야 氏 提供
貯水池를 벗어나 헤엄칠 수 있을까
國內 移住背景 兒童들이 韓國 社會의 ‘下流’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基本的으로 安定的인 滯留 資格을 確保할 수 있어야 한다는 指摘이 나온다. 韓國 政府도 未登錄 兒童 問題를 苦悶하고 있다. 法務部는 지난해 未登錄 移住兒童이 一定 要件을 갖추면 特別 滯留를 許可하겠다고 發表했다. 國家人權委員會가 2020年 “長期滯留 未登錄 移住兒童에 對한 强制退去를 中斷하고 救濟策을 마련하라”고 勸告한 뒤다. 하지만 유루티츠는 未登錄 身分이 되더라도 救濟받을 수 없다. 救濟策은 韓國에서 태어나 15年 以上을 國內에서 滯留하며 初等學校를 卒業해야 適用된다. 게다가 2025年 2月까지만 限時的으로 施行된다. 國家人權委員會는 이 救濟策에 對해 “2萬 名으로 推算되는 未登錄 移住兒童 中 500名 以下 少數의 移住兒童만 救濟할 뿐”이라고 評價했다. 市民團體와 法曹界에서도 批判이 나온다. 安山 原曲法律事務所의 최정규 辯護士는 政府가 問題를 放置하고 있다고 指摘한다. “國內에서 出生했든 中道入國 兒童이든 本人 意志와는 關係없이 未登錄 身分이 됐다는 點은 같습니다. 이는 出生地로 差別을 하는 셈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받는 傷處와 混亂을 생각해야 합니다.” 安山에서 多文化敎會를 運營하는 박천응 牧師는 이고리, 어티겅도야 氏의 손주들 같은 移住家庭 子女들을 ‘貯水池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父母 世代의 社會經濟的 地位를 克服하지 못한 채 社會의 底層에 고인다는 意味다. “移住背景 아이들의 父母님 世代는 本國에서 有能했어도 韓國語나 滯留 資格 問題로 大部分 單純 勞動에 從事합니다. 經濟的 問題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敎育을 받지 못하죠. 工團 地域 勞動者들의 子女는 工團 人力의 貯水池예요. 父母에 이어 工團 勞動者가 되는 惡循環에 빠지는 거죠.” 이고리의 高等學校 進學, 자야 氏의 大學院 碩士 取得. 이 모두 貯水池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셈이다. 이고리는 이제 꿈을 向해 첫걸음을 내디딜 準備를 하고 있다. 一般高 進學을 始作으로 大學을 나오고 通譯士가 될 것이다. 碩士學位가 두 個나 있고 美國 留學까지 했지만 就業이 어려웠던 자야 氏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고리는 自己 이름의 뜻을 생각한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意味다. 엄마와 家族들을 지킬 수 있도록 剛해지고 싶다. “뭔가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剛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전 제 家族을 지키는 剛함을 가진 사람이 될 거예요.”
이고리처럼 “그래도 大韓民國에서 태어났으면 軍隊는 가야지”라고 말하며 海兵隊에 간 인도네시아系 韓國人 靑年이 있다. 갓 스무 살, 남들은 避하지 못해 안달인 軍隊를, 그것도 海兵隊를 왜 自願해서 가려고 했을까.
나는 인도네시아系 韓國人입니다
4話 읽기
共有하기 닫기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