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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連絡船은 떠난다’의 作曲家 | 1972.02.27 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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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룡 便 - ‘連絡船은 떠난다’의 作曲家
이봉룡 便
‘連絡船은 떠난다’의 作曲家
1972.02.27 放送
‘追憶의 스타 앨범’은 出生·데뷔에서부터 近況에 이르기까지 그 時節 그 歌手의 一生을 追憶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 追憶의 스타 앨범. 이제는 永遠히 가버린 歲月 靑春의 華麗한 浪漫과 感想이 번져있는 그리운 追憶. 歲月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時節 그 歌手의 얘기를 돌이켜 보는 追憶의 스타 앨범. 오늘은 作曲家 이봉룡 便입니다.

- 歲月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靑春이 묻힌 江가에 새 봄이 올때마다 追憶의 언덕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노래. 賑穀의 거리에는 아직 게다짝 소리 搖亂하고 南山 外成大 가는 길엔 螢光燈 아닌 가스燈이 輝煌하게 빛나고 있을 무렵 腸洗淨이 불러줬던 `連絡船은 떠난다`를 作曲해서 높이 評價 받았던 作曲家 이봉룡.
이봉룡이 作曲한 `連絡船은 떠난다` 腸洗淨의 목소리로 들어 봅니다.



- 腸洗淨이 불러줬던 `連絡船은 떠난다`를 비롯해서 고운봉의 `船艙`, 박경원의 `나폴리 戀歌`, 남인수의 `落花流水`,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백년설의 `고향설`, `아주까리 船艙` 等 200餘 曲을 作曲해서 한때 憂愁에 젖은 望鄕의 作曲家로 높이 評價를 받았던 作曲家 이봉룡은 1914年 8月 3日生. 三鶴島 바다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보아도 한숨이요 갈매기의 구슬픈 노래소리도 눈물이었다는 木浦가 그의 故鄕. 16歲 斷髮머리 少女로 데뷰해서 `木浦의 눈물`로 歌謠界의 女王이 됐던 이난영의 오빠이기도한 이봉룡은 어렸을때부터 끔찍하게도 노래를 좋아하는 音樂狂이었습니다. 이봉룡 이난영 男妹의 音樂的 素質은 그들의 祖上으로부터 이어받은 天賦의 것으로 `靑山裏 碧溪水`를 즐겨 부르던 아버지 또한 嚴格하면서도 音樂에는 理解가 깊어서 이봉룡은 普通學校를 卒業한 얼마後 허술한 港口都市 木浦에서 樂器店을 始作 했으며, 新劇의 旗발을 높이 들었던 土月會가 太陽劇場으로 改名을 하고 港口都市 木浦로 巡廻公演을 왔을 때 이봉룡은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團長 박승희를 찾아가서 이난영으로 하여금 後날 歌謠界에 女王이 될 門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이봉룡이 作曲해서 共存의 히트를 날렸던 `木浦는 港口다` 이난영이 불러 줍니다.



- 高層빌딩이 櫛比한 忠武路 어느 골목안에는 아직 草家지붕이 있었고 그 지붕 위에는 하얀 박꽃이 피어있을 무렵 危慌燦爛한 네온사인 代身 아직도 어느 들窓門에서는 들깨기름으로 피우는 燈盞불이 깜빡거리고 있던 時節. 學校 成績이 언제나 中間을 넘어서지 못해서 종아리 맞기가 일수였던 이봉룡은 그러나 其他値는 솜씨만은 아주 一品이었습니다. 樂器店을 벌여놓고 장사를 한다는 것은 말뿐이고 낮이나 밤이나 밥 먹는것 조차도 잊어버리고 기타만 쳤던 이봉룡. 所願대로 동생인 이난영을 歌手로 데뷰 시키는데 成功한 이봉룡은 기타를 치면서 作曲 工夫를 하기 始作했습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窓을 열고 달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거리에는 남인수의 `哀愁의 小夜曲`이 한창 流行을 하고 있을때 이봉룡은 남인수에게 불리울 노래를 作曲 하느라 머리를 싸매기도 했습니다.
남인수가 불러줬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作曲家 이봉룡이 心血을 기울인 曲 입니다.



- 남인수가 불러 히트를 날렸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落花流水`에 이어서 백년설의 `고향설` 그리고 고운봉의 `船艙`, 腸洗淨의 `連絡船은 떠난다` 等 거푸 個性的이고 情感이 어리는 作曲을 해서 重鎭 作曲家가 된 이봉룡은 故鄕인 木浦에서 結婚, KPK의 김해송과 結婚한 동생 이난영과 함께 歌謠界를 누비는 男妹 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해송이 拉北되고 이난영이 健康을 해치子 이봉룡은 自己의 6男妹와 이난영의 10男妹의 뒷바라지에 허둥거려야 했으며 끝내는 동생 이난영이 이승을 버리고 가자 失意에 빠져 意欲을 잃기도 했었습니다. 人生은 가고 노래만 남아 追憶이란 반드시 아름다운것일수만은 없다고 秀麗하는 作曲家 이봉룡. 타고난 宿命처럼 노래를 부르며 40餘年 동안 作曲을 해온 이봉룡은 200餘曲의 노래를 지어오는 동안에 한때는 남인수 腸洗淨이 콤비를 이루는데 成功하기도 했으며 國際的 歌手로 눈부신 活躍을 하고있는 金氏스터즈를 길러낸 숨은 內助者익도 합니다. 숙자, 礙子, 民資의 金氏스터즈의 막내인 民資의 아버지이기도 한 이봉룡은 이제 늙어가는 自身들의 遺産을 물려주기 위해서 金氏스터즈 김보이즈를 길러내는데 情熱을 기울이기도 했으며 時代的으로 急變하는 歌謠界의 潮流속에서 옛날의 슬픈 가락을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봉룡이 作曲한 輕快한 탱고 `나폴리 戀歌` 박경원이 시원스런 목소리로 불렀던 노래.



- 狙擊의 능산 鐵의 三角紙에서 들려오던 殷殷한 砲聲은 멎고 廢墟같았던 서울 거리가 活氣를 띄어갈 무렵 무척 輕快한 탱고兆로 斬新한 作曲을 해서 異色的인 才能을 認定 받기도 했던 `나폴리 戀歌`는 男性的인 박경원의 시원스런 톤으로 한때 學生層에서 널리 愛唱 됐으며 現代感覺에 맞는 멋진 리듬으로 엮어지는 다음 作曲이 期待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왠일인지 옛날의 구슬픈 가락에 젖어 未練을 버리지 못하는 作曲家 이봉룡. 이봉룡은 時間만 나면 홀로 조용한 시골길 散策하는 것이 趣味이며 그렇기때문에 親舊도 別로 없고 그래서 孤獨하기도한 사나이.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릿內 나는 埠頭가에 이슬맺은 百日紅.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只今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
고운봉이 불렀던 `서창`, 이봉룡이 내놓은 代表曲 中의 하나 입니다.



- 울려고 내가 왔던가로 더욱 有名한 `船艙`의 作曲家 이봉룡.


- 아 只今도 제 自身이 只今 저 戰力으로 只今 作曲 活動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옛날에 뭐 여러가지 뭐 재밌는 얘기도 많고 남인수, 金鼎九 氏 이래가지고 그때의 우리 그 저는 作曲으로써의 活動을 하고 그 사람들은 뭐 親舊之間 아주 多情한 親舊之間이었습니다. 그래서 只今도 하고 있습니다만은 그때 時節을 생각할 때 우리가 民族의 智慧를 느낄 때 大衆이 그것을 부를 때 말씀이죠. 그걸 부르고 참 여러가지로 大衆들이 大衆한테 어필하고 이래가지고 相當히 참 ...라 그럴까요? 이런 氣分이어서 참 재밌는 生活을 해왔습니다.


- 港口都市 木浦에서 자라고 木浦에서 結婚한 夫人과 더불어 6男妹를 두고 이제는 레코드 會社를 하면서 團欒하게 살고있는 作曲家 이봉룡. 머지않아서 옛날의 回顧的 슬픈 가락에 새로운 感覺의 멋진 리듬이 加味된 異色的인 노래가 나올 것으로 期待되고 있습니다.

- 흘러간 歲月속에 묻혀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時節 그 사람의 얘기를 돌이켜보는 追憶의 스타앨범. 오늘은 作曲家 이봉룡 篇으로 構成 최호영, 아나운서 우재근 이었습니다.

(入力일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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