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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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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과 구름의 圖像學(圖像學)
― 金芝河의 抒情詩와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


김수림(75年 仁川出生, 成均館大 國語國文科 4年 在學)


金芝河는 韓國 現代詩의 傳統 속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物質的 想像力의 詩人이다. 上昇하는 불의 이미지는 거센 挑戰과 抗爭의 悲壯함이 主를 이룬 初期 抒情詩에서 特히 印象的인데, 이야말로 김지하가 지닌 物質的 想像力의 本流를 後期에 이르기까지 一貫되게 表現하는 核心 圖像(icon)이다. 이러한 `불 이미지'의 支配的 性格은, 남진우가 生命의 불 永遠의 빛 이라는 글에서 이미 通時的으로 섬세하게 分析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김지하는, 불의 司祭인 것 못지 않게, 物議 詩人이다. 물 이미지는 김지하 市 全般을 볼 때 불 이미지만큼 폭넓은 分布를 보이지는 않는다. 出現하는 頻度 亦是 적은 것이 事實이다. 하지만 `물 이미지'가 지닌 意味 比重은 그 分布의 枝葉性을 넘어서는 무게를 가진다. 김지하의 抒情詩에서 `물 이미지'는 支配的인 `불 이미지'를 때로는 牽制하고 때로는 補完하는 구실을 한다. 때문에, 불 이미지를 中心으로 한 김지하의 鬪爭的인 男性性을 理解하고, 아울러 그의 詩的 變貌를 測定하기 위해서도 물 이미지는 가늠자로서의 價値가 充分하다.

强調할 必要도 없이, 물과 불은 서로에 對해 가장 敵對的인 物質이다. 물과 기름은 섞여들지 않고 서로의 表面을 懷柔할 뿐이지만, 不過 물은 서로를 殺害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서로를 殺害하는 두 物質이 한 詩人의 世界를 力動的으로 構成하고 있다. 이렇게 물과 불이 펼치는 混沌스러운 矛盾과 相生의 辨證法이야말로 김지하의 文學이 지닌 `力動性'의 象徵的인 根源이 아닐까?1 그러나 `물과 불의 辨證法'을 통해 김지하의 抒情詩篇들을 照明하는 作業은 只今 이 글의 範圍를 벗어난다. 이 글은, 實際 分析을 통해 `물의 이미지'가 김지하의 詩 全般에 미치는 意味의 比重과 影響力을 밝히는 데 注力하고자 한다.

김지하의 市에서 불의 이미지가 壓倒的으로 優勢하다고 해서 물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境遇는 없다. 물의 이미지는 중기로 分類되는 愛悋 1部 以後부터 보다 活潑히 드러나기 始作하지만, 첫 詩集 黃土 에서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人爲的인 分類가 되겠지만,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大體로 事物을 비추는 自然의 거울로서 나타나는 境遇와 그렇지 않은 境遇로 나눌 수 있다. 後者의 境遇에 물은, 불 이미지와 對立·矛盾되는 物質로서 提示된다. 그러나 좀더 支配的인 類型은, 물이 自然의 거울로서 드러나는 境遇―더 積極的으로 말한다면 事物을 自己 안에 되비추고 反映하는 作用 自體로서 드러나는 前者의 類型이다. 이 境遇 `물'이라는 語彙나 이미지가 具體的으로 提示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反映의 裏面에 감춰진 `물'이라는 物質을 充分히 導出, 또는 復元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 이미지는 單純히 竝行하는 이미지群을 形成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相互 疏通的인 場 안에서, 窮極的으로는 하나의 統一된 意味 脈絡으로 連結된다. 이 글의 制限的인 性格上 論議의 主眼點은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에 集中될 것이다.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는 많은 境遇 至極히 暗示的인 形態로만 그 痕跡을 남기고 있다. 김지하에게 反映的인 물은 `숨어있는 물'이다.


내 오른팔을 虎狼가시나무라고 불러라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

있다면

내게 힘이 있다면

한 팔로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한 팔로 너희들의 삶을 껴안아주고 싶구나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서

나의 힘없음을 비웃는구나.

― 용추다리 , 全文2


김지하의 용추다리 는 그의 詩에 나타난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決코 빼놓을 수 없으리만큼 重要한 作品이다. 要點的으로 말해, 용추다리 는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가 詩人에게 心理學的으로 얼마나 內密한 深部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雄辯해 주고 있다. 事實 용추다리 의 外觀이나 그것이 말하고 있는 內容은 一見 單純한 것이다. 詩的 自我 또는 話者인 `나'는, "너희들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아주고" 싶은 欲望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欲望은 實現될 수 없는 欲望이며, 그런 意味에서 헛된 欲望에 不過하다, 라는 것이 이 詩의 一次的인 內容이다. 그 行間을 確信과 悲歎이 交叉하는 情緖가 채우고 있다.

하지만 詩에 있어서만큼은, 表面的인 傳言의 理解가 모든 意味化 過程의 深化와 그에 參與하는 讀者의 情緖的·審美的 體驗을 保證하지 못한다. 甚至於, 表面的인 傳言과 意味化 過程은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기도 한다. 좋은 詩, 重層的인 意味化 過程을 可能하게 하는 詩가 지닌 德目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거듭거듭 質問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話者는 구름이 自身의 힘없음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처음 두 行의 命令語法이 주는 效果와 마찬가지로, 他人들을 위해서 그들의 삶과 죽음마저 管掌하고 싶다는 話者의 欲望은 實로 巨大한 것이다. 그 欲望은 人間으로서는 敢히 꿈꾸기조차 不可能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欲望은, 超越的인 絶對者나 적어도 神話的 英雄의 境地에 이르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欲望이다. 金炫이 일컬었던 김지하의 `英雄主義的 傾向'이란, 이렇게 巨大한 欲望을 품고 있는 詩人에 對해 知識人으로서 그가 느낄 수밖에 없었던 警戒心을 多少 迂廻的으로 表現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果然 어떠한 體驗이 그렇듯 巨大한 欲望을, 그렇듯 손쉽게 꺾어 놓을 수 있었을까?

質問은 마지막 두 行에 集中된다. 話者는 구름이 自身을 비웃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한 理由에 對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그 句節의 意味를 올바로 되새기려면 詩의 前半部와의 對備가 不可避하다. "내 오른팔을 虎狼가시나무라고 불러라 / 내 왼팔을 사자봉 벼락바위라고 불러라"라고 말하면서 話者는 巨大한 自然物과 스스로를 同一視 하고 있다. 그의 命令語法은 拒否하기 힘든 威嚴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러한 命令語法에 依해서 超越的 存在를 模倣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雄辯的으로 命令하는 話者의 想像的인 모습 亦是 兩팔을 치켜든 聖像을 聯想케 한다. 그것은 一次的으로 虎狼가시나무와 사자봉 벼락바위라는 事物이 觀察者로 하여금 對象을 우러러 보게 만들고, 視覺的인 威壓感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보다 深化된 分析은, 1·2 行의 이미지가 작은 것(오른 팔/왼 팔)에서 큰 것, 垂直的인 높이를 지닌 것(虎狼가시나무/벼락바위)으로 變化하는 은유적 움직임을 보여주며 그 過程에서 `팔'의 位置가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 아니라 위를 向해 치켜드는 力動的인 姿勢로 表現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어지는 3∼6行의 "죽음을 막고" "삶을 껴안"는다는 行爲는, 앞서 나타난 `垂直的인 上昇'의 表象 作用에서 다시 水平的으로 擴張되는 表象作用을 보여준다. 垂直的인 높이와 水平的인 넓이를 함께 갖춘 나무·바위의 이미지는 이에 對한 아주 適切한 象徵이라 할 수 있다.

1行에서 6行에 이르는 部分은 삶과 죽음을 主管하고 싶다는 話者의 欲望에 걸맞게 巨大한 主體의 이미지를 表象한다. 그 巨大함의 外的이며 同時에 內的인 크기는 簡單히 `上昇과 擴散'이라는 이미지의 運動으로 規定된다. 여기에는 人間의 道德的·精神的·肉體的 限界들을 넘어서려는 높이에 對한 熱望(上昇)이라는 個人心理學이, 周邊의 他人들을 보살피고 싶다는 바램과 만나고 있다. 또한, 外的인 世界에 맞서 싸우면서 威嚴 어린 모습으로 泫泫하는 父性(男性性)李, 또 한 便으로는 他人의 삶을 自身의 품에 껴안는 母性(女性性)이 하나의 肉體 속에 포개어진다.

이렇게 上昇과 擴散으로 規定되는 巨大한 超越者의 이미지와 對照를 이루고 있는 것이 7·8 行의 `구름'이다. 무엇에 얽매임 없이 世界를 浮遊하는 `구름'의 이미지는 東洋的인 騷擾와 浪漫主義的인 精神의 代表的인 象徵의 하나로 남아있다. 于先 可能한 讀法은 `구름'의 이미지를 浪漫主義的인 象徵으로서 理解하고, 그것을 다시 다리를 건너고 있는 話者와 對照시켜보는 것이다. 용추다리 의 後半部 두 行은 `話者가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中'이라는 核心的인 情報를 提供해준다. 地上의 삶으로부터 超然한 채 自由롭게 天空을 浮遊하는 구름의 存在에 비추어 볼 때, 話者는 그가 가진 다리(脚)를 통해 地上에 묶여있고 무언가를 건너가기 위해 다리(橋)를 必要로 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欲望했고, 欲望의 이미지를 통해서 만들어냈던 人身이나 英雄이 아니다. 이러한 讀法은 나름대로 有力한 意味들을 生産해내기는 하지만 非客觀的인 指標에 기대어 있고, 지나치게 推論的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話者의 `自己 認識'에 對한 解說이 缺如되어 있다. 自身은 人神이 아니며 하나의 平凡한 人間에 不過하다는 自己 認識의 體驗을 考慮하지 않는 以上, 우리는 용추다리 의 구름이 왜 天上에서 所要夏至 않고 何必 話者의 발 밑에서 나타나는지를 答할 수 없다.

이 글이 줄곧 暗示해온 바와 같이, 話者의 自己 認識의 根源에는 보이지 않는 `물'李 隱密하게 숨어 있다. `구름'이라는 單語가 讀者에게 一次的으로 提供하는 心象은 하늘에 있는 구름, 卽 浪漫主義者의 구름이다. 그러나 용추다리 에서 구름은 話者의 발 밑에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話者의 발 밑에 와 있다는 말은, `물'의 이미지를 排除하고는 不可能한 陳述이다. 詩人은 어느 한 구석에서도 `물'에 對해 言及하지 않고 있지만, 용추다리 를 理解하는 데에 가장 窮極的인 指標는 다름 아닌 `물'이다. 그 `물'은 明示的인 言表로서 存在하지 않지만, 意味의 行間에 숨어있다. "무심한 구름이 용추다리 건너가는 내 발 밑에 와"있다고 話者가 말할 때, 그는 하늘 위에 上昇해 있는 구름이 아니라 물에 反映된, 卽 하강해 있는 구름을 보는 것이다. 그가 다리를 건너가는 途中이라는 狀況은 이 詩의 隱密한 深層에 `물'李 놓여있다는 事實을 보다 客觀的으로 支持해준다. 自然의 거울인 `물'을 보는 體驗은 언제나 내려다보는 體驗이다. 따라서 그 下向的 視線은 虎狼가시나무, 사자봉 벼락바위와 聯關된 上向的 視線·欲望과 克明한 對照를 이룬다. 巨大한 欲望과 그만큼 巨大한 超越者와 英雄의 이미지를 渴望하던 한 사람이, 어째서 그가 애初에 품고 있던 `높이에 對한 熱望'(上昇)과는 反對되는 下向的 視線(下降)을 取하는 것일까? 이러한 視線의 뚜렷한 엇갈림과 그에 따른 相反된 態度는 이 詩를 理解하는 核心 열쇠가 된다.

그가 건너가고 있는 `용추다리'를 追體驗하는 讀者에게 그 다리의 具體的인 實相이 果然 어떠한가에 對한 細細한 情報는 許諾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土俗的인 名稱과 山속에 있는 다리라는 事實이, 튼튼하게 만들어진 現代式 다리가 아니라 낡고 위태로운 다리라는 印象을 준다. 굳이 이러한 類推가 없더라도 다리는 그 높이 때문에 不安定하게 느껴지고 漠然한 不安感을 불러일으키는 事物이다. 話者는 어쩌면, 다리의 높이와 그 不安定함에서 비롯하는 두려움과 不安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視線은 어째서 굳이 발 밑의 深淵을 向하는 것일까? 융의 心理學은 人格의 均衡을 回復하려는 꿈과 無意識의 機能을 强調한다. 그의 理論은, 道德的·精神的인 높이에의 極端的인 追求가, 언제나 墜落에 對한 魅惑과 두려움에 依해 補完·修正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3 용추다리 의 話者가 느꼈을지 모를, 다리 건너期의 不安은 空間的인 同時에 心理的인 理由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不安 心理에 依한 精神的 均衡 回復이라는 융 心理學의 解釋的 前提와 全혀 다른 次元의 問題는 아니지만, 우리는 話者가 내려다보는 行爲를 그 自體로 上向的 欲望의 反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은 欲望하는 바를 이루려는 盲目的 一念 속에서 欲望 自體를 反省하기도 어렵고 成就하기도 어렵다. 어떤 意味에서 反省을 통한 欲望의 制動과 修正은, 當爲的 狀態에 對한 欲望과 現實的 制約 사이의 均衡을 回復하려는 努力일 수 있다. 生死의 反復으로부터 他人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人間的 制約을 넘어선 힘과 높이를 바란다는 英雄主義的 欲望은 너무 크고, 너무 壓倒的이다. 그 欲望의 巨大함이 그리는 心象에 비해 모든 人間 存在는 힘없고 초라하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는 行動은, 이 欲望의 威壓과 盲目性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現實的 制約―"나의 힘없음"―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自身의 欲望을 修正하려는 고통스런 自己 確認의 行爲가 아닐까.

이 下向的 視線에서 무엇보다 重要한 問題는, "나의 힘없음"에 對한 省察의 契機이다. `발 밑의 구름'이라는 言表의 裏面에 숨어있는 물의 存在는 이 點에서 重要하다. 이 詩의 話者가 果然 물에 비친 구름과 함께 超人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힘없는 自身의 映像을 내려다 보았는지는 斷定짓기 어렵다. 그러나 反映的인 물 이미지는, 발 아래 물에 비친 구름의 映像을 보는 일이, 詩的 自我에게는 自身의 凡常함을 돌아보는 `自己 確認'의 重要한 契機였으리라는 可能性을 示唆해준다. `발 밑의 구름'이라는 言表의 裏面에 숨어있는 물의 存在는, 自然의 거울을 통한 話者의 `自己 確認' 體驗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斟酌을 可能하게 한다.

이런 脈絡에서, 反映的 물 이미지와 聯關된 김지하의 詩的 自我가 흔히 괴로운 自己 確認의 體驗에 마주치고, 거기에서 自身의 制約과 限界를 洞察하는 省察的 自我로서 나타난다는 點은 注意를 요한다. 假令 다음과 같은 初期作에서 물의 映像은 自身의 缺陷과 陋醜함에 對한 侮蔑感이 섞인 內省을 보여준다.


주무르고 벗기고 악을 쓰고 빨고 ?고

나는 고름 담긴

술 한 盞의 고름


시궁창 속 얼굴이

달과 내 오줌에 깨어질 때

― 뒷골목의 시궁창 까마귀 벌판 一部, (1: 122)


흔히 復讐心·憎惡·恨 等의 悲壯하고 挑戰的인 情緖를 隨伴하는 불의 上昇 이미지가 中心인 作品에서와는 달리, 自然의 거울을 對하는 김지하의 詩的 自我는 內省的인 面貌를 剛하게 보인다. 萬若 그를 나르시스的 人間 類型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때의 나르시스는 自身의 아름다움에 陶醉한 耽美主義的 나르시스가 아니라, 黨위(sollen)와 存在(sein)의 間隙―理想的 自我와 現實的 自我 사이의 克服될 수 없는 間隙을 洞察하고 괴로워하는 悲劇的인 나르시스이다. 흥미로운 事實은 이 깨달음이 人工의 거울이 아닌 自然의 거울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와 聯關하여 나타나는 것이 禮儀 고개 숙이는 行爲―`下向的 視線'이라는 點이다. 初期 김지하가 치솟는 불의 美學을 통해 보여주었고 용추다리 에서도 나타나는 英雄主義的 態度는, 當爲와 存在의 이런 乖離를 살피는 媒介物인 `反映的 물'에 依해 牽制된다. 그러나 물을 내려다 보며 얻은 깨달음은 너무 고통스러운 體驗이다. 위의 引用에서도 보이 듯이, 물과 聯關된 自己 確認의 體驗은 흔히 悲歎·自己 幻滅 等의 情緖를 낳는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地下生活者'는 "都大體 自意識이 發達한 人間이 어찌 自己를 尊敬할 수가 있겠는가?"4라고 외친다. 용추다리 의 話者는 아직 깨달음의 苦痛으로부터 回復하지 못한 段階에 있다. 그는 如前히 欲望하는 바와 存在하는 바가 兩分된 狀態에서 괴로워한다. 詩人이 自身의 苦痛을 漸次 다스려가는 過程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물-구름의 이미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森羅萬象·1 에서 그것은 놀라운 物質的 想像力을 통해 提示된다.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點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 森羅萬象·1 全文, (2: 243)


黃土 에 실린 비녀산 이라는 作品에서 詩人은, "삶은 濁한 江물 속에 빛나는 /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1: 52)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의 구름이 屬한 하늘과 地上의 물은 푸른 光彩와 濁함이라는 兩極의 이미지로 分裂된 것이었다. 그 分裂은, 그러나 兩쪽으로 찢겨진 別個 狀態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挫折된 꿈 때문에 우리가 고개 떨굴 때, 陋醜한 現實을 證據하는 바로 그 濁한 물이, 地上의 反對便에 位置한 푸른 하늘과 구름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 反映的인 물은, 우리가 그 앞에서 成就될 수 없는 欲望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記憶해야 하는 聖所와도 같다. 詩人이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이 땅의 삶이 陋醜하고 더럽다는 理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더러운 江물/現實 속에 忘却할 수 없는 記憶과 꿈으로서 푸른 하늘이 빛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좁혀질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하늘과 地上의 거리를 거듭 確認하고 記憶해야 한다는 事實,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비녀산 에서 푸른 하늘을 비추고 있는 江물의 이미지는, 地上과 天上의 幸福한 合致가 아니라 對立과 分裂의 深化이고, 그에 對한 고통스러운 記憶으로서 存在하는 것이었다. 森羅萬象·1 에 이르러서 물과 하늘/구름의 이미지는 根本的으로 變化된 樣相을 보여준다. 分裂과, 그것에 對한 記憶이라는 意味를 갖고 있던 더러운 물의 이미지는 이제, 循環과 生成의 그것으로 變貌한다.

"썩은 물도 물은 물"이다. 그 물은 흐르고, 하늘을 비추고,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物質이다. 그것이 우리가 經驗的으로 알고 있는 물의 屬性이다. 그런데 詩人은 곧이어 그 물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 있다. 이 部分의 內容을 單純化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a) 썩은 물은 흘러간다

b) 썩은 물은 하늘을 비춘다

c) 썩은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d) 썩은 물에 구름이 어린다

e) 썩은 물은 (깨끗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물이 구름이 되고 그것이 大氣의 循環을 거쳐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는 常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그러한 自然科學的 常識이 森羅萬象·1 의 話者가 陳述하고 있는 內容을 한層 수월하게 理解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도 事實이다. 그러나 이 詩가 初等 敎育의 受惠者라면 누구나 所有하고 있는 常識을 詩的인 形態로 變形시켜 놓은 作品에 不過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썩은 물에 구름이 비친 모습을 본다는 것과, 그 썩은 물이 돌아오겠다는 陳述 사이에는 아무런 論理的 聯關도 存在할 수 없다. 讀者가 自身의 科學的인 常識을 動員하지 않는다면, 그 間隔은 메워질 수 없는 性質의 것이다. 텍스트의 間隙을 메우기 위한 一次的인 讀解에 있어 우리가 必要로 하는 것은 大氣와 물의 循環에 關한 科學的 常識이다. 詩人의 直觀은 그러한 添言이 없이, 물에 어린 구름을 보는 行爲와, 그 물의 回歸와 循環이라는 두 個의 文章을 因果關係를 나타내는 語尾 `-니'로써 連結짓는다.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다시 물로 變轉하는 過程에 對한 一切의 說明을 省略함으로써 詩人은 結局 하나의 事實을 强調한다. 썩은 물과 昇華된 구름은 窮極的으로 하나이다.

더러움과 腐敗 그리고 어두움과 무거움 等을 屬性으로 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와, 깨끗함·맑음·가벼움·밝음 等을 屬性으로 거느린 구름의 이미지는 우리의 感覺的인 認識에서 對立·矛盾된다. 事物의 外觀에 바탕을 둔 認識은 決코 그 相反된 이미지들을 한 데 統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簡單한 科學 常識은 썩은 물과 純白의 淨化된 구름이 특정한 變化의 段階에 屬해 있을 뿐이며 根源的으로 同一한 物質이라는 事實을 말해주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다른 密度를 지닌 別個의 事物이라고 區別을 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물의 循環 過程에 對한 言及을 모두 省略하고 다만 그 물이 "돌아오겠다"는 말이 되풀이될 때, 그것은 詩人의 直觀이 물과 구름의 同一性을 强調하는 言述의 組織 方法이다. 돌아온다는 動詞는 흘러간 것과, 只今 썩은 물 위에 어리는 것과, 또 未來에 이 땅에 내릴 것이 同一한 物質이라는 前提 없이는 不可能한 表現이다. 繼續的으로 形態를 뒤바꾸는 물에 있어서 가고 돌아옴, 卽 `循環'은 結局 물이라는 物質의 內在的인 屬性으로 表現된다. 地上의 썩은 물도, 하늘에 浮遊하는 구름도, 돌고 도는 循環의 軌道 안에 있는 하나의 자리이며, 動的인 循環性을 함께 나누어 갖고 있다. 그것을 直觀的으로 깨닫는 物質的 想像力의 所有者에게 있어 구름은 곧 `가벼운 물'이다.

더러운 물과 對比되는 구름은, 心理學的으로 말한다면 `더러운 물'李 높은 次元으로 高揚되고 昇華(Sublimation)된 形象, 아니 말 그대로 `昇華' 自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世上에서 더럽지 않은 물이 果然 어디에 있을 것인가. 高揚된 純粹性의 象徵인 구름은, 非肉體的이고 地上의 欲望에 對해서 超越的이라는 點에서 浪漫主義者들의 구름과 屬性을 같이하지만, `가벼운 물'의 眞正한 이미지가 비로소 確然히 드러나는 地點은 무거운 물·더러운 물이 變化한 모습이 바로 구름이라는 點을 發見하는 瞬間이다. 구름은 自己 高揚과 鍛鍊을 거쳐 淨化된 썩은 물 外에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 意味에서 `가벼운 물'로서의 구름은 浪漫主義者의 구름과는 相當한 距離에 놓여 있다. 腐敗하고, 더럽고, 무거운 肉體를 지닌 썩은 물이 하나의 潛在的인 `質料'라면, 그것의 未來的 `形象'李 저 淨化된 구름의 形象으로 나타난다.

흘러가는 썩은 물이 "깨끗이 되어 / 또 오고 / 또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話者의 語調는 分明히 觀照的이고 아직 斟酌의 形態에 머물러있음에도 樂觀的인 色彩를 띠고 있다. 昇華의 過程은 거의 언제나 欲望의 轉換과 遲延, 或은 快樂의 抑制와 같이 苦痛스럽고 否定的인 抑壓을 隨伴하지만, 森羅萬象·1 에서 淨化 作用으로서의 昇華는 그런 抑壓의 否定的인 內容과는 相當한 距離에 있는 作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昇華의 過程을 거친 썩은 물은 待機 속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地上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되돌아옴으로써 天上과 地上은 하나의 圓環 속에 놓이게 된다. 구름과 물이 다르다면 地上과 天上은 어떤 連繫點도 없이 分裂만을 永遠히 繼續할 뿐이다. 그 둘은 그저 斷絶된 世界에 不過하다. 一旦 天上의 가벼운 물과 地上의 썩은 물이 同一視됨으로써만, 물이라는 物質의 屬性에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循環'이라는 새로운 屬性이 追加된다. 그 `循環'이야말로 썩은 물의 淨化를 可能하게 하는 運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물의 循環性을 깨닫는 일은, 現在에는 아직 潛在的인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는 運動들을 未來와 過去로 擴張된 時間의 地平 속에서 把握할 수 있는 能力을 必要로 한다. 瞬間 속에서 永遠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只今 이 瞬間'의 前後에 포개어져 있는 時間을 볼 수 있는 詩人만이 물의 循環性을 깨닫고, 淨化의 可能性을 豫感한다. 森羅萬象·1 의 話者는 썩은 물 속에 "구름 한 點 어린 것"을 一瞥함으로써 現在 속에 充溢한 時間과, 거듭되는 `森羅萬象'의 宇宙的 循環을 感得하고 있다. 物價에 자리한 詩人은 썩은 물이라는 潛在的인 質料 속에서 淨化된 구름이라는 未來胎를, 그러나 同時에 發見하는 것이다. 그에게 언젠가 到來할 未來胎(구름)는 潛在胎로서의 質料(썩은 물) 안에 內在되어 있다. 그는 現在와 未來를, 現實과 꿈을 한꺼번에 생각하며, 그 안에서 存在하는 것(sein)과 當爲的인 것(sollen)은 劇的으로 同一性을 獲得한다. 그러한 同時性과 共存의 가장 含蓄的이고 卓越한 象徵은 `구름을 反映하는 썩은 물의 이미지'에 依해 表現된다. 그 反映的인 이미지는 `물과 구름'李 아니라 `물-구름'이다. 물과 구름을 別個로 여기지 않고 물-구름으로 認識하는 詩人은 이제 "맑은 나도 더러운 나도 / 앞서거니뒤서거니 함께 / 내 안에서 걷고 있다"( 속살·1 )고 淡淡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더러움과 맑음이 循環하는 물의 軌跡 속에 있는 等價的인 部分임이 밝혀진 後에야 그는 비로소 더러움 또한 分明히 自身의 一部이라는 것을 容認할 수 있다. 森羅萬象·1 의 觀照的이고 餘裕로운 語調는 이러한 寬容의 姿勢와 不可分의 關係에 놓여 있다. 물-구름의 이미지가 없이, 또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行爲가 없이, 果然 이 모든 깨달음과 豫感이 可能할 수 있었을까?

물-구름을 바라보는 行爲가 얼마나 本質的인 重要性을 가지고 있는지는, 假令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b) 썩은 물은 하늘을 비춘다―c) 썩은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와 같은 內容所의 짝이 `d) 썩은 물에 구름이 어린다―e) 썩은 물은 돌아올 것이다' 와 같은 內容所의 짝과 얼마나 克明한 對照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點을 한 番 눈여겨보면 明確해진다. 하늘만을 비출 때,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구름을 비출 때만이 그 反映的인 물은 다시 돌아올 물이 된다. 卽, 循環하는 물이 된다. 이것은 分明히 넌센스다! 하지만 그러한 넌센스와 夢想이 없이, 어떻게 우리는 썩은 물과 구름이 같고, 그것들이 자리를 바꾸며 循環하고, 마침내 "또 오고 / 또 돌아"올 것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구름을 反映하는 물의 이미지가 없이 天上과 地上, 當爲와 存在는 하나의 圓環 속에 자리할 수 없다. 구름을 비추는 瞬間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는 물-구름이 된다.

이제 땅에도 구름은 있고, 하늘에도 물은 있다. 前科學的인 精神에게 있어서 물과 大氣의 循環에 關한 科學的 常識은 重要하지 않다. 重要한 것은 썩은 물 속에 구름이 비치고 그 구름을 보면서 冥想에 잠기는 일이다. 우리는 經驗을 통해서, 썩은 물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그 물은 事物을 더 훌륭하게 비추어준다는 事實을 알고 있다. 反映的인 물이 지닌 `腐敗와 反映의 正比例 法則'에 依해서, "썩은 물도 / 물은 물"일 뿐만 아니라, 썩었으면 썩었을수록 그 물은 더 좋은 물이 된다. 물의 內部에서 進行되는 腐敗와 混沌이 增加하면 增加할수록, 그 물은 `구름'이라는 昇華의 꿈을 더욱 뚜렷하게 反映하고, 詩人은 그 앞에서 더욱더 자주 冥想에 잠길 것이기 때문이다. 水面에 비친 구름으로부터 물의 循環性을 깨닫는 精神에게 있어, 昇華의 可能性은 이미 循環하는 물의 內在的인 屬性일 뿐만 아니라 썩은 물(反映的인 물)의 그것이기도 한 것이다. 詩人의 思惟 속에서 無花果 의 꽃이 열매의 內部에서 滿開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 그게 無花果 아닌가 / 어떤가 (2: 191)), 白色의 구름은 썩은 물의 진창 속에서 피어오른다. 김지하의 물 이미지는, 高陽·淨化·調和된 形象(구름/속꽃)을 저 混沌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質料(물/果肉) 속에 이미 潛在해 있는 可能性으로 把握하는 力動的인 思惟의 한 類型을 열어 보여준다. 그것은 靜態的인 現在를 可能性이 들끓고 있는 곳으로 把握한다는 點에서 力動的이며, 그 可能性을 썩음/더러움/혼돈/모순 等이 뒤얽혀 있는 `運動'으로 把握한다는 點에서 또한 力動的이다. 그러니 `混沌과 더러움을, 否認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누구보다도 混沌과 더러움에 찌든 이 땅의 自我로 인해 괴로워해온 詩人이, 當爲와 存在 사이의 不和로 苦痛받아온 詩人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當爲-存在 間의 分裂로 괴로워하던 悲劇的 나르시스는 이제 썩은 물(存在/質料)과 구름(當爲/形象)의 華嚴的 얽힘을 洞察함으로써 巨大한 肯定에 到達한다. 나로서는 그러한 肯定의 强度와 數量을 斟酌조차 할 수 없다. 그 肯定은 경이롭고, 섬?하다. 이렇게 力動的인 肯定性은 마침내 逆旅 와 같은 絶唱 속에서 蓮꽃이라는 佛敎的 象徵을 利用하여 불의 形象(붉은 蓮꽃)을 물이라는 質料(진흙창) 속으로부터 開花시키고, 兩者 間의 親和와 潛在的인 하나됨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내 이마는 記憶의 집

悔恨과 願한 가득한 진흙창

蓮꽃 한 송이 일찍 피어

이마를 가르며 붉게 벌어진다

― 逆旅 一部, (2: 302)


이로써,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는 김지하의 力動的인 詩的 旅程을 理解하는 重要한 圖像으로 자리한다. 김지하는 單一한 命題로 定義되기를 끊임없이 拒否하는 現在 進行形의 詩人이다. 初期에 挑戰的인 불의 上昇 美學으로 世上과 激烈하게 맞부딪쳐온 靑年 詩人은, 反映的인 물의 이미지에 기대어 力動的인 更新을 이루어낸다. 詩人은 물을 굽어보는 姿勢로 初期의 英雄主義的 自意識을 修正하고, 地上的인 存在에 對한 肯定을 통해 當爲와 存在의 分裂을 감싸안기에 이른 것이다. 그 過程을 同行하는 물-구름이라는 도상은 끝내 逆旅 라는 象徵的인 除名의 後期詩에 와서, `불'-`물' 두 元素의 根源的인 對立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둘 모두를 감싸안는다. 모밀을 태우는 太陽과 더운 피와 횃불이 支配하는 저 黃土 의 世界를 理解하기 위해서, 또 愛悋 以後의 變貌가 보여주는 斷絶과 連續을 多角的으로 理解하기 위해서, 구름과 反映的인 物議 도상은 김지하 詩의 動力원의 하나로 注目되어야 할 必要가 있다. 그렇다. 反映的인 물의 想像力은 詩的 原動力의 하나일 뿐이지 김지하가 到達한 窮極的인 解決點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다음과 같이 사뭇 切迫한 語調로 "내 마음을 쳐라 / 불타는 노을이여 / (…) / 맑은 샘물에다 舊怨 請하는 / 散亂한 내 마음 / 더욱더 散亂하게 쳐라"( 쳐라 , 2: 283) 외치면서 물에 依支하는 自身을 불의 힘으로 否定한다



1) 물과 불의 二元的 對立은 主體의 分裂이라는 主題와 聯關될 때 보다 記述的的인 힘을 證明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김지하가 다루고 있는 中心的인 主題 가운데 하나는 바로 `分裂된 主體'의 問題이며 여기에는 男性性-女性性, 世界-主體의 對立과 融合이라는 가볍지 않은 主題들이 密接한 聯關을 맺고 있다. 槪要만을 말하자면, 김지하에게 있어서 불은 男性性의 表象으로서 물은 女性性의 原理로서 기능한다고 여겨진다. 물과 불이라는 存在의 動力이 어떤 力學 關係 속에 서로의 힘을 調整하고 변화시키는가 하는 問題와 男性性과 女性性의 問題, 分裂된 主體의 問題는 相同 關係에 있다.

2) 김지하 詩全集 2卷: 牡丹 위의 四更 , 솔, 1993, 53쪽 (앞으로 김지하의 作品引用은 卷數·面數만을 表記)

3) 칼 구스타프 융 編著, 정영목 옮김, 사람과 象徵 , 까치, 1995, 68∼69 쪽 參照

4) 도스토예프스키, 李東鉉 譯, 地下生活者의 手記 , 문예출판사, 1972, 2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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