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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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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性, 또는 갇힌 길 위의 人生
-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과 江原道의 힘

朴 名 陳(40)

1. 나는 이미지와 섹스한다. 故로 存在한다.

映畫는 그 誕生 때부터 文學과 演劇이라는 두 젖줄을 붙들고 成長했지만, 입가에 母乳(母乳) 痕跡이 마르기도 前에 두 個의 起源(起源)을 배반하기 始作했다. 이는 敍事(敍事)에 對한 이미지의 叛亂으로도 볼 수 있는 바, 特히 巨大談論의 解體 以後 理性보다는 感性의 물질性으로 急回轉하는 樣相과 함께 그 速度를 높이고 있다. 이제 `헐리우드 키드'들은 `나는 思惟한다. 故로 存在한다'에서 `나는 이미지와 섹스한다. 故로 存在한다'로 말套를 바꾸었다. 이 섹스의 恍惚境은 새털보다도 가볍다.

模樣이야 어떻든 이제 우리 나라도 大衆的인 `호모 비디오쿠스'의 時代로 접어들었다는 點을 疑心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들은 하나의 確固한 目的地를 向해 끊임없이 前進해야 하는 巨大 敍事的 삶으로부터 뛰쳐나와 여러 느낌의 다발로 엉켜 있는 이미지의 밭으로 달려간다. 이제 嚴肅하고 그럴 듯한 作爲의 몸짓들은 더 以上 삶의 眞情性을 確保하지 못한 듯이 고개를 숙인다. 知事(志士)의 카랑카랑했던 목소리는 日常의 소란스러운 雜音 속에 묻혀 버리고, 더 以上 달콤한 未來는 永遠히 다가오지 못할 時間처럼 낯설다. 苟且한 삶의 껍질만이 남루한 빨래처럼 햇볕 아래 널려져 있을 뿐이다. 未來의 進步를 膽智하고 있던 中心的 主體는 日常의 늪 위를 漂流하고 있는 가랑잎으로 變했다. 메시아도 맑스도 失語症이 걸린 지 이미 오래.

젊은 監督 홍상수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그는 고여 있는 물웅덩이의 意味에 對해서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水面에 비친 風景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하려 할뿐이다. 이러한 홍상수의 態度는 우리의 삶이 그런 대로 멋질 것이라는 마지막 期待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激情的이고 一絲不亂하던 理念의 時代가 가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目的地를 向해 時間이 흘러가고 모든 삶의 指向點이 認識論的 消失點을 中心으로 모인다고 믿었던 時代가 저물면 어떤 모습의 그림자들이 기지개를 켜는가. 그것은 `當爲(當爲)'의 世界가 아니고 `存在'의 世界이다.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信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이다. 따라서 `날 것'으로서의 미장센은 스크린과 觀客이 한 몸 되는 視線의 通路를 자주 가로막는다.

傳統的인 映畫 文法에 길들여진 觀客은 스크린의 映像에서, 只今은 存在하지 않지만 過去에는 있었던, 또는 未來에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場面을 期待하고 있으며, 이러한 場面에 自身을 同一視함으로써 假想 現實을 建設한다. 그러나 홍상수는 이러한 映畫的 慣習을 끈질기게 解體한다. 그의 映畫는 가볍고 지루한 現代人의 日常, 優雅하거나 高尙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靈魂, 탐욕스럽게 過去와 未來를 먹어 치우는 貪食主義者를 殘忍할 程度로 발가벗긴다. 이때 홍상수의 눈은 對象을 占有하는 近代的 視線이라기보다는 오히려 對象을 더듬는 視線에 가깝다. 그의 눈은 角質化된 日常의 삶을 천천히 문지른다.

구효서의 小說 낯선 여름 을 텍스트로 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로 데뷔한 홍상수는 이어서 江原道의 힘 을 發表함으로써 우리 나라 映畫界에 적지 않은 衝擊을 안겨 주었다. 이들 映畫는 旣存의 韓國 劇映畫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映畫的 慣習을 果敢하게 脫皮함으로써 觀客으로 하여금 當惑感과 더불어 新鮮한 刺戟을 맛보게 했다. 多少 거칠게 表現하자면, 홍상수 映畫는 古典 헐리우드 映畫 文法에 길들여진 韓國 觀客에게 아주 낯설고 生硬한 體驗을 强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효섭, 동우, 민재, 보경을 中心으로 4 個의 에피소드를 얼기설기 交叉시킴으로써 구질구질한 日常事를 그려내고 있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서 登場人物들은 다른 映畫 속 主人公들처럼 `그럴 듯하게' 數式되지 않는다. 이것이 觀客에게 주는 效果는 `낯설음'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서 이 낯설음은 지루한 呼吸의 敍事(敍事)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敍事 속에서 日常은 끝없이 미끄러져 遲延되고 意味 없이 反復된다. 江原道의 힘 에서도 主人公 상권과 止宿은 逸脫의 空間 `江原道'에서 日常의 켜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서울의 한복판으로 돌아온다. 아니, 이 映畫에서 `江原道'와 `서울'은 異音同義語로서, 日常이라는 氣의(記意)를 共有하고 있는 두 個의 記標(記標)일 뿐이다. 홍상수에게 있어 日常이라는 談論 밖 世上은 存在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世上이 곧 日常이다. 이때 日常이란 하나의 巨大한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낯설고 시시한 `風景'으로서의 이미지일 뿐이다.



2. 삐딱하게 世上 보기 - 作爲性과 常套性에 對한 冥想

必然을 믿었던 時代가 있었다. 그때는 時代 自體가 `敍事(敍事)'로 作用했다. 삶은 이 必然의 부름에 依해 論理 井然하게 進行되고 있었고, 이 必然이라는 底引網(底引網)에 걸리지 않는 歷史的 事件이란 存在할 수 없었다. 이러한 信念은 藝術이 現實을 率直하게 反映할 수 있다는 自信感으로 發展하게 되는데, `寫眞'과 `映畫'는 이러한 自信感에 決定的인 後援者로 登場했다. 이제 映畫의 다이제스 속을 스쳐 지나가는 미장센들은 現實 그 自體가 되었다. 아니, 오히려 스크린을 채우고 있는 映像 이미지는 現實을 操縱하고 現實 위에 君臨하기까지 한다. 假想 現實이 眞짜 現實보다도 더 事實的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時代에 日常 生活을 버텨 내야 하는 人間들의 作態란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常套的인 것인가.

孝 섭 어때?
민 再 (眞摯한 表情으로) 너무나 … 뭐라고 表現을 못하겠는데 …
孝 섭 재미있어? 지루하진 않어?
민 再 아뇨. 너무 感動的이에요. 전 그 女子가 죽는 部分이 너무 슬퍼서 …
(하며 눈에서 눈물을 닦아 낸다)
孝 섭 그건 너무 作爲的이지 않어?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美 선 너는 너 혼자 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 너, 하나도 특별한 거 없어. 다른 사람하고 다 똑 같애. 엄청 常套的이란 말야.
지 숙 너 常套的이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나 알고 하는 거니? ( 江原道의 힘 )

이 場面들은 홍상수의 映畫 文法을 理解하는데 重要한 대목이 된다. 作爲性과 常套性은 홍상수에게 있어 中心的 話頭로 作用한다. 홍상수는 민재에게 作爲的이라며 비웃고 있는 효섭의 態度마저도 作爲的이라고 본다. 그것은 誇張되고 부풀려진 自意識의 辨明에 不過하기 때문이다. 민재는 日常 속에 살며 文學의 作爲性을 즐기고 있지만, 효섭은 오히려 文學 속에 살며 生活의 作爲性을 즐기고 있다. 監督은 이처럼 作爲性에 陷沒된 人物들을 日常의 맨살 위로 기어다니게 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서 네 名의 主要 人物들은 各自의 삶의 軌跡을 따라 힘없이 걷고 있으며 우연하게 누군가를 만나고 또 그렇게 헤어진다. 그들을 묶어 놓는 因緣은 불어터진 국수 麵발처럼 弱하기만 하다.

作爲性 問題는 後續作인 江原道의 힘 에서 `常套性'으로 불거져 나온다. 女大生이 有婦男인 大學 講師와 不倫에 빠져 있는 것도 너무나 常套的인 日常에 不過하다. 이들이 自身들의 人生을 深刻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은―지숙과 미선이 常套性 問題로 싸우고 있을 때 膾집 水族館 琉璃壁에 달라붙은 七星長魚의 모습이 인서트로 끼어든다―하릴없이 收租壁에 붙어 있는 七星長魚의 無意味함으로 換置된다. 너무나 시시하고 寂寞한 收租의 물 속. 이제 歷史와 人生은 嚴肅함이나 眞摯함과 같은 船舶들을 保護해 줄 港口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映畫 속의 人物들이 끊임없이 浮遊(浮遊)하는 世上은 어떤 모습인가. 효섭을 만난 出版社 社長이 털어놓는 自身의 計劃에서 確實하게 엿볼 수 있다. 理念이 解體된 時代에 모든 眞摯함은 常套性과 俗物 趣向으로 具現된다.

社長 저도 글 하나를 構想하고 있어요. 莊子와 마르크스의 만남인데, 現代人들은 自然에서 有利돼서 살고 있죠. 더 나아가서 이데올로기의 解體로 因해서 人類의 꿈과 以上이 喪失되어 있습니다. 그런 部分들을 마르크스와 莊子를 對比시켜서 만들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具體的으로 이야기하자면 運動圈의 이야기예요. 運動圈의 民主化 運動 過程 속에서 그런 運動을 함으로 해서 周圍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든지, 周圍 사람들이 苦痛받고, 그러나 꿈과 希望을 가지고 運動을 해 왔는데 現實的으로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 이 親舊가 莊子에 入門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하여 歷史的 主體로서의 이름과 얼굴이 喪失된 時代. 그리하여 出處를 알기 힘든 肉體와 物質만이 흘러 다니는 時代. 이는 意思疏通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眞正한 만남의 不在(不在)를 象徵한다. 이들의 肉體는 近似한 靈魂을 담지하지 못함으로써 交換價値만을 지닌 商品과 別 差異를 지니지 못한다. 肉體性이라고 하는 記標는 眞摯한 記意를 만나지 못한 채 定處 없이 浮遊(浮遊)한다. 끊임없는 헤맴에서 發生하는 渴症은 이들로 하여금 至毒한 虛氣(虛飢)로 置換되기도 한다.



3. 게걸스러움의 美學, 채워지지 않는 欲望의 틈

日常에 埋沒된, 끝없이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虛氣(虛飢)를 채우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者들. 홍상수의 視線에 잡힌 이러한 現代人의 모습은 `게걸스러움' 그 自體이다. 이것은 꾸며지지 않은, 그럴 듯하지 않은 食慾(食慾)과 性慾(性慾)으로 그려진다. 映像 이미지는 비늘을 채 벗기지 않은 生鮮의 껍데기처럼 비린내가 振動하고 느끼할 程度로 번들거린다. 이 비릿한 느꺼움은 登場人物들의 欲望이 挫折할수록 심해지며, 카메라의 視線은 殘忍할 程度로 執拗하게 맨살을 핥으며 지나간다.

後輩의 出版社에서 自身의 原稿를 憂鬱하게 返納 받은 효섭은 肉개醬을 국물까지 마셔 버린 後 電話를 걸어 민재를 카페로 불러낸다. 민재로부터 돈을 받아 낸 효섭은 보경을 旅館으로 데려가 미친 듯이 그女의 肉體를 탐한다. 효섭에게 버림받은 민재는 粉食집에서 饅頭를 시켜 꾸역꾸역 입에 쑤셔 넣는다. 暫時 後 그女의 肉體를 민수가 게걸스럽게 蹂躪한다. 泌尿器科에서 治療를 받고 있는 동우는 보경을 굶주린 듯이 차지하고 氣分 좋게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운다. 江原道의 힘 에서도 人物들은 마치 먹기 위해서 旅行 온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배를 채운다. 商圈은 列車 안에서, 膾집에서, 雪嶽山 野外 술집에서, 成人 나이트 클럽에서, 그리고 止宿은 膾집에서, 布帳馬車에서 時間을 보낸다. 이때 `江原道'는 이들에게 충족시켜야 할 `欲望'으로 換喩(換喩) 되지만 이 欲望은 채워지지 않는 틈으로 남을 뿐이다.

이들에게 먹고 사랑하는 行爲는 欲望의 虛氣(虛飢)짐을 달래 주는 代理充足의 몸부림이다. 이들의 몸짓은 팔리지 않는 효섭의 3流 小說처럼, `靑旗白旗' 게임機에 錄音된 민재의 音聲처럼, 또는 商圈이 나이트 클럽에서 러시아 舞姬(舞姬)의 몸값을 알아보는 것처럼 交換價値 時代의 쓸쓸한 痕跡으로 남을 뿐이다. 이제 더 以上 肉體는 멋들어지게 脚色된 身體가 아니며 이들의 사랑도 그럴 듯하게 꾸며진, 또는 悲壯함을 지닌 敍事(敍事)가 아니다. 카메라는 서둘러서 이들의 몸짓을 따라가며 잡지 않고 무심한 듯이 곁눈질로 훔쳐본다. 事物을 쫓아서 미장센 안에 監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카메라가 쳐 놓은 그물에 멍청한 고기가 걸려 든 것처럼 無彩色으로 나타난다.

홍상수는 呼吸이 긴 롱테이크를 主로 使用함으로써 監督이 登場 人物의 主觀的인 內面 空間 속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意志를 剛하게 보여준다. 이에 따라 映畫 固有의 運動 이미지가 最大限으로 抑制된다. 이는 監督이 焦點話者의 時點에서 敍事를 집중시키지 않고 다양한 視線으로 바라보겠다는 態度로 읽힐 수 있다. 따져 보면 特定 人物 中心의 時點 쇼트는 얼마나 恣意的인가. 홍상수는 `本質'보다는 `實存의 表面'에 關心을 모음으로써 기표의 흐름 그 自體에 注目한다. 그러나 이 記票는 우물에 빠진 돼지처럼 허우적댈 뿐이고 時間이 흐를수록 깊숙이 가라앉을 뿐이다. 水面 위에는 돼지의 자맥질로 인한 微細한 물결의 痕跡만이 남고 그것도 이내 지워지고 만다. 睡眠은 무심하게도, 頑固한 表情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매끄러운 가죽만을 남긴다. 민재와 카페에서 만난 효섭이 그 카페 入口에 놓인 花盆 앞에 쭈그리고 앉아 花盆 안에 있는 벌레를 손가락으로 장난친다. 카메라는 이 모습을 효섭의 등 뒤에서 付勘 撮影으로 보여준다. 효섭의 손가락에 놀라 허둥대는 벌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 花盆과 벌레는 우물과 돼지의 환유(換喩)라 할 수 있다. 永遠히 벗어나지 못할 花盆 속을 맴돌고 있는 可憐한 存在. 이 우물과 花盆의 象徵性은 日常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홍상수 映畫의 人物들을 喚起시킨다. 이들은 우물에, 또는 花盆 안에 갇힌 돼지와 벌레에 不過한 存在이다.

따라서 이들의 生活은 너무나 시시하다. 아니 悽絶할 程度로 苟且하고 낯설다. 이들은 偶然의 橫暴 때문에 事情없이 구겨지고 망가진다. 동우가 吐瀉物을 뒤집어 쓴 것처럼 효섭은 同窓들과의 會食 場所에서 뜨거운 飮食 국물을 덮어쓴다. 소크라테스의 最後 辯論을 模倣한 듯한 효섭의 法廷 陳述은 語塞하고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효섭의 自己 辯論은 疏通이 되지 않는, 抑壓된 欲望의 自慰行爲에 지나지 않는다. `보이스 오버(voice-over)'로 處理된 이 미장센에서 효섭의 一面 그럴 듯해 보이는 最後辯論은 畵面 左側에 숨어서 權威的인 談論만을 내뱉는 判事에게 傳達되지 못하고 繼續 새어나간다. 효섭의 意味 없는 몸부림은 곧 `不在하는 現存'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남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권태로운 日常뿐이다. 동우 亦是 百貨店 常務, 常務의 女祕書, 티켓 茶房 레지, 出張地에서 만난 後輩 刃創과의 만남에서 어떠한 意味 있는 痕跡도 남기지 못한다. 이러한 樣相은 江原道의 힘 에서 商權과 나이트 클럽 女從業員과의 情事, 止宿과 警察官과의 만남에서도 그대로 持續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있어 `日常은 靈魂을 蠶食한다'.

日常의 脫出을 企圖하는 보경은 효섭이 터미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꿈이 繼續 遲滯된다. 藥局 親舊 집에 들린 보경은 2層房에서 暫時 꿈 속에 잠긴다. … 보경의 初喪집. 동우가 弔問客을 맞이하고 있고, 藥局 親舊가 옆에서 그를 보살핀다. 그女의 採根에 依해 동우는 廚房에서 라면을 먹다가 弔問하러 온 효섭과 민재를 맞이해 人事를 나눈다. 이들은 마루에 앉아 사이좋게 케이크를 나눠 먹는다. 이때 안房에 있던 보경이 마루로 나오고, 입가에 빵가루를 묻힌 동우가 보경을 힐끗 보고는 뜨악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왜 벌써 일어났어?" … 효섭과의 脫走 計劃을 留保 當한 보경이 할 수 있는 唯一한 出口는 꿈이다. 그러나 보경은 꿈속마저도 지겨운 日常事로 채워진 存在이다. 이제 그女는 日常을 벗어나는 꿈조차 제대로 꿀 수 없다. 그리하여 보경은 映畫의 마지막 場面에서 아파트 居室에 新聞紙를 길게 깔고, 新聞으로 된 길 위를 걸어 베란다로 나간다. 每日같이 비슷한 內容의 事件이 反復되고, 記事들이 서로 아무런 必然的 關係도 가지지 않은 채 新聞의 한面을 채우고 있다는 點에서, 新聞은 그 自體로 `日常'을 代表한다. 보경은 그 日常의 길을 걸으며 또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映畫가 끝난다.

事情이 이렇다면 江原道의 힘 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서보다 希望的인 結末을 誘導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상권과 止宿은 事物을 바라보는 視角에서 對照的인 모습을 보인다. 商圈은 雪嶽山의 野外 술집에서 後輩 才腕에게 沐浴에 對한 醫學的 知識을 傳播한다. 상권은 後輩에게 沐浴은 皮膚에 나쁘니까 가벼운 샤워로 代替하라고 忠告한다. 왜냐하면 `皮膚는 때가 살짝 덮여 있어야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商圈은 몸을 문지르는 者가 아니라 徹底하게 바라보는 者이다. 그는 雪嶽山에서 마주친 눈이 예쁜 女子를 發見하고는 才腕에게 `괜찮아 보이지? 印象이 깨끗한 것 같더라'라고 말할 수 있고, 雪嶽山을 觀光 案內圖를 통해 鑑賞하고, 그 山을 바라보면서 몇 名의 사람이 촘촘하게 들어설 수 있는지 計算할 수 있는 者이다. 따라서 그는 映畫가 끝나는 瞬間까지도 洗手대야에 담긴 金붕어를 團地 물끄러미 내려다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止宿은 雪嶽山 登山路에 떨어져 파닥거리고 있는 물고기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손수 길옆 땅속에 묻어 준다. 그女는 江原道 旅行을 마치고 서울의 沐浴湯에서 몸을 물 속 깊이 담근다. 그리고 旅館에서 商圈이 그女의 몸을 열려고 할 때 이렇게 외칠 수 있다. `나도 좀 살아야 되겠어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이러한 止宿의 行動 變化가 日常의 쳇바퀴에서 뛰쳐나와 脫周旋(脫走線)에 成功的으로 발을 내디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4. 遊牧民의 地形學, 또는 無意味함의 사슬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의 映畫 포스터에는 `短篇小說 같은 映畫'라고 적혀 있지만 其實 이 映畫는 演劇을 꽤나 닮았다. 4個의 獨立的인 에피소드를 3番의 癌展에 依해 分節시키고 있으며(1막 4張의 短幕劇과 같다), 로케이션과 같은 外部 空間의 移動보다는 密閉된 建物 內部 空間에서 이루어지는 事件을 展開하고 있으며, 俳優들의 長廣舌이 持續되는 것 等이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映畫가 演劇과 親密感을 주는 根據는 固定 撮影 技法과 롱테이크를 통해 遠近法과 부피感과 質感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事實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江原道의 힘 에서도 類似한 모습으로 具現된다.

演劇 觀客은 客席에 앉아 固定되어 있는 舞臺 裝置를 지켜본다. 勿論 演劇의 舞臺 裝置도 最小限의 遠近法을 실현시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映畫처럼 審도(深度)를 維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觀客이 카메라처럼 消失點을 向해 前進하거나 後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演劇에서의 運動感은 急速한 時空間 移動으로 인한 事件의 因果的 連續性을 演出해 내기 힘들다. 그렇다면 舞臺 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定處 없이 徘徊하는 俳優들의 肉體와 그들이 쉴 틈 없이 뱉어 내는 音聲들뿐이다. 헤겔이 演劇 장르를 가리켜 `運動의 總體性'이라 命했을 때 우리는 演劇이 時空間의 迅速한 移動, 事物에 對한 剩餘的인 描寫와 說明, 敍事의 一貫된 進行 等을 追求하지 않고 人間과 人間 사이의 葛藤, 또는 個別的 人間의 精神的 運動의 총체성을 追求한다고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 映畫는 `前進的 모티브(progressive motive)'를 基本的으로 使用하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事件의 展開를 持續的으로 遲延시키고 있다는 點에서 問題的이다.

홍상수의 映畫는 內部 空間을 보여주는 場面에서도 패닝숏 等을 利用한 情報 傳達에 至毒하게 인색하다. 이는 演劇에 있어서 時間과 空間, 그리고 舞臺 外部 狀況에 對한 情報가 制限되어 있는 境遇와 類似하다. 觀客은 部分的으로 傳達된 情報를 土臺로 그 餘白을 메워 나갈 수밖에 없다. 이 餘白을 채우는 것은 俳優들의 臺詞와 肉體的 顯示(顯示), 그리고 沈默을 지키면서 프레임을 지키고 있는 背景뿐이다. 따라서 場面의 運動性보다는 臺詞의 過剩, 또는 빈 空間으로 채워지기 十常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서는 密閉된 空間이 頻繁하게 展開된다. 그리고 이 空間에 對한 카메라의 視線은 部分的이고 斷絶되어 있다. 觀客은 主로 어두컴컴한 密閉 空間에서 내뱉는 登場人物들의 多少 虛無하고도 無味乾燥한 大使와 만나게 된다. 그늘지고 답답한 이 空間은 빠져 나오기 힘든 `우물' 속이다. 따라서 카메라의 視線은 主로 浮刻(俯角)의 形態를 지니게 된다. 동우의 休憩所 化粧室 場面, 민재가 電子 商街 錄音室에서 音聲을 錄音할 때라든지, 보경이 버스 안에서 졸고 있는 場面을 카메라는 마치 우물 안을 들여다보듯이 若干 높은 地點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勿論 이때의 우물 風景은 지쳐 버린 世上에 對한 提喩(提喩)이다.

홍상수의 映畫는 총체성을 追求하는 事物의 對象性(對象性)李 解體되고 分子의 無作爲的인 分散運動을 이루면서 漸漸 豫測 不可能한 無秩序를 向하여 엔트로피를 增加시킨다. 終局에는 모든 分子 運動의 크기와 方向은 完全히 흩어져서 世界는 烈士(熱死 hot dead)하게 된다. 一般的으로 映畫는 事件과 狀況을 질서화하는, 卽 美的(美的) 過程을 自然의 物理的 過程과는 反對로 情報를 固着化시키는 方法을 擇하게 된다. 이는 明瞭하고 秩序 있는 必然의 架空的 世界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홍상수의 映畫는 構成에 있어서 必然의 相對的 減少와 偶然의 相對的 過剩에 依한 無秩序를 最大로 增幅시킴으로써 엔트로피를 增加시킨다. 그런 意味에서 映畫의 人物들은 定着하지 못하고 떠도는 遊牧民(遊牧民)의 後裔들이다.

엔트로피는 騷音(騷音)의 增加로 그 程度가 深化되는데, 江原道의 힘 에서는 이 騷音의 機能이 活性化된다. 江原道 民泊 房안에서 미선이 누워 있을 때 窓을 통해 프레임 밖에 存在하는 野菜 장사 트럭의 마이크 소리가 闖入한다. 지선이 洛山寺 佛像 앞에서 절을 할 때 圓徑(遠景)으로 보이는 數學 旅行團의 가이드가 마이크로 `아! 雪嶽山이여!'라고 하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온다. 이러한 騷音은 카메라의 焦點에 잡힌 對象에 對한 觀客의 注意를 分散시키고 狀況에 對한 關心의 集中을 풀어헤친다. 시시하고 권태로운 이 騷音은 미장센에 侵入者처럼 登場하여 日常의 散漫함을 構築한다.

따라서 홍상수 映畫 美學은 질서화된 對象의 固定된 情報를 合算해 내는 것이 아니라, 無秩序를 向해 나아가는 自然의 法則에 따라 무(無)로서의 情報 그 自體를 觀客에게 보여준다. 映畫에 對한 情報가 觀客에게 親切하게 提示되지 못한다면 觀客은 無秩序한 미장센에서 自身의 旣存 情報를 積極 活用하여 理解 可能한 體系를 確立하려 한다. 우리는 이때 觀客이 映畫에 對한 自發的인 參與를 통해 텍스트의 情報 剩餘度를 높이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無秩序한 談論 體系, 非因果的인 狀況 連結 等은 鑑賞者로 하여금 個別的이고 積極的인 解讀으로 이끌게 된다. 文人들과의 會食 자리에서 食堂 앞에서 만난 從業員과의 對話에서 이러한 徵候를 엿볼 수 있다. 담배를 피고 있는 효섭에게 숯불을 들고 지나가던 從業員이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하는 境遇가 좋은 보기이다.

숯불 든 男子 : 小說家,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별을 쓰신 이문열 作家분 오셨습니까 … 그럼 或是 罪사함과 거듭남의 祕密에 對해서 아십니까 … 그런데 어디서 많이 뵈신 … 본 … 作家분 같습니다. … 前 業務 때문에 …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별'이라는 小說은 存在하지 않으며, 또 있다 하더라도 이 小說의 作家는 이문열이 아니라 조세희이다. 모두 4個의 主題를 담고 있는 숯불 든 男子의 談論은 서로 必然的인 論理性을 維持하고 있지 않으며 結束力 없이 羅列되고 있을 뿐이다. 이 4個의 서로 낯선 談論들은 쉽게 끊어지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헤어진다. 이 映畫에서 벌어지고 있는 人物들間의 關係와 事件 展開는 모두 이런 式이다. 無意味한 만남, 對話, 行爲, 狀況들이 無秩序하게 羅列되고 지루하게 흘러갈 뿐이다. 이 흐름은 至毒하게 권태로운 日常의 늪 아래로 透明한 意味를 遲延시키면서 가라앉는다. 그럼으로써 巨大談論이 支撐해 왔던 主體와 談論의 自明性에 懷疑感을 보낸다. 따라서 홍상수 映畫의 人物들과 敍事軸은 垈地(大地)에 定着하지 않고 平原을 彷徨하는 遊牧民의 발걸음을 닮았다. 그러나 不幸하게도, 이 遊牧民이 걸어 다니는 길은 굳게 막혀 있다.



5. 存在와 當爲의 辨證法을 위하여

一般 觀客에게 친숙한 劇映畫 文法은 촘촘하게 이어진 敍事 體系에 依해 클라이막스를 向한 疾走를 그치지 않는다. `始作-中間-끝'이라는 歷史 깊은 敍事 장르의 規則은 이 體制에 맞는 畫素(話素)만을 選擇하여 組立한다. 따라서 아무리 徹底한 寫實主義 映畫라 하더라도 한 篇의 劇映畫를 위한 作爲的인 選擇과 排除의 美學을 避하기는 힘들다. 映畫 또는 演劇은 `運動의 총체성'을 追求함으로써 特定한 緊張感 및 劇的 沒入을 강요받는다. 그 世界가 監督의 눈이든 登場人物의 눈이든 關係없이 觀客은 場面 속에 自身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밖에 다른 道理가 없다. 그리하여 映畫를 통하여 우리는 웃고 울고 憤怒하고 歡呼한다. 그러나 이 映畫가 특정한 意圖로 編輯되고 꾸며진 場面의 몽타즈라는 事實은 쉽게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그럴 듯하게 그려진 光景들에 對해 아주 친숙함을 가진 채 讀解를 試圖하고 있으며, `그럴 듯한 거짓말'을 現實 그 自體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것을 映畫의 慣習(convention)이라 부르자.

홍상수는 이러한 映畫의 旣存 慣習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는 映畫的 畫素(話素)들이 하나의 消失點을 向해서 組織되기를 拒否하고 時間과 空間을 遲延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遲延되는 時空間 속에, 映畫的 乏盡性을 缺如한 空白 속에 자질구레한 日常을 채워 놓는다. 各各의 人物들과 에피소드들은 代書士(大敍事)의 核心을 向해 凝集되지 않고 水面 위에 떨어지는 光線처럼 이곳저곳으로 産卵(散亂)한다. 따라서 남는 것은 잘 짜여진 하나의 敍事軸이 아니라 無常하게 反復되는 日常의 껍데기뿐이다.

홍상수의 힘겨운 싸움은, 透明한 理性(理性)에 對한 우리의 턱없는 過信(過信)과 世上을 某種의 統一性과 총체성으로 解讀(解讀)할 수 있다는 樂觀論을 懷疑함으로써 映畫와 삶의 關係를 眞摯하게 苦悶하게 해 준다는 點에서 重要하다. 그 싸움은 無責任한 按酒(安住)와 惰性化된 俗物根性에 銳利한 칼날을 들이댄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但只 映畫를 보고 있다는 儼然한 事實을 말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에게 거는 우리의 期待는 그의 映畫 美學이 存在(sein)와 當爲(sollen)의 熾烈한 辨證法的 葛藤을 外面하지 않을 때 持續的으로 充足될 수 있을 것이다. 結局 우리는 막혀 버린 길 위에서도 새 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길이 또 多少 거칠고 시시한 길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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