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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普通科學者] 韓國社會가 李鎬汪 硏究그룹을 記憶해야 하는 理由 :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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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普通科學者] 韓國社會가 李鎬汪 硏究그룹을 記憶해야 하는 理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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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普通科學者] 韓國社會가 李鎬汪 硏究그룹을 記憶해야 하는 理由

대한민국학술원 제공
韓國 代表 依科學者 李鎬汪 高麗大 名譽敎授. 大韓民國學術院 提供

“內 人生에서 選擇權이 주어졌던 瞬間은 거의 없었습니다. 난 一定(日政) 때 學窓時節을 보냈는데, 그때는 植民地에 科學技術을 가르치지 않아서 工夫를 繼續하려면 法學科 醫學 밖에 없었지요. 醫大에서 內科와 微生物學을 選擇한 게 唯一한 내 意志였겠네요. 韓國戰爭 中 말라리아, 콜레라, 梅毒, 淋疾 等 수많은 傳染病을 보며 已往 醫師가 된다면 많은 患者들을 돌볼 수 있는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卒業 後 나라의 德을 입게 됐고, 以後에는 그 恩惠를 갚는 길을 갔습니다. 只今 돌아보니 하늘이 定해준대로 人生을 살았어요.” -高(故) 李鎬汪 高麗大 名譽敎授, 한국과학기술한림원 '翰林院이 만난 사람' 인터뷰 中에서 ?

 

이달 初 作故한 李鎬汪 高麗大 名譽敎授를 普通科學者로 부르긴 어렵다. 그는 韓國 科學者로 드물게 恒常 노벨賞 受賞者로 擧論되던 人物이고, 流行性出血熱을 일으키는 한타바이러스를 發見한 1976年 以後, 韓國의 科學者社會에서 恒常 權威있는 元老科學者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韓國을 硏究의 現場으로 삼았고, 그의 社會的 地位와 名聲 또한 韓國社會라는 脈絡 속에서 評價받을 수 밖에 없다. 2020年 韓國社會는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COVID-19·코로나19) 바이러스의 猖獗로 팬데믹(전 世界的 大流行)의 恐怖를 經驗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始作된지 벌써 2年 7個月, 韓國은 이제서야 國産 백신의 生産을 앞두고 있다 ? .

 

하지만 韓國이 처음부터 백신 生産에서 世界的으로 뒤쳐져 있던 것은 아니다. 1991年 綠十字는 이호왕 敎授와 함께 流行性出血熱 豫防 백신 ‘한타 박스’를 내놨고 이는 韓國에서 바이러스 發見者가 診斷法과 豫防 백신까지 開發한 最初 事例로 記錄되어 있다 ? . 韓國 백신開發의 歷史는 解放 以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4年 傳染病豫防法이 制定되고, 1970年代부터는 民間 製藥社가 백신을 開發하고 供給하기 始作했지만, 現在의 國家豫防接種 시스템이 마련된건 2005年이었다. 問題는 以後 韓國의 保健專門家들이 持續的으로 백신 自給率의 問題를 提起했음에도 不拘하고, 韓國은 2009年 新種 플루와 2013年 메르스(MERS·中東呼吸器症候群) 事態에서 백신 早期 確保는 勿論 백신 開發에서 主權確保에 失敗해왔다는 事實이다 ?

 

韓國 政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傳染病 狀況에서 '이番 政權에서만 터지지 않으면 된다'는 安逸한 對應을 해온 셈이다. 池錫永이 1880年 牛痘國을 세우고, 亡해가는 나라 朝鮮에서 그나마 天然痘가 豫防될 수 있는 基礎를 만든 韓國은, 이제 백신主權을 위해 國家가 엄청난 投資를 해도 先進國을 쫓아가기조차 버거운, 蓄積의 時間을 놓쳐버린 백신 後進國이 되어버렸다 ? . 2022年 7月 6日, 韓國 바이러스學의 礎石을 놓은 科學者 李 敎授가 別世했지만, 政府는 科學技術情報通信部 次官을 殯所에 보냈을 뿐이다. 言論은 그의 죽음을 比重있게 다루지 않았다. 2021年 5月, 中國 交雜벼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안룽핑이 死亡하자 中國 社會 全體가 哀悼의 물결에 휩쌓였다. 科學技術有功者에 對한 兩國의 差異가 兩國 科學技術競爭力에 어떤 差異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는 歷史가 判斷해줄 것이다.

 

周邊에서 中心으로, 國際的 科學者의 誕生

 

‘한탄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백신 ‘한타박스’를 개발한 이호왕 박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恨歎 바이러스’를 發見하고 백신 ‘한타박스’를 開發한 李鎬汪 博士. 한국과학기술한림원 提供

李 敎授는 1928年 咸鏡南道 新興郡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越南했다. 그는 서울대 醫大를 다니면서 微生物學을 가르치던 기용숙 敎授의 影響으로 차츰 바이러스學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基 敎授는 1905年 黃海道 松禾郡 천동면에서 出生해 1929年 경성의학전문학교를 卒業하고 當時 唯一한 朝鮮人 微生物學 敎授 유일준으로부터 師事하고 1942年에 滿洲醫科大學서 醫學博士學位를 받았다. 그後 祖國이 光復이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 醫大 微生物學敎室 主任敎授가 되었다 ? . 特히 그는 解放 以後 콜레라가 猖獗할 때마다 防疫業務에 나섰고, 韓國 微生物學 分野의 發展에 크게 貢獻한 人物이다 ?

 

李 敎授는 기 敎授를 ‘기인’이라고 불렀다. 基 敎授는 콜레라가 터지면 裝備를 챙겨 防疫現場에 出動하는 것을 樂으로 여길 程度로 獨特한 人物이었고, 哲學을 專攻한 서울대 敎務課長을 찾아가 大學院長이면 바이러스가 무엇인지 程度는 알아야 한다며 슬라이드로 個人講義를 했던 科學者였다 ?.  이 敎授는 1974年 基 敎授가 別世하자, 서울醫大 學長 資格으로 直接 調査를 作成했고 이렇게 썼다.

 

“이 世上에는 學問하는 사람도 많고 硏究하는 사람도 많으며 敎育者도 많고 大學敎授도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學問과 運命을 같이하고 最後의 一角까지 敎育에 몸을 바친 분은 많지 않습니다. 가신 어른에게 失禮되는 表現일지 모르겠습니다마는 ‘信念(信念)과 自身(自信)의 사나이’, ‘意志와 固執의 사나이’, 그리고 ‘學問과 哲學의 사나이’라는 別稱을 가지셨던 先生님이야말로 우리들의 龜鑑이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存在였음을 다시 한 番 느끼게 됩니다.” ?

 

李 敎授는 1955년 美國의  前後 서울大 再建 프로젝트이던 '미네소타 計劃'에 따라 美國 미네소타對로 留學을 떠났다. 그는 미네소타對에서 日本 腦炎 硏究로 博士學位를 받고 日本腦炎 硏究로 世界的인 學者로 成長해 나갔다. 韓國戰爭 直後 韓國에선 한해에 約 3000~4000名이 日本 腦炎으로 숨졌지면서 腦炎은 美국립보건원(NIH)에서도 關心을 갖는 傳染病이다. 그 德分에 이 敎授는 韓國인 最初로 1964年 美國 NIH로부터 5年間 6萬달러의 硏究費를 받아 硏究를 遂行하게 된다.

 

1966年 日本이 腦炎豫防백신을 開發하자 일본 腦炎 硏究의 價値가 사라지면서 이 敎授는 美國人 親舊로부터 流行性出血熱 硏究로의 方向 轉換을 勸誘받았다. 그리고 美 陸軍 硏究開發部의 硏究費로 硏究에 着手하게 된다. 流行性出血熱은 1940年代 滿洲 駐屯 日本軍에서 約 1萬 2000名의 患者가 發生했고 이후 韓國戰爭 中에 韓國軍과 美軍에서 數千名의 患者가 發生했던 疾病이지만, 當時 ‘韓國型 出血熱’이라는 別名까지 붙은 이 怪疾의 原因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1970年부터 美 陸軍의 硏究費로 始作된 이 敎授 硏究는 1975年까지 遲遲不進하다가, 그의 美國인 同僚이자 NIH에서 勤務하던 벨리슨 博士의 便紙에 쓰인 들쥐의 肺에 寄生하는 곰팡이 毒素라는 힌트를 통해, 들쥐의 肺를 調査하게 됐고 바로 여기서 ‘恨歎바이러스’를 發見하게 된다.

 

恨歎바이러스의 發見 以後 李鎬汪의 人生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노벨賞 候補로 擧論되는 것은 勿論 國內에서 受賞할 수 있는 賞이란 賞은 모두 휩쓸었고, 大寒바이러스學會 初代會長, 대한미생물학회 會長, 大韓백신學會 初代會長 等을 거쳐 隱退 以後에도 恨歎生命科學財團을 만들어 後進養成에 힘써왔다 ?.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

 

李 敎授가 硏究를 遂行하기 始作하던 1970년대는 한국의 硏究環境은 劣惡하기 그지 없었다. 國內 大學 硏究所의 劣惡한 狀況 속에서 이 敎授가 이를 克服하기 위해 選擇한 方法은 硏究네트워크의 構築이었다 ? . 2005年 科學史學者 김근배 전북대 敎授는 ‘硏究네트워크’라는 槪念으로 이호왕 敎授의 硏究를 再照明해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라는 題目의 論文을 發表했다. 이교수에게는 두 名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 中 한 名이 위에서 言及된 基 敎授였고, 다른 한 名은 미네소타대 博士學位 指導敎授 윌리엄 쉬러 敎授다. 金 敎授에 따르면 이 敎授의 두 스승은 모두 學問的으로 까다로운 性品을 지닌 學者들이었다.

 

한국의 기용숙과 미국의 윌리암 셔러 교수는 이호왕 네트워크의 출발점이었다. 김우재 제공
韓國의 기용숙과 美國의 윌리암 쉬러 교수는 李鎬汪 네트워크의 出發點이었다. AMEDD 역사 遺産 센터 提供

쉬러 敎授는 弟子인 李 敎授에게 人間的인 따뜻함을 全혀 보여주지 않았고, 徹底히 事務的으로 對했다. 이 德分에 李鎬汪은 韓國人 特有의 人間的 背景에 呼訴하지 못하고, 오로지 實力으로 學位에 挑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쉬러 敎授는 韓國으로 돌아간 弟子와 學問的으로는 매우 緊密한 네트워크를 構築했다. 이 敎授도 한국의 스승인 基 敎授와 美國의 쉬러 敎授를 통해 硏究네트워크를 擴張해 나갔다. 流行性出血熱 硏究를 提案한 美 陸軍의 에드워드 부셔 博士 또한 쉬러의 紹介로 만났던 學者였다. 以後 美陸軍의 硏究者들은 李鎬汪의 硏究에서 큰 役割을 擔當하게 된다.

 

李 敎授는 쉬러 敎授에게 크게 依支했다. 韓國에 基盤을 갖지 못한 그에게, 美國人 指導敎授는 가장 큰 背景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李 敎授는 韓國으로 돌아와서도 쉬러 敎授에게 持續的으로 便紙를 보냈고, 쉬러를 통해 硏究네트워크를 擴張했다. 李 敎授가 恨歎바이러스를 發見하고 이를 가장 먼저 알린 것도 쉬러 敎授였다. 當時 韓國은 勿論 美國의 硏究者들 中 相當數는 이 敎授의 發見을 不信했는데, 왜냐하면 美陸軍이 數十年間 硏究하고도 밝히지 못한 流行性出血熱의 原因菌을 韓國의 無名 科學者가 發見했다는 點 때문이었다. 이를 他界하기 위한 方策도 쉬러 敎授로부터 나왔다. 쉬러 敎授는 弟子에게 病原體 檢證을 美國 硏究者를 통해 孟劍으로 證明하라고 提案했던 것이다. 쉬러 敎授의 提案으로 孟劍이 成功하자, 以後 이 敎授의 硏究結果는 全世界에서 널리 인정받게 된다.

 

李 敎授가 미국 硏究者들이 찾지 못했던 病原體를 찾아내고 이 硏究結果가 國際的 基準으로 檢證되자, 이 敎授의 硏究그룹은 곧바로 世界的인 硏究그룹과의 競爭에 露出되었다. 當時 流行性出血熱 硏究는 이 敎授 그룹 外에도 美 陸軍 硏究그룹과 NIH硏究그룹의 세 그룹에 依해 主導되고 있었다. 特히 노벨賞 受賞者인 대니얼 칼턴 가이듀섹이 主導하던 NIH硏究그룹은 巨額을 提示하며 李鎬汪을 誘致하려고까지 했다. 李 敎授가 그 提案을 拒絶하자, 가이듀섹은 李 敎授 硏究그룹의 이평우 硏究員을 엄청난 金額으로 誘致해 데려갔다. 以後 이 敎授 硏究그룹은 “美國의 硏究그룹들과 ‘드러난 協力’을 하면서 한便으로는 ‘감춰진 競爭’을” 벌이는 複雜한 狀況을 맞이하게 된다.

 

김우재 提供

美 陸軍 硏究그룹과는 수월한 協力關係가 維持됐지만  NIH연구그룹은 流行性出血熱 硏究의 成果를 獨차지하려는 野心을 露骨的으로 드러냈다. 세 硏究그룹의 競爭이 過度해지면서, 李鎬汪硏究그룹은 世界的인 醫學學術誌人 랜싯에 잘못된 電子顯微鏡 寫眞을 提出하는 失手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韓國의 科學技術 競爭力이 걸음마를 떼던 1980年代 이 敎授는 이미 世界的 水準의 美國 硏究그룹과 競爭하며 그들을 壓倒하지는 못했지만 先頭그룹으로서 뚜렷한 成果를 남겼다. 世界最初 流行性出血熱 豫防백신의 開發은 바로 그런 成果의 集大成이라고 할 수 있다.

 

金 敎授는 當時 韓國의 劣惡한 環境 속에 李鎬汪 硏究그룹이 成功할 수 있었던 要因으로 李 敎授가 幅넓게 構築했던 硏究네트워크를 꼽는다. 李 敎授는 不利한 硏究與件과 硏究能力을 다양한 硏究그룹과 硏究者들과의 열린 네트워크를 통해 克服했다. 勿論 美國이라는 世界 最强國의 硏究者들과의 네트워크 속에서 競爭과 協力은 銅錢의 兩面처럼 硏究現場의 現實이었지만, 世界最高 水準의 硏究開發費를 投資하는 國家가 되었는데도 世界的 硏究者들과의 열린 硏究네트워크 構築에서 크게 뒤떨어지는 現在 韓國의 科學者 社會를 돌아보면, 李鎬汪이 얼마나 先驅者的인 面貌를 갖춘 科學者였는지 다시 한番 깨닫게 된다. 

 

李 敎授는 韓國에서 보기 드문 科學者다. 이는 그가 世界的 水準의 硏究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國際學術誌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論文을 出版하는 韓國人 科學者는 이제 셀 수 없을 程度로 많다. 李 敎授는 世界的 水準의 硏究를 遂行한 것 뿐 아니라, 한 分野를 先導하는 硏究를 했던 얼마 안되는 韓國 科學者로 記憶되어야 한다. 이제 어느 나라보다 훨씬 豐足한 硏究環境을 갖게된 韓國에서, 이 敎授처럼 한 分野를 開拓하고 先導하는 科學者가 더以上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直接 칸 映畫祭 受賞 俳優를 廳舍로 불러 晩餐을 提供한 大統領은 이 敎授의 죽음에 對해 單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中國의 農學者 위안룽핑이 死亡했을 때, 시진핑 主席은 直接 湖南省 書記를 보내 家族을 慰勞하고, 그를 追慕했다. 또 다른 李鎬汪이 韓國에서 登場하는걸 期待하는건, 麩質 없는 일인지 모른다. 多幸히 韓國의 科學史學者들은 李鎬汪을 깊이 硏究해놓았다. 신미영 博士의 아래 論文들은 이호왕을 깊게 理解하기 위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항상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고 말했다. 이호왕 교수의 명복을 빈다. 출처 과학기술한림원/김우재 제공
 그는 항상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고 말했다. 이호왕 교수의 명복을 빈다. 出處 科學技術翰林院/김우재 提供
 

※參考資料 

- 살아있는 과학기술계 위인 ‘이호왕 박사’, "하늘이 정해준 길을 갔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웹진 ‘In+Sight’, 2015.06  https://kast.tistory.com/127

-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437

-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55234

-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21881

-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1350

- 李鎬汪의 자서전은 이 신문에 연재되었고, 모두 볼 수 있다.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page=1&table=150503232134&&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

- 박성래,and Park Seong-Rae. "바이러스와 반세기를 함께한 이호왕." 과학과 기술 37.5 (2004): 98-101.

-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260

- 이규식. (2007). 기용숙의 연구와 생애: 콜레라 연구를 중심으로. 의사학, 16(1), 71-81.

-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50503232134&st=view&page=4&id=137&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showmemo=on

-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50503232134&st=view&page=4&id=137&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showmemo=on

- 박성래, "바이러스와 반세기를 함께한 이호왕." 과학과 기술 37.5 (2004): 98-101.

- 김근배. (2005). 네트워크에 걸려든 바이러스: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27(2), 1-25.

-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260

 

※筆者紹介 

김우재.  어린 時節부터 꿀벌, 개미 等에 關心이 많았다. 生物學科에 進學했지만 간절히 願하던 動物行動學者의 길을 自意 半 他意 半으로 抛棄하고 바이러스학을 專攻해 博士學位를 받았다. 以後 博士後硏究員으로 美國에서 醋파리의 行動遺傳學을 硏究했다. 醋파리 수컷의 交尾時間이 環境에 따라 어떻게 變하는지를 神經回路의 觀點에서 硏究하고 있다. 모두가 無視하는 이 基礎硏究가 人間의 時間인지를 理解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主張하고 다닌다. 科學者가 되는 새로운 方式의 플랫폼, 타운랩을 準備 中이다. 最近 醋파리 遺傳學者가 바라보는 社會에 對한 冊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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