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王은 31名의 백제王들 가운데 가장 미스터리한 人物이다. 金富軾은 三國史記에 武王이 先王인 法王의 아들이라고 記錄했지만, 武王을 ‘江華도령’ 哲宗처럼 草野에 묻혀 살던 傍系 王族으로 보는 學者가 많다. 特히 三國遺事에는 그에 關한 흥미로운 記錄이 실려 있다. 그는 寡婦 어머니와 蓮못의 龍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 마를 캐며 살았고, 智略을 發揮해 新羅 眞平王의 딸 善花公主와 結婚하였으며, 後에 人心을 얻어 백제의 王이 되었다는 스토리다.
그는 600年부터 641年까지 長期間 王位에 있었지만 泗沘都城 一圓에서 그의 痕跡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益山에 그와 關聯한 傳承과 遺跡이 남아 있고 一部 文獻에는 그가 益山으로 都邑을 옮겼다는 記錄이 실려 있다. 게다가 近來까지 그러한 記錄을 뒷받침해주는 發掘 成果가 조금씩 쌓여 어느새 武王의 益山薦度說이 힘을 받는 模樣새다. 武王은 果然 益山으로 都邑을 옮겼을까.
○ 日 교토 寺刹에서 發見된 실마리
1970年 日本에서 百濟史 關聯 重要 記錄 하나가 公開됐다. 교토의 한 寺刹에 所藏된 觀世音應驗機라는 古書에 ‘百濟 무강왕이 智謀密旨로 遷都했다. 639年 번개가 쳐 帝釋情事가 불탔다. 塔 아래의 여러 寶物 中 佛舍利가 든 甁과 金剛經을 담은 목칠함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內容이 쓰여 있었다.
1970年代 後半부터 이 記錄을 活用한 硏究가 本格化했고 學者들은 무강왕을 武王, 智謀密旨를 益山으로 推定하면서 益山千圖說을 主張했다. 이와 달리 이 記錄의 信憑性에 疑問을 품는 見解도 나왔다. 佛舍利의 영험함을 보여주려 誇張해 敍述한 것이므로 史料로 活用하기 어렵다는 論理이다.
그런데 이 記錄의 信賴度를 높여주는 遺跡이 2003年에 모습을 드러냈다. 圓光大 博物館이 帝釋寺址 北쪽에서 639年 帝釋寺 火災 때 불탄 기와, 壁體, 小組佛像 彫刻들의 廢棄場을 確認한 것이다. 또한 1965年 發見된 왕궁리 5層 石塔 속 舍利器와 錦江經板이 觀世音應驗기에 描寫된 그것과 비슷하다는 點에 注目하는 硏究도 같은 해에 나왔다. 卽, 元來 帝釋寺 木塔에 安置되었던 舍利器와 錦江經板이 火災 以後 왕궁리 5層 石塔에 다시 奉安되었을 것이라는 主張이다.
○ 南北으로 492m, 東西로 234m인 王宮터
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는 1989年부터 왕궁리 5層 石塔 周邊에 對한 發掘에 나섰다. 當初 寺刹의 規模와 性格 等을 確認하는 程度에서 그칠 豫定이었지만 塔 南쪽에서 停電(正殿) 性格의 大型 建物址가 確認되는 等 王宮으로서의 面貌가 確認되면서 全面 調査를 통해 王城의 構造를 確認하는 쪽으로 調査의 方向이 틀어졌고 33年이 지난 只今도 發掘은 繼續되고 있다.
그 사이 南北으로 492m, 東西로 234m에 達하는 네모난 空間에 井然한 담牆을 돌리고 그 안에 다양한 建築物을 配置한 백제 宮闕터가 次例로 속살을 드러냈다. 南쪽 區域에서는 建物터들이, 北쪽 區域에서는 自然美를 갖춘 後援이 調査됐다. 後援의 西쪽 낮은 空間에서는 貴金屬攻防터와 大型 化粧室 痕跡이 確認됐다.
初期부터 遺跡地 곳곳에서 凡常치 않은 遺物이 쏟아졌다. ‘上部乙와(上部乙瓦)’, ‘下部乙와(下部乙瓦)’, ‘水夫(首府)’ 等 名門이 새겨진 기와가 出土된 것이다. 特히 ‘水夫’名 기와는 泗沘都城 以外에서는 出土되지 않는 것으로, 水夫란 王이 居處하는 首都를 의미한다는 點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間의 發掘을 통해 먼저 백제의 旺盛이 建築되었고 그 以後 時期에 一部가 節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發掘 結果만을 놓고 보면 이 遺跡을 백제의 王宮으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 小王陵의 主人은 善花公主?
1917年 朝鮮總督府 職員들은 博物館 展示品 確保를 名分으로 백제 古墳 發掘에 나섰다. 發掘 對象에 益山 雙陵이 包含됐다. 雙陵은 武王 夫婦의 陵으로 高麗 忠肅王 때 盜掘 當했다는 옛 記錄이 있기 때문이다. 대왕릉에서는 保存狀態가 良好한 木棺과 함께 玉으로 만든 허리띠裝飾, 半破된 土器 等이 出土됐지만 小王陵에는 木管 裝飾品 몇 點만이 남아 있었다. 以後 오랫동안 대왕릉은 王, 小王陵은 王妃의 무덤으로 여겨졌다.
2009年 1月, 미륵사지에서 緊急뉴스가 打電됐다. 石塔 解體 過程에서 舍利공이 發見되었고 그곳에서 나온 舍利봉영기에 武王의 王妃가 ‘百濟 佐平 舍宅積德의 딸’이라는 글句가 새겨져 있다는 內容으로, 이 消息은 善花公主의 實存 與否를 둘러싼 論爭을 觸發했다.
2015年 國立錢主博物館이 刊行한 雙陵 發掘報告書는 이러한 論爭을 격화시켰다. 博物館 硏究員들은 대왕릉에서 收拾된 齒牙 4點이 20, 30代 女性의 것이라는 專門家의 意見을 參考하는 한便, 出土된 土器를 新羅系로 보면서 무덤 主人公이 善花公主日 可能性을 剛하게 示唆했다. 關聯 內容이 言論에 連이어 報道되면서 社會的 關心이 高調되자 政府 當局은 雙陵에 對한 再發掘을 決定했다.
2018年 원광대 馬韓百濟文化硏究所 硏究員들이 대왕릉의 무덤房 入口를 다시 열었을 때 그 속엔 나무箱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여니 人骨 篇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日人들이 發掘한 다음 人骨을 別途로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國立文化財硏究所는 法醫學者들과 共同 硏究를 進行한 다음 ‘뼈의 主人公은 腎臟이 最大 170.1cm, 7世紀 初中半의 어느 時點에 世上을 뜬 60, 70代 男性이며, 武王日 可能性이 있다’는 結果를 내놓았다. 以後 대왕릉에 묻힌 人物이 武王日 것으로 보는 見解가 大勢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益山에는 武王과 關聯한 傳承과 遺跡이 存在한다. 王宮, 王室寺刹, 王陵이 모두 確認되었기 때문에 益山에 새로운 王道가 建設되었을 公算이 크다. 다만 아직 王宮 周邊의 道路網, 百姓들의 居住 區域 等이 제대로 發掘된 바 없어 새로운 王道가 어느 程度의 範圍에 어떤 모습으로 세워져 기능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張差 體系的 發掘 및 硏究를 통해 百濟史 最高의 미스터리, ‘益山 遷都’ 論議가 큰 進展을 이루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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