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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俗노래의 寶物的 存在 | 1971.08.15 放送
民族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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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관 便 - 民俗노래의 寶物的 存在
이은관 便
民俗노래의 寶物的 存在
1971.08.15 放送
‘追憶의 스타 앨범’은 出生·데뷔에서부터 近況에 이르기까지 그 時節 그 歌手의 一生을 追憶의 노래와 함께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永遠히 가버린 歲月. 靑春의 華麗한 浪漫과 感想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歲月은 흘러 갔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時節 그 歌手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追憶의 스타앨범. 오늘은 이은관便입니다.

헤일수 없이 많은 歲月은 흘러 갔어도, 祖上 萬臺 얼과 함께 이어온 우리民族 固有의 民俗노래. 그 民俗노래를 30年동안 불러 준 이은관. 이은관은 倡夫타령 배뱅이굿을 비롯해서 西道民謠 南道民謠 等 全國 各地의 民俗노래를 스스로 캐내고 스스로 지켜온 寶物的 存在이기도 합니다. 民族的인 모든 要素를 抹殺하려 들었던 日帝 36年. 그 동안 우리나라 固有의 美風良俗을 비롯해서 民俗도 차츰 자취를 감추려 할 무렵. 忽然히 倡夫타령을 불러 脚光을 받고 舞臺에 서게 된 이은관은 그러나 感激의 8·15 그 날까지 別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8·15 解放 後에야 國樂院 民謠誇張이 돼서 本格的인 民謠를 다듬기 始作했습니다. 이은관 하면 배뱅이굿을 聯想하고 배뱅이굿을 생각하면 이은관을 聯想하리 만큼 배뱅이 굿으로 잘 알려진 이은관.

이 배뱅이굿은 黃海道를 中心으로 西道地方에 널리 퍼져 잇는 것으로. 한사람이 登場해서 窓으로 여러사람의 役割을 도맡아 하는것이 特徵입니다. 文獻上으로 記錄된 것이 없이 口傳돼 그 由來를 알 수 없으나, 獨特한 窓으로 進行되는 民俗劇인 배뱅이 굿. 이은관의 獨特하고 구성진 가락으로 들어봅니다.

♪ 배뱅이굿

김정승 이정승 최정승의 歲政丞 夫人이 함께 九月山에 있는 深山大刹에 가서 佛供들이는 것으로 얘기가 始作되는 배뱅이굿을 부른 唯一한 民俗歌手 이은관은 1917年 11月 27日生. 只今은 38以北땅인 江原道 伊川郡 利川이 그의 故鄕이자 태어난 곳입니다. 農事를 業으로 하는 中農의 7男妹中 長男으로 태어난 이은관은 어렸을때의 本名 또한 이은관 그대로였습니다. 利川普通學校를 卒業하고 鐵原普通 高等學校를 다니는 동안 少年 이은관은 노래 부르는데 뛰어난 素質이 있었으며 特히 民俗 노래를 부르는 獨特한 唱法에는 타고난 天賦의 가락이 들어 있기도 했습니다. 鐵原 高等 普通學校에 다니던 21歲때. 이은관은 鐵原 劇場에서 開催된 新聞社 主體의 歌謠콩쿨 大會에 나가 倡夫타령을 불러 堂堂 1等에 當選됐습니다. 流行歌謠도 아니고 倡夫타령이라는 民俗노래를 불러 1等에 當選하자, 이은관은 自身을 얻고 보다 積極的인 民俗노래를 알아보기 위해 힘을 기울이기 始作했습니다.

本來 이은관이 태어난 江原道에는 民俗노래가 없기 때문에 黃海道로 가서 黃州에 사는 이은수氏에거 석달동안 西道民謠人 배뱅이굿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이은수氏에게서 西道民謠日 배뱅이굿을 傳受받은 이은관은 다음에 서울로 올라와 旅館은 轉轉하면서 ...氏에게서 서울소리를 익히는 한便. ...科 그 一行에 參加해서 漫談에 곁들여 民俗노래를 부르는 첫 舞臺에 올랐습니다. 只今 한일劇場 자리인 제일극장 舞臺에 서서 才談과 함께 民俗노래人 배뱅이굿을 즐겨 불렀던 이은관은 倡夫타령을 불러 喝采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무렵 旌善放送局 스타디오에서 全國을 向해 民俗의 노래를 最初로 放送했던 이은관은 그 때 첫 舞臺에 올랐던 時節의 追憶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뭐 그때는 人氣고 뭐이고 그것조차 생각할 수도 못할 땝니다. 何如튼 舞臺라는게 처음올랐으니까 벌벌 떨리고 何如튼 精神이 좀 왔다갔다하는 그런 氣分으로 何如튼 제 있는 熱을 다해가지고서 한마디 뽑았었죠. 하니까 拍手소리가 나고 발로다 쾅쾅 굴르면서 좋다 소리가 난것 같에요. 근데 그거를 좋아서 하는 것인지 나빠서 하는 것인지 잘 제가 分揀을 못할 程度로 제가 떨었습니다. 그래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장구를 곧잘 쳤던거 같애요. 그래 이제 장구통을 치면서 장구통을 굴리면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이제 땅에다 놓고 굴리면서 이제 그걸 장구를 치다가 또 땅에서 내려놓고 제가 웃음거리 춤이 있습니다. 춤을 췄더니 그때는 客席에서 와~ 소리가 나고. 아주 뭐 쾅쾅 굴르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래서 아 이제 내가 이제 소리 배웠던 보람이 있나보다 하고 이제 이런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하하하"

하늘에 太陽이 빛나는 臺낫에도 어둠이 깃든 것처럼 憂鬱했던 日帝 36年. 밤이면 달이 뜨고 별이 빛나도 쓸쓸하고 외로웠던 그 時節. 이른바 大東亞 戰爭의 風雲이 亞細亞를 어둡게 하던 그 무렵. 하찮은 戀歌의 歌詞하나에도 온갖 神經을 쓴 日帝가 우리 民族 固有의 얼을 담고 있는 民俗노래를 좋아라 할리 萬無했습니다. 다듬고 가꾸어 保護하고 키워왔어여만할 民族 固有의 노래였건만 그리고 그 民俗노래를 간직하는 寶物과 같은 이은관이었건만, 祖國을 빼앗긴 民族의 民俗은 抹殺될 運命에 있었고 民俗노래를 부르는 이은관은 賤待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일극장에서 舞臺에 서고 輕傷放送 마이크를 앞에서도 民俗노래를 부르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은관은 脚光을 받지 못하고 ....와 그의 一生이라는 團體에 끼어 이은관은 才談과 함께 民俗노래를 끈질기게 부르며 地方巡廻를 하기 始作했습니다.

♪ 濟州道 타령

어느때는 걷다가 지친 山마루 턱에서 어느때는 쓸쓸한 旅館房에서 그리고 또 어느때는 장마가 들어 손님이 없는 허전한 舞臺에서 表裏의 가슴을 안고 身世타령을 해야만 하기도 했던 民俗歌手 이은관. 이은관은 3-4年동안 줄곧 어느때는 이름도 모르는 고을을 찾아 헤매는 地方巡廻公演을 繼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世界 2次大戰은 끝나고 曺國은 光復을 맞이했습니다. 3千萬 겨레가 손에 손에 太極旗를 들고 感激의 눈물을 흘리던 그 날. 民俗노래를 아끼고 民俗노래를 끈질기게 부르며 살아 온 이은관이 맞이한 8·15 祖國 光復은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감격스러운 것이 였으면, 눈물겨운일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只今은 民俗歌手로 君臨하고 있는 이은관은 8·15 祖國光復을 맞이했던 그 때의 그 感激을 다음과 같이 回顧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죠. 그 때 그 뭐 말할수 없었요. 아. 이제부터는 우리가 부르던 우리의 音樂을 할 수 있다는 그 기쁨이란 如干 말할 수 없는 喜悅이었죠. 日帝때 亦是 制壓이 많았죠. 우리 民俗이라는 것이야 正말 制壓에 눌려서 多少 하긴 하지만서도 늘 참 ... 舞臺나 放送活動도 制約이 많았고.하지만 아 解放되고 나서야 그 다음부터야 우리의 音樂이다 우리의 音樂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뭐 아주 여러분도 모두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

感激의 8·15 祖國 光復을 맞이하자 우리民族 固有의 民俗은 붐을 이룰수밖에 없었고 새로 胎動한 國樂院에는 民俗의 노래를 管掌하는 民謠課라는것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늘에서 시들어 있어야만 했던 民俗歌手 이은관은 斷然 國樂院 民謠課長에 就任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便으로는 舞臺 公演을 하기도 해서 活氣를 띄우기 始作했습니다.

개타령. 이은관의 구성진 목소리로 들어보는 新民謠입니다.

♪ 개타령

얼나가지 않아 6·25 動亂이 일어나자 이은광느 國樂院 사람들을 이끌고 國軍慰問의 先頭에 나섰으며 收復後에는 오아시스 레코드를 비롯해서 新世紀 地球 도레미 레코드 會社等에서 배뱅이 굿 等 民俗노래 吹入에 熱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한便 漫談家人 장소팔과 어울려 才談과 함께 民俗노래를 불렀던 이은관. 이은관 장소팔 콤비의 才談과 노래는 그 當時 中年이나 老人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층에서 많은 팬을 얻고 喝采를 받기도 했습니다. 장소팔과 함께 公演을 繼續하면서 배뱅이굿이라는 映畫에 出演해 獨特한 窓과 함께 能熟한 演技를 보여주기도 했던 이은관은 얼마後 세운상가에 民俗藝術學院을 設立하고 民俗노래는 勿論 伽倻琴 古典舞踊等을 가르쳐 後輩養成을 하기 始作했습니다. 16歲때 20歲의 神父와 親戚仲媒로 結婚을 했으나 8·15解放 이듬해 傷處를 하고 收復 後에야 남상옥氏와 再婚을 한 이은관은 83歲의 老父親으 모시고 있으면 1男 5女 中 出嫁한 歲딸들에게서 이미 外孫子들이 태어나 9名. 外孫子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이은관. 이은관은 舞臺에서 或은 放送局 마이크 앞에서 그리고 또 或은 吹入으로 끈질기게 民俗노래를 불러 온 지난 30年을 다음과 같이 回顧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가지 조금 後悔라고 할까요. 조금李禔 겸연적은 것은요. 제가 固有한 民俗音樂을 가지고서 너무 劇場舞臺에서 活躍할 때에 民俗的인 原形에서 조금 벗어난 노래. 웃음거리 才談. 노래 부를적에 조금 우습게 부른 일. 이런 일을 只今 생각하면는 조금 나이가 먹고 보니까 조금 그런 面에서 부끄러운 생각이 있고, 이제부텀은 原則的인 民俗音樂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懇切합니다. "

흔하지 않고 어쩌면 그대로 消滅해 버렸을지 모르는 우리 民族 固有의 民俗노래를 어느때는 외롭게 또 어느때는 熱狂的인 喝采속에 불러왔던 이은관. 이은관은 이제 自己의 無形의 財産. 古典으로 이어져 나가야만할 民俗노래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後輩養成에 盡力을 하면서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只今은 동대문구 窓信徒에 있는 古風의 韓屋에 살면서 30年 흘러간 歲月을 되세기며 그리고 어느 때는 그 누구보다도 반가웠던 8·15 祖國光復 그 날의 感激을 되돌아 보면서, 團欒한 生活을 하고 있는 이은관. 그러나 아직도 民俗의 노래 부르는 것을 唯一의 使命이요 보람으로 알고 있는 이은관은 國內舞臺는 말할것도 없고 멀리 日本에 가서 僑胞들을 慰問했으며 또 앞으로도 繼續 慰問公演을 하기 위해서 逃逸할 豫定입니다.

물레야 돌아라. 살살 돌아라. 媤父母들 들어온다. 매 맞는다. 물레가락은 살살 도는제 기지게만 절로 난다. 물레타령 이은관의 목소립니다.


♪ 물레타령

只今은 덧없이 흘러가 버린 30年이지만 그 30年 동안 지켜온 民俗을 이제는 다시 또 누군가가 이어가야 할 民俗노래. 아직도 情熱이 넘쳐 흐르는 그는 이미 自己보다 더 훌륭하게 無形의 遺産을 이어갈 後輩를 養成해 놓고 있을 것입니다.

(入力일 :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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