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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희|記者 購讀|東亞日報
김재희

김재희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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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業界를 取材하는 放送·映畫 擔當 記者입니다. 재미를 주는 콘텐츠를 더 재밌는 記事 안에 담겠습니다.

jetti@donga.com

取材分野

2024-03-19~2024-04-18
文化 一般 54%
人物/CEO 7%
社會一般 7%
産業 3%
檢察-法院判決 3%
패션 3%
音樂 3%
人事一般 3%
기타 17%
  • ‘社長이 또 異常한 소리하네’…직접 選手로 뛰며 開發하자 世界가 알아줬다[BreakFirst]

    목에 핏대가 설 程度가 아니었을까. 2014年 3月 京畿 光州市 吉林洋行(現 바프·HBAF) 事務室에서 윤문현 代表(46)는 職員들을 向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생각도 못 합니까? 말도 못 하나요? 할 수 있는 때까진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젊은 社長님이 목소리를 높여도 職員들은 冷冷했습니다. 大型마트 自體 商標(PB) 堅果類 製品을 納品하던 業體인데, 시즈닝을 한 ‘맛있는 堅果類’를 自體 開發해서 내놓자고 하니 職員들은 唐慌했습니다. 每事에 肯定的 態度를 보였던 生産팀長까지 表情이 영 別로였습니다.“저희는 開發팀度 없는 會社인데, 어떻게 加工 製品을 만듭니까?”개발팀은 없었지만, 尹 代表에겐 ‘生存 本能’이 있었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市場에서 淘汰돼 사라지고 만다.’ 2006年 갑자기 아버지의 會社를 물려받아 經營하게 되면서 그는 切迫함을 배웠습니다. 結局 反對를 무릅쓰고 職員 1名과 함께 無作定 加工 技術을 開發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整理해둔 레시피는 數百億 원臺 賣出 成長의 씨앗이 됐습니다. 流行을 넘어 社會現象으로 注目받았던 ‘허니버터’ 烈風에 빠르게 올라타는 技術的 基盤이 된 겁니다. 빚을 걱정하던 會社는 年 賣出 1000億 원臺의 健實한 企業으로 바뀌었습니다. ‘只今도 괜찮은데 굳이? 왜?’라는 慣性을 每番 거슬러 온 尹 代表의 몸부림의 結果입니다.회사 사람들 모두 저를 싫어했습니다. 會社를 헤집고 있었으니까요.―2006년 아버지의 腦卒中으로 갑작스럽게 事業을 이어받으셨습니다. 吉林洋行은 美國에서 아몬드를 輸入해 國內에 供給하는 單純 流通 會社였습니다. 아몬드 輸入 規制가 풀리고, 供給 經路가 多樣化하면서 納品處가 끊기고 있었습니다. 製造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工場을 세우기 始作하셨는데, 腦卒中으로 쓰러지셨습니다. 前 그때 大學을 갓 卒業하고 大企業 入社를 一週日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會社 經營權을 물려받게 됐는데 100億 원의 빚과 함께였습니다. 病床에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罪悚함과 感謝함이 겹쳤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돈 벌고 계셨구나’를 처음 깨달았거든요. 會社는 不渡 直前이었지만 試圖도 안 할 순 없었습니다. 製造業으로 가거나, 事業을 접거나 둘 中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當時 會社를 支配하던 가장 큰 慣性은 무엇이었나요?‘우리 會社는 流通業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否定的 確信이었습니다. 會社 職員, 去來處 사람들로부터 ‘製造로 가는 건 더 빨리 죽는 길이다’라거나 ‘堅果類로는 돈 못 번다’ 같은 말을 듣기도 했어요. 製造 工程을 構築하려면 投資 費用이 들어가는데, 進入 障壁이 낮으니 競爭社가 넘쳐나고 그렇기 때문에 收益은 못 내는 構造라는 말이었죠. 처음엔 會社 사람들 모두 저를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社長님이 쓰러지시고, 새파랗게 어린 아들이 와서 會社를 헤집고 있었으니까요. (當時 尹 代表는 28살이었다)―회사를 이어받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뭔가요?복잡하게 엉킨 실타래가 있다고 해보세요. ‘어디를 어떤 順序로 당겨야겠다’고 計劃하진 않죠? 어느 한 곳이 풀리면 옆의 것이 풀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 풀리게 됩니다. 실타래 풀 듯 問題를 풀기로 했습니다. 當場 賣出을 만드는 게 始作이었습니다. 當時 大型마트는 PB 商品 開發에 한창이었는데, 먼저 그 市場을 뚫기로 했습니다. 大型마트에 堅果類 PB 商品을 納品하는 業體가 當時에 7~10곳 있었습니다. 끼어들 餘地가 없었죠. 그래서 全國 마트, 便宜店을 돌며 ‘언제든 連絡 달라’며 人事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 곳씩 去來處를 確保한 뒤에는 다들 하기 싫어하는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販促 社員을 두고, 試食 行事를 하는 겁니다. 人件費가 들고 寺院 管理도 귀찮아 全部 꺼리는 일이었죠. 그것부터 했습니다. 모두 忌避하는 일을 모아서 하다 보면 必要한 사람이 됩니다. 當時 우리 會社엔 開發팀度 없었거든요. 맨땅에 헤딩으로 始作했습니다.대형마트에 PB 商品을 納品하면서 실타래는 풀린 듯했습니다. 會社는 2010年 460億 원, 2012年 520億 원, 2014年 650億 원의 賣出을 올리며 安定的인 成長勢를 보였습니다. 그때 尹 代表는 또 한 次例 ‘엉킨 실타래’를 發見합니다. PB 商品으로는 限界가 있다는 點이었습니다. PB 商品은 大型마트라는 브랜드와 流通 채널을 活用해 마케팅이나 流通에 들어가는 費用을 節減하고, 消費者에게 값싸게 提供됩니다. 代身 納品業體의 마진도 그만큼 적습니다. 尹 代表는 獨自的인 레시피를 開發해 自體 브랜드를 만들기로 합니다. 2014年 職員들과 또 한 次例 說往說來가 이어졌습니다.―당시 賣出을 보면 安定的인 狀況이었는데 事業을 다른 方向으로 擴大하려고 하셨습니다.미국과 유럽을 다니며 市場 調査를 하면서 韓國에도 加工 堅果類 市場이 반드시 생긴다는 確信이 생겼습니다. 美國의 마트를 가 보면 堅果類 陳列臺의 4分의 1은 加工 堅果類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反面 韓國에서 堅果類에 對한 認識은 ‘健康食品’에 가까웠죠. 元物 그대로를 먹었습니다. 다양한 맛이 없었죠. 저는 堅果類가 ‘스낵火’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單純히 堅果類를 輸入해 包裝 販賣하는 製造業은 進入障壁이 낮아서 競爭社도 많았고요. 差別化가 必須라고 생각했습니다. ―當時 韓國에선 加工 堅果類 市場이 全體 堅果類 市場의 5%度 되지 않았습니다. 또 險難해 보이는 길을 가려니 職員들의 反撥이 컸을 것 같습니다. 當時 會社엔 開發팀度 없었습니다. 職員들도 冷冷했습니다. 職員 한 名을 데리고 ‘맨땅에 헤딩’으로 아몬드 加工 技術을 開發하기 始作했습니다. 쿠키 가게를 運營하던 知人에게 부엌을 빌려서요. 가장 어려웠던 건 糖液으로 아몬드를 코팅한 뒤 시즈닝 가루를 입히는 技術이었습니다. 코팅된 아몬드가 서로 들러붙고, 時間이 지나면 눅눅해졌거든요. 糖液의 濃度, 冷却 時間을 달리하며 施行錯誤를 反復해 레시피를 完成했습니다. 바로 써먹지는 못해서, 一旦 레시피가 담긴 文書를 事務室 서랍 아래 칸에 넣어 놨죠.―그 레시피 德分에 히트 製品인 ‘허니버터아몬드’가 태어났군요.기억하시겠지만 2014年에 허니버터칩(해태제과) 人氣가 엄청났습니다. ‘허니버터고등어’ 까지 나온 걸 봤습니다. 當時 便宜店 GS25에서 ‘허니버터칩같은 製品 없느냐’고 물어왔습니다. 流行이 한창일 때니까, 2週 안에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當時 샘플 製造를 擔當하던 職員에게 아몬드를 튀기지 말고 구워서 糖液을 묻힌 뒤에 허니버터맛 가루를 입히라고 指示했습니다. 職員이 “이렇게 하면 아몬드끼리 다 들러붙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서랍에 넣어두었던 레시피가 떠올랐습니다. 그 레시피로 2週 만에 허니버터아몬드를 만들었습니다.2주 만에 誕生한 ‘허니버터아몬드’는 會社의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出市 첫 달 賣出이 2億 원이었는데, 다음 달에는 10億 원, 그다음 달에는 20億 원이 됐습니다. 별다른 마케팅이나 販促을 하지도 않았는데 中國業體 바이어가 會社에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輸出國이 25個國으로 늘었습니다. 바프의 賣出額은 2018年 1400億 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돌아보면 허니버터아몬드만 반짝 成功하고 그대로 끝날 수도 있었던 時期였습니다.허니버터아몬드를 낸 뒤 競爭社들이 類似 製品을 만들었는데 우리 製品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았어요. 職員들도 ‘代表님, 다른 會社들은 못 따라 합니다’라고 말했죠.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허니버터아몬드 같은 製品을 만드는 건 자물쇠를 푸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000부터 999까지 세 자리를 넣으면 언젠가 풀리죠. 運이 좋으면 빨리 풀리고요. 後續 製品을 만들어 성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業體들이 자물쇠를 풀 동안 市場 占有率을 높여야 하니까요. 會社에선 ‘허니버터아몬드 生産 工程만 24時間을 돌려도 物量이 不足한 狀況인데 데 왜 新製品을 얹으려 하느냐’고 反對했습니다.―직원들이 反對하는 狀況에서 新製品으로 好不好가 强한 와사비맛을 選擇하셨습니다.내부 反撥이 컸습니다. 新製品도 안 되는데, 와사비맛은 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사비맛 製品이 팔리는 걸 본 적이 없대요. 전 ‘제대로 만들면 된다’고 說得했습니다. 와사비는 元來 고기나 밥에 얹어 먹으면 잘 어우러지는 식재료잖아요. 와사비香을 메인이 아닌 ‘터치’로 期로 하고, 肉水맛을 加味했습니다. ‘10名 中 9名이 5點을 줘도 한 名이 10點을 주는 製品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마니아層을 攻掠하면 追加 賣出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始作한 것이 36가지 맛에 達합니다. 더 開發할 게 있을까 싶은데요. 6個月 동안 마카다미아를 비롯해서 堅果類에 입힐 101가지 맛을 開發했습니다. 유럽, 美國, 日本에 비해 韓國은 마카다미아 消費量이 宏壯히 낮은 國家거든요. 이番에도 제가 마카다미아에 새로운 맛을 입혀서 내자고 했더니 職員들은 ‘마카다미아는 안 팔립니다. 아몬드로 내시죠?’라고 하더라고요. 이番에도 職員들에게 反問했습니다. “바프가 國內 最大 堅果類 브랜드인데, 우리가 안 하면 누가 마카다미아 取扱하겠습니까. 先頭가 리스크를 甘受해야 합니다.”좋아하는 사람 繼續 생각나듯, 會社가 좋으면 繼續 생각나겠죠. 인터뷰하던 尹 代表가 스마트폰을 열어 寫眞帖을 뒤적였습니다. 그가 내민 寫眞에는 손가락 한두 마디 程度 크기의 ‘딸기 맛 마카다미아’ 模型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요즘 事務室에서 模型을 이리저리 만지며 ‘어떻게 하면 딸기와 비슷한 模樣을 만들 수 있을까’ 苦心 中이라고 합니다. 손톱 크기만 한 마카다미아의 角度까지 神經 쓸 程度로 그의 머릿속은 오직 堅果類로 가득 차 있습니다. ―慣性을 깨려고 할 때마다 職員들의 反撥이 컸던데요. 說得의 方法이 있었나요.회의 때 ‘社長이 또 異常한 소리 하네’라는 職員들의 表情을 種種 만나죠. 생각해보면 제가 直接 選手로 뛰는 게 가장 좋은 說得 方法이었던 것 같습니다. 리더라면 어떤 事案이든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는데, 그건 제가 職員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더 많은 時間을 苦悶하기 때문입니다. 職員들도 저 같았으면 좋겠는데 억지로 되는 건 아니죠. 좋아하는 사람이 繼續 생각나듯, 會社를 좋아하고 會社 生活이 즐거우면 자연스럽게 繼續 생각나겠죠. 職員들도 그렇게 될 수 있는 會社를 만들려고 합니다. ―바프를 어떤 會社로 키우고 싶으신가요.‘멋있는 會社’가 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을 멋지다고 表現할 때 여러 理由가 있는 것처럼, 멋있는 會社에도 여러 要件이 있습니다. 賣出은 基本입니다. 會社의 成果는 賣出이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돈만 많다고 멋있는 會社라고 하진 않죠. 職員들이 즐겁게 다녀야 합니다. 職員들의 滿足感과 經驗値가 業務에 反映되거든요. 그래서 會食도 平凡한 곳에선 안 하고, 職員들에게 헬스場도 끊어 줍니다. 가장 重要한 건 挑戰精神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苦悶하고 새로운 試圖를 하는 會社가 되고 싶습니다. 아침 食事가 왜 英語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禁食’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禁食을 깬다’는 意味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當身의 虛飢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初心을 잊은 當身, 慣性에 埋沒된 當身을 위해 多樣한 業界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매주 月曜日 午前 7時 30分 發送되는 ‘慣性을 깨는 1分, BreakFirst’ 뉴스레터를 購讀하고 倦怠와 졸음을 靈感과 革新으로 채워 보세요. 購讀者에게만 公開된 映像 인터뷰도 確認할 수 있습니다.▶뉴스레터 購讀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p0=70010000001050&m=list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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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冷凍김밥은 低廉한 冷凍食品?’…偏見을 깨자 길이 나타났다[BreakFirst]

    暴雨. 慶南 河東의 蟾津江이 汎濫하고 화개場터가 沈水된 2020年 8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河東에서 김밥 事業을 하던 ‘福을 만드는 사람들’(服滿社) 조은우 代表(43)는 道路를 뒤덮은 빗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工場도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 내 안에 抛棄할 勇氣조차 없을 땐 外部의 힘으로 抛棄 ‘當하고’ 싶다는 卑怯한 마음이 스미곤 합니다. 조 代表가 그런 狀況이었습니다. 2年 걸려 만든 ‘冷凍김밥’은 市場의 外面을 받고 있었습니다. 工場이 물에 잠기면 ‘김밥을 世界에 輸出하겠다’던 抱負도 함께 없던 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문량이 暴走해 工場을 擴大해야 하는 只今 狀況을 想像할 수 없었습니다. 機會는 偶然히 찾아왔지만, 機會를 잡은 것은 慣性을 깨고 2年間 切齒腐心한 한 조 代表의 努力 德分이었습니다.―그동안의 旅程이 궁금합니다. 大學에서는 産業디자인을 專攻했어요. 專攻과 關聯된 會社에 就業했지만, 事業에 渴症이 있었죠. 처음엔 外食業界 뛰어들었어요. 프랜차이즈를 갖는 게 꿈이었거든요. 20代에 두 番 고깃집을 차렸고, 그때 번 돈으로 호기롭게 上京했습니다. 粥집을 始作했는데 結局 亡했어요. 그때 남은 財産이 1000萬 원이었는데, 그 돈을 들고 河東으로 歸村했습니다. 粥을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離乳食 事業을 벌였는데, 共同 創業者들과 意見이 달라 갈라섰습니다. 河東을 代表하는 地域 名物을 만들어보고 싶어 빵과 胡떡 事業을 벌였는데 反應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2017年에는 ‘대롱치즈스틱’이란 걸 만들었어요. 꿈이 이뤄지나 싶었습니다. 大邱 동성로 1號店을 始作으로 13號店까지 支店이 늘어났고, 高速道路 休憩所 130곳에 入店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國內에서는 生疏한 冷凍김밥을 開發하기 始作하신 거죠? 한창 事業을 키워나가던 때였는데, 2018年 12月쯤이었습니다. 記事를 봤는데, 日本의 無印良品에서 韓國式 冷凍김밥이 大舶이 났다는 內容이었습니다. ‘내가 直接 만들어서 輸出해볼까?’라는 생각이 冷凍김밥의 始作이었습니다. 오랜 期間 事業을 하다 보니 地域 經濟 發展에 도움이 되는 것도 企業家의 役割이라는 마음도 생겼는데, 김밥을 만들면 地域 農産物도 充分히 活用할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요.―애써 開發했는데 發賣 첫해인 2020年 賣出은 4億 원에 不過했다고요. 冷凍김밥을 開發하고 市場을 確保하는 過程에서 마주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냉동김밥은 아무도 안 먹는다’는 市場의 固定觀念이 컸습니다. 冷凍김밥은 新鮮김밥보다 맛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價格이 低廉해야 한다는 認識이 바이어들에게 剛하게 박혀있었어요. 國家補助事業에 支援해도 떨어지는 理由는 늘 같았어요. 發表가 끝나면 審査官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같은 價格이라면 굳이 冷凍김밥을 먹을까요?’ ‘品質이 좋지만 비싼 冷凍 김밥’이라는 製品 自體가 慣性을 거스르는 組合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關心을 보이는 海外 바이어가 있어도 코로나19(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로 倍 碇泊 期間이 두 달을 넘어가 製品을 보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때는 나쁜 생각도 자주 했죠.사실 韓國人에게 冷凍김밥은 生疏한 製品입니다. 指導를 조금만 檢索해봐도 方今 만든 김밥을 살 수 있는 곳이 가득합니다. 더군다나 김밥의 流通期限은 常溫 7時間, 冷藏 36時間입니다. 더 큰 問題는 맛입니다. 解凍 뒤 눅눅해진 김, 아삭함이 사라진 菜蔬는 그다지 끌리지 않습니다. 大部分은 冷凍김밥을 만들 생각도, 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冷凍김밥의 開發 過程이 궁금합니다. 冷凍김밥을 解凍하면 김이 젖으면서 김밥이 풀어지고 材料는 눅눅해집니다. 解凍해도 터지지 않는 冷凍김밥을 만들기 위해 水分을 制御하는 技術이 가장 重要했습니다. 오이처럼 水分이 많은 材料는 除外했고, 당근, 우엉, 油腐 等 材料는 最大限 말렸어요. 完全히 말리면 퍽퍽해지기 때문에 新鮮感을 維持하는 線에서 建造하는 ‘水分 制御 技術’을 硏究했죠. 밥과 材料가 水分을 덜 머금게 하도록 김밥을 빠르게 얼리는 ‘急速 冷凍’ 技術도 開發했습니다. 김이 加熱되면 질겨지기 때문에 適當히 얇으면서 彈力感 있는 金을 고르기까지 市中에 나온 모든 金은 다 먹어봤어요. 解凍 時間은 3分을 넘지 않으면서 김밥 가운데까지 充分히 따뜻해질 수 있게 가운데가 옴폭 패여 있는 勇氣도 直接 開發했습니다. ―‘卽席김밥이 最高’라는 世上의 慣性을 어떻게 깰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냉동을 冷凍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 겁니다. 冷凍김밥이라는 單語 自體에 ‘低廉하고 品質은 多少 떨어지는 冷凍 製品’이라는 固定觀念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깨기로 했죠. 더군다나 처음부터 輸出을 念頭에 두고 레시피를 開發하다 보니 通關이 까다로운 肉類는 빼고 菜蔬를 많이 넣었어요. 自然스럽게 해初 頭部, 땡초, 버섯雜菜, 우엉 有婦, 톳豆腐 等 健康한 레시피의 ‘비건김밥’이 됐어요. 熱量도 大幅 낮췄습니다. 冷凍된 밥을 解凍하면 澱粉 老化現象이 일어나서 熱量 吸收率이 낮아집니다. 그 原理를 應用해 急速 冷凍으로 김밥 熱量을 떨어뜨리는 技術을 開發했습니다. 一般 김밥은 500kcal가 넘는데 저희 冷凍김밥은 200~300kcal에 不過합니다. 低廉한 冷凍食品이라는 分類에서 빠져나와 健康한 ‘웰빙푸드’로 再定義했습니다.―냉동김밥을 ‘웰빙푸드’로 再正立한 成果는 어땠나요? 市場의 反應이 오던가요? 메일이 하나 왔는데, 마켓컬리 MD(商品 企劃者)였어요. 休憩所에서 저희 冷凍김밥 製品을 봤는데, 처음 보는 製品이라 ‘우리가 먼저 팔아봐야겠다’고 생각했대요. ‘내 마지막 동아줄이다’ 싶었어요. 그동안 準備해왔던 대로 ‘低칼로리의 健康한 김밥’이라는 콘셉트의 企劃案을 準備했어요. 旣存에 팔던 ‘매콤제肉’이나 ‘鷄卵김밥’만 强調했다면 契約이 不發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結局 다이어터를 타깃으로 한 ‘비건 김밥’이 關心을 받았고, 去來가 始作됐습니다. 以後 윙잇, 쿠캣 等 國內 大型 流通社 18곳에 入店했습니다. ―2020年 服滿社 冷凍김밥 ‘11時45分’의 輸出國은 홍콩 單 한 곳이었습니다. 韓國에서 人氣를 끄니 海外 販路도 조금씩 뚫리기 始作했습니다. 國內 大型 온라인 마켓에서 販賣量 順位圈에 오른 製品이라고 하니, 國際食品博覽會를 찾은 海外 바이어들도 큰 關心을 보이더군요. 온라인에 달린 ‘無條件 再購買하는 製品이다’ ‘맛있는 다이어트 食品은 처음이다’ 等의 리뷰를 積極的으로 活用했죠. 그렇게 美國, 프랑스, 홍콩 等 12個國에 輸出하게 됐습니다. 冷凍을 冷凍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수출이 始作됐다고는 하지만, ‘KIMBAP’에 對한 海外의 認識은 좋지 못했습니다. 海外 媒體에서는 ‘아시안 푸드’를 卑下의 素材로 쓰고 있었습니다. 美國 드라마에서는 日本 사케를 두고 ‘땀에 젖은 洋襪 냄새가 난다’거나, 生鮮 머리를 넣고 끓인 局에서 ‘쓰레기 맛이 난다’고 嘲弄하는 場面이 登場합니다. 김밥도 例外가 아닙니다. 아시안 移民者 子女가 學校에 點心 메뉴로 傳統飮食을 싸 갔다가 親舊들에게 놀림을 當하는 經驗을 ‘런치박스 모먼트’라고 부르는데요. 이 經驗의 단골 메뉴 中 하나가 ‘KIMBAP’이었습니다. ―海外에서 金은 獨特한 食感과 香 때문에 ‘嫌惡食品’ 取扱받곤 하는데요. 海外市場에서 김밥이 잘 팔릴 거라고 豫想하셨나요? 輸出했던 國家 中에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等에서 再發週가 들어왔어요. 저도 疑訝하더군요. 非이어에게 ‘이걸 外國人들이 왜 사 먹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스시인줄 알고 먹는다”더군요. 그래서 김밥 代身 ‘코리안 스시’로 이름을 바꾸면 더 잘 팔리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름이 익숙하면 接近하기 쉬우니까요. 그래도 韓國의 代表 飮食에 ‘스시’라는 이름을 붙일 순 없었어요. 大韓民國 國民으로서 軍 服務 다음으로 뿌듯한 게 김밥이란 이름을 固守한 겁니다. 지난해 8月, 韓國系 美國人 사라 안은 自身의 SNS에 映像을 하나 올립니다. 1分 남짓한 映像에는 冷凍김밥을 試食하는 場面이 담겼습니다. 틱톡에서 1370萬 回, 인스타그램에서 880萬 會議 照會數를 記錄했습니다. 記憶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以後 北美圈에서는 ‘KIMBAP’ 品切 大亂이 벌어졌습니다. ‘1인 2줄’ 購買量 制限을 걸 程度로 김밥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드디어 韓國 冷凍김밥을 손에 넣었다”는 引證 映像이 쏟아졌습니다. 嫌惡 食品 取扱 받던 김밥의 急激한 身分 上昇(?)으로 服滿史에도 福이 굴러 들어왔습니다. ‘11時45分’의 輸出國은 19곳으로 늘었습니다. 賣出은 지난해 60億 원까지 치솟았습니다.―사라 安易 먹은 ‘바바김밥’ 製造社는 ‘올곧’이라는 企業이죠. 여기에 人氣가 높아지자 大企業까지 뛰어들었다고요. 市場을 獨占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은 없나요? 冷凍김밥이 漸漸 人氣를 끌면서 注文量이 늘어나 우리 工場의 生産力으로는 納品 日程을 맞추기도 어려운 狀況이 벌어졌습니다. 다양한 生産者가 있어 오히려 저희의 空白을 메워줬다고 생각해요. ‘코리안 스시’가 될 뻔한 韓國의 김밥이 제 이름인 ‘KIMBAP’을 달고 世界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런 點에선 올곧 같은 業體에 오히려 고맙다는 마음도 듭니다. “最高가 돼라.””던 親戚의 말이 刻印된 것 같아요.조 代表는 只今까지의 成功에 여러 幸運이 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事業 失敗로 1000萬 원을 들고 河東으로 왔을 때까지 조 代表는 오히려 不運의 사나이에 가까웠습니다. 冷凍김밥으로 起死回生하기까지 7番이나 失敗의 쓴맛을 봤으니까요. 두 番의 고깃집, 죽, 離乳食, 빵, 胡떡, 치즈스틱까지 7番이나 種目을 바꿔가며 創業했지만 이렇다 할 成功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7番의 失敗 뒤 찾아온 成功은 운보다는 挑戰 精神 때문이었을 겁니다. 七顚八起는 그를 위한 單語입니다. ―7番의 失敗에도 지치지 않고 慣性을 깨는 挑戰을 이어온 原動力은 뭔가요? 어렸을 때 숱하게 父母님께 혼나도 記憶에 남는 瞬間이 있잖아요. 어린 마음에 傷處가 됐던 瞬間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요. 初等學校 2學年쯤이었을 거예요. 名節에 온 家族이 모였는데, 마당에서 큰어머니가 제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은우野, 뭐든 한 分野에서 最高가 돼라. 世界가 아니면 韓國에서, 韓國이 아니면 地域에서, 地域이 아니면 親舊들 사이에서라도 最高가 돼라.” 그 瞬間, 그 말이 제게 刻印돼 抛棄하고 싶은 瞬間에도 나아가게 하는 原動力이 됩니다. ‘한 分野에서는 最高가 돼야 한다’라는 意志가 몸에 배 있는 것 같습니다. ―服滿社의 目標가 궁금합니다. 最近 投資社 두 곳에서 連絡이 왔어요. 볶음밥, 주먹밥 等으로 種目을 넓혀보자고 하더군요. 會社를 키울 機會지만 拒絶했습니다. 제 哲學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農産物은 값싼 中國産으로, 쌀은 美國 칼로스 쌀로 交替하라고 하겠죠. 原價가 비싸도 品質이 優秀한 國産 農産物을 使用한다는 게 제 鐵則입니다. 衛生的인 김밥 量産化 方法을 開發해서 健康하고 깨끗한 김밥을 世界에 輸出하고 싶어요. ‘冷凍김밥 主題에 4000원씩이나 해?’가 아니라, ‘이렇게 健康하고 맛있는 웰빙푸드가 4000원밖에 안 해?’라는 認識을 世界人에게 심어주고 싶어요. 김밥 하나로 勝負를 보는 ‘김밥系의 匠人’이 될 겁니다.아침 食事가 왜 英語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禁食’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禁食을 깬다’는 意味죠. BreakFirst는이른 아침 當身의 虛飢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初心을 잊은 當身, 慣性에 埋沒된 當身을 위해 多樣한 業界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 每週 月曜日 午前 7時 30分 發送되는 ‘慣性을 깨는 1分, BreakFirst’ 뉴스레터를 購讀하고 倦怠와 졸음을 靈感과 革新으로 채워 보세요. 購讀者에게만 公開된 映像 인터뷰도 確認할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購讀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312469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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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詐欺 結婚, 10億 원의 빚… 그럼에도 낸시 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理由 [復讐者들]

    고양이 人形을 어깨에 얹고 ‘키티 섹시 낸시 앙’을 외치는 潑剌한 女性이 있습니다. 이 文章만 보고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입니다. 20年 前부터 各種 藝能 프로그램에 出演해온 그를 放送人으로 아는 이도 많지만 낸시 랭의 本業은 ‘팝 아티스트’입니다. 7年 前 詐欺 結婚 被害를 겪고 人生의 危機에 逢着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팝아트’라고 합니다. 家庭 暴力, 不法 撮影物 脅迫 等 누구보다 苛酷한 苦痛을 겪은 그가 全 世界 女性을 慰勞하는 ‘스칼렛’ 시리즈를 선보인 데에 이어 올여름엔 ‘스페이스 아트’를 主題로 個人展을 열었습니다. 삶의 苦痛을 藝術로 昇華해 살아갈 힘을 얻게 된 낸시 랭을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2023년은 ‘팝아티스트’로서 바쁜 한 해였습니다. “올여름 ‘스페이스 아트’를 主題로 展示會를 열었어요. 백남준 先生님이 비디오 아트를 創始했다면 낸시랭은 스페이스 아트를 創始하겠다는 目標로 野心차게 準備한 展示입니다. 누리號에 搭載된 큐브 衛星을 開發한 硏究팀을 이끈 韓國航空大 오현웅 敎授(航空宇宙 및 機械工學部)와 ‘나라 스페이스’ 박재필 代表와 協業韓 展示였어요.”―‘스페이스 아트’는 낯선 장르인데요, 처음 着眼한 契機가 궁금합니다. “말 그대로 宇宙와 팝아트를 結合한 藝術의 한 장르라고 생각해주심 돼요. 宇宙와 팝아트를 椄木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2年 前 누리號 1次 發射 失敗 때였어요. 宇宙 産業은 過去엔 國家가 主導하는 巨大한 프로젝트였잖아요. 하지만 最近엔 宇宙 産業이 漸漸 民間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일론 머스크의 事例를 봐도 알 수 있죠. 國家라는 少數 權力이 占有했던 宇宙 技術을 漸漸 民間으로 넘어오는 現象이, 大衆的 이미지를 藝術의 領域으로 끌고 오는 ‘팝아트’ 精神科 맞닿아있다고 생각했어요.”대중적으로 널리 消費된 이미지를 借用해 藝術 作品으로 昇華하는 ‘팝아트’는 美國의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等으로 國內에 알려진 現代美術의 한 장르입니다. 홍익대에서 西洋畫를 專攻한 낸시랭이 專攻과 無關한 팝아트를 選擇한 건 그것이 大衆的이고 商業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藝術과 大衆, 商業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대중적이고 商業的인 藝術, 팝아트에 魅了된 理由는요? “우리가 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大衆的인 오브제를 活用해, 自身의 생각을 담아 作品으로 表現한 게 ‘팝아트’라는 장르예요. 이미 大衆들의 눈에 익은 어떤 이미지를 하나의 作品으로 탄생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商業的이고 가장 大衆的이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함께 共有하고 享有할 수 있어요. 팝 아트는 藝術 앞에서 階級과 階層, 性別과 나이 等의 境界를 허물어 줍니다. ‘그들만의 藝術’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藝術’을 志向하죠.”낸시랭이 팝아티스트로서 첫발을 뗀 건 2003年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當時 韓國 代表로 選定되지 못하자, 山 마르코 大聖堂 앞에서 빨간 속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켜는 퍼포먼스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2006年 8月 KBS ‘人間劇場’에 出演하면서 本格的으로 放送活動을 竝行하는데요, 當時엔 演藝人이 아닌 一般人이 放送에 出演한 건 極히 드문 일이었습니다.―지금이야 演藝人 아닌 一般人들도 放送에 많이 나오지만 2000年代 初盤 낸시랭이 처음 放送에 나왔을 때는 破格的이었어요. “그때 辱을 엄청 많이 먹었어요. 當時만 해도 歌手, 俳優, 앵커, 개그맨 같은 사람만 텔레비전에 나왔거든요. 사람들은 演藝人도 아닌데 왜 放送에 나오냐면서 엄청난 辱과 惡플에 시달렸어요. 근데 只今은 보세요. 醫師, 辯護士, 甚至於 一般人들도 다 TV에 나오잖아요. 先驅者的인 무언가를 試圖했다고 생각해요. 처음이었기에 辱을 많이 먹었던 거죠.그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生計 問題도 있었어요. 돈을 벌지 않으면 作品 活動을 할 수 없었죠. 放送을 한 건 돈을 벌기 위한 目的이기도 했어요.”―20여년간 26回의 個人展을 열었을 程度로 作品 活動을 꾸준히 하셨어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낸시 랭을 藝術家 보다는 放送人, 口舌數로 알고 있어요. “美國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한 有名한 말이 있어요. 그땐 아날로그, 黑白TV의 時代였는데요, ‘未來에는 누구나 15分 동안은 世界的으로 有名해질 것이다.’(1968년 展示 브로셔에 直接 쓴 文句) 앤디 워홀은 그 時代에 그런 慧眼을 가졌을 程度로 時代를 앞선 아티스트였어요. 근데 앤디 워홀의 人生을 보면 할리우드 스타級으로 파파라치, 스캔들, 口舌數, 話題를 몰고 다녔단 말이에요. 지나고 보면 저의 人生 軌跡도 비슷한 評價를 받을 거라 생각해요.”―보통 作品 活動하실 때 令監은 어디에서 받나요. “삶의 특정한 瞬間, 저의 內面 깊숙이 꽂힌 아이디어에 充實한 便이에요. 팝아트 作家라고 해서 팔릴 만한 作品만 하진 않아요. 저의 꿈, 想像力, 時代의 問題, 哲學…. 모든 게 令監이 될 수 있어요. 最近의 제가 ‘宇宙’에 꽂혀있는 것처럼요.”팝 아티스트로 乘勝長驅하던 낸시랭에게 堪當하기 힘든 苦痛이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2017年 詐欺 結婚 被害를 當한 것인데요. 當時 낸시랭이 當한 詐欺 結婚 事件은 세간을 뜨겁게 달궜고 하루에도 100件 以上의 記事가 報道됐습니다. 이 일로 그에겐 마음의 傷處뿐 아니라 10億 원의 빚까지 생겼습니다다. 極端的인 選擇을 苦悶할 程度로 괴로웠다는 그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팝아트 德分이었습니다. 家庭 暴力, 不法 撮影物 流布 脅迫 等의 被害를 겪은 낸시 랭이 自身의 苦痛을 藝術로 昇華한 ‘스칼렛’ 시리즈를 2020年 선보인 겁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터키 이스탄불, 美國 마이애미, 싱가포르 等에서 展示를 열었습니다. ―‘스칼렛’ 시리즈에 담긴 意味가 궁금합니다. “스칼렛은 彩度가 宏壯히 높은 빨간色을 뜻하는 말인데, 데미 무어가 主人公인 映畫 ‘스칼렛’이 있어요. 그 映畫가 우리나라에서 上映할 때 ‘朱紅글씨’로 飜譯됐어요. ‘낙인찍히다’는 意味죠. 映畫 속 主人公은 그럴 理由가 全혀 없는 女性인데 魔女사냥을 當하고 烙印이 찍힌단 말이에요. 제가 詐欺結婚과 여러 犯罪의 被害者가 되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몰아쳐 왔었어요. 그때의 전 極端的인 選擇을 考慮했을 程度로 暗澹한 苦痛 속에 있었거든요. 그때 처음 眞摯하게 苦悶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當한 일들, 저 혼자 當한 게 아니더라고요. 같은 苦痛을 겪은 全 世界 女性들을 떠올리며 作業했어요.”―‘스칼렛’을 全 世界에 선보인 理由는요? “各 나라의 文化와 法이 다르잖아요. 같은 狀況을 두고도 어떤 나라에선 加害者를 處罰하지만 어떤 나라에선 被害 女性에게 더 큰 罰을 주곤 해요. 各 나라의 文化, 慣習, 法이 달라서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지만 藝術로는 可能하다고 생각했어요. 全 世界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른 人種, 慣習, 文化를 가졌음에도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는 良心이란 게 있지 않을까. 그걸 건드리는 게 藝術의 役割일 거예요. 사람들이 저의 作品과 퍼포먼스를 통해 本人 스스로의 良心을 들여다보고 判斷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었어요. ‘스칼렛’은 제게 正말 重要한 作業이었어요. 제 人生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時期에 藝術이 있었기 때문에 克服할 수 있었고, 只今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작품을 통해 回復, 治癒를 經驗하신 거네요. “사람이 極端的인 選擇을 하게 되는 理由가 너무 堪當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만 埋沒된단 말이에요. 周邊에서는 가만 놔두질 않죠. 끝없는 苦痛 속에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選擇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게도 그런 時期가 있었어요. 多幸히 옆에서 節 붙잡아주고 도와준 고마운 知人이 있었기 때문에 只今 여기 살아있을 수 있었죠. 1秒가 100年처럼 너무 길게 느껴질 程度로 힘들었던 時期, 作品에 沒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10억원의 빚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作品 活動을 꾸준히 하고 계시거든요. “正말 熱心히 살고 있는데 元金은 1원도 못 갚았어요. 每달 千萬 원 넘게 나가는 利子를 갚고 있어요. 제가 事業하는 사람도 아니고, 固定 收入이 없는 藝術家가 堪當하기 너무 버겁죠. 展示會에서 作品이 모두 팔려도, 그 돈을 제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다 利子 갚는 데만 다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意欲이 꺾이는 時期가 있었어요.”―지금은 克服하셨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가 쓰지도 않은 社債 利子 갚느라 6年, 7年을 살았는데 元金은 하나도 못 갚았잖아요. 作品이 잘 팔려도 幸福하지 않고 저는 써보지도 못하고 虛無하게 빼앗기니까…. 한동안은 너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程度로 絶望的이었어요. 이게 언제 끝날까. 하지만 只今은 괜찮습니다. 肯定的으로 생각해보려고 해요. 元金은 한 푼도 못 갚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지난 6年間 每달 1000萬 원 以上의 돈을 벌었다는 뜻이잖아요. ‘낸시랭 正말 熱心히 살았다’ 이렇게 다독여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씩씩하게 살아갈 거예요.“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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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만의 ‘怨 픽’ 브라이언이 淸掃에 미친 理由[復讐者들]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 多少 過激한 所信 發言으로 人氣몰이 中인 이가 있습니다. 그는 淸掃 하나로 第2의 全盛期를 맞은 브라이언(42)입니다. 그는 브레이브걸스 惟政의 더러워진 自動車 窓門 틈을 手巾으로 문지르며 喜悅을 느끼고, ‘옷 무덤’李 된 걸그룹의 宿所를 보고는 두 눈을 희번덕이며 “What the hell”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淸掃가 趣味이자 特技인 브라이언은 ‘淸掃狂 브라이언’이라는 유튜브 콘텐츠로 그야말로 ‘떡床’했습니다. 브라이언이 집에서 靑素旗를 밀고 洗濯機를 돌리는, 그야말로 淸掃‘만’ 하는 모습을 담은 淸掃狂 1火는 한 달 만에 照會數 320萬 回를 넘었습니다. ‘淸掃 하나로 이렇게 웃긴 사람은 브라이언밖에 없다’ ‘첫 放送 보고 化粧室 淸掃했다’는 댓글이 쏟아집니다. ‘淸掃 藝能’이라는 前無後無한 장르를 開拓한 브라이언은 한 때 少女팬을 몰고 다니던 實力派 아이돌이었습니다. 1999年 歡喜와 함께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데뷔한 그는 ‘Sea of love’ ‘Missing You’ ‘重力’ ‘習慣’ ‘男子답게’ ‘가슴 아파도’ 等 수많은 히트曲으로 사랑받았습니다. 華麗한 스포트라이트의 裏面도 있었습니다. 銳敏한 性格인 그는 舞臺에 오르고 藝能에 出演하는 每 瞬間 緊張과 不安感에 시달렸습니다. 멤버 환희와는 ‘親하면 熱愛說, 안 親하면 不和說’이 났습니다. 안티팬들의 스토킹과 脅迫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달고도 썼던 歌手 時節을 지나, 그는 ‘美國 淸掃 아저씨’로 人生 2幕을 始作했습니다. ‘찐狂氣’를 뽐내며 藝能 블루칩으로 떠오른 그에게 放送, 유튜브 할 것 없이 涉外 連絡이 쏟아집니다. 每日 아침 8時부터 저녁 9時가 넘어서까지 撮影 3~4個가 잡혀 있는 殺人的인 스케줄에도 그가 에너지를 잃지 않는 理由는 單 하나, 淸掃에 眞心이기 때문입니다. “全 國民이 淸掃하는 그날까지” 淸掃의 이로움을 傳播하겠다는 브라이언을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淸掃狂’에 이어 ‘키스狂’도 노린다는 그의 속셈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確認할 수 있습니다. ―淸掃로 第2의 全盛期를 맞으셨어요. 첫 禍 ‘淸掃狂 브라이언’ 첫 化는 照會數 320萬 回가 넘었습니다. 淸掃 콘텐츠로 이렇게 큰 人氣를 끌 거라고 豫想하셨나요?전 그냥 淸掃를 좋아할 뿐이었어요. 淸掃를 콘텐츠로 만들고, 甚至於 그걸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곤 想像도 못 했죠. ‘淸掃狂’ 유튜브를 처음 企劃할 때도 걱정이 많았어요. 會議 때 作家님들에게 “이걸 누가 볼까요? 淸掃에 關心이 있을까요?”라는 말도 했었고요. 別 期待 없이 平素와 똑같이 淸掃를 한 건데 너무 재밌게 編輯이 잘 된 거예요. 첫 禍를 보고 ‘아, 이거 되겠구나’ 싶었죠. 淸掃를 귀찮아하거나 게을렀던 분들이 淸掃광을 보고 刺戟 받아서 淸掃 始作했다는 反應이 第一 氣分 좋아요. ―‘더러우면 싸가지 없는 거예요’라는 名言을 남기셨는데, 平素 新潮인가요?저는 正말 그렇게 생각해요. 弄談이 아니었어요. 더럽다는 건 周邊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禮儀를 안 지키는 거예요. 누군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淸掃가 안 되어 있다면 싸가지 없게 느껴지잖아요. 깔끔하고 깨끗한 건 他人에게 禮儀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청소로 事業을 할 計劃은 없나요?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걸 비즈니스로 하자’는 생각이 强했어요. 運動을 좋아해서 크로스핏 體育館을 열었고, 꽃꽂이를 좋아해서 꽃집을 열었죠. 그런데 일이 되면 힘든 瞬間이 와요. 스트레스를 받으니 그 일을 못 즐기겠더라고요. 淸掃를 너무 좋아하는데 비즈니스로 하면 淸掃하는 게 싫어질까 봐 事業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 代身 淸掃 製品 PPL이 엄청 들어와요. 저희 집에 설거지 洗劑가 100甁 있어요. 平生 다 써도 남을 거예요. 그래서 淸掃用品을 매니저, 親戚, 親舊들에게 나눠주고 있어요. ―淸掃광에서 브레이브걸스 유정님의 車를 洗車해 주시고, 걸그룹 宿所를 淸掃해주는 等 淸掃 하나로 多樣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어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다른 藝能을 할 때는 作家님들이 大部分 構成을 하시고 저에게 어떤 콘셉트인지 傳達해주셨는데, 淸掃광에서는 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요. 무엇보다 제가 淸掃를 正말 좋아하고, 淸掃에 對해선 製作陣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니까요. 그래서 會議를 할 때도 재밌어요. 브라이언은 SM엔터테인먼트를 세운 이수만 前 代表의 눈에 單番에 든 ‘確信의 SM賞’이었습니다. 李 前 代表는 오디션場에서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雙꺼풀 없는 눈이 H.O.T.의 장우혁과 비슷해 마음에 든다”며 그를 뽑았고, 練習生 生活 5個月 만에 그를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超高速 데뷔시켰습니다. 外貌뿐만 아니라 實力도 出衆했습니다. 브라이언의 맑은 美聲은 그룹 人氣를 牽引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는 每年 施賞式에서 R&B 部門 賞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坦坦大路 같았던 그의 歌手 生活에 迂餘曲折도 많았습니다. 交通事故로 인한 매니저의 죽음, 안티팬들의 괴롭힘 等이 이어져 極端的인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로 큰 人氣를 얻으셨어요. 그런데 힘든 瞬間도 正말 많으셨다고요.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어요. 2002年에 ‘효순이 미선이 事件’이 터졌어요. 女中生 두 名이 美軍 裝甲車에 깔려 숨진 事故였죠. 當時 저와 歡喜가 라디오 DJ였어요. 生放送 中에 게스트가 이 事件에 對한 제 생각을 물어서 ‘運轉을 하던 美軍들이 確實히 잘못한 일이지만, 美國이라는 나라 全體를 미워하는 건 異常한 것 같다’고 率直하게 말했어요. 그 뒤에 댓글窓에 ‘네 나라로 떠나라’ ‘브라이언 죽어라’ 이런 댓글이 쏟아졌어요. 케이크 안에 칼날을 숨겨서 집으로 보낸 사람도 있었어요. 어떤 분이 便紙를 주셔서 팬레터人 줄 알고 열어 봤는데 事故 現場에 있던 女中生 얼굴에 저와 환희 얼굴을 合成한 寫眞이 들어있던 적도 있어요. 환희한테도 너무 未安했고, 저 스스로도 괴로웠어요. 燒酒를 每日 마시고 매니저 兄한테 ‘저 그냥 죽을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當時엔 ‘絶對 말失手하면 안 돼’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는데, 時間이 지나니 내가 失手했다는 걸 認定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努力하는 게 最善인 것 같아요. 人間은 失手할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스스로를 탓하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게 第一 重要한 것 같아요. ―한때는 ‘國民歌手’로 불렸을 程度로 플라이 투 더 스카이가 큰 사랑을 받았어요. 歌手 活動을 할 計劃은 없으신가요? 예전에는 노래하는 게 正말 즐거웠거든요. 그런데 反復된 聲帶結節로 목이 안 좋아진 뒤로 노래를 하는 게 부담스럽고 두려워졌어요. 제가 다시 音樂을 하길 기다려주는 팬들에게는 未安해요. 한때 正말 사랑했던 노래를 못 하게 된 게 스스로도 正말 아쉽고요. 목 狀態가 돌아온다면 다시 노래하고 싶어요. 只今은 내가 不便하고 두려우니까 못 하고 있지만요. 노래를 언젠가 다시 잘하게 된다면 그때는 컴백할 수 있겠죠? ―歌手活動을 하지 않는 只今의 삶이 幸福하신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이미지가 構築되고,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 三拍子가 맞기가 正말 힘들거든요. 그게 되고 있어서 너무 즐겁죠. 歌手를 할 때는 恒常 負擔이 컸어요. 나만 생각하면 안 되고 팀 멤버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내 말失手 때문에 멤버가 被害 보는 狀況이 생길 수도 있고요. 또 저는 放送에 나가면 緊張이 甚했어요. 안 그래 보여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엑스맨’ ‘戀愛便紙’를 찍을 때 出演 前날부터 식은땀을 흘릴 程度로 걱정이 甚했어요. 只今은 오롯이 나 自身만 神經 써도 되고, 내가 願하는 걸 할 수 있어서 자유로워요. 일을 하면서도 내 삶을 充分히 즐기는 幸福에 빠졌어요. 어떤 분들은 좋은 것만 하려는 게 欲心이라고 하세요. ‘왜 남들 생각은 안 하냐?’고 하시는데, 남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내 人生은 抛棄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마음을 尊重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맑은 美聲으로 노래하던 ‘꽃美貌’의 열여덟 少年은 淸掃의 이로움을 傳播하는 愉快한 마흔 둘 ‘美國 淸掃아저씨’가 됐습니다. 그의 데뷔舞臺인 1999年 ‘데이 바이 데이’ 유튜브 映像에는 요즘 들어 ‘淸掃狂 아저씨 데뷔 舞臺다’라는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時間의 흐름에 따라 自我와 幸福을 찾아나가는 브라이언에게 ‘全盛期’라는 單語는 無色합니다. ‘꽃美男 아이돌 듀오’ 修飾語가 ‘美國 淸掃 아저씨’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의 肯定 에너지는 빛을 잃지 않습니다. ―‘美國 淸掃 아저씨’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對한 負擔感은 없으세요?워낙 깔끔하고 냄새에 敏感한 이미지다 보니 저를 처음 만난 사람들이나 길에서 만난 팬들이 ‘저한테 或是 냄새나나요?’라며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 罪悚하더라고요. 그래도 淸掃는 늘 하는 것이고, 前 淸掃를 하면 즐거워요. 그걸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負擔이라기보다 幸運인 거죠.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온 國民들이 다 淸掃할 때까지 繼續할 거예요.―채널A ‘金쪽相談所’에 出演하셔서 不眠症에 시달리고 있고, 지나치게 銳敏해서 힘들다고 告白하셨잖아요. 요즘에는 좀 나아지셨나요? 어제도 3時間밖에 못 잤어요. 아침 일찍 撮影이 있어서 어제는 일찍 잠들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負擔感 때문에 不眠症이 더 甚하게 오는 것 같아요. 不安感 때문에 잠에 못 드는 거죠. 平素에도 푹 못 자고 1時間에 한 番씩은 깨요. 깨서 물 먹고, 化粧室 가고, 강아지들 잘 자나 보고…. 푹 자 본 적이 없어요. 海外 나갔다가 韓國 돌아와서 時差 때문에 푹 資本 적은 있는데, 그 外엔 늘 睡眠 패턴이 不安定했어요. 제 性格인 것 같아요. ―放送에서 13年 째 솔로라고 하셨는데… 戀愛나 結婚에 對한 생각도 궁금해요. 親兄이 21살에 結婚해서 조카가 20살이 넘었어요. 兄을 보면서 結婚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只今은 나이 들어가며 혼자 있는 幸福에 빠졌어요. 演藝人은 매니저, 스태프, 作家, PD 等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삶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집에 혼자 있는 時間이 服처럼 느껴져요. 非婚主義者까진 아니지만 혼자 보내는 時間이 所重해졌어요. 萬若 누군가를 만난다면요? 人生을 深刻하지 않게, 재밌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유머가 있는 사람이 좋아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입냄새 나면 안 돼요. 저랑 방귀는 안 텄으면 좋겠고요. 하하. ―언제 幸福함을 느끼세요?일 끝나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애쉬, 로미랑 소파에 누워있을 때가 가장 幸福해요. 아무것도 안 하고 便하게 있을 때, 스트레스나 두려움 없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이들한테 키스해주고 抱擁해주는 瞬間이 요즘의 저에겐 第一 큰 幸福입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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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마머리를 잘라서 수세미로 썼다고?… 日常이 코미디인 이 두 男子들[復讐者들]

    ‘勤勉! 誠實! 精進 또 精進!’을 외치는 29살 同甲내기 두 靑年이 있습니다. 不過 5年 前만 해도 그들은 大田의 작은 개그 劇團에서 無料 公演을 올리며 公採 개그맨의 꿈을 꿨습니다. 當時 大學을 中退한 두 靑年은 아르바이트海 번 돈을 모조리 개그 公演에 썼습니다. 단돈 千 원짜리 티켓이 單 한 張도 안 팔렸지만 繼續 舞臺 위에 올랐습니다. 나란히 入隊한 後에도 每日 連絡을 주고받으며 개그 콩트를 짰을 程度로, 두 사람은 코미디에 眞心이었습니다.2020년 初 코로나 寒波가 스탠드업 코미디 業界에 불어 닥치면서 放送局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廢止되고 개그맨 公採 試驗도 中斷됐습니다. ‘第2의 옹달샘’을 꿈꾸던 두 男子의 꿈도 사라지나 했습니다. 한 길만 보고 달렸는데 그 길이 송두리째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두 男子는 ‘勤勉! 誠實! 精進 또 精進!’했습니다. ‘길이 사라졌다면 直接 길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개그 極端, 아프리카tv를 거쳐 유튜브까지 뛰어들었습니다. 그랬던 두 男子, 只今은 累積 照會數 4億 回를 記錄한 유튜브 채널 4個를 運營하는 핫한 ‘코미디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매콤한 두 男子의 매콤한 日常’을 다룬 유튜브 채널 ‘핫__30 두 코미디언 송형주, 김선응을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T5WCnbWVb84)에서 볼 수 있습니다.―대학 中退까지 하며 準備했던 개그맨 公採 試驗이 中斷됐을 때, 어떤 心情이었나요? “一般人으로 따지면 오랫동안 公務員을 準備했는데 公務員 試驗 自體가 사라진 거예요. 公採 개그맨이 되겠다는 目標 하나만을 위해서 몇 年을 努力했잖아요. 甚至於 저희는 軍隊 있을 때도 서로 連絡 주고받으면서 개그 이야기만 했어요. 軍隊에서도 하루에 개그 콩트 2個씩 짜면서 公採 試驗을 準備했어요.”(형주)―군대에서 개그를 짰을 程度면 正말 熱心이었네요. “除隊한 後에는 더 熱心히 했어요. 그때는 正말 돈이 正말 없었는데 같이 懷疑하면서 개그 짤 空間이 없는 거예요. 카페에 가도 커피값이 드니까요. 밖에서 하자니 밤에는 춥고…. 늦게까지 머물 수 있는 室內를 찾다 보니 映畫館 로비에서 會議 많이 했어요. 映畫도 안 먹고 팝콘度 안 먹었는데 眞相이었죠.(웃음) 深夜 映畫가 늦게까지 하면 映畫館이 새벽 3時까지 열 때도 있거든요.”(선응) “개그를 보여줄 舞臺가 없으니까 홍대에서 개그 버스킹도 試圖해봤어요. 길거리 나가서 無作定 準備해간 개그 콩트를 선보이는 거예요. 근데 개그는 起承轉結이 있다 보니, 아무리 짧은 개그與도 길거리에선 사람들이 안 보시더라고요.”(형주)대전 出身 同甲내기인 두 사람은 大學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東亞방송藝術大學校 13學番 同氣였던 둘은 ‘第2의 옹달샘’李 되겠다며 學校를 中退하고 코미디 公演 舞臺에 섰습니다. 大田의 개그 劇團 ‘乾電池’에서 活動할 때는 直接 티켓도 팔았습니다. ―劇團 活動할 때 年俸이 5000원(?)이었다면서요. “그거 잘못된 팩트입니다. 마이너스였어요. 저희가 다른 데서 아르바이트해서 그 돈을 公演하는 데에 쏟아 부었거든요. 5000원도 못 벌었고 事實上 마이너스, 赤字였어요.”(형주) “티켓 한 張이 千 원이었는데 그것도 안 팔리더라고요. 無料 公演만 했던 거죠”(선응)―극단 活動을 6個月이나 했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땐 正말 돈이 없었고 正말 가난했어요. 하루에 저한테 쓸 수 있는 돈이 1000원 程度였는데, 食堂에 가면 밥이 全部 6000원인 거예요. 戀愛도 못했어요. 戀愛하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야 하는데 그럴 돈이 아예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제가 責任질 수 없고 幸福하게 해줄 수 없었어요. 돈이 아예 없었거든요.”(선응)개그맨 公採 試驗을 準備하며 活動했던 劇團 生活을 접은 두 사람은 아프리카tv에서 사람들을 웃겨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라이브 放送을 켜면 入場하는 사람들은 한두 名, 많아야 대여섯 名에 不過했습니다. 개그 劇團에서 無料 公演하던 時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의 反應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主로 라이브 放送을 하다보니까 狀況劇 코미디를 選好하는 저희와 잘 안 맞았어요. 또 收益을 創出하는 方式도 찝찝했고요. 아프리카tv는 後援을 받는 시스템이잖아요. 돈 많은 사람들이 저희 라이브放送을 보시고 後援해주시면 괜찮은데, 저희 放送을 보는 분들이 主로 中·高等學生들人 거예요. 間食 먹을 거 안 사 먹고 저희 後援해주고…. 그런 것들 때문에 罪責感이 甚했어요.”(선응)개그 極端, 公採 試驗, 아프리카tv까지…. 연달아 失敗했지만 ‘乾電池’ 같은 두 男子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유튜브 채널 ‘핫__30 開設한 겁니다. ‘매콤한 두 男子의 매콤한 日常’의 ‘핫__30 只今은 잘 나가지만 처음부터 빵 떴던 것은 아닙니다. 各種 藝能 프로그램 패러디, 戀愛 시뮬레이션 等 여러 種類의 콘텐츠를 試圖했지만 照會數는 悽慘했습니다. 하지만 屈하지 않았습니다. 勤勉, 誠實, 精進 또 精進했습니다. ―어쩌다 하게 된 ‘짓궂은 장난’ 콘텐츠가 大舶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선응이가 되게 비싼 돈을 주고 파마를 했어요. 엄청 뽀글뽀글, 豐盛한 파마였는데, 선응이가 잘 때 그 머리를 밀어버린 거예요. 밀어버린 머리를 수세미로 쓰면서 설거지하는 映像을 올렸어요. 저희끼리 하는 平凡하고도 日常的인 장난이었는데, 그게 大舶이 난 거예요. 照會數가 100萬이 넘었어요.”(형주) “다른 사람들은 ‘甚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희가 正말 親한 사이라 그런 장난은 每日 每日 하거든요.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日常을 그대로 올린 거였는데, 좋아해주시니까 ‘이거다!’ 싶었어요.”(선응)‘100톤 穀食 倉庫에 親舊 車 숨기기’ ‘잠든 親舊 奧地에 버리기’ ‘親舊 앞에서 뒷談話 하기’ ‘親舊 房 구석구석에 招人鐘 設置하기’…. 初等學生도, 中學生도, 成人이라면 더더욱 하지 않을 것 같은 幼稚하면서도 創意的이고 新박한 콘텐츠에 購讀者들은 熱狂했습니다.―‘초등학생 趣向 아니냐’는 意見에 對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히려 좋아요. 저희 개그가 初等學生도 보고 웃을 程度로 어렵지 않다는 거잖아요. 가볍게, 누구나, 나이에 相關없이 全 國民이 다 볼 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해요.”(선응) “實際 購讀者들 보면 10代 後半에서 20代, 30代 初盤까지 다양합니다. 初等學生부터 어르신까지, 全 國民이 消費할 수 있는 웃긴 콘텐츠 많이 만들어보겠습니다!”(형주)‘핫소스’에서 始作한 두 사람의 ‘코미디 유니버스’는 漸漸 領土를 擴張하고 있습니다. 購讀者 參與型 콘텐츠를 올리는 ‘핫챌린지’, 먹放과 토크쇼가 共存하는 ‘핫食堂’, 숏폼 콘텐츠 專用 ‘핫쇼츠’까지. 4個 채널을 합친 購讀者는 219萬 名에 達합니다. ―유튜브 채널을 4個 運營 中입니다. 일을 너무 많이 벌린 건 아닌가요? “後悔할 때도 있어요. 너무 바쁠 때는요. 너무 바빠서 살면서 놓치고 사는 것이 하나 程度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런데 다른 걸 놓치는 만큼 유튜브는 놓치지 않으려고요. 예전의 저희처럼 機會가 懇切한 사람들한테는 부러운 後悔일 수도 있으니까요.”(선응)―한 채널에 集中하지 않고 채널을 여러 個로 나눈 理由가 궁금합니다. “購讀者 맞춤型이라고 보시면 돼요. 메인 채널인 ‘핫__30 親舊끼리 짓궂은 장난치는 콘텐츠잖아요. 저희가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핫__30 購讀하면 되고요. 或是 저희가 먹放하면서 對話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핫食堂’을 보면 되거든요.”(선응)“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이기도 합니다.(웃음) 하나의 채널에 特定 장르 콘텐츠만 쭉 올리는 것이 購讀者, 照會數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형주)―어떤 콘텐츠를 撮影할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핫챌린지’ 찍을 때 재밌어요. 購讀者들이랑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거든요. 購讀者분들, 팬분들 만나서 對話하는 게 좋아요.”(선응) “형주팀 선응팀 나눠서 밥 사주는 콘텐츠를 撮影한 적 있었어요. ‘鄭總務가 쏜다’를 모티브 삼아서 撮影한 건데, 그때 購讀者분이 運營하는 食堂에 갔거든요. 거기서 우리 콘텐츠 사랑해주시는 購讀者분들 배불리 먹이는 게 너무 뿌듯했어요. 팬들과 함께한 티키打카도 좋았고요.”(형주)―구독자는 많지만 照會數가 낮은 채널도 있습니다. ‘핫__30 平均 照會數 50~100萬 回를 維持하는데요. 祕訣이 있나요? “勤勉, 誠實, 精進 또 精進입니다.(웃음) 妙手가 따로 없어요. 될 때까지 하는 거예요. 照會數가 나올 때까지, 사람들이 웃어줄 때까지.”(형주)―방송이 아닌 유튜브에서만 活動하는 게 아쉬울 때는 없으신가요? “저희가 放送을 하다가 유튜브로 넘어온 케이스面 모르겠는데, 아예 유튜브에서 始作해서 그런지 그런 아쉬움은 없어요. 저희가 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理由도 사람들을 웃기고, 저희를 보고 웃어주는 팬들을 만나고, 그런 거였어요. 放送에 나가지 않아도 유튜브를 통해 充分히 코미디를 하고 있고 팬들과 疏通하고 있어요.”(선응) “오히려 유튜브에서 始作한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이젠 저희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잖아요. 누군가의 選擇을 받거나 오디션에 合格할 必要도 없고요.”(형주)―‘코미디 크리에이터’로서의 最終 目標는 무엇인가요? “會社를 차리는 겁니다. 코스피에 上場할 수 있는 유튜브 콘텐츠 製作社요. 꿈이 遠大하죠? 아직 始作도 못 했습니다.(웃음)”(형주) “저희는 유튜브로 팬들을 만나고 있지만 職業은 코미디언이에요. 公採 개그맨 志望 時節 가졌던 꿈과 같아요. 最高의 코미디언이 되는 겁니다.”(선응)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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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惡魔가 編輯했나 惡魔를 編輯했나… ‘나는 솔로’ PD가 입을 열었다[복수자들]

    “‘나는 솔로’를 안 보면 對話에 못 낀다.” 誇張이나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現커’(現實커플) 세 커플 탄생시킨 6期, “손 扇風機 안 가져왔어?” 한 마디로 숱한 패러디를 量産한 10期부터 兆朕이 尋常치 않더니, 最近 放映된 16基에서 頂點을 찍었습니다. 家族과의 食事자리에서도, 職場人들의 ‘커피 타임’ 때도 ‘나는 솔로’는 가장 ‘핫’韓 對話 素材였습니다. 한밤의 발레로 사랑을 告白한 영숙, 올해의 流行語 “테이프 깔까?”의 主人公 광수, 카메라와의 아이컨택을 선보인 상철 等 獨步的인 캐릭터들의 饗宴에 李孝利, NCT 도영 等 演藝人들까지 ‘나는 솔로’ 팬을 自處했습니다. 16期 出演陣이 放送 後日談을 傳하는 유튜브 라이브 放送 視聽者는 25萬 名까지 치솟았습니다. ‘本放死守’라는 單語가 無色해진 時代에 “水曜日 밤 10時 30分만 기다린다”는 骨髓팬들을 量産해낸 ‘나는 솔로’의 中心에는 남규홍 PD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人氣와 함께 남 PD도 스포트라이트의 中心에 섰습니다. ‘脚本 없는 드라마’를, 俳優도 아닌 一般人과 만들어가고 있는 그에게 質問들이 쏟아집니다. ‘어디서 그런 人物들을 涉外하는 것이냐’부터 ‘惡魔의 編輯이 事實인지’, ‘人氣를 牽引한 出演陣에 인센티브를 얼마나 支給하는지’까지 放送과 關聯된 些少한 情報들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膾炙됩니다. 도파민 暴發시키는 出演陣을 끌어모으는 남규홍 PD에게 이런 修飾語가 붙습니다. ‘大韓民國에서 가장 人福 많은 男子.’ 놀랍게도 남 PD는 “實際로 만나보면 그들 모두 平凡한 人間”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하나에만 集中해 濃縮된 感情을 터뜨리다 보면 누구나 ‘빌런’이 될 수도, ‘어쩌다 보니 主人公’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平凡한 男女가 짝을 찾아가는 過程을 담고 있는 南 PD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2011年 ‘짝’에 이어 一般人의 짝짓기 프로그램을 연이어 만드는 理由, 出演陣 ‘빌런 論難’에 對한 그의 생각을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https://youtu.be/BQFoQrj_Gxg)에서 볼 수 있습니다.―최근 放映된 16期가 엄청난 人氣를 끌었어요. 結婚 커플 두 팀 誕生한 6期, 온갖 패러디 量産한 10期, ‘빌런’ 總集合했다는 16期 中 PD님의 ‘원픽’李 궁금합니다.제 마음속 원픽 騎手는 9機라고 늘 이야기 했었는데요. 세 旗手 中 고르자면 6期를 고르고 싶네요. 프로그램이 安定期에 접어든 時期이기도 하고, 出演者들도 宏壯히 熱心히 臨해주셔서 愛情이 큽니다. 같이 삽질하던 時期거든요. 어려울 때 苦生을 같이 한 분들이 오래 記憶에 남아요. 16期도 話題가 많이 돼서 宏壯히 고맙죠. ―期數 話題性에 따라 인센티브를 支給하시잖아요. 歷代級 人氣를 누린 16期 인센티브에 關心도 至大해요. 200萬 원 以上은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300萬 원을 가져가기도 했고요. 웬만하면 同等하게 가는 게 맞지만, 특별한 케이스에는 더 받게 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요, 原則은 없습니다. 出演料와 인센티브를 다들 궁금해하시는데, 돈에만 關心이 너무 置重되는 건 좀 아쉽죠. 돈보다 더 重要한 價値가 있기 때문입니다. 出演料가 漸漸 올라가다 보면 프로그램이 亡해요. 出演料를 노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眞情性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돈을 안 줘도 나오겠다는 覺悟가 있는 사람들이 프로그램에서 活躍하는 케이스를 훨씬 더 많이 봤어요. 돈이 契機가 되는 瞬間 純粹한 마음이 毁損될 수 있어요. ―이番 16期 ‘돌싱 特輯’이 큰 人氣를 끌었잖아요. 老年層, 性小數者, 外國人, 演藝人 特輯 等을 만들어달라는 視聽者들 意見도 있는데, 特輯 計劃이 있으신가요?모솔, 돌싱 特輯 外에 다른 特輯便 計劃은 없습니다. 一般人 出演者들도 너무 많이 밀려있어요. 特輯은 ‘放送을 위한 特輯’으로 끝날 것 같아서 自制하려고 합니다. 言論이나 放送界 從事者들은 웬만하면 커트하려고 해요. 眞情性이 떨어질 수 있거든요. 放送人들은 마이크를 잡고 進行하려는 習性이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나올 수 있어요. 그분들만 모은 特別篇을 만들 순 있겠지만 現在로선 一般人을 優待하고 있습니다. 나는 솔로에는 ‘빌런 論難’李 끊이지 않습니다. 出演者 빌런 論難은 매 期數마다 불거집니다. 視聽者들은 ‘이番 騎手의 빌런은 누구인지’를 두고 甲論乙駁을 벌이기도 합니다. 出演陣이 아닌 남 PD가 ‘最終 빌런’이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出演陣의 驚愕할만한 行動들을 製作陣이 誘導한다는 指摘입니다. 이에 對해 남 PD는 “出演陣이 빌런度 아니고, 製作陣이 빌런의 모습을 誘導하지도 않는다”고 線을 긋습니다. 사랑이라는 感情에 오롯이 集中하는 過程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行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出演陣 涉外에도 그리 안달하지 않는답니다. “누가 나와도 그 程度는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編輯을 두고 論難이 끊이지 않았어요. 惡魔가 編輯했다 VS 惡魔를 編輯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착한 惡魔가 編輯한 거죠. 出演陣 빌런 論難이 繼續 있는데요, 惡魔는 저 하나로 足합니다. 出演陣들은 實際로 만나보면 平凡해요. 感情에 集中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들이 視聽者에게 빌런처럼 보여지는 거죠. 저희가 그런 行動과 狀況을 誘導했다고 誤解할 수 있는데, 솔로나라에 가면 누구나 다 그 程度 모습은 나온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캐스팅에 그렇게 안달복달 하지 않아요. 누구를 뽑아 놔도 적어도 亡하지는 않거든요. ―‘빌런’李 合格 基準이 아니라면 出演陣을 뽑을 때 어떤 點을 重要하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合格 팁은 뭔가요?합격과 不合格이 있는 건 아닙니다. 1, 2年 前에 인터뷰했던 분들도 出演하는 境遇가 있죠. 基準線에만 通過됐다 싶은 분들은 때에 따라 以後 기수에 出演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基準線에는 어떻게 通過하나요?) 活動的이고 積極的인 분이 좋고요, 사람을 서로 紹介하는 프로그램이니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要素를 갖추면 좋아요. ‘내 子女가 저 프로그램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요. 魅力도 重要해요. 조금만 對話를 해 봐도 즐겁고 재밌는 분들은 宏壯히 좋은 出演者죠. 마음을 動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인터뷰 20~30分 안에 시시콜콜 그 사람의 모든 걸 豫想하거나 期待하면 안 돼요. 그냥 하늘에 맡깁니다. ―한 인터뷰에서 ‘革命을 일으킬 만한 人物을 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南 PD님이 생각하는 ‘革命家’란 어떤 사람인가요? 革命家에게는 自己犧牲이 必要해요. 組織이나 團體를 여러 側面에서 좋게 바꾸려는 따뜻한 마음과, 그걸 實踐할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革命家거든요. 그런 분들이 솔로나라에 오면 分明 새로운 기운이 돌죠. (16基의 革命家는 누구였나요?) 광수님이요. 그분이 스토리에 많은 波瀾을 일으켰어요. 모든 事件들에 다 關與를 하면서 판을 뒤집어놓았기 때문에 革命가 役割을 한 거죠. 광수님 紹介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어쩌다 보니 主人公’. ―外貌도 보시나요?외모가 뛰어난 분들이 훨씬 유리한 건 事實이에요. 그분들은 판을 흔들어놓거든요. 革命史跡 要素가 있기 때문에 製作陣 立場에서 예쁘고 잘생긴 분들을 歡迎하는 건 當然합니다. (外貌的으로 가장 革命的이었던 出演者를 꼽는다면?) 11期 英哲, 17期 玉脣. ‘달걀 속 노른자위 같은 사람 마음, 기름 두르고 후라이를 해 보면 안다.’ 南 PD가 直接 敵은 放送 속 글句입니다. 달걀을 깼을 때 노른자위의 境界는 흐리멍덩하지만 후라이를 하면 노른자의 境界가 漸漸 鮮明해집니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남 PD는 말합니다. 反復되는 日常 속에서는 두드러지지 않았던 人間 本性은, ‘솔로 나라’라는 기름이 부어지는 瞬間 그 實體를 드러냅니다. 솔로나라의 村長으로서 기름 붓는 役割을 繼續 하겠다고 남 PD는 말합니다. ―세 딸의 아버지이십니다. 딸이 이 中 하나의 프로그램 出演해야 한다면요? 하트시그널 vs 나는 솔로 vs 換乘戀愛.나는 솔로에 나오는 게 좋죠. 旣往 經驗할 거면 津하게 經驗하는 게 좋아요. 本人들은 더 많은 걸 가져갈 수 있어요. 感情이 高濃度로 農畜되면 짧은 時間 안에 터질 때도 있어요. 出演陣들이 全部 하는 말이 ‘솔로 나라 와서 울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番 出演해보면 알아요. 濃縮된 感情들이 낯선 環境에서 暴發하는 經驗을 하시게 됩니다. 感情을 터뜨리지 않으면 病이 납니다. 울고 싶으면 울어버리고 시원하게 解消해야 돼요. 感情을 그때그때 터뜨려버리면 다 解消되게 돼 있고, 그게 또 다른 에너지가 돼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어요. ―旣存 演出作 짝과 나는 솔로가 一般人 매칭 프로그램이잖아요. 類似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理由가 있나요? 意圖한 겁니다. 짝의 境遇 宏壯히 훌륭한 프로그램이 뜻하지 않게 사라진 側面도 있어요. 짝의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살려보자고 意圖해서 만든 게 나는 솔로에요. 죽은 子息은 正말로 눈물나거든요. 제 죽은 子息인 짝을, 10年의 歲月이 흐른 後에 怜悧하게 살려 놓은 게 나는 솔로에요. 짝과 나는 솔로 모두 우리 時代의 사랑에 對한 自畫像 役割을 합니다. 男女가 짝을 찾아나가는 過程을 보면서 視聽者들이 自身의 모습을 돌아볼 거라고 期待합니다. 짝 製作陣이었던 나상원 PD, 백정훈 PD와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닷 다시 뭉쳐 짝의 精神을 이어 받아 같은 方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精神은 毁損되지 않은 狀態로 繼續 갈 겁니다. ―남규홍에게 ‘달걀 속 노른자 위 같은 사람 마음’이란 뭔가요?제 마음이죠. 달걀 속 노른자위는 흐리멍덩해요. 區別도 안 되고 先導 曖昧하고 色도 曖昧한데 기름을 두르고 튀김을 해보면 鮮明하게 노란色으로 쫙 드러나거든요. ‘普通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라는 意味로 쓴 겁니다. 제 마음도 그런 마음이고요.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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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義理’ 實踐하는 김보성 “義理 傳播 위해 俳優가 됐다”[복수자들]

    으里! 으里! 으리!두툼한 두 팔을 타이트하게 휘감은 검은 가죽점퍼,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구레나룻을 길게 늘어뜨린 이 男子. 인터뷰 始作하자마자 난데없이 ‘義理 三蒼’을 외칩니다. 눈 감고 들어도 ‘으리!’를 외치는 그 男子, 누군지 今方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自稱타칭 ‘義理의 사나이’ 김보성(57)입니다.과거엔 ‘콘셉트 아니냐’며 疑心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只今은 누구도 그런 疑問을 提起하지 않습니다. 1989年 데뷔 後, 35年間 한결같은 態度로 義理를 외치고 있으니까요. 泄瀉 콘셉트로 始作했다 할지라도 이토록 오랫동안 眞摯하다면 이젠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적어도 大韓民國에선 김보성 하면 義理, 義理 하면 김보성입니다. 김보성이 義理를 思慕하는 理由는 무엇일까요. 代替 김보성에게 義理가 무엇이기에!〈복수자들〉이 ‘義理의 사나이’ 김보성을 直接 만났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김보성의 義理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住所를 複寫해 住所窓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義理를 傳播하기 위해 俳優가 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事實입니까? “事實입니다. 義理를 人生의 信念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20代 初盤이었어요. 어릴 때 죽을 고비를 많이 겪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人生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苦悶을 많이 했죠. 그러다 얻게 된 結論이 바로 義理였습니다. 짧은 人生, 後悔 없이 義理를 지키며 살기로 決心했습니다.”―‘의리를 지킨다’는 게 어떤 意味인가요? “20代 初盤 스티븐 스필버그의 映畫 ‘쉰들러 리스트’를 봤습니다. 映畫에서 獨逸 將校가 ‘한 名 더 살릴 수 있었는데’ 하면서 嗚咽하잖아요. 그 場面이 제게 큰 깨달음을 줬습니다. 世上에서 가장 價値 있는 일은 한 사람의 生命을 살리는 일이다.”―그래서 데뷔하자마자 義理를 외치신 건가요? “俳優 活動할 때도 꾸준히 放送에서 義理를 말했습니다만 眞摯한 語套로 義理에 關한 이야기를 하니 모조리 編輯이 되더라고요. 재미가 없었나 봐요. 그래서 作戰을 바꿨죠. 多少 戱畫化되더라도 재밌게 義理를 외치면 사람들의 視線을 끌 수 있지 않을까. 義理에 對한 나의 意志와 信念을 傳播하기 위해 더욱 效果的이지 않을까.”의리를 傳播하기 위한 그의 計算(?)은 통했습니다. 김보성이 묵직한 주먹을 불끈 쥐고 ‘으리!’를 외치자 사람들은 爆笑를 터뜨렸습니다. 各種 藝能 프로그램 러브콜에 쏟아지는 廣告까지. 오랜 信念을 ‘效果的으로’ 傳達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주기 始作한 겁니다. 하지만 大衆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眞짜 理由는 김보성이 ‘입’으로 義理를 외치는 데에서 끝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보성은 ‘나눔의 義理’를 지키기 위해 寄附, 奉仕 같은 公共을 위한 善行에 積極的으로 投身해왔습니다. 歲月號 慘事 때는 生活費 名目으로 貸出받은 金額의 一部인 1000萬 원을 떼어 寄附했습니다. 當時 그는 歲月號 合同 焚香所에 찾아가 “誠金을 많이 못 내서 대단히 罪悚하게 생각한다. 내 能力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원망스럽다”며 歎息했습니다. ―‘고작 1000萬 원’이라고 하셨지만 貸出받아 寄附한다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입니다. “歲月號 慘事 當時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몇 날 며칠 밤낮을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貸出 받아 生活하던 때였어요. 너무 적은 額數라 부끄러웠고 더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疏外되고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 對한 義理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김보성의 마음엔 能力이 不足해 더 많은 金額을 寄附하지 못한 게 恨(恨)으로 남았습니다. 以後로 그는 當時의 한풀이라도 하듯 ‘나눔의 義理’를 지키는 데에 邁進하고 있습니다. 視覺 障礙人과 飢餓 兒童을 위해 2000萬 원을 寄附하고, 國際救護團體 ‘월드비전’을 통해 미얀마 兒童들에게 다달이 後援金을 보냈습니다.쉰 살이 되던 해에는 새로운 挑戰도 했습니다. 2016年 小兒癌 患兒를 돕기 위해 綜合 格鬪技 데뷔戰을 치룬 겁니다. 競技에선 惜敗했지만 對戰料와 入場料 全額 8000萬 원을 小兒癌 患兒를 위해 寄附합니다. 뜻깊은 일을 했지만 김보성 個人에겐 試鍊이 닥쳤습니다. 競技 途中 眼球가 陷沒돼 失明 危機를 겪은 겁니다.―부상을 입으면서까지 小兒癌 患兒 寄附에 邁進하는 理由가 궁금합니다. “奉仕活動으로 만난 小兒癌 환아가 있었어요. 그때 그 아이와 約束했거든요. ‘우리 아기 빨리 나아서 아저씨랑 밥 같이 먹자’고요. 渾身의 힘을 다해서 競技를 치른 後에 病院을 몇 番 찾아갔어요. 근데 아이가 끝까지 저를 안 만나주는 거예요. 病勢가 漸漸 惡化되고 있었는데, 저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前날에도 엄마에게 ‘김보성 아저씨랑 約束 못 지켜서 어떡하냐’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가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고, 葬禮式場에 가서 入棺하는 모습도 지켜봤어요. 正말 마음이 아팠어요.”―기부금만 내는 것이 아니라 直接 奉仕活動도 하시는 거네요. “眞心 어린 行動이 따르는 것, 그게 眞正한 ‘나눔의 義理’입니다. 보여주기 式이 아니라 眞心으로, 純粹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寄附나 奉仕를 特定 集團의 利己的인 目的으로, 自己들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의리를 지키기 위해 自己犧牲을 기꺼이 甘受하는 건 崇高한 일입니다. 貸出도, 負傷도 두렵지 않았던 김보성. 感染病 앞에서도 그는 勇敢했습니다. 2020年 2月, 大邱·慶北 地域에서 코로나19 患者가 多數 發生한 時期에 直接 트럭을 몰고 가서 마스크 1萬4000張을 市民들에게 直接 나눠준 겁니다. 市民들 한 사람 한 사람 抱擁하며 慰勞와 激勵를 건넸습니다. ―그때도 寄附만 하신 게 아니라 直接 트럭을 몰고 大邱로 내려가셨습니다. “當時 大邱 空氣가 汚染됐다는 루머까지 돌았어요. 마스크도 不足했고 大邱를 隔離해야 한다는 主張도 나왔어요. 大邱 市民들이 精神이 疲弊해질 程度로 너무 힘들었던 狀況이었죠. 한 분 한 분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때 마스크 나눠드리면서 ‘힘내시라’고 市民들과 抱擁을 했어요. 많은 市民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便紙 써서 주시고 ‘感謝하다’고 꽃도 주셨고요.”―‘나눔의 義理’를 지키려 貸出도 받고 負傷도 입으셨습니다. 家族들 反應은 어떤가요? “제 아내도 저처럼 大韓民國 最高 義理女입니다.(웃음) 小兒癌 患兒 도울 땐 저 따라 直接 머리카락 잘라서 寄附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든든하게 家庭을 지켜주고 아이들 잘 키워주고 있고요. 제가 寄附하는 것, 奉仕活動 하는 것도 다 理解해줍니다. 奉仕活動은 아내도 함께 나간 적도 많았어요. 한 番도 反對한 적 없고 支持해줬습니다.”이쯤 되면 김보성의 職業이 마치 ‘義理啓蒙運動家’인 것으로 錯覺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本業은 俳優입니다. 액션 俳優가 되겠다는 一念으로 충무로에 入門해 數年間 演出部, 엑스트라, 劇團 生活 等을 轉轉하다가 1989年 映畫 ‘幸福은 成績順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했습니다. 이미연의 相對役이자 主演級인 봉구 役을 맡아 스타덤에 오릅니다. 1990年代만 해도 映畫 ‘투캅스’ 시리즈, 드라마 ‘모래時計’ 等에 出演했지만 언제부턴가 映畫, 드라마에서 ‘俳優 김보성’을 보긴 어려웠습니다. 여러 事情이 있겠지만 ‘義理’를 외치는 김보성에게 藝能인 이미지가 剛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俳優보다 藝能인 이미지가 剛해졌습니다. 演技에 對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예전에 한창 活動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俳優다.’ 事實 저는 藝能에서 웃기려고 한 적이 한 番도 없었거든요. 제가 말하는 스타일이 웃긴 건지, 狀況이 웃긴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웃음을 준다면 저로선 感謝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演技에 對한 목마름은 아직도 많습니다. 只今 準備하고 있는 映畫도 있습니다. 演技와의 義理도 지킬 수 있는 機會가 더 많아지길! 으里! 으리!”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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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法院 “안인득 放火-殺人 遺族에 國家가 4億 賠償하라”

    調絃病을 앓던 안인득(46)李 같은 아파트 住民 5名을 殺害하고 17名을 다치게 한 2019年 ‘안인득 放火·殺人事件’의 被害 遺族에게 國家가 賠償해야 한다는 法院 判決이 나왔다. 서울中央地方法院 民事合議24部(部長判事 박사랑)는 15日 ‘안인득 放火·殺人事件’의 被害者이자 遺家族人 原稿 4人이 國家를 相對로 提起한 損害賠償請求訴訟에서 “國家는 總 4億餘 원을 支給하라”며 原告 一部 勝訴 判決을 내렸다. 이 事件으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金毛 氏와 金 氏의 女同生 금세은 氏 等이 2021年 11月 警察의 安逸한 對應이 慘事로 이어졌다며 國家를 相對로 5億4000萬 원을 賠償하라고 訴訟을 提起한 지 2年 만이다. 東亞日報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3月 ‘안인득 放火殺人, 그 後 1068日의 記錄’ 報道를 통해 이들의 被害 以後 삶과 精神的 苦痛, 訴訟을 提起하게 된 背景 等을 다룬 바 있다. 裁判部는 判決文에서 安 氏가 犯行 前 6個月間 異常行動을 보여 112에 數次例 申告됐지만 警察의 措置가 없었던 點 等을 指摘하며 “警察이 安 氏에 對해 診斷 및 保護申請을 要請하는 等 積極的으로 措置하지 않은 것은 顯著하게 不合理하며 職務上 義務를 違反한 것”이라고 判斷했다. 또 “警察이 行政入院 申請을 要請해 實際로 安 氏가 入院했다면 적어도 放火·殺人을 實行하기는 不可能했을 것”이라며 警察의 職務上 義務 違反과 被害者의 死亡·傷害 間 因果關係를 認定했다. 금세은 氏는 이날 本報와의 通話에서 “勝訴했지만 家族을 잃은 아픔은 如前하다. 如前히 不眠症과 恐慌障礙에 시달린다”면서도 “이제라도 重症精神疾患者를 國家가 제대로 管理해 비슷한 事件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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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法院 “‘안인득 事件’ 國家 責任 認定…遺族에 4億 원 賠償하라”

    調絃病을 앓던 안인득(46)李 住民 5名을 殺害하고 17名을 다치게 한 ‘안인득 放火·殺人事件’의 被害 遺族에게 國家가 賠償해야 한다는 法院 判決이 나왔다. 서울中央地方法院 民事合議24部(박사랑 部長判事)는 15日 ‘안인득 放火·殺人事件’의 被害者이자 遺家族人 金毛 氏 等 原告 4人이 國家를 相對로 낸 損害賠償請求訴訟에서 “國家는 總 4億餘 원을 支給하라”며 原告 一部 勝訴 判決을 내렸다. 이 事件으로 딸과 어머니를 잃은 金毛 氏와 아내 車某 氏, 金 氏의 누나, 金 氏의 女同生인 금세은 氏가 2021年 11月 國家를 相對로 5億4000萬 원을 賠償하라며 訴訟을 提起한 지 2年 만이다. 東亞日報 히어로콘텐츠팀은 지난해 3月 ‘안인득 放火殺人, 그後 1068日의 記錄’ 報道를 통해 이들의 精神的 苦痛과 被害, 訴訟을 提起하게된 背景 等을 다룬 바 있다.판결문에서 裁判部는 “警察이 安 氏에 對해 診斷 및 保護申請을 要請하는 等 積極的으로 措置하지 않은 것은 顯著하게 不合理하며 職務上 義務를 違反한 것”이라고 判斷했다. 이어 精神健康福祉法 條項과 警察 內部 業務指針 等에 따라 “警察은 精神疾患이 있고 字·打海 危險性이 있다고 疑心되는 對象者에 對해 行政入院 等 措置를 할 必要가 있었다”고 指摘했다. 裁判部는 또 安 氏가 2019年 4月 犯行을 일으키기 前 6個月 間 異常行動을 보여 112 申告가 數次例 이뤄졌지만 警察의 措置가 없었던 點을 指摘했다. 裁判部는 “警察이 行政入院 申請을 要請해 實際로 安氏가 入院했다면 적어도 放火·殺人을 實行하기는 不可能했을 것”이라며 警察의 職務上 義務 違反과 被害者의 死亡·傷害 間에 因果關係가 있다고 認定했다.금세은 氏는 이날 本報와의 通話에서 “勝訴했지만 家族을 잃은 아픔과 衝擊은 如前하다. 아직도 不眠症과 恐慌障礙에 시달린다”며 “그럼에도 重症精神疾患者를 國家가 제대로 管理해야 한다는 判例가 생겼다는 것이 慰安이 된다. 앞으로 警察이 現場에서 보다 積極的으로 重症精神疾患者에 對한 保護措置를 해서 제2의 안인득 放火·殺人事件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이番 判決로 重症精神疾患者에 對한 ‘國家責任制’ 導入이 힘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觀測도 나온다. 法院에서 重症精神疾患者의 入院 與否를 決定하도록 하는 司法入院制度나, 患者 本人이 願치 않더라도 자·타해 威脅이 뚜렷한 境遇 患者를 病院에 護送하는 ‘비(非)字의 護送 體系’ 等이 國家責任制의 骨子다. 백종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法制理事는 “現在 우리나라의 精神健康福祉法은 重症精神疾患者에 對한 管理 責任을 家族에게 過度하게 지우고 있다. 비자의 入院 大部分이 家族에 依해 이뤄지고 있는 것도 警察과 地自體가 제 役割을 하지 못해서다”라며 “이番 判決을 통해 重症精神疾患者에 對한 管理와 治療에 國家가 積極的으로 나서도록 하는 ‘國家責任制’ 論意가 進陟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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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嫌惡하던 나를 넘어섰다”… 美 런웨이 선 韓國人 最初 ‘플러스사이즈’ 모델[復讐者들]

    키 160cm의 NBA 歷史上 最單身 選手 먹視 보그스. 아메리칸발레시어터 設立 以來 最初의 黑人 首席 舞踊手 미스티 코플랜드. 兩손 代身 義手로 붓을 든 畫家 석창우…. 이들의 共通點은 特定 職業에 對한 先入見을 깼다는 것입니다. 短身의 籠球選手, 黑人 발레리나, 兩손 없는 畫家처럼 김지양 氏(37)도 ‘모델’이라는 職業에 對한 偏見을 깬 人物입니다. 그는 키 165cm에 70kg, 39-32-38의 身體 사이즈로 韓國人 最初 美國 런웨이에 선 ‘플러스 사이즈 모델’입니다. 플러스 사이즈는 77사이즈(男性 基準 100사이즈) 以上을 뜻합니다. 女性 77사이즈, 男性 100사이즈 以上을 生産하는 旣成服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의 登場은 잔잔한 湖水 表面에 던져진 돌멩이와 같았습니다. 韓國에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生疏했던 2010年, 그는 美國 最大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人 ‘풀 피겨드 패션위크 LA’에서 韓國人 最初로 데뷔했습니다. 살집이 있는 몸으로 런웨이를 堂堂하게 걷는 그의 모습은 ‘모델은 말라야 한다’는 固定觀念에 波動을 일으켰습니다. 以後 그는 東洋人 最初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 ‘캐리비안 패션위크’ 公式 홈페이지를 裝飾했고, 패션브랜드 ‘아메리칸어패럴’에 보낸 콘셉트 寫眞이 全 世界 온라인 投票에서 991名 中 8位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4年부터 플러스 사이즈 雜誌 ‘66100’을 發行하기 始作했고, 같은 이름의 플러스 사이즈 衣類 및 속옷을 販賣하는 쇼핑몰을 創業했습니다. 水面 위 波動은 컸지만 後暴風도 뒤따랐습니다. 雜誌社들은 그에게 畫報 撮影을 提案하면서도 代價를 支拂하지 않으려 했고, 인터뷰 記事에는 그의 外貌를 卑下하는 수많은 惡플들이 每日같이, 아무렇지 않게 달렸습니다. 根據 없는 誹謗 속에서도 그가 自尊感을 지킨 方法은 나 自身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認定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中턱이 平生의 콤플렉스였고, 畫報 撮影 後 턱을 깎는 포토샵을 해달라고 付託하는 自身이 혐오스러운 적도 있다고 告白합니다. 겹겹이 存在했던 自己嫌惡와 마주한 뒤 “나는 只今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이야기를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볼 수 있습니다. (住所를 複寫해 住所窓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https://youtu.be/0Kr9gt3byXg)―2010年 165cm에 70kg의 몸매로 美國 런웨이에 선 最初의 韓國人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注目을 받으셨어요. 只今도 같은 스펙을 維持하고 계신가요?그때보다 14kg이 더 늘었어요. 只今은 99사이즈를 입고 있습니다. ―데뷔 當時만 해도 韓國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生疏했어요. 어떻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기로 決心하신 건가요? 大學校에서 外食調理學을 專攻하고 料食業 關聯 會社에서 일하다가 여러 가지 일들이 얽혀 勸告辭職을 當하게 됐어요. 退社 後 뭘 할지 몰라서 彷徨을 많이 했습니다. 제 길이라 생각하고 大學에서 專攻한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당황스러웠어요. 마침 그때 포털 사이트에 ‘挑戰! 슈퍼모델 코리아’ 시즌1 志願者 募集 公告가 떴어요. 公告를 보는 瞬間 ‘이거다’ 싶었어요. 그동안 제가 살아오면서 失敗하지 않을 법한 일들에만 挑戰해서 成就가 當然하게 주어졌는데, 모델은 失敗할 것 같아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모델의 어떤 點이 그렇게 좋으셨던 건가요?‘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支援하기로 決心하고 프로필 寫眞 撮影을 하는데 저를 向해 터지는 照明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삶에서 내가 오롯이 主人公인 瞬間이 別로 없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그 瞬間만큼은 제가 主人公이었어요. ‘이 瞬間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漸漸 커져서 모델에 제대로 挑戰해보게 됐어요. ―‘罪責感 없이 먹는 게 所願이야’라는 에세이를 내셨을 程度로 飮食에 眞心이세요. 먹는 것과 모델일, 두 가지가 兩立하는 건 어렵다는 視線도 있어요. ‘自己管理가 귀찮아서 플러스 모델 하겠다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視線이죠. 많은 분들이 誤解하시는 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고 마음껏 먹는다는 거예요. 저희도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니에요. 사이즈나 外形을 제가 에이전시나 契約한 業體에 提出한 프로필에 맞게 維持해야 하거든요. 例를 들어 제가 빨간 머리를 한 프로필 寫眞을 提出했으면 빨간 머리인 狀態로 있어야 하고, 검게 태닝을 한 모습이면 그대로여야 하죠. 몸무게가 프로필 基準 더 쪄서도 안 되지만, 더 빠져서도 안 되고요. 모델이란 職業이 가지는 特殊性은 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그대로 適用돼요. 또 于先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처음 登場한 理由는 旣成服 사이즈 以上을 입는 사람들도 모델이 着用한 옷을 보고 제대로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게 해주자는 것이었어요. 모델이 無條件 마르기만 해야 한다는 것 自體가 先入見인 거죠. 모델은 엄청 消息을 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데 그런 極端的인 食單이 맞는지, 持續 可能한지에 對한 苦悶도 있었어요. 베르사체는 2020年 베르사체 歷史上 처음으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세 名이나 런웨이에 올려 話題가 됐습니다. 2021年 샤넬 런웨이 쇼에는 네덜란드 出身 플러스 사이즈 모델 質 코틀레브가 堂堂한 워킹으로 觀客들의 拍手를 받았습니다. 包容과 平等, 身體的 多樣性을 强調하고 있는 겁니다. 韓國은 조금 더딥니다. 如前히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起用하는 브랜드는 거의 없고, 런웨이에도 마른 모델이 大部分 섭니다. 일감이 턱없이 不足하기에 때론 不當한 處遇도 참아내야 합니다. ―男性 雜誌 맥심에서 2021年부터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를 열고 있어요. 旣存에 열던 ‘미스 맥심 콘테스트’보다 衣裳의 露出 水位가 훨씬 높아 뚱뚱한 女性들을 性的 對象化 하는 것 아니냐는 批判的 視線도 있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女性을 性的 對象化하는 問題는 오랜 時間 舌戰을 펼쳐왔던 主祭잖아요. 몸집이 큰 女性을 對象化하는 건 女性에 對한 嫌惡, 뚱뚱한 사람에 對한 嫌惡 等 多樣한 嫌惡들이 重疊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맥심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는 미디어가 뚱뚱한 女性을 어떻게 消費하고자 하는가를 보여주는 端的인 예에요. 하지만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일감이 正말 적기 때문에 어떤 機會라도 있다면 잡아야 하는 게 現實이죠. 그래서 콘테스트에 나가는 분들을 제가 非難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맥심과 같은 男性 雜誌의 畫報 提案을 받은 적이 있나요?플레이보이코리아에서 提案했지만 拒絶했어요. 當時엔 돈을 준단 말을 안 한 게 가장 큰 理由였어요. 이건 제가 宏壯히 오랫동안 겪어온 일이에요. 節 모델로 쓰고는 싶은데 돈을 주긴 싫은 거죠. 그런 境遇 인터뷰 名目으로 절 부르고, 풀 메이크업을 시켜서 撮影을 해요. 結果物은 두 페이지짜리 火報告, 인터뷰는 아주 작게 나가죠. 일에 合當한 代價를 받지 못하는 狀況을 10年 넘게 겪어왔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大部分 쇼핑몰을 열어서 모델을 하거나, 需要가 比較的 많은 海外에서 活動하려는 분들도 있어요.―플러스 사이즈 모델에게도 要求되는 基準이 궁금해요.‘누가 더 예쁘게 살쪘는가’에 對한 소리 없는 競爭이 있긴 해요. 허리가 가늘고 가슴과 엉덩이가 큰, ‘커비(Curvy)’韓 몸매를 選好하죠. 結局 마른 모델을 뻥튀기해 놓은 體型이에요. 그래서 볼륨感을 키우기 위해 가슴과 엉덩이 擴大 手術을 하는 境遇도 많아요. 그 自體도 問題라고 생각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旣成服보다 더 큰 體型의 사람들도 自身의 身體와 잘 맞는 옷을 이미지로 보고 購買할 수 있도록 돕는 役割도 해야 하는데, 플러스 사이즈 모델조차 現實에 없는 몸매의 基準에 또 다시 맞춰지는 거죠.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向한 嫌惡의 視線과 惡플들, 적은 일감으로 인한 生活苦까지 겹치면서 憂鬱症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도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周邊 勸誘에 보톡스를 맞을까 苦悶한 적도 있습니다. 周邊의 基準에 나를 맞추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를 回避하지 않고 마주한 結果 그는 永遠하지 않을 美의 基準에 自身을 맞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活動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瞬間은 언제인가요? 最近에 躁鬱症 藥을 먹고 있어요. 너무 오랜 期間 일에만 埋沒돼 지냈던 것 같아요. 獨立出版物 出刊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아니다보니 5年 程度 雜誌를 끌어오면서 많이 지쳤어요. 쇼핑몰을 運營하게 된 것도 힘들었어요. 周邊에서 ‘너 모델 된 것도 쇼핑몰 해서 돈 벌려고 그러는 거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죽어도 쇼핑몰만은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는데, (經濟的 理由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듯 始作했거든요. 惡플에도 많이 시달렸어요.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躁鬱症이 찾아온 것 같아요. ―가장 傷處가 됐던 惡플은 뭔가요? ‘김지양은 虛言症 患者’라는 惡플이요. 길거리에서 헌팅을 當한 적이 있는데 너무 不快했어요. 싫다고 分明하게 拒絶했는데 繼續 따라왔거든요. ‘싫다면 싫은 것이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는데, ‘김지양은 虛言症 患者다, 저렇게 뚱뚱한 女子를 누가 헌팅하느냐’라는 惡플이 달렸어요. 가 男便이 있다는 事實에 對해 ‘있지도 않은 男便을 있다고 거짓말한다’는 惡플度 正말 荒唐했죠.―모델을 꿈꿨지만 資金難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쇼핑몰을 創業하셨어요. 只今도 쇼핑몰을 運營하는 게 힘드신가요? 只今은 宏壯히 만족해요. 쇼핑몰 ‘66100’은 女性 66사이즈, 男性 100사이즈를 의미해요. 旣成服에서 ‘라지’에 該當하는 사이즈죠. 그 以上의 사이즈를 영캐주얼이라 普通 부르는 브랜드들에서 製作하지 않아요. 그래서 66100은 ‘66 사이즈, 100사이즈 사이즈를 넘어서는 當身의 無限함에 對해서 이야기한다’는 意味를 담고 있어요. 저희 쇼핑몰을 利用해본 顧客들은 “여기 絶對 亡하면 안 돼요. 여기 말고는 바지 살 곳이 없어요”라고 말씀하세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힘이 나요. 속옷도 마찬가지예요. 패드와 와이어를 없앤 속옷 上의 ‘브라렛’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허리 40인치 以上인 분들도 입을 수 있는 팬티를 만들고 있어요. 旣成服 사이즈 基準으로 105, 110까지만 나오는데 저희는 130까지 커버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契機가 있나요?이중턱에 宏壯히 큰 콤플렉스를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준 지 얼마 안 됐어요. 自身의 몸에 對한 콤플렉스에 對해 곰곰이 따져 보면 그 안에 內在된 自己嫌惡를 發見할 수 있을 거예요. 올해 初 發刊된 ‘엉엉 우는 法을 잊은 나에게’를 쓰면서 많이 생각을 整理했어요. 出版社와 契約을 하고 5年 間 原稿를 못 보냈어요. 出版社는 ‘堂堂하고 自信感 있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이야기를 바랐는데 저는 나 自身조차 건사하기 힘들어서 휘청대고 있었거든요. 그 때 自己嫌惡와 마주하는 時間을 가졌고, 苦悶의 時間을 지나 昨年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굴은 갸름해야 하지 않겠냐’라며 보톡스를 맞아 보라고 提案한 분도 있었어요. 보톡스는 永遠하지 않아요. 一時的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 中毒됐을 때 問題가 되는 거죠. 내가 平生을 維持할 수 없는 것에 一時的인 滿足感을 가지면서 살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스스로 사랑해 줄지는 個人의 選擇이겠죠. ‘누군가의 말 때문에 二重턱을 이렇게 까지나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이제 그걸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只今은 熱心히 이中턱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지양에게 ‘사이즈’란 어떤 意味인가요? ‘克服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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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男子 키 158은 말이 안된다”는 말에 마음 굳혔다…작은 키의 광대 일오팔[復讐者들]

    ‘키 작다’가 稱讚이 되는 그날까지어느 유튜버 紹介글에 나온 文句입니다. 이 유튜버 이름은 ‘日오팔’. ‘性은 일, 이름이 오팔’은 當然히 아닙니다. ‘日오팔’의 本名은 이명재(27·男). 陸軍 兵長으로 滿期轉役韓 그는 大韓民國의 健壯한 靑年입니다. 그가 ‘日오팔’이란 이름을 갖게 된 理由는 아주 簡單합니다. 키가 158cm이기 때문입니다.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작았던 그는 中學校 때 衝擊的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醫師에게 “더는 못 큰다”는 診斷을 받은 겁니다. 갓 中學生이 된 아들의 키가 더 크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未安하다”며 울먹였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어린 아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自己憐憫에 빠져 스스로 초라한 人間이 되지 말고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다”고 독하게 마음 먹는 契機가 됩니다. 그로부터 10年이 지난 只今, 그의 키는 如前히 158cm입니다. 하지만 ‘작은 키’를 個性으로 내세워 47萬 名의 購讀者를 保有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됐습니다. ‘키 작다’가 稱讚이 되는 그날을 위해 孤軍奮鬪 中인 유튜브 크리에이터 일오팔을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住所를 複寫해 住所窓에 붙여 넣어도 됩니다 )―유튜브 채널 슬로건(‘키 작다’가 稱讚이 되는 그날까지)이 印象的입니다.“그런 날이 오겠냐며 어떤 사람은 비웃을지 몰라도 적어도 저는 眞心입니다.(웃음) 事實 演藝界에도 작은 키로 活動하는 분들이 저 말고도 宏壯히 많잖아요. 그분들 活動을 보면서 저도 應援을 받았던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겐 그런 存在가 되고 싶습니다.”―‘165cm, 170cm 程度만 됐어도’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어중간하게 작을 바에 아예 확 작은 게 낫다고 생각해요. 市場 論理로 따져보면 稀少性이라는 게 있잖아요. 키 작은 男子들 사이에서 저처럼 확 작은 사람이 오히려 競爭力이 있지 않나. 저는 正말 그렇게 생각합니다.”일오팔은 스스로 ‘광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일까 개그맨, 演藝人, 유튜버 보다는 ‘광대’라는 單語가 一五팔에게 더욱 맞는 옷처럼 느껴집니다. 一五팔의 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탕후루, 마라燙 等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生 ‘김한강 시리즈’와 키作남(키 작은 男子)李 겪는 生活 속 哀歡을 담은 ‘日오팔 시리즈’. 2~3分 남짓 짧은 콩트에서 다양한 狀況에 處한 캐릭터를 演技하는데, 映像에서 일오팔은 華麗하고 잘난 사람이기보다는 조금은 不足하고 찌질한 사람이 됩니다. ―日오팔을 두고 ‘찌질 美(美)’가 있다고들 합니다. “처음 유튜브 始作할 땐 다양한 試圖를 해봤어요. 근데 팬들이 저의 불쌍하고 憂鬱해하는 表情을 特히 좋아해주시더라고요. 憂鬱한 表情 演技를 하려면 어떤 캐릭터가 좋을까 苦悶한 끝에 ‘김한강’ 캐릭터가 誕生한 거예요.”―리얼리티 보다는 延期 콘텐츠가 많은 便입니다. “元來는 正統 演技를 하고 싶었어요. 셰익스피어 戱曲도 다 읽고 硏究를 많이 했거든요. 유튜브 始作하면서도 演技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苦悶했어요. 그러다 ‘김한강’ 캐릭터를 만들었고 다양한 狀況劇을 보여줄 수 있게 됐죠. 언젠가 正極 演技에 挑戰해보고 싶어요. 찌질하고 凄凉하고 불쌍한 캐릭터, 저한테 익숙한 役割이요.”―광대가 되고 나서 가장 뿌듯했던 記憶이 있다면요?“제 映像을 보고 팬들이 應援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 中에서도 키가 작은 親舊들이 저를 보면서 힘을 많이 얻는다고 메시지를 보내실 때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正말 廣大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저도 그 親舊들 메시지가 眞心으로 와닿고 感謝하고 또 힘을 얻게 되거든요.한 番은 길거리에서 저보다 작은 男子 분(154cm)이 오셔서 ‘작은 키 때문에 힘들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第 映像을 보던 분이셨어요.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眞心을 터놓고 對話했어요. 表情이 밝아지시는 걸 보고 저도 한참동안 氣分이 좋았던 記憶이 있습니다.”‘작은 키’는 누군가에겐 콤플렉스일 수 있습니다. 一五八道 처음부터 ‘키 작다’는 말이 듣기 便했던 건 아닙니다. 惡意 없이 던지는 말에 傷處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學窓時節 때 놀림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어요.“초등학교, 中學校 때까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親舊들도 正말 많이 놀렸고요. 누군가 惡意를 갖고 甚하게 괴롭혔다기보다는 ‘키 작다’며 日常的으로 놀림을 받다보니까 持續的인 데미지가 오는 거예요. 別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이 蓄積되다보니 傷處가 되더라고요.”―지금은 오히려 ‘작은 키’를 前面에 드러내는 콘텐츠를 만들잖아요. 契機가 있었나요?“중학교 때 親舊들은 저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쟤 眞짜 웃긴 애다’ ‘쟤 키는 작은데 웃기긴 眞짜 웃기다’ 親舊들 사이에서 ‘웃긴 애’로 통하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中學校 卒業할 때쯤 스스로 決心했어요. ‘나는 廣大해야겠다’고요. 高等學校 때는 學校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程度였어요. 유튜브도 高等學校 親舊가 먼저 提案한 건데, 그 親舊가 只今은 채널 ‘日오팔’의 PD를 하고 있어요. 親舊가 유튜브하자면서 해준 말이 저한테 엄청 꽂혔거든요. 대놓고 이랬어요.” 男子 키 158cm은 眞짜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너 유튜브 해야 된다.―얼핏 들으면 氣分이 나쁠 만한 말인데요.“물론 氣分 나쁘게 들을 수 있는데 전 아니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제가 完全 說得이 되어버린 거예요. 率直히 제 키가 어중간하게 작은 것도 아니고 아주 확 작잖아요. 그게 弱點이 아니라 個性이자 캐릭터, 强點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한국 女性 平均(161cm)보다 키가 작은 건데 戀愛할 때 苦衷은 없나요?“남들 하는 만큼 해왔습니다.(웃음) 戀愛 經驗은 10回 程度 되는데요. 率直히 말씀드리면 제 모습을 멀리서 실루엣으로 보면 키도 몸집도 작아서 矮小하잖아요. 근데 가까이에서 앉아서 對話하면 ‘작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反戰 魅力이 있다고 해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自信感이 작은 키를 補正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自信感을 갖게 되면 性格도 좋아집니다.”―주눅 들거나 萎縮되는 法 없이 恒常 理性 앞에선 堂堂한 便인가요?“물론 저보다 5cm 以上 크신 분들은 조금 부담스럽긴 합니다. 비 오면 雨傘을 같이 쓸 때가 있는데, 제가 雨傘을 들면 (저보다 키 큰) 女子분들 눈을 자꾸 찌른다고 하더라고요.(웃음) 物理的인 限界 때문에 멀어지는 것 말고는 戀愛에 있어서 키는 全혀 問題가 되진 않습니다!”유튜브 채널 ‘日오팔’은 빠른 成長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채널 開設 2年餘 만에 購讀者 45萬 7000名을 達成했습니다. 主力 콘텐츠인 쇼츠(60秒 以下 유튜브 映像) 最高 照會數는 7045萬 膾를 찍었습니다. 最近엔 곽튜브, 빠니보틀 等 人氣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多數 所屬된 샌드박스로 所屬社를 옮기고 새로운 跳躍을 準備 中입니다.―부모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습니다.“저번 名節 때 父母님 뵀는데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最近엔 할머니랑 손잡고 걸어가는데 저를 거리에서 알아봐주시는 분이 계셨어요. 事實 할머니께 제 職業(유튜브 크리에이터)을 說明하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근데 길거리에서 팬들이 알아봐주시니까 할머니도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도 무척 기뻤습니다.”―꿈이 있다면요? “巨創한 꿈은 없어요. ‘키 작다’가 稱讚이 되는 그날까지. 只今처럼 熱心히, 잘 살아보겠습니다!”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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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惡플, 嘲弄 보란 듯이 나만의 길을 갈 것” 13年 만에 타이푼 컴백한 솔비[復讐者들]

    ‘作家 권지안’이 ‘歌手 솔비’로 돌아왔습니다. 2012年 첫 個人展을 始作으로 2021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開催된 國際 아트페어에서 大賞을 殊常하기까지. 지난 10餘年 間 畫家로 살았고 인정받은 그가 타이푼(TYPHOON)의 두 멤버와 13年 만에 新曲을 發表한 겁니다. 노래 題目은 ‘왜 이러는 걸까’. 最近 ‘覆面歌王’에 出演해 話題가 된 타이푼 멤버 우재와 함께 부른 듀엣曲입니다. 2006年 結成된 3人組 混成그룹 ‘타이푼’은 活動 4年餘 만인 2010年 1月 解體된 그룹입니다. 타이푼이 解體됐을 무렵 그는 活動名 솔비를 暫時 접어두고 自身의 本名인 권지안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기 始作했습니다. 惡性 루머와 댓글로 憂鬱症을 앓던 그가 治療 目的으로 그림을 始作한 겁니다. 治療를 넘어 創作의 世界로 넘어온 그는 2012年 첫 個人展을 열게 됩니다. ‘專業 畫家’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를 두고 一角에선 歌手 活動을 아예 접는 게 아니냐는 推測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作家 권지안만큼이나 歌手 솔비度 놓치고 싶지 않은 所重한 나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音樂과 美術을 結合한 ‘셀프 컬래버레이션’ 같이, 歌手와 畫家를 모두 經驗한 그만이 할 수 있는 獨創的인 藝術 世界를 보여주고 있는 ‘作家 권지안’ 그리고 ‘歌手 솔비’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2006年 타이푼의 리더이자 메인보컬로 데뷔해 演藝界에서 겪은 經驗談과 “沙果는 그릴 줄 아냐”며 嫉妬 섞인 非難 洗禮에도 不拘하고 作品 하나로 世界 美術界에서 認定받은 이야기까지.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그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채널 ‘기웃기웃’은 여기로 接續하면 됩니다. https://youtu.be/qkzYPq9J9Uk 네이버에선 住所를 複寫해 住所窓에 붙여 넣으면 됩니다.)―13년 만의 타이푼 新曲으로 컴백 所感이 궁금합니다. “2010年 타이푼 解體되고 한참 뒤인 2017年에 ‘그래서…’와 ‘우하하’라는 曲으로 리메이크 앨범을 낸 적이 있어요. 그걸 듣고 거북이 先輩님의 ‘飛行機’를 製作하신 분이 저희한테 提案해주셨죠. 타이푼이 거북이의 노래 ‘飛行機’를 불렀으면 좋겠다고요. 欣快히 提案에 응했어요. 거북이 先輩님들에 對한 저희 記憶이 엄청 좋았고요. ‘飛行機’는 터틀맨(故 임성훈) 先輩님의 훌륭한 業績이기도 해서 타이푼 스타일로 밝게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飛行機’ 리메이크 作業을 契機로 멤버들이 다시 뭉치게 됐어요. 우리 이렇게 끝내지 말고 新曲도 내보자고요. 13年 만에 나온 新曲이에요. 題目은 ‘왜 이러는 걸까’입니다.”―이전의 타이푼 曲들과는 사뭇 다른 雰圍氣입니다. “新曲 作業할 때 멤버들끼리 한 이야기가 있어요. 元來 우리가 했던 신나는 댄스曲 말고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해보자고요. 따뜻한 가을에 어울리는, 사랑이 넘치는 설레는 音樂을 하고 싶었어요. 우재(타이푼 리드보컬)氏가 ‘覆面歌王’에 出演해서 좋은 結果를 얻으면서 컴백 타이밍도 좋았어요. 우재 氏가 歌唱力이 宏壯히 좋거든요. ‘覆面歌王’을 통해서 우재 氏의 歌唱力이 널리 알려진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올해는 ‘作家 권지안’이 아닌 ‘歌手 솔비’로만 活動하시는 건가요? “올해는 美術 分野에선 安息年을 갖고 있어요. 10年 동안 作家로서 그림을 그려오면서 한 番 쉬어가는 것도 必要하다고 느꼈거든요. 새로운 作業을 위해선 다른 에너지도 必要하잖아요. 올해는 特히 音樂에만 集中해보고 싶어서 ‘왜 이러는 걸까’ 다음으로 準備하는 音盤도 있어요.”―솔로 音盤인가요? “歌手 알리 氏랑 함께 作業한 曲이에요. 最近 알리 氏랑 이탈리아, 스위스 旅行을 다녀왔거든요. 그곳에서 靈感을 받아서 제가 作詞하고 알리 氏가 音樂을 만들었어요. 11月 公開 豫定이에요. 題目은 ‘에스프레소 마티니’입니다. 제가 ‘에스프레소 마티니’라는 칵테일을 되게 좋아하는데, 거기에서 靈感을 받아 歌詞를 썼어요.”솔비는 歌手 타이푼의 메인 보컬로 2006年 演藝界 데뷔했습니다. 우재, 指環과 함께 3人組 混成그룹으로 데뷔했지만 大衆의 注目을 받은 건 솔비였습니다. 엉뚱하고 率直한 캐릭터로 各種 藝能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치며 솔비는 단박에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다보니 타이푼의 다른 멤버들은 相對的으로 關心을 덜 받게 됩니다. 活動 스케줄, 收益 等 멤버들 間 隔差는 自然스럽게 그룹 解體로 이어졌습니다.―타이푼 活動 時節 다른 멤버들보다 큰 人氣를 누렸어요. “活動할 當時 제가 너무 바빴어요. 솔로 活動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타이푼 活動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제가 自發的으로 팀을 나온 건 아니었어요. 個人 活動이 많아지고 收益이 커지니까 會社에서 自然스럽게 分離한 거였죠.”―타이푼 解體 後 멤버들과는 어떻게 지냈나요? “家族 같았던 사이였어요. 팀이라는 게 비즈니스 關係라고 하지만 멤버들은 나의 모든 걸 다 알고, 그 사람의 모든 걸 다 알잖아요. 어쩌면 家族보다 가깝기 때문에 서운한 게 많을 수 있고요. 家族처럼 느끼기 때문에 險한 말이 오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사이가 좋았어요. 우재, 指環 모두 저보다 동생인데 누나누나 하면서 잘 따랐고요.”―불화는 없었나요? “싸운 적도 많았죠. 宏壯히 衝擊을 받았던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멤버들의 問題라기보단 當時 매니저의 問題였죠. 그땐 血氣 旺盛한 20代 初盤이었잖아요. 한창 예쁠 때였고 戀愛도 하고 싶었고요. 그러다 보니까 매니저가 멤버들한테 ‘솔비 누나를 監視해라’고 시킨 거예요.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매니저는 걱정되니까 그랬던 건데…. 제 立場에선 그 事實을 알고 나서는 氣分이 나빴어요. 그걸 시킨다고 또 하냐면서(웃음).”‘가수 솔비’는 各種 藝能프로그램에 出演하며 當代 最高의 人氣를 누렸습니다. 畵面 속 솔비의 이미지는 이랬습니다. 엉뚱하고 率直하지만 白癡美를 지닌 美女. 솔비의 이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放送에선 그런 이미지로만 그를 다뤘습니다. 大衆의 關心을 받는 많은 演藝人이 그렇듯, 솔비 亦是 惡性 댓글과 루머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堪當하기 힘든 危機였습니다. 그는 治療를 받아야 하는 水準의 憂鬱症을 앓게 됩니다. 타이푼 解體 後 放送活動을 줄인 그는 憂鬱症을 治療하는 過程에서 美術을 接하게 됩니다. 처음엔 內面의 傷處를 治療하기 위한 手段이었던 美術이 只今은 그의 一部이자 全部가 됐습니다. 10年 만에 ‘歌手 솔비’는 ‘作家 권지안’이란 呼稱이 더 以上 語塞하지 않은 사람이 됐습니다. ―‘歌手 솔비’와 ‘作家 권지안’. 本人과 더 닮은 自我는요? “솔비는 입혀지고 包裝된 캐릭터에 가까워요. 社會에서 生成되는 人格이 있고 元來의 내가 가진 天性이 있잖아요. 實際의 저는 內省的이고 眞摯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放送人 솔비’는 어쨌든 視聽者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줘야 하잖아요. ‘歌手 솔비’는 舞臺에서 華麗해야 하고요. 그런 義務感 때문에 特定 이미지가 强調되어서 가끔 지칠 때도 있어요. 하지만 ‘作家 권지안’은 元來의 제 모습을 全部 包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內省的이고 眞摯하지만 재밌거나 華麗할 때도 있고요. ‘本來의 나’라는 便安함이 ‘作家 권지안’일 때 더 느껴지는 것 같아요.”‘미술계 完販女’라는 修飾語가 붙을 程度로 ‘作家 권지안’의 作品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큰 人氣를 누리고 있습니다. 作品의 落札價는 數百萬 원부터 數千萬 원臺를 呼價합니다. 最高價를 記錄한 것은 ‘플라워 프롬 해븐’(Flower From Heaven)입니다. 2022年 서울옥션 競賣에서 71回 競合 끝에 2010萬 원에 落札됐습니다. 推定價였던 400萬 원의 5倍 水準이었습니다. ―‘플라워 프롬 해븐’은 어떤 作品인가요? “個人的인 意味가 큰 作品이에요. 2年 前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를 追慕하려고 ‘플라워 프롬 헤븐’이라는 音樂을 만들고 歌詞를 쓰려고 했어요. 근데 아버지를 잃은 喪失感을 代身할 수 있는 單語가 없는 거예요. 歌詞를 다 지우고 허밍으로 노래를 했어요. 허밍으로 부른 ‘플라워 프롬 헤븐’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이에요. 이 그림에 스피커를 심어뒀는데, 그 안에 허밍 音樂을 담았어요. 그림 落札받은 사람만 이 音樂을 들을 수 있는 거죠.”―어떤 音樂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落札 받은 분께 音樂 公開 與否를 決定할 權限이 있어요. 근데 그분께서 結局 音樂을 公開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이 公開하지 않는 限 들을 수 있는 方法은 없어요.(웃음)”―그림을 사는 분들을 위해 늘 祈禱하신다면서요. “저는 힘들고 憂鬱하고 心理的으로 不安定할 때 美術을 膳物처럼 만났거든요. 제가 그림을 통해 肯定的인 에너지를 받고 잘 克服했듯이 제 그림을 보는 분들도 治癒의 에너지가 傳達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림을 購入해서 집에 걸어둔다는 건 마치 家族이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내 空間에 누군가 들어와서 같이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누군가의 空間에 걸리든 제 그림이 幸運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작가 권지안’의 創作 動力은 肯定的 에너지인가요? “제 作品들 中 傷處에 對한 表現을 담아낸 作業도 있지만 그럼에도 前 恒常 肯定을 담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내가 美術을 통해서 克服했고 希望을 갖게 됐기 때문이에요. 美術뿐 아니라 삶도 그래요.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는 希望을 갖기 위해 살아가는 거잖아요.”긍정과 希望을 그리고 싶다는 ‘作家 권지안’에겐 그의 作品世界를 貶下하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沙果는 그릴 줄 아냐”부터 始作해 ‘高等學校 入試 美術 같다’ ‘美大 新入生 水準이다’ ‘演藝人 프리미엄 아니냐’ 같은 刺戟的인 말들이 쏟아집니다. 大部分 美術을 專攻하지 않은 그가 演藝人이라는 理由로 注目을 받는다는 主張들이었습니다. 2021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開催된 國際 아트페어에서 大賞을 受賞한 것을 두고도 甲論乙駁이 이어졌습니다. ‘歌手 솔비’에게 쏟아졌던 惡性 댓글이 이젠 ‘作家 권지안’을 向한 非難으로 바뀐 것입니다.―‘작가 권지안’을 向한 嘲弄과 貶下가 ‘歌手 솔비’에 對한 惡性 댓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批評이라는 건, 作家를 分析하고 그 作家에 對해 作家의 世界를 正確하게 안 다음에라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저에 對해 分析도 않고 時流에 한두 마디 보태는 건 弄談 따먹기 水準이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火가 났다기보다는 評論하시는 분이 放送에 나와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계실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評論家는 評論할 때, 放送人은 放送할 때, 畫家는 그림 그릴 때 멋있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일 價値가 있나요?”―본인 作品에 對한 批評 中에 와 닿았던 것도 있나요? “웬만한 批判的인 視角에 對해선 正말 흥미롭게 봐요. 왜냐하면 作家가 自己 世界에 빠져서 깊은 골로 들어갈 때가 더 問題거든요. 이걸 客觀的인 눈으로 보려고 努力해야 해요. 그걸 可能하게 하는 批評은 作家에게 좋은 材料이고 좋은 刺戟이에요.”―‘연예인 프리미엄’이라는 意見에 對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演藝人이니까 프리미엄 붙는다’ ‘演藝人 作品이니까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는데 實際로 돈을 주고 그림을 사 갈 때는 演藝人이라서 사는 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의 歌手, 演藝人으로서의 커리어와 저의 作品 價値는 別個라고 생각해요.”‘직업화가’가 된 後부터 그에겐 스스로 세운 原則이 있습니다. 作品 販賣 收益金의 10%를 寄附하겠다는 것. 特히 京畿道 水原에 位置한 영·幼兒 養育 保護施設 경동원과는 2014年 因緣을 맺은 後 只今까지도 奉仕活動과 寄附를 해오고 있습니다. ―美術을 통해 다른 이를 돕게 된 理由가 궁금합니다. “巨創한 理由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는 美術을 통해서 治癒를 받았잖아요. 제가 받은 肯定, 治癒의 에너지를 나누고 싶은 거죠. 제게 있어 美術은 單純히 그림을 그리는 行爲가 아니에요. 저는 美術로 人生 工夫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忍耐力이나 다양한 생각과 視野. 美術의 材料를 찾기 위해 自傳的인 探究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美術을 통해서 조금씩 世上을 알아가고 있어요.”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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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性醜行 陋名 쓰고 아이돌 떠난 이 사람, 海兵隊서 ‘無敵’이 되어 돌아왔다[복수자들]

    아이돌에게 ‘戀愛’와 ‘結婚’은 禁忌 中 하나입니다. 成人 間의 사랑이 指彈의 對象이 되는 건 苛酷하다는 視線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實力만큼이나 重要한 것은 이미지입니다. 熱愛說은 아이돌이 構築해 온 판타지를 한 瞬間에 무너뜨립니다. 나이가 서른 살에 가까운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結婚 消息을 알릴 때 팬들에게 長文의 손便紙를 通해 ‘罪悚하다’고 謝過를 하고, 結婚을 하거나 熱愛說이 터진 멤버의 脫退를 팬들이 나서서 要求하기도 합니다. 엑소의 첸, 하이라이트의 손동운, 아이콘의 바비 모두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아이돌 밴드 ‘엔플라잉’ 멤버였던 권광진(31)도 禁忌를 깬 아이돌 中 한 名입니다. FT아일랜드, 씨엔블루를 排出하며 아이돌 밴드 名家로 불렸던 FNC엔터테인먼트의 期待株 엔플라잉으로 2015年 데뷔한 그는 2018年 팬과의 交際로 論難의 中心에 섰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가 팬미팅에서 팬을 性醜行했다는 루머가 SNS에 퍼졌습니다. 當時 所屬社는 “팬과의 交際가 事實로 確認돼 권광진의 脫退를 決定”했고, “性醜行 疑惑에 對해서는 正確한 是是非非를 가릴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醜聞에 휩싸인 채 팀을 떠났던 권광진이 脫退 5年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當時엔 女子親舊의 存在를 떳떳하게 認定하지 못했다”는 그는 熱愛說 相對였던 팬과 지난해 結婚했습니다. 性醜行 루머를 퍼뜨렸던 이들은 2021年 虛僞事實 流布로 민·형사상 處分을 받았습니다. 脫退 後 海兵隊에 入隊한 그는 除隊한 뒤 海兵隊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無敵卷’을 만들어 ‘군튜버’로 活動하고 있습니다. 購讀者 11萬 名을 넘기며 人氣를 끌고 있는 그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아이돌의 戀愛에 對한 그의 생각을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確認할 수 있습니다. ―2018年 9月 엔플라잉 脫退 後 첫 인터뷰에요. 팬과의 交際로 所屬社에서 退出당하新건데, 그 팬과 지난해 結婚을 하셨다고요. 當時 女子親舊였던 只今 아내가 버스 停留場에 제 生日 祝賀 廣告板을 걸었어요. 저도 그걸 보려고 갔다가 現場에 있던 아내와 偶然히 마주쳤어요. 廣告를 걸고 現場에 와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제가 番號를 물어봤어요. 예뻐서 반한 것도 있고요(웃음). 連絡을 주고받다가 사귀게 됐죠. 交際가 發端이 돼 팀은 脫退했지만, 이 親舊는 제가 끝까지 책임졌습니다. 지난해 結婚을 했거든요. 처음 팬과 사귄다는 所聞이 퍼져서 所屬社가 맞느냐고 確認을 했을 때는 “안 사귄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아이돌은 戀愛를 하면 안 된다는 思想敎育을 練習生 때부터 받아서 저도 모르게 防禦機制가 發動했어요. 結局 交際 事實이 드러나서 所屬社가 脫退를 決定했죠. 거짓말을 한 건 아직도 反省하고 있습니다. ―性醜行 疑惑도 있었어요. 虛僞事實 流布者들을 告訴했고, 2021年 流布者들이 刑事上 處罰, 民事上 賠償 處分을 받았습니다. 그 때 心情이 어떠셨나요? 아이돌 時節을 통틀어 性醜行 루머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제가 하지도 않은 짓으로 非難의 對象이 됐으니까요. 제가 性醜行했다는 글을 SNS에 올린 사람이 제 아내와 같이 엔플라잉 팬 活動을 하던 親舊였어요. 女子親舊가 저와 사귄다고 하니 嫉妬가 났는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내서 글을 올렸더라고요. 虛僞事實이었기 때문에 저는 警察에 立件조차 되지 않았고요, 저는 처음 글을 올린 사람과 악플러들을 虛僞事實 流布로 告訴했습니다. 刑法上 有罪 判決을 받았고, 民事上 損害賠償을 물었어요. 4年餘 만에 제가 無故하다는 事實이 밝혀져서 多幸이라고 생각해요. 2006年 15살의 어린 나이에 FNC에 入社해 10年 가까이 練習生 生活을 했습니다. 정용화, 강민혁, 이종현과 함께 씨엔블루의 데뷔 멤버로 確定돼 日本에서 앨범을 내고 活動했지만, 韓國 데뷔 直前 팀 色깔과 맞지 않는다는 理由로 그의 자리를 이정신이 大體했습니다. 한 次例 데뷔의 苦杯를 마신 뒤 2015年 엔플라잉으로 데뷔했지만 2018年 性醜聞으로 퇴출당했습니다. 10代와 20代를 바친 10餘 年의 練習生 期間에 비해 아이돌로 活動한 期間은 턱 없이 짧았습니다. ―脫退 後 멤버들과의 關係는 어떤가요? 멤버들과 種種 連絡을 하고 지내다가 3年 前부터는 連絡이 杜絶됐어요. 會社에서는 저와 멤버들이 交流를 한다는 게 事業的으로 안 좋을 거고, 팬들도 저와 멤버들이 連絡하는 것을 싫어해서 自然스럽게 끊겼어요. 제가 脫退한 直後에 엔플라잉이 ‘屋塔房’으로 음원차트와 歌謠 프로그램에서 데뷔 後 처음으로 1位를 해서 正말 기뻤어요. 祝賀글을 제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팬들에게 抗議 메시지가 오더라고요. 안 좋은 理由로 脫退했으니 더 以上 멤버들과 엮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죠. 그래서 글을 바로 내렸어요. ―멤버들과 오랜 期間 練習生 生活을 같이 한 家族 같은 關係였을 텐데요. 初盤엔 家族 같은 關係이다가 漸漸 個人主義的 性向으로 바뀌기 始作했어요. 社內政治를 해야 하는 理由가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저는 옳고 그름이 確實한 스타일이고 그걸 加減없이 表現하는 性格이거든요. 어느 瞬間 제 생각을 드러냈을 때 멤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어요. 그게 팀에게는 좋은 길이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저도 제 생각을 숨기고, 멤버들에게도 率直하게 터놓질 못했어요. 그런 게 쌓이다보니 漸漸 비즈니스 關係가 돼 갔어요. ―10年 넘게 練習生 生活을 했는데, 팬과 사귄다는 理由로 脫退를 해야 했어요. 抑鬱하거나 아쉽지는 않나요? 너무 어린 나이에 所屬社에 들어오다 보니 10年이 넘는 練習生 期間 동안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에 對한 理由를 明確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밴드音樂을 좋아해서 漠然히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練習生이 됐거든요. 只今 생각해보면 저는 아이돌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윙크를 하고 하트를 만드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아이돌이라면 當然히 해야 하는 걸 못하는 제 모습도 만족스럽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放送에 나오는 제 모습도 모니터링하지 않았어요. ‘뜨거운 감자’ 때 舞臺를 보면 카메라도 안 쳐다보고 혼자 舞臺에서 뱅뱅 돌아요. 그래서인지 아이돌에 아무 未練도 안 남은 것 같아요. 권광진은 엔플라잉 脫退 9個月만인 2019年 9月 海兵隊에 入隊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入隊한 海兵隊는 그에게 人生 2幕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는 7週間의 新兵敎育 過程에서 1000餘 名의 騎手 動機 中 1等에 該當하는 ‘無敵海兵上’을 받았습니다. 除隊 後에는 海兵隊 關聯 콘텐츠로 유튜브 ‘無敵卷’을 만들어 購讀者 11萬 名을 넘겼습니다. ―除隊 後 海兵隊 유튜브 채널 ‘無敵卷’을 開設했어요. 最近 購讀者 11萬 名을 넘겼는데, 收益活動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해병대 關聯 굿즈를 販賣하는 ‘海兵隊 스토어’도 運營하고, 유튜브 活動도 하면서 感謝하게도 아이돌 때보다 只今 훨씬 더 많이 돈을 벌고 있어요. 제가 엔플라잉 活動 精算이 되기 前에 脫退를 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일을 하면 돈을 받는 構造를 理解한지가 얼마 안 됐어요.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어렸을 때부터 練習生으로 들어가서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職業이라는 敎育이 無意識에 흘러들어가 있어요. 그러다보니 오늘 스케줄을 가면서도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고, 콘서트를 해도 收益이 正確하게 얼마인지 모르는 거예요. 너무 어리다보니 돈에 對해 敏感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期數 動機 中 1等에 該當하는 ‘無敵海兵上’을 받았어요. 海兵隊가 왜 그렇게 좋으셨나요?엔플라잉에서 脫退했을 때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박살난 狀況이었어요. 入隊 當時 제 머릿속엔 ‘生存’에 對한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살아갈지를 苦悶하다보니 예전에 追求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빈손에서 始作하니 海兵隊 生活에 더 切實하고 熱心히 臨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오롯이 쏟았죠. 軍隊 生活이 體質에 맞아서 職業群印度 考慮했어요. 헬기操縱 쪽으로 가려고 敎材도 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에 제 머리맡에 便紙를 두고 나가시더라고요. 헬기 操縱은 事故가 나면 無條件 卽死거든요. 危險한 일에 挑戰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셨는지 그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軍人이 되는 代身 軍隊 콘텐츠를 만드는 일로 滿足하고 있어요. ―兵役忌避로 論難이 된 男子 演藝人들도 많습니다. 그런 事例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굉장히 안타까워요. 論難이 일었던 분들 大部分 잘 나가다가 한 瞬間 兵役忌避로 活動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軍隊가 事實 그렇게 안 빡세거든요. 演藝界가 훨씬 더 힘듭니다. 제가 海兵隊 入隊 첫날 느낀 게, ‘잠은 재워주네?’였어요. 저는 演藝人 生活을 하면서 잠을 많이 자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전 軍隊에서 午前 5時 半이면 눈이 떠져서 第一 먼저 씻고 자리를 整理했어요. 肉體的으로는 海兵隊가 아이돌보다 더 힘들 순 있지만 시키는 것만 熱心히 하면 돼요. 아무리 무거운 걸 메고 訓鍊을 받아도 精神的으로 힘든 것만 못해요. 팬과의 交際는 事實이었지만, 當時 사귀던 女子親舊와 結婚을 했습니다. 그의 이름 뒤에 꼬리票처럼 따라다녔던 性醜行은 事實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平生을 約束할 程度로 끌렸던 相對와 戀愛를 했다는 理由만으로 退出當해야 했던 當時 狀況이 抑鬱할 法도 하지만 권광진은 “누구의 탓을 할 것도 없다. 오로지 내 不注意였다”고 말합니다. ―海兵隊가 여러 모로 삶의 터닝포인트였던 것 같은데요, 가장 크게 달라진 點이 있다면요.탈퇴 直後에는 性醜行 루머를 퍼뜨린 팬을 비롯해 周邊 사람들을 탓했어요. 軍隊에서 저를 되돌아보는 時間을 가지게 됐어요. 第 不注意로 팀을 脫退하게 됐기에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練習을 熱心히 안했거나, 누군가에게 無禮하게 行動했던 제 잘못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요즘엔 온라인에 性醜行 루머를 올렸던 분들에게도 未安한 마음까지 들어요. 처음엔 제가 좋아서 팬 活動을 始作했던 분들이잖아요. 제가 誠實하게 活動했다면 그 분들이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 한때 제 팬이었던 사람들에게 被害補償까지 받고 ‘나도 참 惡辣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다 제 잘못이라는 反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앞으로의 目標가 궁금합니다. 제 別名이 ‘卷하마’에요. 放送 中에 물을 많이 마셔서 購讀者 분들이 붙여 주신 別名인데요. 물을 많이 먹는 理由가 혼자서 쉴 새 없이 말을 해서 그래요. 처음 라이브 放送을 할 때는 視聽者가 2, 3名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몇 時間동안 熱心히 떠들던 게 習慣이 돼서요. 그런데 全혀 힘들지 않아요. 아이돌 때는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마음대로 發言할 수 없고, 恒常 操心해야 했어요.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갔던 것 같아요. 只今은 제가 願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제가 願하는 스케줄을 잡잖아요. 無敵卷 채널도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가고 있고요.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요.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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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年 次 개그맨 ‘아싸 最優先’, “呼應 없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 되고 싶다”[복수자들]

    뭘 올려도 사람들이 안 봐요. 길거리 다니면 가끔 절 알아보긴 하시는데 購讀者, 照會數는 더 떨어지고 있어요. 이제 저 어떡하죠?개그맨 最優先(35)李 ‘至毒한 슬럼프에 빠졌다’며 짠내 나는 泣訴 映像을 올렸습니다. 아무리 봐도 누군지 잘 모르시겠다고요? 맞습니다. 척 보면 알 법한 有名 개그맨은 아닙니다. 하지만 最優先은 데뷔한 지 7年이나 된, 꽤 오래 活動해온 개그맨입니다.‘윤형빈 小劇場’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로 喜劇인 生活을 始作한 그는 2017年 tvN ‘코미디빅리그’의 한 코너 ‘潛入搜査’로 데뷔했습니다. 지난해 ‘코미디빅리그’를 그만두고 여러 유튜브 웹藝能에서 活躍했지만 아싸 티는 벗지 못했는데요. 最近엔 SNL 코리아 시즌4에도 出演하는 等 천천히 ‘인싸’들의 世界로 넘어오는 中입니다.동아일보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아싸 개그맨 最優先을 만났습니다. 父母님의 反對를 무릅쓰고 오랫동안 꿈 꿨던 개그맨의 길을 7年째 걷고 있지만 最優先의 現實은 如前히 碌碌지 않다고 합니다. 期待 만큼 呼應을 받진 못해도 끝까지 ‘웃기는 사람’李 되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를 映像()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7年次 개그맨, 슬럼프에 빠졌다고요?“거리에 나가면 알아봐주시는 사람들이 늘었는데 (유튜브 콘텐츠는) 뭘 올려도 照會數가 잘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큽니다. 2021年 2月 채널을 開設했는데 1年 만에 購讀者 數 10萬 名이 넘었거든요. 100萬 뷰가 넘는 콘텐츠도 꽤 있었고요. 근데 最近 1年 間 購讀者 數가 2萬 名도 안 들었어요. 上昇勢가 확 꺾여서 苦悶이에요.”―읍소 映像을 올리셨는데요.“유튜브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건 事實 오래 前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이걸 제 苦悶이라고 오픈한 적은 없어요. 다른 유튜버들과 달리 購讀者와 疏通하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었거든요. 혼자 꽁해 있는 것보다 오픈廚房처럼 購讀者들의 助言, 直言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올렸습니다.”―인기를 끌지 못하는 理由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아싸 大學生’이라는 副캐 하나만 繼續 演技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推測해요. 照會數가 오르지 않는다는 건, 보는 사람만 보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요즘 가장 큰 苦悶입니다. 저 亦是 正答은 잘 모르지만 이런저런 試圖를 해보려고 努力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副캐를 活用한 콩트만 했다면 이젠 副캐를 活用한 여러 企劃 콘텐츠에 挑戰해보려고요.”―아싸 大學生 副캐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실제 人物을 보고 令監 받은 캐릭터는 아니에요. ‘코미디빅리그’에서 演技했던 한 코너의 캐릭터였어요. 錄畫는 했는데 放送엔 못 나왔거든요. 最近 개그맨들 사이에서 副캐가 한창 人氣였을 때 저도 副캐를 해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코미디빅리그’에서 演技했지만 放送에 나오지 못한 ‘아싸 大學生’을 떠올렸죠. 제가 할 수 있는 것 中에 가장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實際의 저라는 사람과 결이 가장 비슷하기도 했고요.”―원래 ‘아싸’ 같은 性格인가요?“그냥 平凡했어요. 中·高等學校 때는 조용한 便이었고요. 學校에서 떠들고 웃기고 그런 타입은 全혀 아니었어요. 大部分 조용히 있는 便이었는데 親해지고 나면 재밌어지는 親舊였어요. 새學期가 始作되면 1學期 때는 데면데면하다가 2學期 되면 웃겨지는 親舊 있잖아요. 그게 저였어요. 다시 半 바뀌면 조용해졌고요.(웃음)”최우선이 本格的으로 ‘副캐’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기 始作한 것은 2022年 2月. ‘코미디빅리그’에 함께 出演하며 同苦同樂했던 개그맨 김해준이 副캐로 큰 人氣를 끌면서부터였습니다. 最優先과 김해준은 無名 時節 한 집에 同苦同樂할 程度로 親한 사이입니다.―절친 김해준 氏가 一躍 스타가 됐는데요. “兄이 너무 잘 돼서 놀랐어요. 제 周邊 사람 中에 이렇게 有名해진 사람은 해준 兄이 처음이었거든요. 스타들은 제게서 되게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로 제 옆에서 같이 코미디 하던 兄이 잘 되는 걸 보게 되니 많은 刺戟이 됐어요. 그것 때문에 ‘아싸 最優先’ 유튜브를 始作한 것도 있어요. 머리로만 새로운 挑戰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해준이 兄 德分에 直接 行動으로 옮기는 契機가 됐죠.”―‘아싸 最優先’은 少數에게 컬트的 人氣를 끌고 있습니다.“‘떡상’은 되지 않았지만 몇몇 팬들이 좋아해주시는거 보면 少數에게 어필하고 있진 않나 생각합니다.(웃음) 너무 少數여서 憫惘하긴 한데요. 그래도 저를 좋아해주시는 팬들이 있으니까 正말 괜찮을 때도 있습니다.”―‘아싸 大學生’은 어딘가 모르게 不足한, 모자란 느낌의 캐릭터인데요. “제가 하고 싶어하는 ‘페이소스’式 개그랑 잘 맞는 캐릭터예요. 저의 短點이나 缺陷, 슬프거나 짜증나는 일을 개그로 승화시키는 거죠. 나에게 不幸한 일이 닥치더라도 他人에게 웃음이 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윤형빈 小劇場’ 時節부터 크게 依支했던 박휘순 先輩에게 影響을 많이 받았어요.”―가장 닮고 싶은 개그맨으로 박휘순 氏를 꼽으셨더라고요.“박휘순 先輩는 개그맨 志望生 때 ‘윤형빈 小劇場’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예요. 잘 모르는 사이였는데 되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밥도 사주시고 술도 사주시면서. 모든 後輩들에게 다 잘해주는 서글서글한 性格인줄 알았는데, 저한테만 잘해주셨던 거였어요. 理由를 여쭤보니 ‘널 보면 내 志望生 時節이 생각난다’고 하시더라고요.”―두 분이 若干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박휘순 先輩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恒常 웃어야 해. 안 웃으면 집에 憂患이 있는 사람 같고, 只今 當場이라도 世上 떠날 것처럼 보이니까. 우리의 無表情은 無表情이 아니다. 恒常 웃어라.’ 어쩌면 개그맨으로서 제게 팁을 주신 거죠. 事實 개그맨들이 大部分 外向的이고 表情도 밝잖아요. 저처럼 憂鬱하고 축 처지는 雰圍氣의 개그맨은 恒常 웃어야 好感처럼 보일 수 있다고 眞心으로 助言해주신 거였어요.”최우선은 ‘高學歷 개그맨’으로도 有名합니다. 중앙대 經濟學科를 卒業하고 한때 稅務士가 되려고 考試院에서 지낸 적도 있습니다. 처음 개그맨이 되겠다고 했을 때 父母님의 反對가 가장 甚했다고 합니다. ―父母님은 왜 反對하신 건가요? “大學 卒業했으니 멀쩡한 會社 就職해서 平凡하게 살지 왜 그런 險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요. 처음엔 엄청 反對하시다가 동생이 就業하면서부터 (父母님) 마음이 누그러지시더라고요.(웃음) 아들 둘 다 밥벌이 못 하고 살면 어떡하냐 걱정하신 거죠. 동생에게 고마워요. 德分에 父母님 걱정을 덜었으니까요.”―부모님께 들은 稱讚 中 가장 記憶에 남는 게 있다면요?“원래 周邊 사람들한테 子息 자랑 잘 안 하시는데, 저 개그맨 되고 나서 SNS 프로필 寫眞도 바꾸시더라고요. ‘코미디빅리그’에 出演한 映像 캡처한 寫眞으로요.(웃음) 동생은 就職해서 나가 사는데 저는 半百獸처럼 父母님이랑 함께 살거든요. 집안일도 잘 하고 父母님이랑 對話도 자주 하니까 內心 저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튜브에 올리는 映像마다 낮은 照會數에 話題聖徒 떨어지니, 얼굴이 알려진 개그맨으로서 自尊心이 傷할 法도 한데요. 그만두거나 숨기보다는 正面突破를 擇했습니다. 100萬 뷰, 數十萬 購讀者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1年 내 작은 成果라도 만들어서 채널削除하지 않는 것’이 그의 目標입니다.―목표가 너무 素朴한 거 아닌가요?“옛날부터 周邊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재밌어하는 걸 좋아했어요. 팬은 많지 않고 有名稅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役割이 繼續 주어지잖아요. 그것만으로 만족해요. 他人과 比較만 하지 않으면, 제 狀況은 正말 만족스러워요. 잘 나가는 同僚들과 比較를 아예 안 하는 性格은 아니지만 크게 神經 쓰는 便도 아니거든요.”―개그맨이 本人의 天職이라고 생각하나요?“데뷔 前까진 後悔할 때도 많았어요. 개그맨 되겠다고 學院도 다니고 公演도 熱心히 했는데 잘 풀리지 않았으니까요. 서른 살이 되던 해 ‘코미디빅리그’에 데뷔하고 여러 프로그램에도 出演하고 작지만 유튜브 채널도 運營하고 있어요. 느리지만 천천히 제 길을 가는 中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개그맨만 힘든 건 아니잖아요.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그래도 하나뿐인 人生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不安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재밌고 즐거울 때가 더 많습니다.”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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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돌은 當身의 戀愛相對가 아니다… 前 아이돌 作心發言[復讐者들]

    “아이돌은 舞臺에서 춤 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이지 적어도 팬들과 ‘類似戀愛’하는 職業은 아닙니다.”‘유사연애’는 假想의 人物에게 戀愛 感情을 갖고 想像으로 戀愛하는 行爲를 뜻합니다. 아이돌 業界에서 唯獨 많이 言及되는 말이죠. 아이돌 그룹 틴탑의 前 멤버 방민수 氏는 K팝 아이돌 팬덤이 ‘類似戀愛’를 强要하는 文化 때문에 병들고 있다고 批判했습니다.그는 19살에 아이돌 그룹 틴탑의 리더 ‘캡’으로 데뷔해 14年間 아이돌 멤버로 活動하다가 올 5月 그룹에서 脫退했습니다. 아이돌 脫退 後 畫家로 活動하는 그는 틈틈이 刈草(刈草·풀 베는 日)도 하는 等 第2의 人生을 살고 있습니다. 最近에는 自身의 유튜브 채널을 開設해 演藝奇劃社의 類似戀愛 비즈니스, 私生팬과 類似戀愛로 대표되는 팬덤의 實體 等에 對해 加減 없는 批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復讐者들〉이 그를 만나 ‘아이돌 14年의 삶’에 對해 물었습니다. 아이돌과 팬의 類似戀愛를 助長하는 演藝 奇劃社의 商術, 아이돌에겐 恐怖 그 自體라는 私生팬 文化, 아이돌 내 非人氣 멤버의 설움 等을 다뤘습니다. 東亞日報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인터뷰 映像()을 볼 수 있습니다.방민수는 2010年 데뷔한 以後부터 14年間 줄곧 ‘아이돌 不適應者’였습니다. 19살에 데뷔한 그는 成人이 된 後에도 아이돌이라는 理由로 자유롭게 自己 表現을 못하는 抑壓的 雰圍氣가 싫었습니다. 身體에 타투를 한다고 辱을 먹고 팬을 보고 웃지 않는다고 非難을 當했습니다. 自身에 對한 公共의 敵對感이 커질수록 그는 漸漸 엇나가게 됩니다. SNS 라이브 放送에서 自身에게 惡플을 다는 팬들에게 辱說을 하고 吸煙을 했습니다. 틴탑 內에서 ‘밉相’으로 통하던 그는 結局 팀을 脫退하게 됩니다.아이돌 活動 時節 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팬들과의 ‘類似戀愛’가 當然視되는 雰圍氣였습니다. 아이돌에게 戀愛感情을 느끼는 팬들의 紙匣을 열기 위해 위해 演藝 奇劃社에서는 類似戀愛를 誘導하는 서비스나 行事를 企劃합니다. 팬이 스타에게 느끼는 戀愛 感情을 利用하는 건 演藝 産業의 古典的인 비즈니스라고 하지만, 그中에서도 아이돌 業界에선 이를 가장 積極的으로 活用하고 있습니다. 팬들은 아이돌과 戀愛하는 것 같은 幻想을 購入하기 위해 기꺼이 巨額을 支拂합니다. 스킨십이 許容되는 아이돌 팬 사인會, 實時間 映像을 통한 아이돌의 私生活 公開, 아이돌 멤버와의 假想 온라인 채팅 等이 代表的입니다.―아이돌 産業은 ‘팬덤 비즈니스’로 維持됩니다. 팬덤 德分에 아이돌 産業이 運營되고 아이돌 멤버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팬덤 德分에 아이돌이 돈을 버는 게 맞지만 아이돌은 極盛 팬덤 때문에 傷處를 받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極盛 팬덤을 助長하고 이를 幇助하는 會社의 態度가 第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音盤에 멤버別 포토카드를 넣어서 販賣하는 게 代表的인데요. 팬 한 名에게 CD 여러 張을 팔려고 하는 手法이에요. 一部 極盛 팬들은 願하는 멤버의 포토카드를 갖기 위해 音盤 購入에만 數十, 數百萬 원을 쓰게 됩니다. 돈을 많이 쓴 一部 팬들은 ‘나는 이만큼 消費를 했으니까 (아이돌 멤버에게 類似戀愛를 强要하는 것은) 當然한 權利’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BTS 같이 有名한 아이돌한테는 別로 害가 되진 않아요. 全體 팬덤이 많으니 極盛 팬들의 影響力이 弱할 수밖에 없거든요. 問題는 人氣가 頂點에 있는 아이돌이 아니라 下落勢에 접어든 아이돌입니다.”―아이돌의 人氣가 떨어질 때 ‘類似戀愛’ 弊害가 甚해지는 理由는 무엇인가요? “팬이 1萬 名 있을 때랑 100名 남았을 때를 假定해보세요. 100名의 極盛 팬들은 全體 팬덤이 1萬 名이었을 때나 100名만 남았을 때나 쓰는 돈의 額數는 같거든요. 1萬 名 있을 때는 少數였기에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면 自身들이 多數가 된 後에는 목소리를 漸漸 키우는 거죠. 人氣가 떨어진 아이돌에게 ‘너희 나 없으면 안 되잖아. 나 너희한테 이렇게 돈 많이 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너희들은 나 없으면 뭐가 되겠냐’고 權利를 主張하는 거예요.”유사연애로 始作한 팬덤이 어느 瞬間 線을 넘는 境遇도 發生합니다. 私生팬(演藝人의 私生活을 侵害하는 極盛팬을 이르는 말)의 스토킹 犯罪가 代表的입니다. 私生팬에게 스토킹을 當해도 가벼운 對應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돌이 많습니다. 犯行 强度가 웬만큼 甚하지 않고서야 팬들을 告訴·告發한다는 것이 아이돌에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사생팬에게 스토킹을 當한 적이 있으신가요? “데뷔 初盤부터 私生팬들이 있었어요. 집 앞에서 새벽 3~4時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새벽이라 얼굴도 안 보이는데 불쑥 찾아와선 便紙랑 膳物을 건네는 거죠. 소름 끼치게 놀랐어요. 저는 처음부터 私生팬들을 보면 제발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辱도 하고 그랬어요. 當하는 立場에서 스토킹은 正말 不安하고 두려운 일이에요. 携帶電話番號는 大體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는 番號로 電話, 文字 오는 건 日常이고요.”―집 住所, 携帶電話番號는 個人情보잖아요. 어떻게 알고 接近하는 걸까요? “아이돌 個人情報를 去來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例를 들면 아이돌이 海外 公演 간다고 空港에 가잖아요. 스케줄을 公開하지 않으면 飛行時間을 알 수가 없거든요. 근데 저희가 海外 나갈 때마다 少數의 팬들은 恒常 空港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팬들에게 아이돌 飛行 情報를 돈 받고 파는 空港 關係者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演藝 奇劃社에는 職員이 많잖아요. 매니저부터 始作해서 다양한 職群의 職員들. 그 사람들도 팬들한테 돈 받고 집 住所나 携帶電話番號를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非公開 스케줄을 통째로 販賣하는 분도 있고요. 아이돌 個人情報를 사고파는 것으로 收益을 創出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犯罪나 다름 없죠.”14년간 아이돌로 살면서 精神的으로도 疲弊해졌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틴탑에서 ‘非人氣멤’이었다고 합니다. 美人氣 멤버를 稱하는 ‘非人氣멤’은 아이돌 그룹 內에서 人氣가 없는 멤버를 의미합니다. 여러 名의 다양한 멤버로 構成된 아이돌 그룹에선 멤버別로 팬덤의 差等이 생기는 건 어쩌면 當然한 結果입니다. 하지만 非人氣멤이 된 아이돌은 對人忌避症이 생길 程度로 傷處를 받는다고 합니다. 방민수는 活動 當時 主로 선글라스를 着用했는데, 아이돌 活動에 適應하지 못한 그가 카메라 렌즈나 他人의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틴탑 活動 時節 非人氣멤이셨나요? “다른 멤버들에 비해 人氣가 없었어요. 다른 멤버들이 저보다 훨씬 잘 하기도 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類似戀愛 못 하겠다면서 行動도 ‘아이돌 답지 않게’ 한 거죠. 팬이 없는 것까진 괜찮은데 다른 멤버를 좋아하는 팬들이 저에게 敵對感을 드러내는 게 힘들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멤버가 잘 나가지 못한다’ ‘너 때문에 틴탑이 뜨지 못한다’는 理由를 들면서요. 팬 사인會 같은 데서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요.”―비인기 멤버面 어떤 게 가장 힘든가요? “팬 사인會 같이 팬들이 參與하는 行事죠. 팬 사인會에서는 願하는 멤버들을 골라서 사인을 받을 수 있거든요. 팬 사인會 때 大部分의 팬들이 저는 普通 건너뛰고 싶어했어요. 팬들 表情에서도 저를 싫어하는 게 다 보이잖아요. 그러다보니 팬 사인會 같이 팬 만나는 行事는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속없이 웃어주고 싶지도 않았고요. 같이 活動하던 時期 親하게 지냈던 걸그룹 멤버가 한 名 있었어요. 그 親舊도 그룹에서 非人氣멤이었거든요. 軍部隊 行事를 갔는데 사인會를 했대요. 사인 받고 싶은 멤버한테 줄 서라고 했는데 그 親舊한테는 1名도 안 선 거예요. 뒤에서 軍 幹部들이 軍人들한테 ‘야, 저기 가서도 사인 받아, 인마’ 그랬는데 그게 더 傷處였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 하면서 엄청 울더라고요. 當場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狀況인데도 (팬들 앞이기 때문에) 웃고 있어야 해서 너무 괴로웠다고요.”―자격지심을 느껴서 틴탑을 脫退했다고 個人 放送에서 告白하셨는데요. “非人氣멤으로 繼續 살다보면 설움의 延長線으로 自激之心이 따라와요. 사람은 他人과 自身을 比較하면서 自我를 찾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래도 저는 周邊 멤버들과 저를 比較할 수밖에 없었어요. 틴탑에서 저는 恒常 꼴찌였어요. 自激之心을 느낄 수밖에 없는 狀況이었죠.”―정신적으로도 많이 脆弱해졌을 것 같습니다. “大部分의 아이돌은 ‘보여지는 나’와 ‘眞짜 나’의 乖離를 느낄 거예요. 憂鬱症이나 躁鬱症에 걸리는 아이돌도 많고요. 저 같은 境遇는 스스로 싫어하는 行動을 억지로 해야 했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 빼고는 全部 不幸했어요. 내가 견디기 힘들 程度로 싫어하는 行動을 ‘아이돌이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 된다는 것에 對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어요. 스스로를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아이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떤 일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는 狀態로 데뷔한 제 잘못이 컸죠. 참고 또 참다가 結局 그만두게 된 거예요.”아이돌을 그만둔 그는 畫家로 活動하고 있습니다. 初等學校 5學年 때부터 美術을 배웠던 그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합니다. 2019年 첫 展示會를 연 그는 아이돌 活動 中에도 그림을 그려왔으며 個人 SNS를 통해 그림 販賣도 하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後에는 日傭職으로 刈草 作業을 해 話題를 모았습니다. 刈草 作業을 통해 그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金額은 100萬 원 남짓입니다. ―아이돌을 그만둔 只今은 幸福하신가요? “돈은 훨씬 못 벌지만 幸福합니다. 아이돌 때 公演 10餘 分 하고 내려왔을 때 벌 수 있는 돈이 몇百萬 원이었다면 刈草는 2~3時間에 30萬 원 벌거든요. 근데 저는 그 돈이 훨씬 價値 있고 괜찮다고 느껴질 수 程度로 아이돌 活動이 힘들었어요. 그런 狀況이 왔기에 抛棄할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抛棄하지 못했을 거예요.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行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幸福해요. 저는 아이돌 文化와 生活을 견디지 못해서 나왔지만, 그래도 只今 이렇게 幸福해질 수 있었던 건 14年 동안 熱心히 일해 온 德分이기도 하잖아요. 過去의 不幸했던 일로 後悔하지 말고 只今 幸福에 集中하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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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尹錫悅 大統領, BTS 멤버는 外界人이다? 36年 째 UFO ‘덕질’하는 天才 工學者[復讐者들]

    尹錫悅 大統領과 BTS가 外界人이라고 主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荒唐無稽해 보이는 主張을 한 이는 假說과 檢證으로 世上을 바라보는 科學者입니다. 그는 서울대 物理學科 學事, 카이스트 新素材工學科 碩士, 英國 케임브리지大 工學博士 課程을 밟은 맹성렬 又石大 電氣電子工學科 敎授(59)입니다. 世界 人名事典 ‘마르퀴스 후스 後’에 2年 連續 登載된 工學者, 2006年 特許廳이 授與하는 特許 部門 最高賞 ‘세종대왕賞’ 受賞者, ‘나노物質 合成과 실리콘界 및 非실리콘界 나노 트랜지스터’ 等에 對한 硏究로 38篇의 SCI(科學技術論文引用索引)級 論文을 發表한 硏究者이기도 합니다. 그의 입에서 ‘大統領과 BTS는 外界人일 것’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요? 맹 敎授는 天才 工學者임과 同時에 36年間 UFO를 硏究해온 國內 最高 權威의 UFO 硏究者이기 때문입니다. 맹 敎授는 世界 最大 UFO 團體 뮤폰의 韓國 代表이자, 韓國UFO硏究協會 會長입니다. 世界的인 팝 歌手 브리트니 스피어스, 美國 前 大統領 조지 부시도 外界人이라는 所聞이 茂盛했었죠. UFO 硏究者들 사이에서 非凡한 사람들은 外界人일 可能性이 높다는 主張이 심심찮게 나왔던 것과 같은 脈絡에서 맹 敎授도 尹錫悅 大統領과 BTS 멤버들이 外界人일 수 있다고 主張한 겁니다. UFO는 實在한다는 證據들은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最近에는 美國 政府가 100年 間 UFO에 對한 情況을 숨겼고, 外界人의 遺骸를 保有하고 있다는 主張이 議會 聽聞會에서 提起됐습니다. “UFO의 存在는 安保 威脅 要因이기 때문에 美國이 모든 證據들을 隱蔽해왔다”는 맹 敎授의 主張과 一脈相通합니다. 낮에는 電氣電子工學을, 밤에는 UFO를 파헤치는 맹 敎授를 지난달 13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社屋에서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BTS와 尹錫悅 大統領이 外界人인 理由를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도 確認할 수 있습니다. ―最近 美國 議會 聽聞會에서 美國 政府가 未確認飛行現象(UAP)의 硏究 結果에 對해 隱蔽하고 있다는 主張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美國은 1940年代 末부터 1960年代 말까지 積極的으로 UFO를 硏究하다가 國益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判斷했는지 硏究를 中斷시켜버렸어요. 最近 들어 다시 硏究를 하고 있지만 그 結果를 透明하게 公開하지 않고 있습니다. 外界人이 美國과 中國, 러시아보다 뛰어난 軍事力을 갖추고 地球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이는 世界 安保에 엄청난 威脅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나라 亦是 UFO 硏究에 消極的인 便인데 最近 들어 조금씩 希望이 보이고 있습니다. 尹錫悅 大統領이 候補者 時節 公約 中 하나로 航空宇宙廳 新設을 내세웠고, 當選 後에도 2023年 末 航空宇宙廳이 出帆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最近 몇 年 사이 UAP에 對한 證據들이 밝혀지고 있는 만큼, 航空宇宙廳 안에 UFO 關聯 硏究 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UFO의 實在와 함께 많이 擡頭되는 主張은 有名人들의 ‘外界人說’입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조지 부시, 루퍼트 머독 等 수많은 有名人士들이 ‘렙틸리언’(人間型 爬蟲類 怪物)설에 휩싸였었는데요. 敎授님도 이를 믿으시나요? ‘周邊에 外界人이 있다면 누가 外界人인 것 같으냐’는 質問을 많이 받아요. 有名人들은 外界人일 可能性이 높습니다. 外界人의 觀點에서 생각해 보세요. 地球를 占領하고 싶다면 外界人을 어느 자리에 둘까요? 有名하고 影響力 있는 사람으로 심어 놓겠죠. 그래서 한 나라를 統治하는 大統領이 가장 外界人일 可能性이 높은 겁니다. 世界的으로 影響力이 큰 BTS도 마찬가지고요. ―有名人의 렙틸리言 설을 두고 ‘陰謀論’이라고 보는 視角도 많은데요, 外界人이 存在한다는 證據가 있나요?외계인에게 拉致된 經驗이 있는 ‘被拉者’들의 陳述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陳述 證據는 힘이 弱합니다. 普通 逆行 催眠 技術을 써서 被拉者들의 拉致 經驗을 듣는데, 催眠 狀態의 陳述이 얼마나 信憑性이 있는가에 對해서는 學者들 사이에서 論爭이 있어요. 그 內容이 얼마든 歪曲될 수 있다는 거죠. 陳述보다 더 信憑性이 있는 證據는 北美에서 發生해 온 家畜 屠殺 事例입니다. 1960~1970年代 美國 뉴멕시코주를 中心으로 南美, 캐나다 等地에서 소들이 銳利한 칼에 사지, 귀, 生殖器 等이 잘린 채 發見됐고, 더 놀라운 건 死體에 피가 한 방울도 없이 다 빠져나간 狀態였다는 겁니다. 2009年에도 美國 콜로라도州 한 牧場에서도 4마리의 소가 이 같은 狀態로 發見됐습니다. 눈, 귀, 혀, 生殖器 等이 사라졌고, 피와 傷處도 全혀 없는 狀態였습니다. 野生動物에 물린 痕跡도 없었고, 切斷 道具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이런 情況들 때문에 家畜 屠殺의 犯人이 外界人일 것이라는 主張이 나오고 있습니다. ―外界人에게 拉致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외계인 被拉 經驗者들의 證言에 따르면 처음 拉致된 瞬間엔 恐怖스러웠다가 어느 時點부터는 즐거워진다고 합니다. 心理學的으로 恐怖를 잠재우기 위한 防禦記載가 作動해 즐거움을 假짜로 느낀다는 主張도 있고, 外界人이 텔레파시를 통해 人間의 精神을 操縱하는 것이라는 主張도 있습니다. 事實 뚜렷한 方法은 없습니다. 그냥 즐겨야죠. 別수 있나요. UFO와 外界人 이야기를 할 때 맹 敎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납니다. UFO에 關心을 갖기 始作한 건 서울대 物理學科 3學年 在學 時節 ‘科學과 宗敎’라는 授業을 들은 後부터였습니다. 以後 UFO를 主題로 레포트를 썼고, 서울대 最初로 UFO 探究 동아리를 만들었지만 加入者가 없어서 外部 人員을 迎入해 韓國UFO硏究協會를 열었습니다. 28살이었던 1995年에는 UFO에 對해 探究한 資料를 모아 600쪽에 達하는 冊 ‘UFO 신드롬’을 發刊해 科學 部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類似 科學 아니냐”는 同僚 學者들의 無視도 받았지만, 그는 周邊에서 뭐라 하던 自身이 眞心으로 하고 싶은 걸 좇아야만 直星이 풀리는 性格이었습니다. 그 固執으로 36年을 工學者이자 外界人 硏究者로 살았습니다. ―外界人 硏究는 언제부터 하시게 된 건가요? 大學 時節 授業을 들었다가 UFO 存在에 關心을 갖게 됐어요. 그 後 제 專攻과는 別個로 UFO를 探究하기 始作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性格이에요. 元來 醫大도 갈 수 있는 成跡이었지만 父母님 反對를 무릅쓰고 物理學科에 進學했어요. 돈 벌기 힘들 때 ‘醫大에 가고 物理學, UFO 硏究는 趣味로 할 걸’이라 後悔가 찾아오기도 하는데, 잠깐 그러고 말아요. 醫大를 갔다면 제 젊은 時節이 宏壯히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工夫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代身 物質的인 部分에서의 損害는 堪耐해야죠. ―‘檢證되지 않았다고 해서 無條件 科學이 아니라고 斷定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檢證돼야 科學 아닌가요? UFO를 ‘類似科學’(主唱者와 硏究者가 科學이라 主張하지만, 科學의 要件으로서 갖추어야 할 條件과 맞지 않는 것)으로 바라보는 視線도 많습니다. 立證 方法論이 非科學的이라면 科學이 아닙니다. 하지만 科學的인 方法論으로 檢證해낸다면 그건 科學이죠. UFO 目擊談이나 外界人 被拉에 對한 主張을 科學的 方法으로 立證하고 糾明해낸다면 UFO와 外界人의 實在도 科學的인 것이 되는 거예요. 一般人들이 올리는 UFO 寫眞을 갖고 ‘UFO는 있다!’고 主張한다면 그건 非科學的인 것이죠. ―UFO가 存在한다는 科學的인 證據는 무엇이 있나요? 가장 決定的인 UFO 證據로 言及되는 건 航空母艦 니미츠호 操縱士들이 UFO를 目擊했고, 그 物體가 實際 레이더에도 感知됐던 事例입니다. 2004年 니미츠호 航空母艦 訓鍊 途中 2代의 操縱器에 搭乘해있던 4名의 操縱士들이 一齊히 UFO를 目擊했다고 證言했고, 그 모습이 操縱器의 레이더와 潛水艦의 소나(음파에 依해 水中目標의 防衛 및 距離를 알아내는 裝備)에도 잡혔습니다. UFO 推定 物體가 宇宙에서 大氣로 進入하는 모습, 大氣를 非正常的으로 빠른 速度로 進入하는 모습, 進入 後 海水面 위에서 머물러 있는 모습이 레이더에 잡혔죠. 當時 레이더로 이 物體를 感知한 操縱士들이 該當 位置로 가서 이 物體와 追擊戰을 벌였다는 證言도 나왔습니다. 追擊戰을 벌이던 物體가 바다 밑으로 사라졌는데, 바닷속에서의 움직임은 小나로도 感知됐습니다. 具體的인 證據들을 美國 政府가 갖고 있지만 民間에 公開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該當 資料가 民間 科學者들에게 넘어가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면 地球上의 技術이 아니라는 明白한 證據가 되기 때문에 쉬쉬하는 것이죠. ―UFO와 外界人이 있다고 主張했던 존 脈 하버드대 醫大 敎授는 美國 主流學界에서 外面받기도 했는데, 敎授님도 비슷한 經驗이 있으신가요?학자들 앞에서 UFO 얘기를 하면 저를 異常하게 보곤 했어요. “먹고 살기 힘들구나”라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죠. 저를 工學者이기 前에 UFO를 파헤치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속된 말로 ‘또라이’로 置簿하는 視線도 있었습니다. 10年 前만 해도 그런 視線이 不便했지만 요즘엔 UFO 이야기를 放送에 나와 사람들에게 共有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이제는 自身 있게 ‘UFO는 科學이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美國 主流 科學者들 中 UFO 問題를 深刻하게 생각하고 眞摯하게 接近하려는 이들이 많아졌어요. 專門 雜誌에 UFO와 外界人을 다루는 趨勢도 이어지고 있고요. UFO가 非主流에서 主流로 編入되는 것 같아 幸福합니다. 김재희記者 jetti@donga.com이지훈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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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洞네 지키는 平凡한 消防官이 꿈”… 넷플릭스 ‘사이렌’의 정민선[復讐者들]

    “‘女子 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出演者들은 女性警察, 女性軍人, 女性消防官이 아니라 職業群을 代表해서 나온 겁니다.”올 上半期 公開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藝能 을 演出한 이은경PD는 製作發表會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警察, 消防官, 軍人, 스턴트맨, 運動選手, 警護員 等 6個 職業群의 女性들이 各自 職業의 名譽를 걸고 熾烈한 生存 競爭을 벌입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땀범벅 되고 負傷을 입어도 멈추는 法이 없습니다. ‘偏見을 먹고 사는 職業’에 從事하는 女性들이 至毒한 勝負를 벌이는 모습에 代理 快感을 느꼈다는 視聽者의 應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속 視聽者의 눈길을 사로잡은 ‘强한 女性’이 있었습니다.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 “나보다 센 놈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선전포고한 勇敢한 消防官입니다. 짧은 時間에 혼자 長斫 30個를 패서 팀을 勝利로 이끌고, 불 끄는 競技에선 專門性을 發揮해 활활 타오르는 불을 迅速하게 制壓했습니다. 慶北 喪主消防署 所屬 정민선 消防士(30)가 그 主人公입니다. 最近 이 만난 그는 지난해 第1號 女性 消防車輛 運轉要員으로 任命된 消防官이기도 합니다. 消防車 運轉은 오랫동안 금녀의 領域으로 여겨졌던 分野입니다. 정민선 消防士 인터뷰는 東亞日報 유튜브 ‘復讐者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기개 넘치는 宣戰布告가 魅力的이었습니다. “ 1話 나오는 날, 消防學校 訓鍊 中이었어요. 텔레비전 큰 畵面으로 보고 싶었는데 訓鍊 中이라 그럴 수 없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休息時間에 近處 카페로 가서 携帶電話로 봤는데 첫 禍에서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웃음) ‘내가 저런 말을 했었나’ 하면서 봤던 記憶이 납니다.”―말만 그런 게 아니라 競技에서 ‘센 놈’ 役割을 톡톡히 하셨습니다. 特히 長斫 霸氣의 達人이 되셨어요. 다른 팀은 나눠서 했는데 正 消防士님 혼자 長斫 30個를 팼어요. “그때 消防팀 리더였던 김현아 언니가 負傷을 입으면서 저희팀 雰圍氣가 안 좋았어요. 누구 하나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흐를 程度로 暗鬱했어요. 팀別 아레나戰을 하러 現場에 到着했는데 運動場에 長斫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거예요. 進行者가 ‘義理 게임입니다. 順序를 定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最大限 혼자 해봐야 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順序를 定하는 게 저한테는 意味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책임지고 다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다른 팀員들도 있는데 왜 혼자 長斫 30個를 다 패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暗鬱해진 팀 雰圍氣를 다시 띄우고 싶었어요. 저도 언니들도 다시 힘을 내려면 狀況을 反轉시켜야 하잖아요. 消防官들이 每日 겪는 火災, 災難 現場이랑 똑같아요. 팀員이 負傷을 입고 뒤처지고 있으면 自發的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아마 長斫이 2倍 더 많았어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體力보다 精神力으로 해내는 거니까요.”부상 입은 同僚를 代身해 限界에 挑戰하고, 緊迫한 狀況에서도 他人을 해치지 않고 正正堂堂하게 競爭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消防팀. 自己를 犧牲하고 他人을 求하는 ‘消防官’이라는 職業的 特性이 잘 드러났다는 反應이 많았습니다.―을 통해 消防官이라는 職業에 對한 好感도가 높아졌습니다. “저희 4名이 消防官을 代表해서 出演했을 뿐입니다. 現場에 있는 모든 消防官의 平素 모습이에요. 아주 오래 前부터 大韓民國 消防官들이 땀으로, 피로 일궈온 結果라고 생각합니다.”― 出演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勤務 中에 消防廳에서 連絡이 왔어요. 넷플릭스 藝能 프로그램에 出演해보겠냐고요. 처음엔 放送 出演 엄두가 나지 않아 拒絶했어요. 근데 一週日 뒤에 또 連絡이 와서 罪悚한 마음에 製作陣 미팅을 하게 됐어요. 對話를 한참 나눈 後에 프로그램 趣旨에 對해 여쭤봤죠. PD, 作家님들이 正말 오랫동안 의 企劃意圖를 說明해주셨어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었어요. 製作陣 말씀이 끝나자마자 ‘出捐하겠다’고 말씀드렸죠.” 演出을 맡은 이은경PD는 프로그램 企劃 意圖에 對해 이렇게 說明한 적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포츠 漫畫의 세 가지 키워드는 友情, 努力, 勝利다. 이 키워드들은 가슴을 뛰게 한다. 自己 分野에 眞心이고, 조금 모자라도 뛰어들고, 무언가를 欲望하고, 그것을 爭取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이야기 속에서 늘 가슴이 雄壯해졌다. 그런데 女性이 主人公인 스포츠 漫畫가 많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友情, 努力, 勝利가 담긴 津한 女性 敍事物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友情과 努力, 勝利. 消防팀이 登場하는 場面에서 세 가지 키워드는 唯獨 빛이 났습니다. 消防팀은 反則보다 正攻法으로 競技에 臨하며, 피 튀는 싸움보단 땀 흘리는 競爭을 擇했습니다. 生死를 함께 한 消防팀뿐 아니라 決勝戰에 오르기까지 ‘원팀’으로 協力했던 運動팀과도 끈끈한 友情을 誇示했습니다. ―撮影이 끝난 後에도 出演者들과 友情을 나누고 계시다고요. “消防팀 언니들과는 團體카톡房에서 하루 終日 떠들고요. 사이렌에 對한 좋은 記事, 댓글 나오면 꼭 共有해요. 決勝戰에서 맞붙은 運動팀과는 撮影 끝나고 會食도 했어요. 運動팀 김성연 選手와는 旅行도 다녀오기로 했고요.”―소방팀 리더 김현아 消防長에 對해 ‘世上에서 가장 尊敬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縣衙 언니의 말이 消防팀의 方向이었어요. 현아 언니는 힘도 세고 性格도 불같아요. 누구보다 義理 있고 리더로서 犧牲 精神도 剛해요. 언니는 自己가 獨裁者처럼 굴었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왔어요. ‘幸福한 獨裁’ ‘멋있는 獨裁’였다고요. 그래서 決勝戰 때 消防팀 리더인 현아 언니가 ‘우리답게 攻擊하고 멋지게 戰死하자’고 이야기했잖아요. 저희 모두 질 거라 豫感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우리다운 것을 하자는 언니 말에 다들 說得됐던 것 같아요. 너무 虛妄하게 運動팀에 敗北하긴 했지만요.(웃음)”―‘사이렌’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女性 消防官이란 存在를 더욱 實感할 수 있었습니다. “火災, 災難 現場은 男女 消防官을 가리지 않아요. 똑같은 壓力의 호스를 들고 똑같은 무게의 裝備를 차고 要救助者(構造가 必要한 사람)를 求해야 해요. 저희가 性別을 떠나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에요. 현아 언니 인터뷰를 봤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恒常 證明하고 立證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女子 消防官이라는 理由로) 누군가의 視線 끝에 無視, 짜증으로 始作하는 境遇가 많아요. 저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先入見을 갖고 보시는 거예요.”―그럴 땐 어떻게 對處하시나요? “저는 그런 視線에 神經을 쓰지 않는 便이긴 해요.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크니까 제가 女子지 男子지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人生 모토 中 하나가 ‘眞짜는 모두가 알아본다’는 거예요. 나 自身과의 싸움에서 成長하고 배우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그냥 웃고 말아요. 날마다 出動해야 하는 思考, 災難 現場이 있는데, 그런 偏見들에 속상해할 時間이 없는 거죠.” ―災難이나 事故가 發生하면 普通 사람들은 待避하지만 消防官은 安全한 데 있다가도 危險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一旦 出動벨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危險하지 않은 瞬間이 單 한 瞬間도 없어요. 뉴스에는 큰 事故, 큰 事件만 나오잖아요. 消防官 孤立, 死亡 이런 큰 뉴스만 나오죠. 근데 現場에서는 작은 事件, 事故도 正말 많이 일어나요. 例를 들면 저희가 타는 消防車는 되게 높거든요. 着用 裝備가 宏壯히 무겁기 때문에 車에서 내리다가 넘어지기도 해요. 空氣呼吸器 着用하면 視野가 좁아지기 때문에 옆에 障礙物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防火服이 찢어질 때도 있어요. 火災 現場에서는 불덩이들이 제 머리 위에서 굴러다니고요. 開放된 窓門 틈으로 火焰이 鎔巖처럼 噴出되는 境遇도 많고요.”―화재 現場에서 房禍福을 입어도 熱氣가 고스란히 느껴지나요? “저희가 입는 防火服은 萬能이 아닙니다. 瞬間의 熱氣를 막아주는 役割을 하고요. 防火服의 素材가 밖에서 오는 熱氣, 水分을 막아주는 役割도 하지만 제 몸에서 나오는 熱을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放火服 안에 있는 熱氣를 고스란히 다 견뎌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熱氣를 식히기 위해 消防官들이 交代로 現場에 進入하는 거예요.”―화재 現場에서 가장 두려운 瞬間이 있다면요? “火災 現場은 濃煙(濃煙·짙은 煙氣) 때문에 視野 確保가 안 되거든요. ‘中成大’라고 해서 視野 確保가 되는 空間으로 進入, 待避해야 해요. 여기에 놓인 물이 가득 찬 手巾을 잡고 移動하는데 그 手巾이 消防官들에겐 목숨 줄 같은 거거든요. 이걸 놓치면 正말 무서워요. 消防官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消防官들이 强度 높은 訓鍊을 받는 건 두려움과 무서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元來부터 消防官인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익숙해지기 위해 訓鍊을 많이 받아야 해요.”―모든 消防官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하더라고요. 트라우마가 甚했던 事故가 있었나요? “몇 年 前 高速道路에서 交通事故가 난 적이 있어요. 山沙汰, 落石 防止 構造物에 들이받았는데 車輛 正面, 오른쪽 琉璃가 다 깨져서 破片이 얼굴로 튀었어요. 잠깐 精神을 차리고 보니 뒷목 部分이 되게 뜨거운 거예요.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나오고 있더라고요. 그때의 뜨거운 느낌이 아직도 完全 鮮明해요. 찢어진 部位에 아홉 바늘 程度 꿰매고 後遺症으로 耳石症도 생겼어요. 正말 큰 事故였어요.”―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事故 났을 때 應急室에서 急한 措置를 받고 繃帶를 감고 집에 돌아오니 午後 11時 程度 됐더라고요. 他地에서 勤務를 하고 있으니까 故鄕에 계신 엄마한테 電話를 드렸죠. 事故 났다고 말씀드리니 엄마가 덤덤하게 ‘來日 갈게’ 하시고는 바로 오셨어요.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차분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前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저녁 늦게 電話를 했는데 엄마가 엄청 緊張하는 목소리로 받으시는 거예요. 늦은 時間 딸에게 電話가 오니까 這番 事故 때처럼 또 다친 게 아닐까 念慮하신 거죠. 그때 마음이 正말 아팠어요.”그럼에도 不拘하고 정민선 消防士는 消防官이 된 것을 決코 後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放送 出演으로 有名稅를 얻었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別稱은 ‘洞네를 지키는 平凡한 消防官’입니다. ―‘洞네를 지키는 平凡한 消防官’李 되고 싶었던 理由가 궁금합니다. “救助가 懇切한 누군가에게 必要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特異하게도, 제가 直接 119 申告하는 일이 많았어요. 제 눈앞에서 누가 다치거나 交通事故가 난다거나, 山불이 난다거나…. 한 番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씨가 어떤가 보고 있는데 工事場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다른 누가 먼저 申告를 할 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제가 最初 申告者였어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날것의 現場에 消防官들이 사람들을 求하고 措置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걸 보면서 漠然하게 ‘他人을 救하는 사람’李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正말 神奇한 게 뭔지 아세요? 제가 消防官이 된 後부터는 事件, 事故를 目擊한 적이 없어요. 이젠 제가 現場에 가장 먼저 出動하는 사람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

    •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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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랙퀸은 죄다 트랜스젠더냐고? 어쩌라구~” 18年次 드랙 아티스트 나나영롱킴[復讐者들]

    ‘드랙퀸은 全部 트랜스젠더’라는 嫌惡의 視線도, 女性들의 ‘脫코르셋’ 움직임에 逆行한다는 偏見도 옛말입니다. 20餘 年 前만 해도 梨泰院 地下의 클럽에서 비밀스럽게 享有되던 ‘드랙’은 젠더의 區分을 넘어 自身을 자유롭게 表現하는 藝術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人氣 댄스 크루 프라우드먼은 드랙 아티스트 ‘캼’과 協同 舞臺를 선보이며 드랙에 對한 偏見을 깼다는 好評을 받았습니다. 人氣 유튜버 랄랄의 ‘드랙퀸 扮裝室 氣싸움’ 콘텐츠로 드랙 아티스트에 對한 大衆들의 關心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드랙이 陽地로 올라오는데 寄與한 아티스트 中 하나는 現時點 드랙新(Scene)의 슈퍼스타, 나나영롱킴(本名 김영롱·36)입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와 마마무의 뮤직비디오, 朴孝信 콘서트 티저映像에 出演하는 等 K팝 아티스트와 協業하며 ‘드랙은 性小數者들만의 文化’라는 障壁을 허물었습니다. 化粧品 브랜드 ‘헤라’ 캠페인 모델로도 活躍했습니다. 캠페인 廣告 끝 무렵 金色 假髮을 벗어던지고 카메라를 凝視하는 유튜브 映像에는 ‘百貨店 브랜드 廣告에서 드랙을 볼 날이 오다니, 感激을 넘어 존경스럽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커밍아웃을 한 同性愛者이자 드랙퀸. 少數者 中 少數者인 그는 손쉽게 嫌惡와 憤怒의 對象이 되기도 했습니다. 偏見의 끝에는 도리어 自身의 삶에 對한 끝없는 肯定이 있었습니다. 헤라 캠페인 廣告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自己의 삶을 살잖아요. 自己가 主人公이라면 華麗해도 되지 않을까. 새드보다는 해피엔딩.’ 해피엔딩을 向해 每瞬間 나아가는 나나영롱킴을 지난달 10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社屋에서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국민대 演劇映畫科에 進學했던 그가 드랙에 빠져 自退한 事緣부터, ‘드랙퀸은 潛在的 트랜스젠더’라는 偏見에 對한 一鍼까지 東亞日報 유튜브 ()에서도 確認하실 수 있습니다. ―드랙이 좋아서 大學校를 그만 두셨다고요. 俳優가 되고 싶어서 國民對 演劇映畫科에 進學했어요. 그런데 제가 LGBTQ+(性小數者)에 屬한 사람이다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抒情的인 로맨스 演技를 못하겠더라고요. 男女의 劃一的인 星役割과 사랑 演技를 풀어낼 수가 없었어요. ‘演技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죠. 自退를 하고 5, 6年 동안은 演劇이나 뮤지컬을 하나도 안 봤어요. 舞臺를 보면 제가 演技를 다시 하고 싶어질 것 같았어요. 드랙퀸으로 어느 程度 자리를 잡고 밥벌이를 하면서 마음이 便해졌어요. 이젠 同期들 演劇도 보러가도 아무렇지 않아요. ―‘드랙’의 語源은 무엇인가요? 셰익스피어 時代에는 女性들이 演劇과 오페라 舞臺에 올라갈 수 없어서 女性의 役割을 男性이 했어요. 男性이 女性 扮裝을 했을 때 드레스가 舞臺 바닥에 질질 끌리는 모습에서 ‘드래그’(Drag)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語源에 對한 假說은 워낙 많아서 뭐가 正確한 건진 저도 몰라요. 各自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예전엔 드랙이 무엇인지 이해시키려고 했거든요. 살다 보니 굳이 그럴 必要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무리 說明해도 自己가 願하는 대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드랙은 女性性을 强調하는 ‘女裝男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무당벌레, 겨털(?)을 聯想케 하는 特異한 扮裝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빨간色 바탕에 흰色 點박이 수트를 입은 드랙 扮裝을 보고 무당벌레라고 하는 분도 있고 日本 設置美術家 구사마 야요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봐도 좋아요. 解釋은 自由죠. 드랙 아티스트가 반드시 女裝만 하는 게 아니에요. 무당벌레 같은 昆蟲이나, TV, 거품 等 事物이 되기도 해요. 自身의 머릿속에 있는 第3의 캐릭터를 만드는 親舊들도 있어요.―드랙퀸은 女性이 되고 싶어 하는 男性들, 卽 潛在的 트랜스젠더라는 一部 視角도 있습니다. 事實인가요?아닙니다. 드랙을 單純히 津한 化粧, 華麗한 드레스를 입는 ‘女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誤解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異性愛者인 女性 드랙퀸도 있고, 男性性을 强調하는 ‘드랙킹’도 있어요. 드랙은 自身이 表現하고 싶은 걸 마구마구 表現하는 藝術 장르예요. 요즘엔 ‘드랙퀸’ 代身 ‘드랙 아티스트’ ‘드랙 퍼포머’라는 用語가 더 많이 쓰여요. ‘드랙퀸=餘張’이라는 틀이 깨졌으면 좋겠어요.―드랙이 大衆化되긴 했지만 如前히 매니악韓 장르예요. ‘풀타임 드랙’으로 生計維持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지도 궁금해요. 프리랜서다 보니 輸入이 固定的이진 않아요. 지난해 10月까지는 투잡을 뛰었어요. 낮에는 浴室用品 브랜드 ‘러쉬’를 다녔고, 저녁에는 撮影이나 드랙 公演을 했죠. 러쉬는 LGBTQ+를 應援하는 브랜드 中 하나죠. 入社 面接에서 “우리 브랜드는 LGBTQ+를 支持하는데 性小數者에 對한 不快感이나 嫌惡感이 있느냐”고 直接的으로 質問해요. 그래서 러쉬는 LGBTQ+의 文化를 理解하고 尊重해주는 사람들로 構成이 돼 있죠. 그 德에 러쉬에서 7年 동안 재밌게 일했어요.―최근 들어 드랙이 急激히 大衆化돼가고 있는 雰圍氣예요. 킹키부츠, 헤드윅, 프리실라 等 드랙 아티스트를 素材로 한 뮤지컬이 人氣이고, 最近엔 드랙 아티스트와 K팝 歌手들과의 協業度 活潑하게 이뤄지고 있고요.해외에선 드랙 文化가 자리 잡은 지 오래 됐는데, 韓國에서는 드랙이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 素材가 된지 5, 6年 밖에 안 됐어요. 드랙이 마니아層만 즐기는 陰地의 文化였다면, 요즘엔 한層 더 밖으로 나온 건 確實하죠. 男女 커플이 데이트 코스로 드랙쇼를 보러 오기도 하고, 얼마 前엔 제 公演에 단골 顧客이 媤어머니를 모시고 오기도 했어요. ‘드랙 아티스트’라는 華麗한 外皮를 벗은, 사람 ‘김영롱’은 不特定 多數의 嫌惡 섞인 손가락질로 傷處를 받기도 했습니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 19)李 한창이던 2020年 集團感染이 勃發한 곳이 性小數者들이 즐겨 찾는 梨泰院 클럽이라는 잘못된 情報가 擴散되면서 커밍아웃한 게이인 나나玲瓏킴에게도 하루에 100個 以上의 嫌惡 메시지가 왔습니다. 當時 그는 강박증과 恐慌障礙에 시달렸습니다. “性格이 어두웠으면 自殺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回顧했을 程度로 嫌惡의 强度는 深刻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그에게 泄瀉藥을 탄 生水甁을 건넨 行人도 있었습니다. ―숱한 惡플에 시달려 오셨다고요. 입에 담기에도 어려운 人身攻擊的인 惡플이 너무나 많았어요. 辯護士가 惡플을 推理니 101個더라고요. 한 사람이 여러 惡플을 단 境遇도 있어서 사람 數로 따지면 69名이었고, 그들에 對한 告訴를 進行했죠. LGBTQ+ 親舊들이 惡플에 시달리면서 “全部 고소할거야. 가만 안 둘 거야”라고 말은 하지만 實踐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다 착하고 여리다보니 그 過程을 견딜 自信이 없었던 거죠. 그들을 代身해서라도 매운맛을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多人員을 告訴한거고, 아직 進行 中에 있습니다. ―2021年 貸付業體 廣告모델이 되신 뒤 認知度가 높아졌어요. 世上의 偏見에 “어쩌라구!”라고 反擊하는 앙칼진 멘트가 痛快했는데요. 一角에선 非難도 있었다고요. ‘貸付業體 廣告를 왜 하느냐. 제 精神이냐’는 辱을 엄청 먹었어요. ‘트랜地션(性轉換)을 準備하는 親舊들이 當身(나나영롱킴)을 보고 性轉換 手術을 하기 위해 돈을 빌렸다가 못 갚고 自殺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極端的인 批判까지 들었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로 보셨던 거죠. 周邊에 트랜地션을 準備하는 親舊들한테 “廣告를 보고 돈 빌려서 手術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물어보니 “언니는 트랜스젠더度 아니고 드랙퀸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고 疑訝해하더라고요. ―퀴어 퍼레이드에서 行人으로부터 泄瀉藥을 탄 生水桶을 받으신 적도 있다고요. 맞아요. 퀴어 퍼레이드를 應援하는 척 하면서 물甁을 건넸는데 알고 보니 泄瀉藥이 타져 있었던 거죠. 嫌惡의 感情에 빠진 사람들은 罪責感이 없어요. 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는 目的 하나에만 빠져있어서 自身이 하는 行爲가 얼마나 深刻하고, 他人에게 傷處를 주는지 생각하지 못하죠. 但只 性小數者에 對한 嫌惡만이 아니에요. 社會 全般에 퍼져 있는 嫌惡의 共通的인 問題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아티스트가 되고 싶나요?얼마 前 제 드랙쇼에 臺灣 男女 觀光客들이 오셨어요. K팝, K드라마에 對한 關心에서 始作해 韓國의 LGBTQ+ 文化에도 興味를 갖게 되셨대요. 제 公演을 보기 위해 休暇를 내 韓國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正말 感動을 받았어요. 元來 ‘나나’라는 이름으로만 活動하다가 ‘玲瓏킴’을 붙이게 된 理由도 海外에 韓國의 드랙을 더 알리고 싶기 때문이에요. 아직은 生疏한 韓國의 드랙이, 제 韓國 이름 ‘玲瓏킴’을 타고 더 날개를 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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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眞짜 돌아이’ 들을 때까지 繼續 할 거예요” 無限挑戰 콘테스트 出身 1世代 크리에이터 채희선[復讐者들]

    “크리에이터? 네가 무슨 創造主냐?” 2015年 ‘크리에이터’가 적힌 名銜을 건네자 親舊들이 던진 말입니다. 2009年 無限挑戰 ‘코리안 돌+아이’에 參加해 얼굴을 알리고 2014年 유튜브를 始作해 人氣를 끈 1世代 크리에이터 ‘채채’, 채희선 氏(31)의 이야깁니다. 只今은 初等學生 將來 希望 1順位 職業이 됐지만 9年 前만 해도 크리에이터는 生疏한 職業이었습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는 채 氏에게 親舊들은 “創造主냐”며 웃었고, 父母님은 “탤런트와 다른 거냐”고 물었습니다. 지난달 16日 서울 鍾路區 동아일보에서 만난 채 氏는 “유튜브를 始作한 2014年에는 페이스북의 時代가 永遠할 줄 알았다”고 回想했습니다. 꿈틀거리는 끼를 發散할 通路를 찾던 中 유튜브를 알게 됐습니다. 地上波 개그맨 公採 試驗 最終 段階에서 苦杯를 마셨던 그는 2014年 購讀者 47萬 名 채널 ‘쉐어하우스’의 演技者 아르바이트로 始作해 購讀者 79萬 名을 保有한 코미디 채널 ‘쿠쿠크루’의 客員멤버로 活動을 넓히면서 認知度를 쌓기 始作했습니다. ‘데이트할 때 몰래 방귀 뀌는 方法’, ‘道를 아십니까 만났을 때 對處法’ 等 콩트 콘텐츠 照會數는 數百萬 回에 達합니다. 以後 本人의 유튜브 채널 ‘채채’에서 ‘가슴 작으면 좋은 點’ ‘마르면 나쁜 點’ 等 固定觀念을 뒤집는 ‘채高點’ 콘텐츠, 121萬 購讀者를 保有한 ‘딕헌터’(本名 신동훈)와 커플로 분한 ‘神采커플’ 콘텐츠를 선보이며 50萬餘 名의 購讀者를 모았습니다. 아이돌 그룹에게 ‘魔의 7年’이 있듯 크리에이터에게도 全盛期가 永遠하진 않습니다. 2015年부터 5年 넘게 人氣를 누렸지만 2021年 自律神經失調症, 起立性 頻脈을 앓아 유튜브 製作을 쉬어야 했습니다. 53萬 名이었던 購讀者는 43萬 名으로 줄었습니다. 섣불리 주저앉지는 않습니다. 지난해부터 結婚 後 日常을 담는 유튜브 채널 ‘채새宅’을 開設했고,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瞬間을 克服한 過程을 적은 에세이 ‘오히려 좋아’도 發刊했습니다. 사람들을 웃길 때의 自身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를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한물간 유튜버가 살아남는 方法’()을 <復讐者들> 인터뷰에서 確認할 수 있습니다. 23日 午後 4時 公開되는 2部에서는 ‘結婚傳道師’가 된 그가 말하는 ‘配偶者 고르는 方法’도 公開됩니다. ―無限挑戰의 코리안 돌+아이 特輯에서 最終 選拔된 24名의 돌아이 中 한 분이셨어요. 當時 高等學生이셨는데, 프로그램 出演 契機가 궁금해요. 어렸을 때 꿈이 코미디언, 리포터, 演劇俳優, 쇼호스트, 레크리에이션 講師였어요. 1順位인 코미디언이 안 됐을 境遇 以後 職業들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程度로 저를 表現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職業을 갖고 싶었어요. 大學에서 藝體能을 專攻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無限挑戰 코리안 돌+아이 콘테스트는 父母님께 저를 證明할 方法이었어요. ‘우리 애한테 말도 안 되는 똘끼가 있구나’를 보여드리면 제가 藝體能 專攻을 하는 걸 支援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이 콘테스트에 나가기 위해 ‘이 사람은 돌아이가 맞습니다’라고 적힌 書類를 만들어서 校監先生님을 비롯해 100名의 先生님, 親舊들 사인을 받아 提出했어요. ―유튜브는 어떻게 처음 始作하게 됐나요? 코미디언이 꿈이었기 때문에 地上波 公採 개그맨 試驗을 봤어요. SBS는 最終까지 가서 떨어졌어요. 繼續 不合格의 苦杯를 마시고 있던 中에 코미디 유튜브 채널 ‘쉐어하우스’에서 演技者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냐는 提案을 받았어요. 當時 2014年은 大部分 페이스북만 하던 時代였어요. 時急 4500원을 받고 演技者 알바를 始作했죠. 以後 돌+아이 콘테스트에 함께 出演했던 딕헌터 님의 提案으로 유튜브 채널 ‘쿠쿠크루’ 客員멤버로 들어가게 됐어요. 2015年엔 第 채널 ‘채채’를 開設하면서 本格的으로 크리에이터 活動을 始作했죠. ―本格的으로 크리에이터 活動을 始作한 2015年만 해도 유튜브라는 플랫폼은 生疏했어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周邊 反應은 어땠나요? 다이아TV와 契約을 맺은 뒤에 知人들 모임에 나가서 ‘크리에이터’가 적힌 名銜을 줬더니 다들 疑訝한 表情이었어요. 只今은 有名한 PD가 된 한 오빠는 “크리에이터? 너 職業이 創造主野?”라며 웃었어요. 그 程度로 生疏한 職業이었던 거죠. 父母님도 처음엔 제 職業을 잘 理解하지 못하셨어요. 제가 크리에이터를 한다고 하니 “탤런트 비슷한 거냐”고 물으셨어요. 父母님이 親舊들에게 제 職業을 說明하려고 해도 携帶폰에 유튜브가 안 깔려 있어서 紹介 못 하신 적도 많았대요. ―人氣를 끌었던 ‘채高點’ 콘텐츠에서는 ‘가슴 작으면 좋은 法’ ‘키 작으면 좋은 法’처럼 콤플렉스일 수도 있는 點을 愉快하게 콘텐츠化했고, 痔疾手術 過程까지 仔細하게 公開했어요. 本人을 내려놔야 하는 것에 對한 負擔은 없나요? 전 제가 웃길 때가 가장 예쁜 것 같아요. 스스로 魅力的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가 망가지고 웃기는 瞬間이라 ‘現打’가 온 적은 한 番도 없어요. 올리는 족족 100萬 照會數는 거뜬하게 넘기는 人氣 유튜버가 됐지만 그는 2021年 突然 活動을 中斷했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健康 惡化 때문이었습니다. 온終日 어지럼症이 持續되는 起立性 頻脈症候群과 自律神經失調症을 함께 앓으면서 日常生活이 不可能해졌습니다. 大學院을 다니던 中이었지만 冊의 文章 한 줄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程度였습니다. 沒入과 執拗함의 힘으로 精神的, 身體的 苦痛을 이겨낸 그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開設하고 에세이集도 냈습니다. 人氣가 예전만 하지 않지만 그는 單 한 番도 크리에이터를 選擇한 걸 後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때 가장 幸福하기 때문”입니다. ―購讀者가 53萬 名까지 늘면서 가장 人氣 있는 1世代 유튜버로 活潑하게 活動하셨는데, 2021年부터 活動이 뜸해졌어요. 昨年에는 映像이 10個밖에 안 올라왔더라고요.2021년부터 健康이 惡化됐어요. 起立性 頻脈症候群, 自律神經失調症 두 가지가 한 番에 왔어요. 病名을 몰라서 病院도 많이 다녔고요. 그 病의 症狀은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하루 終日 持續되는 거예요. 그 症狀이 1年 半 동안 持續돼서 日常生活이 안 될 程度였어요. 그때 大學院을 다니고 있었는데 論文 한 줄을 읽고 쉰 뒤에 다시 한 줄을 읽어야 했어요. 라이브 커머스 쇼호스트 活動도 하고 있었는데 멘트를 외울 수가 없어서 進行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두 가지 病이 同時에 찾아온 건가요?살다 보면 堪當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堪當을 할 수 없는 일이 있잖아요. 例를 들어 내가 토익點數를 400點에서 750點으로 올리겠다거나, 購讀者 數를 40萬 名에서 50萬 名으로 올리겠다는 건 제가 堪當할 수 있고, 努力으로 克服이 可能한 問題예요. 當時 제가 堪當할 수 있는 範圍를 넘어선 일이 닥쳤어요. 내 努力으로 解決이 不可能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몸이 아프더라고요.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病의 原因이 된 것 같아요. ―堪當할 수 없는 日課 맞닥뜨린 瞬間을 어떻게 克服하셨나요? 내 能力 밖의 問題라면 그와 關聯된 걱정과 생각을 바로 끊어내세요. 스트레스를 最大限 안 받으려고 하는 거죠. 저는 다른 일에 集中을 正말 많이 하려고 努力해요. 雜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루를 津이 빠지게 사는 거죠. 例를 들어 放送을 할 때 ‘오늘 하루 眞짜 이 악물고 이 사람들 다 웃겨주겠다’는 마음으로 臨해요. 大學院 工夫를 할 때는 타이머를 재요. ‘오늘 하루 13時間 앉아있는다’ 라고 스스로와 約束을 하고요. 남들 눈에는 스스로를 酷使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제게는 그게 集中의 方法입니다. 제가 어떤 일에 沒入하고 集中을 하면 제 뒤에 있는 그림자들이 안 보이더라고요. ―지난해 出刊한 에세이 ‘오히려 좋아’에서 ‘나는 슬픔을 갈고 닦아 웃음을 만드는 感情鍊金術師’라고 描寫하셨어요. 힘든 瞬間을 이겨내는 肯定의 힘을 어떻게 기른 것인지 궁금해요.혼잣말을 많이 해요. 每日 어떤 생각들을 하는데 그 생각을 10番 以上 스스로한테 외쳐요. 例를 들어 오늘은 길을 걸어가면서 ‘淘汰되지 말자’를 열 番 反復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제가 블로그에도 쓴 말인데요, ‘結局 끝까지 남아 成功한 사람들은 오래 버틴 사람이다’라는 말을 요즘 繼續 새기려 해요. 現實이 버거울 때마다 생각해요. ―昨年부터 유튜브 채널 ‘채새宅’을 始作하셨고, 如前히 43萬 購讀者를 保有하고 있는 ‘채채’에도 本格的으로 映像을 올리시고 있어요. 反應이 예전만 하진 못한데 크리에이터로서의 苦悶은 없으신가요? 트렌드를 만들 수 없다면 트렌드를 따라가기라도 해야 해요. 요즘 ‘렉카’ 콘텐츠가 忍飢잖아요. 그래서 2個月 前 ‘채채, 當身이 몰랐던 10가지 事實’이라는 렉카 컨셉의 映像을 올렸던 거예요. 트렌드를 따라가야 조금이라도 大衆의 趣向을 把握할 수 있겠죠. 근데 전 저만 할 수 있는 것에 對한 欲求가 커요. 남들과 똑같은 걸 만들고 싶진 않아요. 남들이 안 했는데 眞짜 웃긴 걸 만들고 싶어요. ‘眞짜 미쳤다’, ‘眞짜 또라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분들 正말 많잖아요. 요즘 初等學生들의 將來希望 1順位가 유튜버日 程度예요. 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助言이 있다면요.‘한 房에 훅 갈 수 있다’, 이 말을 꼭 記憶해야 돼요. 새로운 캐릭터와 콘셉트의 유튜버들은 繼續해서 생겨나고, 유튜브가 밀어주는 特定 알고리즘에서 벗어나면 뜻하지 않게 人氣가 식을 수도 있어요. 結局 個人의 브랜드를 탄탄히 다져놔야 합니다. 그래야 유튜브의 트렌드에서 좀 뒤처지게 되더라도 個人 브랜드를 支持하는 팬들의 힘으로 繼續 콘텐츠를 만들 수 있어요.―크리에이터는 人氣와 收益이 不安定한 職業이잖아요. 2015年으로 돌아가더라도 크리에이터라는 職業을 擇하실 건가요? 收益과 人氣는 必然的으로 騰落이 있어요. 月收入 隔差가 크게는 10倍까지 나요. 收益이 적은 달에는 意氣銷沈해지고, 많이 번 달에는 ‘장난 아닌데?’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變하지 않는 事實은 제가 이 일에 갖는 愛情이에요. 사람들마다 가장 잘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高等學校 때부터 느꼈는데 저는 數學이나 科學을 잘하는 學生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말하는 것이나, 親舊들 웃기는 건 全校 1等이었어요. 저는 이 일을 選擇한 걸 後悔한 적이 單 한 番도 없어요. 전 제가 웃길 때보다 남들이 절 보고 웃을 때 훨씬 더 幸福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繼續 그 幸福을 追求해 나갈 겁니다. 복수자들映畫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年間 군饅頭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復讐?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自身을 죽이려 한 보스를 處斷하는 複數? 그것도 아닙니다. ‘復讐者들’은 復讐(複數)의 職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始作하고 싶지만 方法을 모르겠다고요? 本캐와 副캐, 兩쪽을 오가는 復讐者들이 直接 挑戰과 竝行의 노하우를 傳해드립니다.김재희 記者 jetti@donga.com이지훈 記者 easyhoon@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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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演技人生 50年, 두리랜드 33年 俳優 임채무 “餘生은 醫療奉仕 다니며 살고 싶다”[복수자들]

    日日連續劇, 週末드라마 안房劇場의 ‘탤런트’로 50年, 運營할수록 損害가 더 큰 놀이公園 ‘社長님’으로 33年을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나이는 七旬을 넘었습니다. 人生 後半部 餘生은 40年 前 품었던 宿願을 이루며 살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올해 데뷔 50周年을 맞은 俳優 임채무(75)의 이야기입니다.40년 前, 全國을 돌아다니며 드라마 撮影을 다녔던 10年 차 俳優 임채무에겐 所願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모여 사는 山間僻地에 醫療奉仕를 다니는 것. 40年 前이나 只今이나 都市로부터 한참 떨어진 시골의 醫療 인프라는 劣惡합니다. 限平生 농사짓느라 몸을 쟁기처럼 써왔던 어르신들 大部分 무릎과 허리에 골病이 들었지만 제때 治療를 받기란 어려웠습니다. 시골엔 큰 病院이 없었던 탓에, 診療라도 받으려면 大都市로 나와야 하지만 交通便도 如意치 않은 곳이 大部分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歲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을 지켜볼 時間도 없이 하루하루 살다가 이 나이가 됐다”는 임채무. 七旬이 넘은 나이, 子息이 子息을 낳아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된 後에야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4月부터 自身의 이름을 내건 藝能 ENA ‘임채무의 浪漫닥터’를 進行하게 된 겁니다. ‘임채무의 浪漫닥터’는 移動治療所 車를 타고 다니며 全國 各地를 찾아 醫療奉仕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早晩間 시즌2 撮影을 앞두고 있습니다. 임채무는 이番 시즌에서도 出演料를 받지 않습니다. “늘그막에 奉仕한답시고 始作했지만 結局 내가 얻는 게 더 많더라”는 그를 最近 景氣 楊州의 두리랜드에서 <復讐者들>李 만났습니다.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2 撮影을 앞두고 계십니다. “(시즌1 撮影 때) 7個月 동안 20個 넘는 邑面리 시골을 다녔어요. 가서 보니까 어르신의 99.9%가 무릎, 허리는 基本으로 故障이 나 있는데 病院을 안 가시는 거예요. 왜 안 가시느냐 물으면, 마을 交通便이 아무리 좋아도 아침에 한 番, 저녁에 한 番 아니곤 버스가 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큰 理由는 시골엔 病院이 없잖아요. 病院 가려면 大都市로 나와야 하고 겨우 豫約을 하면 患者가 워낙 몰리니 診療도 미뤄지고…. 그러다 보면 버스가 끊겨서 집에 오기 힘들고. ‘에라 모르겠다, 귀찮다’ 하면서 病院을 안 가는 거죠.”―의료봉사 하겠다 마음 먹으신 게 40年 前이시라고요. “全國 各地를 돌아다니며 드라마 撮影을 하고 夜間 業所나 地域 祝祭에서 行事 뛰던 時節이에요. (시골의 醫療施設이) 그때는 只今보다 훨씬 劣惡했어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나이 들면 시골로 醫療奉仕를 다니며 살아야겠다고요. 어르신들 治療도 해드리고 맛있는 飮食도 먹여드리고 싶다. 診療 椅子, 醫療器具, 寢臺, 冷藏庫 같은 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버스가 한 臺 있으면 참 좋겠다. 構想만 한 게 아니라 實際로 해보려고도 했어요. 故 김우중 대우그룹 會長님이 도와주려고 하셨어요.”―김우중 會長과는 어떤 因緣이었나요. “當時 演藝人들로 이뤄진 ‘無窮花 蹴球團’이 있었어요. 그때 金宇中 會長이 우리 蹴球團을 支援해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요. ‘大韓民國 公務員들, 特히 警察, 市廳, 區廳 公務員들이 運動할 時間이 없어서 運動을 못 한다고 하더라. 억지로라도 運動을 해야 몸도 精神도 健康해진다. 有名한 演藝人들이 親善 蹴球大會 하자고 하면 運動하러 나올 것이니 公務員들 불러내서 같이 運動하라.’ 나라와 國民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신 분이었어요. 참 尊敬하고 좋아했죠. 私席에서 會長님을 뵐 機會가 있었는데 그때 醫療奉仕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어요. 當時만 해도 (제가) 人氣가 좋았을 때니 팬클럽 會員들이랑 奉仕活動 다니고 싶은데 醫療 車輛 한 臺灣 寄附해줄 수 있냐고 여쭤봤죠.”―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나 欣快히 알겠다고 하시더니 바로 祕書室長을 불러서 이것저것 指示를 하시더라고요. 計劃도 다 세우고 이런저런 計算도 끝내고 기다리는데, 나중에 祕書室에서 連絡에 왔어요. 當時 金額으로 醫療 車輛 製作에만 2億 원이 넘게 들어가는 거예요. 法人 會社에서 個人에게 無償으로 줄 수 있는 方法이 없었어요. 法的으로 問題가 될 수 있던 거였죠. 아쉽지만 抛棄할 수밖에 없었어요.”배우 生活을 하며, 두리랜드를 運營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꺼내게 된 건 比較的 最近이었습니다. ‘9988 整形外科醫院’ 이태훈 院長과 獨特한 因緣이 始作되면서부터입니다. 整形外科 專門醫인 이태훈 院長은 ‘임채무의 浪漫닥터’ 시즌1 때부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태훈 院長과는 어떤 因緣이었나요? “이태훈 院長이 運營하는 ‘9988 整形外科醫院’을 보고 누가 나한테 提報를 했어요. 제 노래 ‘9988 내 人生’ 題目을 베껴서 病院 이름을 지은 게 아니냐는 거예요. ‘9988 내 人生’은 2018年에 제가 直接 만든 曲이에요. ‘99歲까지 팔팔(88)하게 살아서 子息 속 썩이지 말자’는 뜻을 담은 曲인데, 이태훈 院長이 許諾도 없이 ‘9988’을 갖다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매니저한테 ‘잘됐다. 著作權 엄청 뜯어내자’ 해놓고 잊어버렸어요.(웃음) 그러고 한참 있는데, 몸이 너무 아픈 거예요. 治療를 받아야 해서 어느 病院을 갈까 했는데, 매니저가 9988 病院에 가자고 했죠. 當時 狀況이 危急해서 바로 手術하고 治療도 잘 받았어요. 그러고 이태훈 院長이랑 食事를 했는데 슬쩍 著作權 이야기를 꺼냈죠. 이태훈 院長은 ‘9988’은 自己가 2017年부터 썼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더니 ‘先生님이랑 家族분들 平生 整形外科 診療는 제가 無料로 해드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건 됐고 나랑 醫療奉仕하러 다니자’고요.”―촬영이긴 하지만 7個月 동안 每週 奉仕를 다니셨습니다. 힘들진 않으셨나요? “나이가 나이인지라, 每週 全國 各地를 다니다 보니 疲困하고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도 率直히 있어요. 근데 이걸 하면서 새롭게 느낀 건, 남의 人生을 들여다본다는 게 참 즐거운 日이더라고요. 80歲, 90歲, 100歲까지 健康하게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아요. 술 담배 적게 하고 飮食 잘 챙겨 먹는 것보다 肯定的이고 樂天的으로 사는 게 가장 重要하더라고요. 慶北 義城에 사는 87歲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분은 아침 10時에 막걸리 半甁, 午後 4時에 막걸리 半甁을 每日같이 마셔요. 막걸리가 거의 株式이야. 근데도 나보다 기운이 훨씬 더 좋아요. 樂天的인 마음으로 즐겁게 사니까.”시골 老人들의 樂天的인 삶을 憧憬한다고 했지만, 事實 임채무는 누구보다 ‘樂天的인 夢想家’에 가깝습니다. 30年 넘게 京畿 楊州에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公園 ‘두리랜드’를 運營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企業이 아닌 個人이 놀이公園을 運營하는 건 임채무가 唯一합니다. ‘두리랜드’를 만들어야겠다 決心한 건 1973年 京畿 楊州의 史劇 撮影 現場. 端役을 轉轉하던 無名 俳優 임채무는 自身의 撮影 順序를 기다리다 隣近 溪谷에서 놀던 家族을 發見합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엔 깨진 술甁이 흩어져 있고 高聲放歌를 하는 어른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문득 이런 다짐을 하게 합니다. “아이들이 安全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자!” 10餘 年이 지난 1989年 그때 그곳에 짓기 始作한 ‘두리랜드’는 1990年 5月 門을 열었습니다.―30년 가까이 두리랜드엔 담도 없고 入場料도 없었다고요.“원래부터 入場料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0원씩 받았어요. 門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을 데려온 父母가 門 앞에 서있는 거예요. 아이는 들어가겠다고 울고, 帽子를 푹 눌러쓴 아버지의 주머니에선 銅錢 소리만 들렸죠. 入場料 때문에 難處한 것 같았어요. 다음 날 職員 불러서 入場料 없애자고 했죠.”1990년대는 그가 CF, 드라마, 夜間 業所에 出演해서 돈을 벌었을 때입니다. 放送에 나가 번 돈이 놀이동산 賣出의 두 倍가 넘었습니다. 私費를 털고 私財를 팔아 職員들 月給을 줬습니다. 하지만 IMF를 겪으면서 事情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이동산을 찾아오지 않았고, 그를 불러주는 放送도 많이 줄었습니다. 經營 危機로 두리랜드는 2000年代 初 閉場했다 2009年 재개장했습니다. 以後에도 ‘入場料 0원’을 固守하던 두리랜드는 2020年부터 入場料를 받기 始作했습니다. ―入場料를 받으시면서 辱을 많이 먹었다고요. “여태 안 받다가 다 늙어 돈毒이 올랐냐고 辱하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돈 받지 말고 다음 달에 門 닫을까요?’라고요. 제가 예전에는 夜間 業所도 다니고 CF, 드라마 撮影도 많았으니까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는데 只今은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돈을 못 벌잖아요. 근데 電氣稅나 稅金, 人件費에 每달 利子만 7千萬 원이 넘어요. 두리랜드가 亡하면 안 되잖아요. 亡하는 거 막기 위해 入場料를 받게 됐어요.”―두리랜드 運營하느라 생긴 빚이 160億 원이라고 들었어요. “IMF 外換危機 때는 正말 어려웠는데 그래도 入場料 안 받고 運營하겠다는 原則을 固守했어요. 근데 90年代만 해도 人氣 있었던 回轉木馬, 바이킹, 범퍼카 같은 아날로그 놀이器具는 아이들이 더 以上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요즘엔 微細 먼지와 黃沙 때문에 엄마들이 바깥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걸 꺼리잖아요. 그래서 롯데월드처럼 室內 施設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2017年 末에 두리랜드를 닫고 2018年부터 新築 工事를 始作했죠.”VR 같은 새로운 놀이器具를 들여오고 室內 施設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지만, 演藝人 임채무의 輸入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結局 汝矣島에 있는 아파트 두 채를 팔았고 子女들 마이너스 通帳까지 끌어 썼습니다. 迂餘曲折 끝에 두리랜드는 再開場했지만 정작 그와 夫人이 잘 곳도 如意치 않았습니다. 두리랜드 안 化粧室을 改造해 一 年 넘게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第一 未安하고 고마울 따름”이라며 “두리랜드는 돈 벌려고 運營하는 게 아니다. 빌린 돈 갚으려고 이제 와 入場料를 받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벌었던 돈도 다 쏟아부으시고 빚도 많으신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理由가 뭔가요? “이제 이게 내 삶이에요. 便하게 살 수 있는데 大體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答할 수밖에 없어요.(웃음) 어른들을 만나면 이 사람은 나한테 뭘 願할까, 뭘 바랄까를 苦悶하게 돼요. 근데 아이들은 달라요. 아무 計算 없이 웃고 울고 나한테 안겨서 人事도 해주고요. 그런 아이들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죠. 가끔 놀이公園에서 만나면 父母님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人事를 시켜요. ‘여기 만들어주신 분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正말 感謝하고 또 보람을 느낍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재희記者 jetti@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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