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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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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 오늘날 우리가 代案을 찾는 方式


金演


1. 프롤로그
2. 안토니아는 돌아온다
3. 마를린 고리스의 選擇
4. 加害者와 被害者들
5. 굽은 손가락:"언젠가 나아지리라는 希望을 갖는 誤謬를 참을 수 없다"
6. 안토니아의 世界
7. 에필로그


1. 프롤로그

오늘날 우리에게 映畫는 무엇일 수 있는가? 그것은 事業家의 企劃商品이기도 하고, 戀人들의 消費品이기도 하고, 無聊한 이들의 가십이기도 하며, 고단한 者들의 白日夢이기도 하다. 映畫는 그 모든 것이기에, 同時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내 存在 속의 映畫, 우리들의 映畫, 그 時代의 映畫는 늘 再定義되기를, 各自의 對答을 기다린다. 映畫에 對한 定見은 삶의 여러 局面에 對한 政見과 別個로 存在하지 않으므로, 그 對答은 映畫 自體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映畫는 映畫 以上의 것이 된다. 世上은 映畫 속으로 收斂된다.


2. 안토니아는 돌아온다.

벌써 一年쯤 되었는가. 네덜란드의 映畫 한便이 東아시아의 고단한 삶 속으로 들어왔다. 마를린 고리스(Marleen Goris) 監督의 <안토니아스 라인="">. 이 映畫는 무엇보다 對案에 關한 映畫다.

어느날 안토니아는 딸과 함께 故鄕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映畫에서 떠나는 者들을 많이 보아왔다. <허공의 질주="">에서 리버 피닉스, <졸업>에서의 더스틴 호프만, 故鄕을 벗어나 世上을 向해 나아가는 征服者 펠레...어찌된 영문인지 映畫는 그들의 以後에 對해 이야기하지 않고 끝나지만, 우리가 그들의 그날 以後에 對해서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마도 世上을 만났을 것이고, 그 世上의 鄙陋한 一部가 되었거나, 아니면...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다, 안토니아는 돌아온다. 그 戰爭의 廢墟를 딛고 저렇게 딸의 손을 잡고 堂堂히 돌아오는 이를 이제껏 映畫에서 본 적이 없었다. 안토니아가 떠돈 그 20年 동안에는 戰爭이 있었고, 歸鄕은 곧 무엇인가를 다시 始作해보고자 하는 代案的 움직임을 表象한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그 모든 辛酸함을 겪어내고 돌아온 者의 이야기이다.


3. 마를린 고리스의 選擇

마를린 고리스는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는 한篇의 映畫 속에 對案的인 삶을 提示하고자 몇가지 方法을 選擇하였다. 먼저 죽음을 앞둔 안토니아의 回顧로 始作되는 이 映畫는 안토니아의 一生에 對한 報告인 同時에 안토니아로부터 始作되는 `新人間'들의 系譜에 對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新約에서 아브라함으로 始作되는 家計의 敍述만큼이나 莊重한 意味를 지닌다. 왜냐하면 系譜的 레토릭은 人間의 歷史를 새로 쓰고자 하는 欲望에서 發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膽大한 欲望은 많은 人間들의 이야기와 累代에 걸친 歷史性을 必要로 하였다. 그리고 映畫에서 頻繁히 쓰이는 나레이션은 映畫 內의 時間을 統制하며 4代에 걸친-안토니아의 어머니까지 包含한다면 5代에 걸친-유장한 家族史를 單 한篇의 映畫 속에 담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한便 이 映畫는 깊은 歷史的 社會的 關心을 가지고 있음에도 不拘하고 自身의 空間을 특정한 社會歷史的 한 時點으로 가두지 않는다. 勿論 우리는 登場人物의 모습에서 그곳이 西歐社會라는 것을, 基督敎文明圈이라는 것을, 世界大戰이 끝난 後라는 것을 斟酌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메시지를 制約하기 위해 映畫 前面으로 드러나거나 하지 않는다. 특정한 歷史的 事件과 媒介되지 않은 채 普遍性을 確保하고 있는 映畫空間은 神話的 空間에 가깝다. 비록 특정한 社會歷史的 關心에서 浸潤된 映畫라 할지라도 이러한 神話的 試圖가 成功할 境遇, 各 人物들은 典型性을 띠게 되고 에피소드는 停戰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境遇가 頻繁하다.

畵面을 좇는 카메라의 境遇도, 主觀的인 時點을 나타내는 움직임은 極히 意圖的인 境遇를 빼고는 相當히 節制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벌어지는 狀況을 淡淡하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우리가 情緖的 喚起를 얻는다면 그것은 카메라가 우리를 劇中 人物과 一致시켰기 때문이거나, 劇的 大事件에 依해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映畫의 차분한 呼吸이 우리 個個人의 分散된 體驗을 悠長한 삶의 흐름 속에 轉移시키는 데 成功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觀客이 映畫를 통해 얻는 情緖的 高揚感은 실로 理性的인 理由에 依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 映畫가 노리는 對案的 삶의 깊이와 넓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單線的 事件은 不足하다. 따라서 이야기는 하나의 劇的인 事件을 위해 起承轉結로 構成되어 있지 않다. 映畫의 머리를 열고 닫는 것은 안토니아의 一生이라는 單位일 뿐이다. 劇的인 事件을 前後로 이루어지는 緊張의 高調와 解消를 바라기 보다는, 이 映畫는 삶의 代案을 提示하고자 하는 膽大한 目的에 걸맞게 여러 가지 서브 풀롯을 풀어놓는다. 構成의 힘이 있다면 모든 것이 時間 속에 흘러간다는 式의 配列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映畫가 모두어진 內的 흐름을 가질 수 있었던 理由는 그것이 한 人間이 人生에서 능히 마주할 수 있는 經驗을 生老病死의 韻律에 맞추어 追跡했기 때문이다. 이런 境遇, 이야기에서 重要한 것은 劇的 構造가 아니라 캐릭터들이다. 旣存 삶의 秩序를 批判的으로 檢討하기 위해 섬세하게 選擇된 그들. 典型性을 띠고 있는 그 人物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든다.


4. 加害者와 被害者들

이 映畫가 나오는 많은 人物들은 크게 서너가지로 유형화해 불 수 있다. 惡으로 表象되는 逼迫하는 者들, 그리고 逼迫받고 疏外된 者들, 그리고 그 너머의 굽은 손가락과 안토니아네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안토니아스 라인="">을 女性主義 視角으로 讀解하는데, 그러한 讀法을 따를 境遇, 이 映畫의 人物軍 中에서 農夫 댄 一家는 典型的으로 男性 爲主의 秩序를 象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暴力과 强制의 原理가 支配하는 그 世界의 犧牲者인 디디는 안토니아네 사람들에 依해 救助된다. 댄-피트 라인의 世界와 안토니아의 라인 間의 葛藤은, 안토니아가 돌아와 처음으로 까페에서 마주쳤을 때, `如前히 못생기고, 性質이 더럽군'하는 댄의 一喝로부터 始作되어, 댄의 아들 피트가 안토니아의 孫女 테레사를 强姦하는 데 이르러 極點에 達한다. 이때 加하는 안토니아의 膺懲 亦是 非男性的 世界의 그것이다. 이 밖에도 이 映畫를 女性主義 視角으로 볼 수 있는 要素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안토니아네 家計가 旣存의 人間事와는 달리 女性 中心의 歷史가 된다는 것은 勿論 時事的이다. 안토니아네는 기꺼이 아비 모를 子息을 낳으며, 안토니아 스스로 아들과 男便이 必要하지 않느냐는 農夫 바스의 質問에 그런 것이 왜 必要하느냐고 反問한다. 그런데 정작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特徵的인 것은 그러한 女性主義的 要素를 여느 類似한 境遇에서보다 아주 深奧한 地點으로부터 確保하였다는 點이다. 그것은 明示的인 男性的 惡과 對決하는 에피소드에서보다는 안토니아의 世界觀과 굽은 손가락의 世界觀이 辨別力을 가지게 되는 地點에서 確認하게 될 것이다.

그밖에 映畫에서 加害者들에 屬하는 人物群들로는 硬直되고 僞善的인 信仰에 사로잡혀 있는 聖職者들이 있다. 僞善에 찬 마을의 神父에 關한 에피소드, 敎會에서 가르치는 죽음의 幸福을 떠나 삶의 幸福을 찾아가는 新婦. 그는 世俗의 欲望을 肯定하여 還俗한 끝에 妊娠腸이 레打와 結婚한다. 그리고 카톨릭 戒律 때문에 아래層 사는 新敎徒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보름달이 뜨면 늑대울음을 울다 죽고마는 미친 마돈나 이야기. 이 에피소드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삶을 制約해온 宗敎的 要素에 對한 批判을 遂行하고 있다.

그리고 이 映畫에서는 主流로부터 逼迫받는 많은 方外者들이 나온다. 이들은 앞서 擧論한 加害者들의 對蹠點에 서 있다. 댄-피트네서 苦痛받는 디디, 아이들에게마저 늘 當하고 사는 마을 삼룡이 루니 립스, 마을에서 二十年 동안 살고도 異邦人 取扱을 받는 홀아비 農夫 바스, 기꺼이 애비없는 모르는 子息을 만들며 나중에는 同性愛者가 되는 다니엘라... 이들은 모두 안토니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眞景을 맛보게 된다는 共通點이 있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아네의 그 너른 앞마당의 會食자리로 招待된다.

이와같은 人物群들이 說得力있게 그려지긴 했지만, 惡을 象徵하는 무리들과, 그로부터 逼迫받고 主流秩序로부터 밀려난 무리들로 大別되는 對稱的 構圖는 事實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제 이 映畫를 旣存의 것들과는 다른 것으로 만드는 두가지 類型의 人間들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그것은 굽은 손가락과 안토니아이다.


5. 굽은 손가락:"언젠가 나아지리라는 希望을 갖는 誤謬를 참을 수 없다"

逼迫하고 逼迫당하는 이러한 彌滿한 惡의 世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마도 于先 싸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굽은 손가락이 戰爭내내 레지스탕스로 싸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世上의 惡은 如前히 繼續된다. 그래서 굽은 손가락은 말한다, "苦痛은 例外가 아니라 日常的이다." "變하는 것은 없고 달라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甚至於 사람들은 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굽은 손가락은 單純한 行動價가 아니라 그것에 對해 생각하는 思惟의 專門家이기도 하였다. 굽은 손가락은 말한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偶然때문이라니 不合理하다." 이 映畫에서 굽은 손가락은 古典的 意味의 哲學者賞을 象徵하는 듯이 보인다. 그는 分科學問의 하나로 물러앉기 前 包括學으로서 哲學을 하는 이처럼 人間의 뭇 知識을 網羅하고 있다. 그 知識을 꿰는 힘은 理性이다. 그는 死後의 舊怨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理性的으로 正當化되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이며, 現實的으로 그러한 믿음은 도리어 인간세에 災殃이나 招來해왔다는 것이 그의 歷史的 洞察이다. 그의 理性으爐보건대, 人類는 全혀 進步하지 않았다, 世界는 如前히 惡으로 彌滿하다, 우리는 이 世界를 選擇한 적이 없다, 이 모든 惡은 存在의 偶然性에 기초해 있다.... 굽은 손가락은 쇼펜하우어를 빌려 말한다. "이 世上은 苦惱하는 靈魂과 惡魔로 가득찬 地獄이다." 굽은 손가락의 딜레마는 끝이 없다. 하여, 그는 이 苦惱로서 自身의 집을 만들고,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밖으로 永永 나오지 아니하였다.

굽은 손가락의 苦惱와 關聯하여, 映畫를 보면서 내가 숨죽이며 지켜보았던 場面은 굽은 손가락의 弟子이자 안토니아의 孫女인 테레사가 果然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苦悶에서 結局 出産하기로 決心하기까지의 過程이었다. 世上은 地獄이며, 여기에 새로운 生命을 던진다는 것은 곧 태어날 누군가에게 苦痛을 附與한다는 意味와도 같다.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前提를 認定하는 限 그것은 너무도 論理的인 結論으로 보이기 때문에. 事實 어쩌면 우리가 人生에서 할 수 있는 唯一한 眞正한 判斷과 選擇이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決定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環境 속으로 自身의 選擇과 무관히 떨어진다. 勿論 우리는 그 속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자잘한 判斷들을 하고 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주어져 있는 커다란 삶의 條件 속에서의 選擇들이다. 事實 그 條件 自體에 對한 選擇과 判斷은 排除되어 있다. 새로운 生命을 이 世界에 들어서게 할 것인가 하는 判斷이야말로 唯一하게 그 條件에 對한 判斷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選擇할 수 있는 것은 그 條件이 가진 境遇의 數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라는 條件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二分法的 判斷에 不過하긴 해도, 그것은 正말 唯一한, 條件 自體에 對한 判斷인 것이다. 이런 意味에서 보자면 아이의 出産은 적어도 그 瞬間까지 自身이 살아온 生에 對한, 世上에 對한 評價의 瞬間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어찌?怜킬? 이 世上의 삶에 對한 肯定의 表示이다. 굽은 손가락은 論理的이기 이를 데없이 自身이 살아온 이 世上에 對한 判斷을 아이를 낳지 않고 또 及其也는 自身의 生을 버림으로써, 實踐으로 貫徹했다.

그렇다. 그는 正말 죽었다. 그에게 厭世와 自殺은 觀念의 遊戱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더 以上 '생각'하고자 하지 않는다."


6. 안토니아의 世界

굽은 손가락이 보기에, 인간세는 苦痛과 無意味의 世界이다. 그곳에 生命體를 내보내는 것은 地獄에다 어린아이를 던지는 일이므로 차마 못할 짓이다. 그는 그렇게 테레사의 出産에 對해 反對하였다. 하지만 안토니아네 사람들은 낳고 또 낳아, 家計를 이루었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그 삶의 肯定에 對한 到底한 正當化는 어디서 온단 말인가?

意味的 動物로서의 人間. 사람은 밥 없어도 못살고, 社會가 없어도 못산다지만 意味가 없어도 못산다. 映畫 <빅칠 big="" chill="">에서는 제프 골드브럼이 섹스가 重要하냐, 合理化가 重要하냐는 多少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質問을 던지면서, 當然하다는 듯 合理化는 單 하루도 안하고 살 수 없으니까 合理化가 重要하다는 結論을 내리는 場面이 나온다. 사람은 意味가 없으면 못사니까, 끊임없이 自身의 삶에 對해서 合理化를 試圖한다. 그러한 意味의 追求는 내가 왜 이짓거리 하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지. 왜 먹고 살려는데? 子息새끼 때문이지...라는 諮問과 對答의 連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물음은 演繹的 探究의 形態를 띤다.

아, 그렇다면 意味는 演繹에서 온다. 그리고 그 演繹의 사슬은 結局 어떤 基礎를 必要로 한다. A의 合理化를 위해서는 B가 必要하고 B의 合理化를 위해서는 C가 必要하고...이런 意味追求의 사슬은 가장 根底에서 어떤 믿을 만한 根據를 必要로 한다. 始作點이 없는 한 우리는 우리 삶의 意味를 測量할 道具가 없다. 이 始作點을 '基礎'라고 불러보기로 하자. 그럼 只今까지 사람들은 무엇이 그 基礎가 될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나? 卑近한 境遇 그 基礎는 子息 새끼일 수도 있겠으나, 좀 더 따져보면 많은 이들이 그 끝에서 神이라는 것을 設定하곤 했다. 거칠게 나마 西洋은 中世 때까지는 적어도 神이 그러한 基礎로서 壓倒的인 說得力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神이라는 것 自體에 質問을 던질 때 그것은 果然 튼튼한가? 人類의 知性史가 보여주듯이 人間의 執拗한 指摘 追求는 虛無的 契機를 감추기 있기 마련이어서, 神이란 때로 그 存在를 懷疑하는 이들 앞에 허약하다. 사람들은 누가 神을 創造했는지는 묻지 않는다는 不平에 答하여 굽은 손가락은 말한다: "神을 믿는 이들의 悲劇은 믿음이 知性을 支配해버린다는 事實이지." 게다가 歷史에 造詣가 깊은 그의 洞察에 依하면, "이제껏 宗敎는 죽음과 破滅을 招來했다."

그래? 그렇다면, 그 神을 代身할만한 基礎는 굽은 손가락의 말을 빌리자면 知性, 或은 理性인지 모른다. 事實 近代 以後 西洋에서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어왔지 않는가. 理性이란 分明히 寶石같은 人間의 能力이긴 해도 果然 그것이 神이 차지하고 있었던 그 너른 空白을 메울만큼 대단한 것인가? 神을 믿는 이들에게 神은 살 理由를 주었지만, 어떻게 보면 理性의 化身이라고 할 수 있는 굽은 손가락은 結局 自殺衝動을 이기지 못했다. 아니 그의 境遇, 自殺은 理性으로부터의 要請에 가까왔다.

이러한 基礎라는 點에서, 다시 묻게 된다. 世上의 짐승스러움에 對해 누구못지 않게 잘 알았던, 안토니아의 삶과 世界에 對한 肯定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게 그것은 안토니아가 씨를 뿌릴 때 背景을 이루던 그 自然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나무들, 穀食들, 風景들로 채워진 空間으로서의 自然.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가 가는, 그리고 變함없이 또 오는 時間으로서의 自然이다. 이 自然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있다. 自殺하는 나뭇잎은 없다. 죽은 듯 떨어졌던 나뭇잎은 봄이면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다. 生命은 自殺하지 않고, 그렇게 저물어 갈 뿐, 그리고 後孫을 다시 이을 뿐. 안토니아는 이러한 自然이 베푼 時空間에 스스로를 無理없이 位置지운다. 살고자 하는 强한 欲求와 肯定은 무엇보다도 理性이라는 虛空보다는 그 큰 自然의 一部로 우리가 位置지워져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아는 者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출 수 있는 唯一한 춤'임을 알고 살아내는 者이다. 이렇게 보자면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나 自殺하는 일은 結局 自然과 步調를 맞추는 일에 根本的으로 違背되는 일이 된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마를린 고리스는 많은 場面들을 自然을 바탕으로 한 미장센에 割愛하고 있다. 안토니아네 사람들은 그 自然을 등에 지고 밭을 일구고, 牛乳를 짜며, 꼴을 벤다. 그 自然 속의 모습은 놀랍게도 그 自體 意味로운 삶의 무늬처럼 보인다. 自然 속의 勞動. 特히 映畫에서 反復되는, 씨를 뿌리며 걷는 안토니아의 壯大한 걸음걸이의 이미지는 印象的이다. 그리고 沙溪가 바뀌어가는 自然, 그 속에 서 있는 無心한 나무들. 全景으로 잡은 많은 自然의 모습들. 이러한 境遇, 自然의 씬은 慣習的으로 映畫言語에서 使用되는 두가지 用例, 卽 時間經過를 나타내는 인서트 샷이나, 그 自然을 바라보는 이의 心狀을 代身 表現하는 샷, 以上의 어떤 것이다. 이 映畫에서 自然은 世上에 가득찬 惡과 不溫한 삶의 條件들을 견디어내며 나아가는 안토니아의 哲學을 表象한다.

自然이란,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말이 暗示하는대로, 그 自體 舊足跡이다. 그냥 "날들은 한株價 되고 한주한週 모여 一年이 되는, 때가 되면 들은 푸르고, 또 이윽고 다시 褐色으로 變하는" 그런 곳이다. 이 자리는 意味 追求의 演繹的 答을 얻는 世界라기보다는 그 質問을 잊는 空間이다. 그 質問을 잊음을 통해 애初에 가졌던 疑問을 解消한다. 이 스스로 그러한 世界. 이것도 神의 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神이라는 槪念에 좀 더 너그워진다면 말이다. 或은 理性도 그 안에 安居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理性에 對해 强迫觀念을 갖지 않는다면. 여기서 우리는 마를린 고리스가 안토니아라는 人物을 創造해내는 過程에서 그間 西歐 知性史의 흐름을 反映했음을 알 수 있다.

惡, 苦痛, 無意味에도 不拘하고 견지되는 삶. 그것에 對한 大肯定을 可能케하는 原理인 自然은 <안토니아스 라인=""> 곳곳의 서브플롯들을 모두어내는 內的 原理로 기능한다. 一例를 들어 안토니아가 基督敎의 硬直된 形態에 對해서 批判할 때, 그女가 肯定하는 것은 우리가 自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人間의 健康한 欲望이다. 新舊敎徒의 壁에 犧牲物이 된 미친 마돈나의 境遇, 僞善的인 神父의 에피소드, 行進曲風의 音樂에 맞추어진 여러 性愛場面은 모두 關聯된 좋은 例이다. 그리고 自然의 世界에서는 죽음조차 淡淡하고 때로 愉快하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모두 自然이라는 보다 큰 原理 內에서 包攝된다.

惡, 苦痛, 偶然을 넘어서 삶을 肯定하는 原理로서 自然, 健康한 欲望을 肯定하는 態度로서의 自然은 그 自體로서 하나의 代案的 삶의 態度를 提案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人間다운 삶을 가로막는 많은 障礙物들을 批判하고 代案을 提示하는 代表的인 方法論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人間本然으로서의 自然은 對案的인 삶의 形態를 追求하는 모든 試圖에서 하나의 準據로서 作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를린 고리스가 對案的 삶을 追求하는 監督이라고 할 때, 그女가 自然에 착反해 있는 것은 어찌보면 當然하다. 旣存의 不合理한 모든 것은, 人間의 自然스러운 幸福과 對照 속에서 그 矛盾이 도드라진다. 抑壓的인 것들은 元來 그러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로 正當化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抑壓的 人爲의 所産으로 還元시키고 代案을 追求하고자 할 때, 우리의 自然狀態가 願하는 것이 果然 무엇인지 되물어질 必要가 있는 것이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는 家父長制, 抑壓的인 宗敎 等이 모두 그런 觀點에서 再檢討되며 흔히 非正常으로 取扱되는 同性愛의 境遇는 그것이 自然的일 境遇 오히려 肯定되는 樣相을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삶에 對한 大肯定의 原理, 批判과 代案의 原理로서의 自然은 마침내 우리 存在가 뿌리박고 있는 歷史性의 換氣에까지 이어진다. 안토니아는 永遠히 죽는 것은 없다고 말하며, 그女의 家系는 오래 持續된다. 이것은 有의 哲學이다. 自然의 性質은 죽지 않고 살아 오래 持續된다는 데 있다. 그것은 그.러.게. 되어 있다. 生物은 그 本來의 意味에서 살아져야 한다는 그 自體의 目的性을 갖는다. 따라서 삶은 살아지고 後孫은 낳아 길러진다. 이러한 存在의 持續으로서의 自然은 마침내 自身의 內包를 歷史性에까지 擴大한다. 왜냐하면 삶은 그렇게 持續되고, 그 持續은 累積되면서 歷史的 次元을 얻기 때문이다. 마를린 고리스가 안토니아의 이야기를 累代에 걸친 家族史의 形態로 構想한 것은 決코 偶然이 아니다. 映畫의 거의 마지막 部分, 안토니아는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會食을 갖고 農夫 바스와 함께 춤을 춘다. 거기에 交叉 編輯으로 안토니아의 지나간 歲月들이 보여진다. 놀라와라, 그 場面, 그러니까 그 지나간 時間을 보는 時點은 늙은 안토니아가 아닌 어린 曾孫女 사라의 그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안토니아의 過去는 늙은 者의 追憶이 아니라 어린 曾孫女가 느끼는 到底한 歷史性으로 자리매김된다. 안토니아는 때를 알아 무덤을 찾는 코끼리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寢牀에 눕지만 그 옆에는 딸에서 曾孫女에 이르는 歷史가 죽음을 지킨다. 마를린 고리스가 안토니아가 죽기 直前 해뜨는 아침의 컷을 揷入하는 것도 決코 偶然이 아니다. 마침내 안토니아는 눈을 감고, "어떤 것도 끝은 없다"라는 나레이션으로 映畫는 끝난다.


逼迫하고 逼迫받는 世界, 惡과 苦痛과 無意味가 버섯처럼 猖獗하는 世界, 그곳에서 굽은 손가락은 自殺하고 안토니아의 삶은 오래 持續되었다. 안토니아의 삶이 보여주는 自然의 原理는 우리의 知的 絶望에도 不拘하고 抛棄할 수 없는 삶의 持續이라는 當爲와 元來 自然스러운 人間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고 어떤 것이어야 하나, 라는 代案的 質問을 同時에 反映한 것이다.


7. 에필로그

우리는 世界와 그 안을 사는 人間 存在에 對해 묻는 많은 映畫들을 보아왔다. 많은 映畫들이 일그러진 人間들과, 우리 精神 속에서 날로 그 領域을 擴大해가고 있는 메마른 沙漠을 보여주었다. 救援을 提示하는 몇몇 啓蒙的, 宗敎的 映畫들이 있었으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있어 그것은 때로 하나의 弄談이었다. 많은 이들은 차라리 加虐的인 마음이 되어 人間에 對한 보다 끔찍한 比喩를 듣고 보기 爲해 기꺼이 어두운 劇場 속으로 行進해 갔다. 그때 우리 마음 어느 한 구석엔가 굽은 손가락은 앙상한 나무처럼 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오늘 우리는 안토니아를 보았다.

映畫에서, 안토니아는 堂堂하다. 다니엘라가 할머니의 葬禮式에서 문득 現實 代身 星霜이 웃음짓는 幻想을 보듯이 우리는 스크린에서 빛나는 저 堂堂한 안토니아를 본다. 映畫가 갖는 이 魔術的인 힘. 映畫는 아마도 우리가 實際로 밤에 꾸는 꿈의 形態와 가장 가깝다 할 것이다. 밤만으로는 不足하여 대낮에도 꿈을 꾸고자 하는 者들은 오늘도 劇場으로 向하여 마음 저 깊숙히 보고 싶었던 것들을 스크린 위에서 본다. 하지만 女性이건 男性이건, 現實의 人間들이 안토니아와 같은 길을 갈 수 있을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人間다운 삶을 위하여 人類가 構想한 많은 理性的 企劃들이 무너진 世紀末의 廢墟에서는 特히 그렇다. 그 廢墟 위로 사람들은 劇場에 가고 나는 묻는다, 우리에게 映畫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이 世上 것이면서 이 世上 것이 아닌 것들에 사람들이 熱狂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이 날것으로서의 世上을 못견뎌하고 있다는 證左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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