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年 11月 12日. 工事 中인 어린이집을 찾은 조나단은 와티 氏의 손을 잡고 正門 近處에서만 서성였다.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나단, 어린이집이네. 어린이집 다시 가고 싶어?”
와티 氏가 말을 걸었지만, 조나단은 어린이집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린이집은 낯선 모습이었다. 시멘트 外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工事 廢棄物이 자루에 담겨 入口에 잔뜩 쌓여 있었다.
조나단이 없는 사이 全面 리모델링 工事에 들어간 것이다. 緊急 保育 對象인 어린이들은 臨時로 마련된 다른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다. 조나단은 어린이집 親舊들을 보고 싶지만 어린이집이 어딘지 알 수도 없다.
두 坪 원룸에 다시 갇히다
조나단은 安山의 房 한 칸짜리 원룸에 다시 孤立됐다. 어른 네 名이 앉으면 꽉 차는 空間. 조나단은 이곳에서 먹고 자는 것은 勿論이고 工夫와 놀이까지 다 解決해야 한다. 親舊는 結局 엄마뿐이다.
와티와 조나단이 사는 원룸 內部를 클릭해 살펴보세요.
집에서 500m 距離에 있는 公園이 조나단의 唯一한 놀이터다.
“公園에 나가자.”
와티 氏의 말에 조나단은 재빨리 일어섰다. 모래놀이龍 삽과 桶을 들고서. 날씨가 좋을 땐 一週日에 두 番 理想을 찾는다. 하지만 겨울엔 이마저도 어렵다.
京畿 안산시의 한 公園을 찾은 와티 氏와 조나단.
와티 氏는 未登錄 身分으로, 낯선 安山이란 都市에서 더욱 움츠러든다. 어느 날 조나단이 熱이 많이 났다. 水原에서라면 자주 가던 病院을 찾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와티 氏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느 病院이 未登錄人 우리를 받아줄까.’
다른 곳도 함부로 갈 수가 없다. 조나단은 冊을 좋아하지만 地域 圖書館을 아쉽게 지나치기만 한다.
와티 氏 帽子는 둘 다 韓國語가 서투르다.
“쉬 안 가? 쉬 안 갈래?”
와티 氏가 韓國語로 묻자 조나단은 “응”이라고만 했다.
서툰 韓國語를 듣고 자란 조나단의 韓國語도 더디다.
“조나단이 여섯 살인데 韓國語 水準은 두 살 程度로 보여요. 놀 때 單語들만 말해요. 文章을 만들어서 自己 意思를 傳達하는 건 아직 안 돼요. 인도네시아 말은 되게 잘해서 ‘짹짹이’라고 別名을 붙여 줬을 程度인데 말이죠.”
조나단 家族을 돕고 있는 인도네시아人 牧師 아구스 氏는 조나단의 言語 能力이 걱정이다.
社會性도 떨어지고 있다. 조나단은 火를 주체하지 못하고 모든 걸 自己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漸漸 애 같지 않아졌어요. 애들은 울거나 떼를 쓰는데 조나단은 어른들처럼 火를 내더라고요. ‘너 가만히 안 둘 거야’ 같은 險惡한 말을 해요. 表情도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는 것을 따라 해요.”(와티 氏)
京畿 水原의 단골 魚묵집을 찾은 와티 氏와 조나단(왼쪽 寫眞). 水原의 敎會에서 드럼을 갖고 노는 조나단.
조나단이 韓國을 떠나 인도네시아로 가면 모든 게 解決될까. 조나단은 單 한 番도 인도네시아를 가본 적이 없다.
“조나단, 보고 싶어. 인도네시아로 와.”
“제 집은 韓國이에요. 인도네시아 안 가요.”
조나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映像으로만 만나봤다. 그럴 때마다 조나단은 分明히 線을 긋는다. 韓國에서 살고 싶다고.
조나단과 비슷한 處地의 아이들은 많다. 조나단이 다니는 敎會만 해도 未登錄 移住兒童 미카엘(假名·3)과 안나(假名·2)가 있다. 韓國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다. 미카엘과 안나의 父母들도 어린이집에서 繼續 拒否를 當했다. 이제 水原에서 安山으로 理事를 苦悶 中이다.
國家人權委員會에 따르면 國內 未登錄 移住兒童은 約 2萬 名 規模로 推算된다. 人權團體는 規模가 이보다 더 클 것으로 豫想한다. 外國 國籍 兒童은 出生 登錄을 하지 않아 統計에 잡히지 않은 兒童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아이들이 갈 곳은 安山뿐이다. 안산시는 2018年 京畿道에서 처음으로 市 豫算으로 登錄 外國人 住民 子女에게 保育費를 支援하기 始作했다. 2020年에는 全額 支援을 實施하기로 決定했다. 지난해부터 누리過程 保育費 24萬 원을 全額 支援하고 있다. 어린이집들이 保育費 支援을 받으니 移住兒童들도 入所하기 수월해졌다.
狀況이 이렇다 보니 移住民 家族들은 安山으로 收斂한다. 案山은 移住民이 모이는 섬 같은 곳이 됐다.
京畿道의 移住兒童 保育 實態를 調査한 이영아 아시아義昌 常任理事는 移住民 保育 政策이 安山 外의 地域에서도 擴大돼야 한다고 强調한다.
“外國人 兒童이 늘어난다는 건 韓國에서 家族을 形成해 살아가는 移住民들이 많아진다는 얘기입니다. 保育 政策은 家族 全體를 도울 수 있어요. 保育費를 支援하는 地方自治團體가 늘어나야 합니다.”
結局 돌고 돌아 安山으로
安山의 ‘移住民 인프라’를 찾아 또 다른 移住를 하는 移住民들은 조나단뿐만이 아니다.
올해 高等學校에 入學하는 누르街셰프 아딜벡(16)은 카자흐스탄에서 온 少年이다. 열 살 때인 2015年, 高麗人 3歲인 어머니를 따라 安山에 왔다. 카자흐스탄 經濟가 惡化돼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딜벡 家族은 4年 만에 安山에서 忠北 淸州로 移徙하게 됐다. 아버지가 職場을 淸州로 옮겨서였지만 事實 安山에 남으려면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딜벡은 移住民이 많은 安山 밖 다른 地域에서 스스로 實力을 알아보고 싶었다.
“工夫도 熱心히 하고 韓國語도 잘하고, 適應을 잘했어요. 그래서인지 ‘韓國 아이들과 제 實力으로 競爭하고 싶다’는 말도 했었죠.”(임미은 先日中 敎師)
아딜벡이 다니던 安山 先日中은 移住背景 學生이 全體의 50%를 넘는다. 하지만 淸州의 學校에선 移住背景 學生이 한 學年에 서너 名 程度뿐이었다. 아딜벡이 처음 겪어보는 環境이었다.
“처음에 애들이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장난을 거는 거예요. 카자흐스탄에선 絶對 男子들끼리 密接한 接觸을 안 하거든요. 安山에선 韓國 애들도 中央아시아 出身 애들이 싫어하는 걸 잘 아니까 그런 장난 안 쳐요.”
아딜벡은 文化的 差異에 唐慌했다. 이른바 ‘一陣’ 같은 親舊들은 赤裸裸하게 對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아딜벡은 갑작스러운 性的 下落에도 唐慌했다. 轉學 온 淸州 學校에서 본 中間考査 點數는 平均 60點臺였다. ‘元來 班에서 3等 밑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는데….’
試驗 難度가 높아지며 脆弱한 韓國語 實力이 발목을 잡았다.
“2學年 되고 나서 놀긴 했지만…. 社會 같은 科目에선 제가 別로 안 좋아하는 敍述形이 正말 많이 나오더라고요.”
아딜벡은 精神이 번쩍 들어 工夫에 매달렸다. 多幸히 이듬해에는 平均 80點 後半까지 點數를 끌어올렸다. 이番엔 高等學校 進學이 問題였다. 아딜벡은 經營 分野에 特化된 特性化高에 가고 싶었다. 카자흐스탄 證券業界에서 일했던 아버지처럼 金融界 進出을 꿈꾸고 있다. 이미 中學校 1學年 때부터 株式 工夫를 始作할 程度로 關心이 많다. 特性化高를 가면 衣類 事業도 試圖해 보고 싶다. 하지만 淸州 近處에는 그런 特性化高가 없었다.
進路 選擇을 相談하고 비자 問題를 相議할 곳이 없는 點도 問題였다. 安山의 선일中엔 多文化部가 따로 있었다. 러시아語에 能通한 先生님이 비자 問題를 詳細히 案內해줬다. 一般 先生님들도 移住背景 學生에게 익숙해 ‘맞춤型 進路相談’을 해주곤 했다. 高等學校에 進學한 移住背景 先輩들도 있어 쉽게 助言을 求했다. 하지만 淸州에선 이 모든 걸 아딜벡이 알아서 해야 했다.
아딜벡 家族은 1年도 채 되지 않아 安山으로 돌아왔다. 結局 安山밖에 答이 없다. 이렇게 移住民들은 安山으로 收斂된다. 案山은 移住民의 섬이다.
섬이 징검다리가 되려면
安山 아이들이 다른 地域으로도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려는 試圖도 있었다.
2019年 京畿道議會에서는 ‘京畿道 移住兒童 條例’가 發議됐다. 條例案은 移住兒童을 ‘大韓民國의 國籍을 가지지 아니한 18歲 未滿의 사람’으로 規定했다. 未登錄이든 登錄이든 關係없이 支援 對象으로 본 셈이다.
‘移住兒童은 出生登錄 될 權利를 갖는다’고 明示하기도 했다. 出生登錄은 移住兒童의 規模를 把握하고 最小限의 福祉 支援을 하기 위한 첫 단추다. 條例案이 通過되면 조나단度 水原에서 어린이집에 갈 可能性이 높다.
條例案을 主導한 김현삼 議員은 勿論 다른 京畿道議員에게 文字메시지가 쏟아졌다. ‘難民 反對’ ‘多文化 反對’를 외치는 外國人 嫌惡 團體들이었다. 안산시에서는 10次例가 넘는 集會가 벌어졌다. 金 議員 집 앞에서도 示威가 벌어졌다.
“團體들과 따로 面談까지 했지만 說得할 수가 없었어요. 反對 團體 분들은 移住民들이 아이를 앞세워 韓國에 들어오고, 結局은 韓國人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라고요.”
金 議員은 이 ‘失敗한 條例案’을 씁쓸하게 回想한다. 1980, 90年代 半月工團에서 일했던 그는 工團 狀況을 누구보다 잘 안다.
“요즘 社長님들이 移住勞動者가 더 必要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어 注文量을 못 댄다는 거예요. 內國人은 採用하고 싶어도 오질 않고요. 그런데도 移住民에 對한 認識은 바뀌지 않고 있죠.”
獨逸 政府는 自國에서 태어난 모든 兒童에게 出生證明書를 發給한다. 泰國이나 베트남 같은 開發途上國度 大部分 國籍과 關係없이 出生登錄을 해준다. 政府가 兒童들을 出生登錄 하면 兒童의 人權侵害 與否를 確認할 수 있다. 豫防 接種 같은 基本的인 福祉 支援도 할 수 있다. 日本은 2019年부터 國籍을 묻지 않고 滿 3~5歲 어린이에게 無償保育 및 幼兒敎育을 해준다.
保育 側面에서 支援을 强化하려는 試圖도 있었다. 지난해 京畿道議會는 登錄 外國人住民 子女에게 保育費를 直接 支援하도록 明示한 條例를 통과시켰다.
稅金을 꼬박꼬박 내도 保育에선 差別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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條例는 通過됐지만 그뿐이었다. 現在 京畿道 內에서 移住兒童에게 保育費를 別途로 支援하는 地自體는 鞍山, 富川, 始興, 軍浦 等에 그친다. 그마저도 詩 自體 豫算으로 解決하고 있다. 京畿道에서는 條例 通過 뒤에도 支援 豫算을 編成하지 않았다.
“外國人 保育費 支援은 豫算 規模가 크고, 地自體가 아닌 中央 政府가 해야 할 일입니다.”
現在 保健福祉部는 指針을 통해 保育費 支援 對象을 ‘大韓民國 國籍을 가진 者로서 住民登錄法에 依해 住民番號를 正常的으로 附與받은 萬 0~5歲 兒童’으로 制限한다. 이 指針의 根據가 되는 嬰幼兒保育法을 살펴보면 國籍에 따른 差別이 容認되고 있다. ‘嬰幼兒는 自身이나 保護者의 性, 年齡, 宗敎, 社會的 身分, 財産, 障礙, 人種 및 出生地域 等에 따른 어떠한 種類의 差別도 받지 아니하고 保育되어야 한다.’
‘國籍’李 文句에서 빠져 있다.
이 條項에 國籍을 包含시키는 嬰幼兒保育法 改正案이 지난해 7月 國會에 發議됐다. 하지만 懸案에 밀려 本格的인 論議는 始作되지 못했다. 게다가 복지부는 國籍 中心으로 設計된 다른 社會保障 制度와 連繫해 論議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표류가 끝나는 그날까지
와티 氏에게 安山은 如前히 낯선 땅이다. 하지만 조나단을 위해 適應해야 하는 곳이다.
“아직 適應 期間이라 조금 낯선 땅이에요. 實은 아직도 水原을 그리워해요. 언젠가는 家族들이 있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거예요. 조나단이 韓國에서 中學校, 高等學校를 卒業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와티 氏는 조나단 같은 아이가 더 異常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神이 주신 祝福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이의 未來에 父母가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움을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해요.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위해 사는 곳을 옮기지 않고 本人이 사는 곳에서 어린이집을 보낼 수 있는 環境이 되면 좋겠어요.”
어린이집뿐만이 아니다. 조나단 같은 移住背景 兒童들은 學校를 다니면서도 韓國語를 잘하는지, 滯留 資格이 있는지 끊임없이 試驗받는다. 이런 條件을 갖춰도 아이들은 韓國 社會의 ‘下流’에 고일 수 있다는 不安感에 시달린다. 異邦人에서 벗어나기 위해 工夫에 더욱 매달린다. 2009年 우즈베키스탄에서 韓國에 온 少年에겐 高等學校 進學조차 切實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