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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年 뒤의 世上을 잘 모르겠다면, 人材가 신바람 나는 組織文化를 만들어라” | 리더십 | D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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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손욱 前 삼성종합기술원 院長이 본 李健熙 리더십

“5年 뒤의 世上을 잘 모르겠다면
인재가 신바람 나는 組織文化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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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年 故(故) 이건희 三星電子 會長이 就任 이듬해 第2의 創業 宣言을 통해 經營 理念으로 强調한 것은 ‘自律 經營’ ‘技術 重視’ ‘人間 尊重’이었다. 이 같은 理念을 提示한 背景에는 組織의 文化(culture)를 根本的으로 바꾸고 構成員 個個人을 尊重해야만 ‘世紀 末 生存’을 擔保할 수 있다는 切迫함이 있었다. 1993年, 三星의 核心 關係社의 任員 200餘 名을 獨逸 프랑크푸르트에 집결시켜 68日間 유럽 産業 現場을 둘러본 것도 모든 經營陣이 世界 ‘一流’가 되는 데 必要한 組織文化를 直接 보고 느끼게 하려는 目的이었다. 아날로그 時代를 발로 찬 方向으로 곧장 날아가는 蹴球공에, 디지털 時代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에 比喩하며 變化하는 世上에 對備할 것을 注文했던 李 會長의 리더십을 돌아본다.



    “2000年 京畿道 龍仁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그룹 社長團의 5個年, 10個年 計劃을 쭉 듣고 난 故(故) 李健熙 會長이 이렇게 묻더라고요. 5年 뒤, 10年 뒤 世上이 어떻게 바뀔지 當身들 눈에 보이냐고. 本人은 世上이 어디로 갈지 到底히 모르겠다며, 只今 할 수 있는 건 어떤 未來가 닥치든 能動的으로 對應할 人材를 키우고 그들이 創意的으로 일할 수 있는 組織文化를 만드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이 會長의 經營 哲學이기도 합니다.”

    京畿道 龍仁市 自宅 隣近에서 만난 손욱(75•寫眞) 前 삼성종합기술원 院長은 오래 至近距離에서 輔弼했던 故(故) 이건희 三星電子 會長에 對해 “人材와 創意的 組織文化의 힘으로 不確實性의 時代를 突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리더”라고 評價했다. 三星SDI(舊 삼성전관) 社長, 삼성인력개발원 院長, 삼성종합기술원 院長, 농심그룹 會長 等을 歷任한 孫 前 院長은 40餘 年을 그룹에 몸담으며 創業主 이병철 選對 會長과 李 會長의 核心 參謀로 일했던 三星 歷史의 산證人이다. 1993年 6月 이 會長이 낡은 業務와 思考方式을 버리라며 經營陣에게 “마누라와 子息 빼고 다 바꾸라”고 一喝했던 것으로 有名한 獨逸 ‘프랑크푸르트 宣言’ 當時 三星電子 祕書室 팀長으로 李 會長을 遂行하기도 했다. 三星의 經營 哲學이 構築되는 過程을 모두 지켜본 孫 前 院長에게서 이 會長의 리더십은 어땠는지, 그의 行步가 이 時代 企業人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DBR(동아비즈니스리뷰)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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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如前히 ‘管理의 三星’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李 會長이 組織文化를 强調하게 된 특별한 契機가 있나.

    이병철 選對 會長은 주어진 目標를 向해 전 構成員이 一絲不亂하게 움직이는 ‘管理의 三星’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李健熙 會長이 先親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은 1987年은 三星에는 危機의 時期였다. 1980年代 以前까지만 해도 三星이 韓國에서 壓倒的 1等 企業이었지만 1980年代 접어들자 財界 順位가 흔들리기 始作했고 就業 選好度 等 여러 側面에서 현대, 大宇에 밀렸다. 特히 當時 景氣에 敏感한 低附加價値 技術 爲主였기 때문에 1979年 第2次 午日쇼크를 겪으며 甚한 打擊을 입었고, 2年間은 新入 社員을 아예 뽑지 못했다. 李 會長은 이를 지켜보면서 ‘三星이 왜 最高의 人材를 뽑고 敎育하는데도 繼續 뒷걸음질 치는지’를 苦悶했고, 結果的으로 리더십과 組織文化가 問題라고 診斷했다. 變化의 速度가 빨라지면서 더 能動的인 組織文化를 가진 현대와 大宇에 主導權을 빼앗겼다고 본 것이다.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創意的으로 일할 사람들이 必要했고, 그러려면 ‘管理의 三星’ 틀을 깨야 했다. 그가 就任 이듬해였던 1988年, 第2 創業 宣言을 통해 ‘自律 經營’의 理念을 가장 앞에 내세운 理由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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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 會長이 말한 自律 經營은 무엇이고, 實際 그룹에 어떤 變化가 생겼나.

    基本的으로 누구나 시켜서 일할 때는 신바람이 안 나니까, 職員들이 스스로 責任 意識을 갖고 成就하도록 하자는 게 自律 經營의 核心이다. 그래야 創意力이 發揮되고 能力을 꽃피울 수 있지 않나. 이 選對 會長은 늘 일정한 時間에 出勤하고, 退勤하고, 目標를 指示하고, 管理하는 定型化된 시스템대로 움직였다. 이와 달리 이 會長은 社長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責任을 附與했다. 오직 人材 敎育만 直接 챙겼다. 元來 京畿道 龍仁 삼성인력개발원에는 湖巖館이라는 硏修院밖에 없었는데, 이 會長이 여기에 ‘創造館’이란 더 큰 硏修院을 짓고 直接 人力開發院長으로서 語學코스 等 敎育 프로그램을 싹 바꿨다. 아울러 全國에 敎育長들을 만들고 創意 敎育을 强調했다.

    新經營을 외친 ‘프랑크푸르트 宣言’ 때 隨行팀長을 맡았는데 기억나는 逸話가 있나.

    그때 祕書室 發令받은 지 얼마 안 된 初任 팀長이었다. 獨逸行 飛行機에 오르기 前날 이 會長이 日本에서 約 13年間 三星의 顧問이었던 技保 마사오, 후쿠다 다미오 等 日本 專門家 4名과 三星電子의 높은 不良率 等의 問題에 對해 새벽까지 討論하고 아침에 日本 顧客社까지 만나 한숨도 못 잔 狀態였다. 當然히 飛行機에서 푹 주무시고 便하게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離陸하자마자 書類 가방에서 顧問들의 堤堰이 담긴 報告書들을 꺼내더니 ‘大體 왜 이런지 答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더라. 報告書의 內容은 大略 이랬다. 部品을 썼으면 原位置에 돌려놓고, 測定器도 다음 次例를 위해 管理하고, 데이터도 다른 사람들과 共有하기 위해 남겨 놓는 게 整理整頓의 基本인데 三星 硏究•開發者들은 13年間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變하지 않으니 이 會長이 直接 나서 解決하라는 結論이었다. 6名의 遂行 팀員이 머리를 싸매고 規則이 없어서, 敎育을 못 받아서, 處罰이 弱해서 等의 理由를 찾았지만, 獨逸에 到着할 때까지 3番이나 退字를 맞았다. 宿所에 가서도 子正이 되도록 宿題를 하고 있으니 오죽 딱했으면 홍라희 女史가 “이제 그냥 答을 알려주고 자러 보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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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答이 뭐였나.

    10餘 時間 宿題 끝에 해주는 말이, 모든 問題는 ‘職員들이 自己 自身을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거라고 하더라.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理解가 안 갔다. 李 會長의 說明은 이랬다. 部品, 道具, 데이터 等 모든 걸 整理하는 건 다른 同僚를 위한 일이고, 다른 同僚들에게 베풀면 結局 그들도 나에게 똑같이 해줄 것이므로 整理整頓은 곧 自己 自身을 사랑하는 일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現在 三星의 問題는 職員들이 自己 自身, 同僚를 그만큼 아끼지 않고 있는 거라며 新經營은 結局 ‘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世界 一流 企業으로 跳躍하기 위해서는 職員들의 일하는 環境, 文化를 바꿔야 한다는 게 要旨였다. 李 會長이 내세운 ‘自律 經營’의 밑바탕에는 構成員들이 幸福한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人間 尊重의 믿음이 깔려 있었다.

    新經營 宣言 때 三星 關係史 任員 200餘 名을 프랑크푸르트로 불러 68日 동안 유럽, 日本의 一流 企業들을 탐방했다고 들었다.

    事前에 計劃된 探訪은 아니었다. 日本 顧問들의 報告書를 본 이 會長이 會社가 亡할 수 있다는 切迫함에 到着한 바로 다음 날 關係史 任員들을 召集한 것이었다. 그는 三星이 韓國 1等인데도 抱川 500大 企業 中 꼴찌 企業들과 比較해도 일하는 方式이나 생각하는 方式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참 못 미친다며 글로벌 競爭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任員이 一流를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고 判斷했다. 그리고 유럽과 日本 駐在員들에게 ‘世界 一流를 全部 찾아라’는 미션을 던진 뒤 200餘 名이 自動車부터 百貨店, 에어버스, 헬리콥터, 다리 等에 이르기까지 世界 一流의 製品과 인프라들을 經驗을 통해 體得하게 했다. 그리고 每日 全員이 任員 出張費로는 堪當할 수 없는 유럽 最高級 호텔인 켐핀스키에서 묵으며 밤새 느낀 點을 討論했다. 韓國의 業務는 實務者들에게 맡기고 電話조차 받지 말고 沒頭하라고 注文했다. 職員들은 任員이 없어야 일을 더 잘할 수 있으며 아래 職級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時間에 任員은 任員의 일을 하라는 說明이었다. 李 會長에 따르면 任員이 해야 할 일은 5年 뒤, 10年 뒤를 爲한 戰略을 짜는 것이었다.

    會長과 討論하면 다들 말을 잘 못할 것 같은데 水平的 對話가 可能한가.

    이병철 選對 會長은 카리스마가 있고 數字 하나라도 틀리는 걸 容納하지 않았기 때문에 經營陣이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會長의 境遇는 끊임없이 質問하는 理由가 追窮이라기보단 스스로 생각을 精製하기 위한 目的인지라 모르면 모른다고 率直하게 말해도 됐다. 李 會長이 높은 地位에 있다고 무게를 잡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몇十 名이 앞에 앉아 있으면 말도 잘 못했다. 新經營 宣言 以後 約 1年에 걸쳐 신들린 듯이 7∼8時間 넘도록 講演을 하면서 經營 理念을 組織에 퍼뜨리는 것을 보고 놀랐을 程度다. 그만큼 會社가 變해야 한다는 切迫함이 컸던 것 같다. 普通은 3人用 소파 正 가운데 앉아 兩옆에 資料를 쌓아놓고 앉아서는 밤새 質問하고, 듣는 것을 좋아했다. 需要 任員會議 때도 다섯 番은 ‘왜’를 물으면서 現象의 表面이 아니라 根本的인 問題를 찾을 때까지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이렇게 探究하고, 質問하고, 問題의 根源을 解決하려는 態度는 이병철 會長, 李健熙 會長, 이재용 會長 3臺로 이어져 내려오는 遺産이다.

    ‘왜’라는 質問을 繼續 받으면 經營陣도 緊張할 것 같다.

    緊張하면서 함께 ‘왜’를 苦悶하게 된다. 假令, 會社의 占有率이 떨어졌다고 報告할 때도 ‘그건 왜 그렇지’를 다섯 番은 묻는데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眞짜 核心이 무엇인지 輪廓이 드러난다. 1999年 삼성종합기술원 院長으로 있을 때도 이 會長이 三星의 未來 먹거리가 무엇인지를 하도 물어봐서 내놓은 答이 바로 ‘바이오’였다. 分明 앞으로의 時代에는 바이오와 IT의 融合이 話頭가 될 텐데 ‘왜 三星엔 바이오가 없지?’의 質問에서 出發한 것이었다. 1980年代 제일제당에서 바이오産業을 始作하긴 했는데 系列 分離가 되면서 떨어져 나간 狀態였다. 그때 바로 삼성종합기술원이 100餘 名의 바이오 核心 人材들을 迎入했고, 그들이 主軸이 돼 일군 會社가 現在 三星바이오로직스, 三星바이오에피스다. 예전에 三星SDS의 韓 社長이 黑字 轉換을 기뻐하며 報告했다가 ‘왜 三星SDS가 黑字를 내야 하냐’며 작은 利益을 좇는 것보다 三星SDS의 소프트웨어로 三星電子의 生産性을 높이는 게 훨씬 價値가 큰 일 아니냐고 물어 該當 經營者를 當惑스럽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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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經營 當時 三星憲法度 發表했다.

    三星憲法에는 ‘人間味, 道德性, 禮儀凡節, 에티켓’이 包含됐다. 처음에 祕書室 팀長級들한테 新經營을 위해 憲法을 만들라고 指示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苦悶을 해도 憲法 條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漠漠한 거였다. 너무 어렵다고 以實直告하자 이 會長이 이 네 가지를 直接 불러줬다. 禮儀凡節과 에티켓은 같은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民族은 老人恭敬 같은 禮儀凡節이 이미 몸에 배 있다. 하지만 에티켓은 다르다. 곰湯집을 하는데 靑年 둘이 들어와서 곰湯 두 그릇을 시키고, 조금 있다가 老人 2名이 들어와 똑같이 곰湯 두 그릇을 시켰다고 하자. 두 그릇을 靑年들에게 먼저 주는 것은 順序를 지키는 에티켓이고, 老人들에게 먼저 주는 것은 禮儀凡節이다. 생각이 있는 主人이라면 靑年들에게 비록 1∼2分 間髮의 差異겠지만 老人들을 먼저 待接해도 되는지 諒解를 求하고 드리는 게 에티켓과 禮儀凡節을 모두 充足시키는 答이다’라고. 李 會長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에티켓과 韓國人 DNA에 박힌 禮儀凡節, 이 모든 걸 잡아야 一流가 될 수 있다고 봤다.

    1995年 3月 龜尾工場에 쌓아둔 5000萬 달러어치 不良品을 불태운 ‘애니콜 火刑式’도 有名하다.

    新經營 宣言을 하기 前에 三星그룹 社內 放送局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作業 現場들을 撮影한 적이 있는데 이때 洗濯機 工場에서 職員들이 플라스틱 不良 部品이 發見됐을 때 返品하는 게 아니라 面刀칼로 泰然하게 깎아 쓰는 게 捕捉됐을 程度로 品質 問題가 深刻했다. ‘그래도 되는 거 아니냐’고 넘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會長은 이를 보면서 ‘아, 會社가 亡하겠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1994年에는 삼성전자 無線事業部 不良率이 無理한 製品 出市로 11.8%까지 치솟았다. 新經營 以後에도 携帶電話의 缺陷이 繼續해서 發見되자 이 會長은 이를 크게 叱責했고, 2000餘 名의 任職員이 지켜보는 가운데 ‘品質은 나의 人格이요, 自尊心!’이란 懸垂幕을 내걸고 電話機 15萬 臺를 불구덩이에 내던졌다. 이런 衝擊療法이 있었기 때문에 不良率이 2%臺로 떨어졌고 品質 經營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製品에 對한 期待値가 높았던 것 같다.

    李 會長은 無條件 ‘월드 베스트’를 志向했다. 恒常 世界에서 가장 앞서가는 企業, 製品과 우리의 現在 位置를 比較하도록 했다. 先進 製品 比較 展示會도 열었다. 水原에 있는 室內體育館에서 每年 會社別로 自己 製品을 世界 1等과 하나부터 열까지 比較하며 會長 앞에서 發表해야 한다. 三星이 더 나은 部分, 비슷한 部分, 더 떨어지는 部分을 分析한 뒤 改善案을 내놓아야 했다. 問題는 全 過程을 錄畫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해 그 約束을 어떻게 履行했는지 다시 같은 자리에서 報告해야 했다. 이처럼 先頭走者가 基準이기 때문에 會社 經營陣 立場에선 壓迫도 컸지만 그만큼 一流라는 自負心도 가질 수 있었다.

    李 會長의 人材 사랑도 각별했다고 하던데...

    1990年代 美國 企業들이 成長하면서 소프트웨어의 時代가 왔고, 많은 豫測家는 全 世界 産業의 構造가 ‘하드웨어 100%’에서 ‘소프트웨어 100%’로 옮겨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들 같으면 그냥 트렌드라고 읽고 넘어갔겠지만 이 會長은 바로 情報通信技術(ICT)의 時代를 豫見하고 소프트웨어 人力 1萬 名 陽性을 注文하며 닥치는 대로 뽑고 人事 部門에 해마다 採用 現況을 報告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人力을 모아놓고 무슨 일을 시킬지조차 몰라 混亂이 있었지만 이들이 結局 三星電子를 世界的인 IT 企業으로 키우는 原動力이 됐다.

    또 ‘S級 人材 1名이 10萬 名을 먹여 살린다’는 發言도 有名하지만 高級 人力을 迎入하기 위해서는 破格的인 年俸과 인센티브도 不辭했다. 이런 S級 人材 모두가 卓越한 成果를 낸 것은 아니지만 全 世界의 頭腦를 吸收하는 이 같은 戰略은 그룹에 새로운 文化와 革新의 아이디어를 심는 데도 크게 寄與했다.

    只今의 三星 組織文化가 이 會長의 바람대로 正말 水平的, 創意的, 自律的인가.

    리더의 생각이 組織 全體로 퍼지고 定着하는 데는 時間이 걸린다. 特히 韓國처럼 變化가 短期間에 壓縮的으로 일어날 때는 여러 모습이 婚材돼 나타날 수밖에 없다. 當然히 삼성그룹 안에도 創意와 自律을 尊重하고 이를 바탕으로 책임지고 일하는 職員이 있는가 하면 權威的이고 甲질을 일삼는 職員도 섞여 있다. 그렇지만 이 會長이 一線에서 組織을 陣頭指揮한 10餘 年間 垂直的인 文化가 水平的으로 變한 것만큼은 분명한 事實이다. 아마 病席에 눕지 않고 10年 程度만 더 健康하게 組織을 이끌었더라도 그런 文化가 더 빨리 定着되고 創意의 씨앗이 꽃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三星의 組織文化가 完璧한 一流인지를 묻기 前에 三星의 글로벌 位相과 比較했을 때 大韓民國 全體 水準이 一流인지를 反問해볼 必要도 있다. 李 會長도 絶對 三星 혼자서만 努力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國家 全體의 文化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創意的 文化를 정착시키기 위한 課題는.

    政治 環境이 自由市場經濟를 只今보다 尊重하고 自由와 創意가 살아날 수 있는 企業 生態系 造成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三星, LG는 1950∼60年代 자리 잡은 會社들인데 1970年 美國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나왔고, 1990年代 末∼2000年代 初에 걸쳐 아마존, 페이스북, 中國의 알리바바 等이 登場했다. 世界的으로 20年 單位로 企業 生態系가 變하는 흐름이 있고, 알리바바처럼 存在하지 않던 會社가 世界 屈指의 會社가 돼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2000年 무렵 네이버, 카카오 等이 出現했지만 재갈이 물려 있어 世界로 뻗어나가지 못했고 旣存 大企業 集團의 뒤를 잇는 後續 企業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企業 生態系를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衰落할 일밖에 없다. 窮極的으로는 이스라엘처럼 創業이 活潑하게 일어나는 創業 王國이 돼야 한다. 이제는 1人이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技術을 만들고 全 世界와 連結될 수 있는 디지털 時代다. 韓國 젊은이들은 只今 이 時間에도 公務員 試驗, 大企業 試驗에 應試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데 超連結 時代인 만큼 各自의 才能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키우고 마음껏 活躍할 수 있어야 한다.

    三星에 없는 것, 그리고 向後 課題를 꼽는다면.

    먼저, 아직은 世上에 없는 것(new to the world)을 내놓은 經驗이 없다. 韓國에 없는 것(new to korea)을 선보인 적은 있지만 韓國 最初일 뿐이다. 半導體 메모리든, 디스플레이든 出發은 美國의 技術이었다. 스마트폰도 援助는 아니지 않나. 그런 側面에서 世界 最初를 내놓는 게 必要할 것 같다.

    向後 課題로는 ‘나눔(Share)’을 꼽고 싶다. 李 會長 生前에 切親한 사이였던 日本 시네마縣 이즈모詩의 이화쿠니 데쓴도 前 市長은 三星 新經營 20周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三星(三星)李 3星(3Stars)’이었는데 新經營을 통해 ‘Study’ ‘Service’ ‘Sense’ ‘Speed’의 4星(4Stars)이 돼 世界的 企業의 班列에 올랐다. 여기에 또 하나의 成人 ‘Share’萬 더한다면 偉大한 企業이 될 것’이라는 說明이었다. 이처럼 삼성그룹에 남은 한 가지는 바로 나눔, 바로 企業의 共有價値 創出(CSV, Creating Shared Value)이다. 文化를 바꾸고, 價値를 만들어내야 한다.

    社會的 價値의 側面에서 이 會長의 리더십을 돌아본다면.

    李 會長은 그룹을 넘어 全體 産業 生態系와 인프라를 생각한 리더였다. 大部分의 사람이 삼성그룹이 自動車 産業에 뛰어든 걸 失敗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애初에 이 會長이 自動車 産業에 欲心을 냈던 까닭은 本人이 造詣가 깊었던 것도 있지만 美國, 日本, 獨逸처럼 輸出이나 産業 構造 맨 꼭대기에 自動車가 있는 國家들이 一流 國家로 成長하는 걸 目擊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電子 産業이 맨 위에 있는데 製造業의 꽃인 自動車를 硏究하는 人材와 인프라가 튼튼하게 깔려 있지 않으면 創造 經濟의 씨앗을 틔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內部의 많은 反對에도 不拘하고 全 世界 有數의 自動車 會社로부터 人材를 迎入하고, 工場을 짓기도 前에 大規模 硏究所부터 세웠다. 첫 試製品 모델이 美國 技術 評價 1等을 했을 程度로 R&D에 大大的인 投資를 아끼지 않았다. 現代•起亞車도 三星의 人材 養成과 硏究 인프라 投資에 刺戟을 받아 이를 뛰어넘을 南陽 硏究所를 지었고, 三星의 試製品 모델을 解體해 뜯어보면서 技術을 高度化했다.

    産業 인프라를 構築한 것이 社會的 寄與라는 意味인가.

    그렇다. 家電 部門에서 三星과 LG가 競爭하면서 韓國의 ICT 生態系를 키워갔듯이 萬若 三星이 自動車 産業을 繼續 끌고 갔다면 現代•기아차와 치고받으면서 大學, 硏究所, 産業界 等에 걸쳐 自動車 硏究 人力과 인프라가 只今의 2∼3倍는 더 탄탄하게 成長하고 世界 一流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처럼 이 會長은 韓國 産業 構造 全體를 苦悶하고 5∼10年을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經營 元老로서 韓國의 經營者들에게 마지막으로 當付할 말은.

    끝으로 다시 한番 强調하자면 ‘바보야. 重要한 건 文化야(Stupid. it’s the culture)’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이게 이 會長이 남긴 메시지이기도 하다. 21世紀는 文化가 말하는 時代다. 人間의 水準이 繼續 업그레이드돼서 知識은 差異 나봤자 스마트폰만 누를 줄 알면 5分 빠르고 늦는 程度다. 이제 知識으로는 競爭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企業이 더 創意的이고, 挑戰的이고, 비즈니스로 世界를 連結할 수 있느냐가 關鍵이다. 人材를 틀에 가두지 말고, 尊重하고, 職員들이 幸福한 일터를 만들어 이들이 신바람 나서 才能을 發揮하게 하면 正말 奇跡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李 會長 就任 當時 利益 1兆 원을 꿈꾸던 三星이 只今의 三星이 됐듯이 말이다.

    DBR mini box : 李健熙의 ‘記錄 哲學’
    “잘못한 것도 記錄하라… 그래야 失手를 反復 안 해”

    巨匠이란 나이가 아닌 經驗과 實力, 自信感으로 그 分野나 社會를 이끄는 사람을 말한다. 나라의 巨匠이 失踪된 지는 오래됐고, 各 分野의 巨匠이 必要한 時期에 또 한 분의 巨匠이 떠나갔다. 筆者는 1996年, 三星의 半導體事業이 어떻게 始作돼 어떤 過程을 거쳤는지 記錄하는 일을 맡았다. 當時 전•현직 任職員들의 記憶과 經驗을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들과의 인터뷰를 모두 錄音했다. 하지만 그런 作業을 憂慮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故(故) 李健熙 會長에게도 그런 報告가 올라갔던 것 같다. 이에 李 會長은 關聯 任員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 얘기한다고 생각하고 作家에게 아는 것을 다 말해주라.”

    故人은 1997年에 펴낸 에세이集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끈氣 있게 ‘生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그것이 重要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後날 判明되며, 歷史의 差異는 곧 記錄의 差異다. ‘生데이터’를 남겨 보라. 내가 只今 말하는 것들을 全部 記錄으로 남겨 保存하라. 그것이 三星의 歷史이고, 各 팀의 歷史가 되고, 財産이 된다.”

    “國家든, 企業이든, 個人이든 失手를 反復하지 않도록 記錄을 잘하고 歷史에서 敎訓을 찾는 나라일수록 一流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記錄 文化가 너무 없다. 무엇인지를 規則的으로 記錄한다는 것 自體를 귀찮아 한다.”

    “日本과 유럽의 50年 된 會社와 5年 된 會社의 差異는 바로 過去의 데이터 差異다. 그러니 三星은 모든 것을 記錄으로 남기고 公開해 탄탄한 記錄 文化를 構築해야 한다.”

    筆者는 日本과 獨逸의 記錄 文化를 直接 經驗한 적이 있다. 日本에 가서 인터뷰를 要請하니 열에 아홉은 작은 가방을 들고 왔다. 가방 안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꼼꼼하게 記錄해 놓은 手帖이 가득 들어 있었다. 韓國에서 인터뷰를 要請하면 大部分 빈손으로 나타나는 것과 對照的인 모습이다.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訪問한 現地 企業에는 모두 記錄觀이 있었다. 記錄管이라고 하지만 形式은 그다지 神經 쓰지 않았다. 建物 入口, 複道 或은 작은 房에 會社의 成長과 變遷史를 記錄한 寫眞과 年表, 옛 設備機械, 生産品 等의 記錄物을 모아 놓은 程度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記錄에 對한 認識과 習慣을 充分히 느낄 수 있었다.

    故人이 말했듯이 日本과 獨逸은 世界的으로 記錄 文化가 가장 앞선다는 評價를 받는다. 또 世界 1, 2位로 많은 長壽 企業을 가진 國家다. 2次 世界大戰 敗戰國에서 製造業을 基盤으로 한 輸出 經濟로 일어선 것, 탄탄한 記錄 文化가 뒷받침돼야 하는 機械工業, 精密機械工業 强國이라는 點도 두 나라의 共通點이다. 記錄 文化를 基礎로 製造 强國이 되고, 世界 1, 2位의 長壽企業 國家로 成長했다는 解釋이 큰 無理는 없다.

    다른 한便, 1897年에 設立된 日本의 야마이치證券은 1997年, 創業 100年이 되던 해에 破産했다. 2600億 엔에 이르는 簿外債務(簿外債務, 帳簿에 計上되지 않은 債務)가 破産의 決定打였다. 7500餘 名의 任職員이 하루아침에 職場을 잃고, 日本 經濟에도 엄청난 打擊을 줬다. 그로부터 20年 後인 2017年 11月를 企劃한 日本 言論들이 만난 야마이치證券의 옛 任職員들이 異口同聲으로 말했다.

    “우리들이 맡은 業務나 分野에서 正直하고 率直한 報告書를 안 쓴 게 가장 후회스럽다. 그랬기 때문에 會社에 堪當할 수 없는 請求書가 돌아왔다.”

    正直하고 率直한 報告書는 企業이나 組織의 記錄 文化의 가장 基礎다. 잃어봐야 알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筆者가 半導體 歷史를 記錄한 原稿가 나오자 三星 內部에서 檢討에 들어갔다. 意見이 갈렸다. 괜찮다는 意見과 너무 많은 事實을 記錄했다는 意見이 있었다. 意見이 繼續 갈리자, 이 記錄을 처음 指示한 李健熙 會長의 判斷에 맡기기로 했다. 손보지 않은 原稿를 읽은 이 會長은 簡單하게 結論을 내려줬다.

    “記錄이란 우리에게 유리한 面도 있고 不利한 面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作家가 解釋한 記錄이라면 受容하지 않을 수 없다.”

    故人이 남긴 생각과 經驗을 記錄으로 남기는 건 우리 몫이다. 누군가 故人의 생각과 經驗을 더하거나 빼려고 할지도 모른다. 으레 그런 게 記錄이라는 認識이 우리 社會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筆者는 故人이 떠난 只今, 故人이 남긴 아래 메시지를 企業들이 새길 必要가 있다고 强調하고 싶다.

    “事故를 낸 것, 잘한 것, 不便한 것 等을 整理하고 模樣이 좋지 않아도 生情報를 그대로 남겨 놓아야 한다.”


    유귀훈 記錄作家 兼 컨설턴트 yoohun@gmail.com
    筆者는 성균관대 新聞放送學科를 卒業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아모레퍼시픽 等의 企業社를 執筆했으며 現在 프리랜서 記錄作家 兼 컨설턴트로 活動하면서 各 企業 歷史에서 배우는 비즈니스 敎訓을 傳達하고 있다. 著書로 『私私製作法』 『유귀훈의 記錄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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