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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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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仲燮 藝術의 構造와 種族的 美意識

전인권(41)

1. 問題의 提起

畫家 李仲燮(1916-1956)은 主로 神話와 에피소드를 통해서 理解되어 왔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天才란 修飾語가 붙어 다녔고, 그의 藝術은 理解하기 어려운 것처럼 論議되었다. 例를 들어, 金光均은 1955年 <미도파 전시회=""> 팔플렛에서 "중섭이 어디다 뿌리를 박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고, 고은은 <이중섭 평전="">에서 "중섭의 藝術은 이미 批評의 숙도(熟度)를 所有한다"하여, 批評의 對象에서 超越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다시 말해 중섭 藝術에 對해서는 광法位韓 批評의 抛棄 現象이 流布되어 있었다.

다른 한便, 少數의 見解이기는 하지만 紀行과 逸話가 誇張되었을 뿐 作品은 대단치 않다는 見解도 있다. 植民地 時代의 唯美主義(원동석), 無分別한 藝術至上主義(김윤수), 墮落한 르네상스의 藝術 意識(계간미술, 79年 여름)이란 批判이 提起되었다. 그러나 그의 藝術 自體에 對한 檢討는 언제나 不充分했고, 지난 40年 동안 李仲燮論의 必要性만 反復的으로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只今도 李仲燮은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가장 잘못 알려진 畫家라는 逆說的 狀況下에 놓여 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各家論의 空白을 의식하면서 중섭 藝術의 基本構造와 特性을 論議하려고 한다. 特히 소그림 爲主의 作家論에서 벗어나 그의 藝術 全體를 問題삼으려 한다. 一部의 誇張된 主張처럼 그는 決코 難解한 畫家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하나하나 卽時 理解된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그의 藝術에 對한 全般的 理解가 五里霧中 狀態에 있는 것은 중섭 藝術의 全體 構造가 제대로 把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一次的 目標는 중섭 藝術의 全體的 構造를 밝히는 것이다.

이 글의 또 다른 目標는 중섭 藝術의 獨特한 構造를 可能케 한 種族的 美意識(種族的 美意識)을 糾明하는 것이다. 중섭 藝術의 表現樣式은 近代的이며 現代的이다. 소그림의 表現主義, 葉書그림의 象徵的 處理, 닭그림의 浪漫主義, 軍童話의 線描化法 等은 全的으로 現代繪畫의 表現樣式을 따른다. 그러나 중섭 藝術을 떠받치는 精神的 背景은 表現樣式과 일정한 乖離를 보인다.

種族的 美意識은 매우 낯선 用語이긴 하지만, 중섭 藝術의 原動力을 糾明하는데 適切한 槪念으로 여겨진다. 種族미는 중섭의 藝術과 人生에 걸쳐 놀라울 程度로 徹底하게 貫徹되는데, 중섭이 不過 40살의 나이로 夭折한 것도 여기에 起因한다. 또 種族的 美意識은 이른바 近代的 自我에 關聯된 問題를 提起한다. 要컨대, 이 글은 중섭 藝術의 精神的 背景을 糾明하는 가운데 近代化 黎明期의 韓國 美術이 西洋 美術을 受容하면서 부딪친 問題와 이를 對應하고 克服해 나가는 過程을 記述하려고 한다.



2. 중섭 藝術의 큰 對照와 작은 大棗

① 소그림과 軍童話의 큰 對照

중섭의 그림을 反復的으로 鑑賞하다 보면, 對照的인 世界를 만나게 된다. 소그림과 軍動畫(群童畵)가 그것이다. 중섭은 소의 畫家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畫家이라고 해야 옳다. 事實 그는 소보다 더 많은 어린이를 그렸다. 그런데 소그림과 軍童話는 참으로 對照的이다. 너무 對照的이어서 同一한 畫家의 그림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程度이다.

두 類型의 그림君의 對照性에 關心을 集中할 때, 于先 눈에 띠는 것은 素材의 數字이다. 例外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섭의 소는 언제나 한 마리이다. 한 마리의 소는 畵面 全體를 壓倒하며 登場한다. 굵은 線이 나타나고 强烈한 色相과 텃치가 强調된다. 또한 중섭은 韓國소를 그리겠다는 自意識이 剛했지만, 그의 소는 코투레, 쟁기, 馬車와 같은 必需品을 벗어 던진다. 그의 소그림에는 어떤 雜物度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不足해서 소의 얼굴만 크로즈-업 되기도 한다. 이같은 特性들은 詩人 고은이 "소의 宗敎"라고 일컬었던 소의 絶對的 性格을 잘 드러낸다.

反面, 軍童話에는 많은 아이들이 登場한다. 많은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봄의 어린이="">에는 개미, 나비, 풀, 나무도 登場한다. 軍童話로 分類할 수 있는 <제주도 풍경="">에도 많은 게가 나타난다. 게들의 特有한 몸 動作은 게들이 數없이 많아질 것 같은 錯覺을 일으킨다. 따라서 軍(群)이란 表現을 어린이만 많다는 뜻으로 理解할 必要는 없다. 그 많음 속에서 중섭의 아이들은 絶對性을 喪失한다. 軍童話는 박용숙의 表現처럼 "서로가 서로를 즐겁게 하는 供犧(共戱)의 世界요, 親交의 動作이 强調되는 相對의 世界"다. 이같은 어울림의 世界는 한 마리의 소그림에서 처음부터 不可能한 場面이다.

對照的 特性은 素材의 數字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섭의 소는 그림 밖의 世上에 對해 무언가를 表現하려고 애쓴다. 소그림에서는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말이라기 보다는 밖으로 向하는 외침이나 울부짖음 같은 것이다. 또한 소는 고개를 70度쯤 휘저어 强烈한 視線을 던지며, 무언가를 意味있게 바라본다. 따라서 중섭의 소는 靜物이나 動物이라기 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搖動치는 정신의 置換물(置換物)이다. 小그림이 表現主義라는 評價를 받는 理由도 중섭의 소가 人間을 代身하여 强烈한 메시지를 傳達하는 變容의 過程을 包含하기 때문이다.

反面, 軍童話의 아이들은 自己들의 世界에 빠져 있다. 중섭의 軍童話에는 普通 4,5 名의 아이들이 登場하는데, 아이들은 艱難 아이처럼 머리털이 없으며 하나같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고 있다. 軍動畫서도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많은 境遇 軍童話의 소리는 갑자기 音樂과 對話가 中斷된 映畫처럼 畵面 속으로 吸收된다. 아무튼 아이들은 나비를 찝거나 물고기와 놀고, 게에 찝히거나 끈을 잡느 等 놀이에 熱中하며 어떤 幸福을 즐기고 있다. 特徵的인 것은 아이들 나이가 10歲 안팎으로 推測되지만, 그들의 姿勢와 態度는 젖먹이의 時期로 돌아가 있다는 點이다. 이같은 退行의 過程을 거쳐 軍童話의 아이들은 高度로 樣式化되며, 個性을 박탈당한다.

중섭의 소가 고개를 쳐든다면, 軍童話의 아이들은 고개를 뒤로 젖힌다. 소가 今方이라도 突進하려는데 反해, 아이들은 完全한 武威(無爲)의 狀態에 빠져 있다. 그外에도 소그림과 軍童話에서는 色彩와 線의 對備 等 여러 가지 對照的 性格을 指摘할 수 있다. 只今까지 중섭 藝術은 소그림만 强調되었고, 軍童話는 相對的으로 疏忽히 다루어졌다. 그러나 萬若 軍童話가 없었다면 소그림의 眞正한 意味는 半밖에 理解되지 못할 것이며, 그 驛도 成立한다. 要컨대, 蘇그림과 軍童話는 對照的 世界인 同時에 서로 다른 側面을 照明해 준다. 따라서 두 類型의 그림君을 "중섭 藝術의 큰 對照"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② 葉書그림과 닭그림의 작은 大棗

중섭 藝術에는 또 다른 對照的 世界도 있다. 葉書그림과 닭그림의 對照的 世界가 그것이다. 그것은 큰 對照, 그러니까 소그림과 軍童話의 사이에 位置한다. 따라서 "중섭 藝術의 작은 大棗"라고 부를 수 있다. 중섭은 東京에 留學 中이던 1940年 頃부터 42,3年 사이에 200餘點의 葉書그림을 남겼다. 後日 그의 아내가 된 야마모토 마사꼬(山本方子)에게 便紙 代身 보냈던 것들이다. 그리고 4點의 닭그림度 남기고 있다. 葉書그림과 닭그림의 對照的 世界는 戀愛와 結婚, 卽 마사꼬란 女人이 一次的 모티브라는 共通點을 갖고 있다.

葉書그림 中에서 注目을 끄는 것은 <새사냥>과 <두 사슴="">이다. 두 그림에는 두 主人公이 登場한다. 이들 그림은 중섭의 戀愛와 關聯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主人公이 登場한다는 點은 닭그림度 마찬가지이다. 닭그림은 結婚生活과 關聯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葉書그림과 닭그림은 모두 두 名의 主人公이 登場한다는 點에서 같은 構圖下에 놓이는 셈이다. 그러나 두 類型의 그림은 相當히 對照的이다. 對照的 特性은 여러 側面에서 捕捉되지만, 論點을 明確히 하기 위해 各 그림에 나타나는 두 主人公들의 視線 및 姿勢의 方向에 焦點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于先, <새사냥>과 <두 사슴="">을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두 主人公은 모두 서로의 視線을 外面하고 있다. 例를 들어, <새사냥>의 男子는 女子의 視線을 避하려는 듯 활시위의 焦點을 虛空에 맞추고 있다. 그 男子의 外面 姿勢는 <두 사슴="">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슴과 類似하다는 點이 흥미롭다. <새사냥>의 女子는 相對를 正面으로 向하고 있다. 그러나 女子가 醉한 表情과 姿勢는 정작 戀慕하는 男子 앞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場面을 描寫한다. 이처럼 두 그림에는 視線의 外面이란 共通點이 있다. 그外에도 葉書그림 中에는 이와 類似한 構圖를 갖는 그림이 여러 點 있다. 이들 葉書그림은 두 主人公이 서로 가까이 하려는 欲望이 넘쳐나지만 더 以上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엇갈린 視線과 外面의 틈 사이로 津한 에로티시즘을 露出시킨다는 點에서 共通된 特徵을 보인다.

反面, 닭그림의 큰 特徵은 明白한 方向性이다. 두 마리 닭은 언제나 正面을 向한다. <투계>의 夫婦싸움과 <부부>의 입맞춤은 닭그림의 固定된 主題인데, 이들 닭그림에서는 <새사냥>과 <두 사슴="">에서 나타났던 엇갈린 視線, 外面, 抑制된 欲望이 完全하게 解消된다. 닭그림의 妙味는 부리가 맞닿는 地點에 形成된 强力한 集中力과 緊張感이다. 그것은 <부부>에서 더욱 强力한데, 그 集中力이 너무 强해서 두 마리 닭은 거의 한 일자(一)로 자지러질 듯하고, 그에 따라 畵面은 금새라도 두 쪽으로 찢어질 것 같다. 그리하여 悽絶하게 싸우고 있는 <투계>조차 그들의 마주침은 悲劇的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葉書그림과 닭그림은 안타까운 戀愛와 幸福한 結婚이란 契機的 發展을 담고 있다. 또한 닭그림은 <새사냥>과 <두 사슴="">의 發展된 世界이며, 疑心할 餘地없이 對照的 世界임을 보여 준다.



3. 중섭 藝術의 構造와 原形的 美意識

① 중섭 藝術의 構造

중섭 藝術에는 거의 體系的이라고 할 程度로 一貫된 展開 過程이 있다. 소그림과 軍童話의 큰 對照, 葉書그림과 닭그림의 작은 對照가 그 展開 過程의 큰 틀을 形成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巨大한 實體인 소의 解體 過程이요, 하나에서 여럿의 世界로 나아가는 增殖過程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過程에서 만남은 必須的인데, 葉書그림과 닭그림은 그같은 移行過程을 보여 준다. 葉書그림과 닭그림은 小그림이 軍童話로 나아가는 다리 役割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중섭의 그림들은 서로서로 緊密한 關聯을 맺고 있는데, 그 全體的 構造는 다음과 같이 圖解할 수 있다.

     1. 소그림-하나의 論理            ---------+
     2. 葉書그림        --+                    |
              둘의 論理; 작은 大棗             큰 對照  
     3. 닭그림        ----+                    |
     4. 軍童話와 家族도-여럿의 論理   ---------+
이 圖解에 따르면, 중섭 藝術의 救助는 小-(葉書그림)-닭-어린이와 家族, 다시 말해 하나-(엇갈린 視線)-둘-여럿의 契機的 發展過程을 거친다. 중섭 藝術의 이같은 展開過程은 중섭의 個人事와 正確하게 一致한다는 點에서 특별한 注目을 요한다. 중섭 藝術은 自身의 自意識, 戀愛와 結婚, 子女의 誕生과 죽음 같은 個人的 體驗과 正確하게 照應한다. 그같은 相關關係는 그의 藝術에 어떤 내면적 論理가 潛在해 있음을 暗示한다. 그 내면적 論理란 이른바 중섭 藝術의 自己表現性이며, 이 글에서 말하는 種族的 美意識이다.

이같은 構造 把握의 一次的 意義는 李仲燮 理解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提供한다는 것이다. 例를 들어, 위의 圖解는 製作過程의 私的(私的) 性格 때문에 本格的인 作品이 아니라는 評價를 받아온 葉書그림을 중섭 藝術의 本流에 합류시키고 있다. 事實 중섭 藝術에서는 使臣(私信)과 本格的인 作品의 區分이 아무런 意味가 없다. 또 위와 같은 構造把握은 소그림 爲主의 感傷에서 벗어나 중섭 藝術 全般에 對한 有機的 理解를 促進한다. 여기에서는 軍童話도 小그림에 버금가는 意味를 獲得한다.

<새사냥>과 <두 사슴="">을 包含한 200餘 點에 이르는 葉書그림에 對한 總體的인 理解는 別途의 論文을 要求하고 있다. 또한 중섭의 藝術世界에는 靑年時代의 戀愛感情을 表現한 葉書그림의 "抑制된 에로티시즘"과 結婚 以後의 性的 느낌을 유머러스하게 表現한 "淫談悖說類의 에로티시즘"이란 領域이 있다. 이들 두 類型의 에로티시즘은 "중섭 藝術의 제3 大棗"라고 할 수 있다. 이 問題에 對해 더 以上 仔細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위의 構造 把握이 중섭 藝術 全般에 걸친 爭點들에 對해 새로운 解釋의 可能性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强調해 두고 싶다.

② 原形의 美意識과 家族도

중섭 藝術에서는 "原形의 美意識"李 重要한 位置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特別히 强調될 必要가 있다. 중섭은 原形 그 自體를 選好하여 호박, 꽃, 天桃복숭아 같은 둥근 物象을 畵面의 中心에 즐겨 配置하곤 했다. 또한 畵面 全體가 圓形을 이루는 境遇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事實이다. 그같은 事例는 <아이들과 끈="">, <춤추는 가족="">, <제주도 풍경="">과 거의 모든 <가족도>에 나타난다. 이들 그림에서는 主人公들이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또는 서로의 滿짐과 接觸을 통해 하나의 原形을 이룬다.

또한 중섭은 末年에 原形狂態(圓形狂態)란 特異한 精神病(?) 症勢를 드러낸 것으로 有名하다. 그의 原形狂態란 눈(眼), 접시, 도너츠, 門의 손잡이와 같이 둥근 物體를 보면, 極度의 아름다움과 極度의 두려움을 同時에 느끼고, 그같은 兩價感情(ambivalance)이 그를 極端的 興奮狀態로 몰아 넣곤 했던 症勢이다. 實際로 圓에 對한 微妙한 感情 狀態가 그대로 露出된 그림도 있다. 가장 代表的인 것은 베잠방이를 입은 아버지와 벌거벗은 두 아들이 동그란 圓을 만들어 놓고, 그 原形이 禁止 區域이라도 되는 양, 그 안으로는 한 치도 더 들어가지 못하는 狀態를 나타낸 <판화 그림="">이다.

原形에 對한 중섭의 特異한 態度는 只今까지 天才의 狂氣란 觀點에서 다루어졌지만, 事實은 중섭 藝術의 核心을 理解하는데 매우 重要한 端緖가 된다. 왜냐하면 소그림(하나)-葉書그림과 닭그림(둘)-軍童話와 家族도(여럿)란 중섭 藝術의 展開 過程은 窮極的으로 原形의 世界를 志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섭 藝術은 精神的 實體인 소의 解體 過程이요, 解體의 窮極的 모습은 原形이란 構造를 띠게 된다. 이같은 理解方式 속에서는 그의 소도 噴火(分化)되기 以前의 원이란 解釋이 可能하다.

또한 중섭이 原形의 美에 穿鑿했다는 事實은 그가 理解할 수 없는 天才 畫家가 아니라, 韓國美에 忠實한 韓國의 畫家였음을 말해 준다. 事實 原形의 美意識은 중섭의 專有物이 아니다. 그것은 韓國美의 窮極的 모습(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다. 金煥基에서 原形은 節制된 아름다움이며, 高麗靑瓷와 같은 高雅함의 根源이다. 張旭鎭은 해와 달, 앞마당, 멍석, 나무 等 生活 周邊의 모든 物象들을 原形으로 再處理한다. 김수근에게 이르러 原形은 子宮 空間이란 母性의 이미지를 獲得한다. 이만익은 神話가 誕生하는 原初的 狀況에서 해와 달, 和合, 構圖(救道)의 이미지를 原形과 連結시킨다. 그外에도 韓國美에 精通한 藝術家들은 例外없이 原形의 美에 穿鑿한다.

이들과 比較할 때, 중섭의 原形은 傳統的 韓國 家屋의 울타리에 가까운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가 家族圖를 많이 그렸다는 것과 家族圖가 大部分 原形이란 事實은 決코 偶然일 수 없다. 結局 중섭의 圓形은 家族的(種族的) 同質性을 前提로 하며, 잃어버린 家族[우리(we)=울타리=우리(enclosure)]에 對한 悽絶한 追求라고 말할 수 있다. 軍童話의 어린이가 젖먹이로 退行 現象을 보이는 理由는 그의 原形的 美意識이 母性의 품속에 對한 記憶에 依해서만 回復될 수 있는 잃어버린 世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原形의 一般的 느낌은 圓滿함이지만, 중섭의 原形은 붙잡음과 滿짐을 통한 紐帶感의 表現이요 强力한 追求의 對象이 된다. 그같은 紐帶感은 물고기가 게와 어울리고, 게는 아이의 고추를 물고, 아이는 새를 붙들고, 새는 나뭇잎을 무는 方式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接觸의 連續 속에서도 强調된다.



4. 擴大된 自我와 種族的 美意識

① 自己表現的 特性과 擴大된 自我

앞에서 본 것처럼 중섭 藝術은 어떤 내면적 論理體系를 가지고 있으며, 窮極的으로 原形의 美意識을 志向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같은 물음은 韓國 美術에서 近代的 自我 問題가 어떤 過程을 거쳐 收容되며, 어떤 障礙物에 逢着하고, 어떤 結果를 招來하는가라는 重大한 質問과 關聯되어 있으며, 조심스러운 解釋을 要求한다.

중섭 藝術은 自己表現的이다. 單純하게 말하면 중섭 藝術은 중섭의 個人事로 還元될 수 있다. 그의 藝術이 植民地 時代의 唯美主義, 無分別한 藝術至上主義, 墮落된 르네상스 藝術 意識이란 批判을 받는 것도 그같은 特性 때문이다. 중섭 亦是 "그림은 나를 말하는 手段"이라고 말하였다. 중섭 藝術의 自己表現的 性格은 움직일 수 없는 特徵인 셈이다. 그런데 중섭의 自己表現的 性格은 解釋上 몇 가지 注意를 요한다.

于先 중섭은 自身에 對한 엄청난 關心에도 不拘하고 事實上 自畫像이나 人物化를 그리지 않았다. 周知하다시피 自畫像이 美術史에 登場한 것은 近代的 自意識이 形成되던 15, 6 世紀의 일이다. 중섭의 그림에도 중섭을 象徵하는 主人公이 많다. 그러나 중섭은 自己 自身을 어머니, 愛人, 아내, 아이들과의 關係 속에서만 表現하였다. 닭그림의 夫婦가 그렇고 家族圖가 그렇다. 중섭 自身은 언제나 그들 中의 한 사람으로 登場한다. 이는 自畫像의 歷史에서 參與者畫像의 段階를 聯想케 한다.

眞實을 말하자면, 중섭의 藝術的 想像力은 決코 중섭 自身이 아니라 家族 또는 家族처럼 親密한 것들을 통해서만 發揮되었다. 예컨대,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便紙에서 "하루 빨리 當身과 하나가 되어 作品을 表現하고 싶은 所望으로 가득하오"라거나, "하루 빨리 當身과 아이들 곁에서 單 一年 萬이라도 製作할 수 있다면 ……" 하고 懇切하게 念願했다. 중섭의 書簡集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에서는 創作에 對한 熱望과 家族에 對한 그리움을 同時에 吐露하는 無數한 表現들을 만날 수 있다.

이같은 表現들은 아내에 對한 愛情表現 以上의 意味, 卽 중섭의 自我觀을 알려 주는 것들로 理解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作品活動은 共同體 構成員과의 關係, 具體的으로는 아내와의 關係를 통해서 設定되고, 그런 關係 속에서 推動力을 얻었다. 중섭의 創作活動 亦是 精神的 次元에서는 아내와의 共同作業의 性格을 띠고 있다. 중섭은 40살의 나이에 夭折한다. 그런데 그가 夭折하게 된 直接的인 原因은 不過 4年間 持續된 아내 및 家族과의 離別이었다. 家族과의 離別, 아내의 不在는 그의 創作活動을 不可能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自然的 生命마져 앗아갔던 것이다.

要約해서 말하면, 중섭이 "그림은 나를 말하는 手段이라고 할 때의 나"는 중섭 個人을 指稱하는 "近代的 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一次的으로는 家族까지 擴大되고 家族과 結合된 나이며, 二次的으로는 自身이 屬한 共同體로 "擴大된 自我"(extended-self)라고 할 수 있다. 그같은 狀況은 小그림에서도 如實히 나타난다. 중섭은 "저 소는 나"이며 "나는 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중섭의 自我는 蘇라는 친숙한 動物에 對한 同一視을 통해 表現되기도 했다. 따라서 중섭 藝術은 表面的으로 自己表現的이나, 內容的으로는 共同體表現的일 수 밖에 없다. 중섭 藝術의 全體 構造가 놀랄만큼 單純한 體系를 지니는 것도 그의 藝術이 共同體로 擴大된 自我의 表現이란 形態를 띠기 때문이다.

② 種族的 美意識과 중섭 藝術의 方法論

중섭 藝術의 眞正한 特性은 그의 藝術이 種族的 美意識으로 充滿한 世界라는 것을 把握할 때 그 全貌가 明確히 드러난다. 중섭 藝術의 表現樣式은 全的으로 近代的인 것이다. 그러나 중섭 藝術의 精神的 特性을 한 單語로 表現할 때, 種族美(種族美)보다 더 適切한 表現은 없다. 그의 作品 世界는 성스러움과 意味深長함으로 가득한 種族의 世界다. 이같은 表現樣式과 表現精神의 乖離가 중섭 藝術에서 微妙한 아름다움을 提供한다.

얼핏 보면 중섭 藝術은 個人事 또는 家族史로 構成된다. 그러나 중섭 藝術은 그 以上이다. 중섭은 소와 닭, 게와 어린이, 물고기와 나무들을 自身의 그림 世界로 끌어들인다. 이 過程에 중섭의 獨特한 方法論이 끼어든다. 중섭이 素材를 理解하는 方法은 卓子위에 놓인 沙果를 認知하는 것과 다르다. 중섭은 一旦 소에 社로 잡히고 난 後, 해가 지도록 들판에 앉아 소를 觀察했다. 그냥 觀察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소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보고 또 보았다. 너무 그러다가 소도둑으로 몰렸던 逸話는 有名하다.

소에 對한 중섭의 態度는 중섭이 소와 精神的으로 깊은 關係를 맺는 過程을 보여 준다. 닭의 境遇도 마찬가지다. 닭이 중섭의 素材가 되기까지 중섭은 닭이(彛)가 오를 程度로 房 안에서 닭과 함께 뒹굴었다. 그리고 그 닭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닭에게 未安하다는 생각이 들면, 닭은 그제서야 중섭의 素材가 되었다. 중섭이 所在를 把握하는 方式은 素材와 親密해지는 過程, 몸으로 觀察하는 몸札이었다. 또 중섭이 素材를 몸찰하는 方式은 種族의 世界를 構成하기 위한 通過儀禮, 그것도 意味深長한 通過儀禮를 치르는 것에 比喩할 수가 있다.

중섭이 創作行爲에 많은 터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種族的 美意識을 엿보게 한다. "한 두 番 본 것은 그릴 수 없다"는 것도 그같은 터부의 一種이다. 이 境遇 問題가 되는 것은 反復 觀察의 與否가 아니라, 種族같은 親密性이 確保되었느냐의 問題였다. 그는 女子와 男子 어른을 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不正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自畫像, 肖像畫, 風景畫에 關心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理由는 近代的 自我의 表現樣式으로 登場한 이들 장르의 그림이 중섭의 種族的 美意識을 反映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중섭은 "갑자기 배에서 바라본 갈매기"를 그릴 수 없었고, 至毒한 가난에도 不拘하고 "레스토랑에서 戀人과 더불어 食事하는 風景"을 그려야 하는 新聞連載小說의 揷畵그리기를 拒絶한다.

중섭의 種族的 美意識은 藝術과 人生의 關係를 理解하는 方式에도 如實히 드러난다. 흔히 評論家들은 중섭을 藝術至上主義者라고 理解해 왔고, 세간(世間)에서는 "妻子息도 버리고 그림만 그리다가 미쳐 죽은 사람"이란 唯美主義者의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事情은 오히려 正反對다. 많은 境遇 그는 藝術이 人生에 奉仕하기를 願했으며, 중섭 藝術이 때때로 呪術化(呪術畵)의 傾向을 띠는 것은 決코 偶然일 수 없다. 事實 중섭의 精神世界에서는 그림조차 삶의 一員으로 參與한다고 보아야 한다.

중섭은 八朔둥이 첫아들이 죽었을 때, "우리 새끼 심심하지 말라고……" 念願하며 그림을 그려 棺에 넣었다. 이것이 軍童話의 始發點이다. 또 중섭은 親舊의 快癒를 빌 때나 親舊의 訃告(訃告)를 接했을 때의 슬픔을 그림으로 表現했다. <도원>(桃園)은 중섭이 熱望한 臺表現, 壁畫의 世界를 가장 近接하게 보여주는 그림인데, 神奇하게도 <일월도(日月圖)>나 <장생도(長生圖)>를 빼닮았다. 이들 그림이 呪術的 性格을 갖고 있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다. 이같은 一連의 事實들은 중섭 藝術의 精神的 背景이 多分히 種族的이었음을 보여 주는 强力한 證據들이다.



5. 맺음말

畫家 李仲燮에 關한 旣存의 論議는 主로 表現樣式에 關한 것이었다. 예컨대, 그의 藝術이 루오, 마티스, 피카소 中 어떤 要素를 더 많이 간직했느냐는 問題가 重要한 關心거리였다. 이는 소그림의 强烈한 表現主義的 傾向과 그의 天才的 令監 및 韓國 現代美術에서 차지하는 比重 때문에 不可避했던 論議過程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섭은 美術思潮上의 어떤 表現樣式度 排他的으로 固執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그림의 表現主義, 닭그림의 浪漫主義的 傾向, 軍童話의 民畫的 技法, 葉書그림의 象徵主義, 淫談悖說類에 나타나는 다시點(多視點)의 큐비즘 等은 중섭이 다양한 表現樣式을 自由自在로 借用했음을 보여 준다. 卽, 그에게 잇어서는 表現樣式보다 表現內容이 壓倒的으로 重要한 意味를 가졌다. 이같은 特性들은 藝術을 共同體의 삶과 緊密하게 連結시키는 美意識, 중섭 自身의 表現을 빌리면 "참다운 化工"의 藝術觀을 보여 준다.

그러나 중섭 藝術을 近代意識의 缺如, 近代的 自我의 不在로 把握하는 것은 適切한 理解가 아닌 것 같다. 그같은 見解는 西洋의 近代性을 無誤謬의 眞善美로 理解하는 植民地史觀에 따른 見解일 뿐이다. 오히려 중섭의 美意識은 外在的으로 주어진 西洋의 現代 藝術을 受容하여 韓半島란 風土에 걸맞게 再創造하는 適應過程, 苦難에 찬 鬪爭過程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確實히 중섭의 方法論은 "본 것만 그리겠다"는 쿠르베, "事物을 正確하게 描寫하면 냄새까지도 그릴 수 있다"는 세잔느와는 性格을 달리한다. 그의 藝術은 몸으로 느끼며, 家族처럼 親해진 것만 그릴 수 있다는 一種의 몸脚註의 또는 汎家族主義, 그것을 통해 利己的 또는 좁은 意味의 私的 世界를 넘어서는 그런 藝術이다.

그러나 중섭은 日本 化雨(和牛)와 스페인 鬪牛에 對해서 韓國의 苦生하는 소를 對立시키고, 한 두 番 본 것은 그릴 수 없는 代身 自身과 親密한 것만을 素材로 삼고, 새로운 것에 對해서는 傳來의 익숙한 것만을 固執하고, 不正타는 것과 不正타지 않는 素材를 區別하며, 自身의 家族을 聖家族(holy family)로 理解한 代身, 他人의 家族을 성스럽지 않은 家族으로 理解했을 餘地를 內包하는 等 體系的이며 階序的人 種族的 美意識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에 중섭 藝術의 限界가 있었음을 指摘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섭의 切親했던 親舊요 後援者였던 構想(具常)은 <성당 부근="">을 다룬 回顧文에서 이같은 限界를 暗示的으로 다룬 바 있다. 중섭 自身도 精神病이 極度에 達했을 무렵, 그같은 限界를 認定하기 始作했고, 그것을 넘어 보려고 애를 썼다. 家族이 아닌 風景畫에 對한 새로운 認識을 가지려 했고, 天主敎란 世界를 통해 삶의 苦痛을 克服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섭은 그가 熱望한 臺表現의 時代를 熱氣에는 너무나 닫힌 世界의 美意識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極端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중섭은 그같은 限界 때문에 眞正한 藝術家였다. 그는 人生과 藝術이 어느 地點에선가 妥協可能할 수 있다는 事實을 考慮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글에서 중섭 藝術이 얼마나, 어떻게 韓國的인가를 다루지 못했는데, 그의 非妥協的 藝術觀은 참으로 獨特한 韓國美를 創造하는 原動力이었다. 그런 點에서 중섭의 限界란 것도 分析的 次元의 論議일 뿐, 그것이 없이는 중섭 藝術이 存在할 수 없었던, 중섭 藝術의 一部였다. 따라서 나는 중섭 藝術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種族的이라기 보다는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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