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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新春文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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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號로서의 藝術作品과 觀客의 役割:
김용철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김주환(64年 서울 出生, 서울大 政治學科와 同大學院 卒業, 이탈리아 볼로냐大學 記號學 博士課程 修了)


觀客은 決코 被動的으로 作家가 作品을 통해 提示하려는 것을 單純히 받아들이는 存在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觀客이 作品을 받아들이고 解釋하는데 있어 無限한 自由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觀客의 役割을 올바르게 評價하려면 우리는 하나의 記號로서의 美術作品이 어떻게 知覺되고, 記號化되고, 解釋되는가 하는 過程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記號生産理論에 따르면, 하나의 作品을 鑑賞하기까지 觀客은 세 段階의 行爲를 成就해야만 한다. 첫째는 物質的 對象을 知覺하여 知覺片鱗을 生産하는 段階이며, 둘째는 그 知覺片鱗을 記號化하여 作品으로 받아들이는 段階이고, 셋째는 作品을 鑑賞하여 그 意味를 把握하고 美的 感興을 얻는 段階이다. 다시 말해서 觀客은 遲刻하기, 記號化하기, 鑑賞하기라는 세 가지 "作業"을 해야 하며 作家는 이러한 觀客의 "作業"李 成功的으로 遂行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이 글의 目的은 美術 作品의 意味가 觀客과 作品 그리고 作家 사이의 밀고 당기는 力動的인 關係 속에서 어떻게 生産되는가 하는 것을 記號生産理論과 김용철의 作品을 中心으로 살펴보는데 있다.


I. 記號生産의 三重三角形 모델

一般的인 記號 生産의 세 段階 過程은 三重 三角形 모델을 통해 보다 分明히 理解될 수 있다.1 美術作品 亦是 하나의 記號임에 분명함으로 우리는 美術作品이 生産되고 感想되는 過程 亦是 同一한 形態의 三重 三角形 모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도표 1=""> 一般的 記號 生産의 三重三角形 모델

<도표 1="">에 나타난 모델의 基本的 家庭은 畿湖가 物質的 對象, 그 對象에 對한 人間 行爲, 그리고 그 行爲에 依한 生産物'이라는 세 가지 構成 要素의 `三角 關係'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記號生産理論에 따르면, 모든 記號는 두 가지 要素로 이루어진다.2 社會的 意味와 물질性, 곧 物質과 意味의 結合이 記號이다. 그런데 여기서 物質이라 함은 知覺의 對象을 意味한다. 人間에게 知覺되지 않는 것--들리지 않는 소리나 可視光線을 벗어나는 빛 等--은 그 自體로서는 決코 記號가 될 수 없다. 왜 컴퓨터에는 반드시 모니터나 스피커가 달려 있는가? 디지털 情報 그 自體는 決코 知覺될 수 없으며 따라서 畿湖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情報는 반드시 모니터나 스피커를 통해서 人間의 몸에 依해 知覺되어질 수 있는 可視光線이나 소리로 轉換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美術 作品을 包含한 모든 記號는 物質的 基礎를 갖고 있다. 예컨대 油化는 캔버스와 물감으로 構成되어 있고 冊에 쓰여진 글은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道路 標識板은 鐵板과 페인트로 되어 있다. 記號 生産의 出發點인 物質的 對象을 우리는 `記號 原料'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記號 生産은 物質的이며 外部的인 對象인 `記號 原料'에 人間의 行爲가 加해지면서 始作한다. 이러한 行爲가 `遲刻하기'이다. 여기서 굳이 `遲刻perception'보다도 `遲刻하기perceiving'라는 말을 쓰는 理由는 後者가 더 適切하게 力動的인 過程 中에 있는 人間의 行爲를 表現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筆者는 이 `遲刻하기'라는 用語로 서로 密接하게 聯關되어 있는, 그러나 서로 區別되는 두 가지 行爲를 모두 指稱하고자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한 知覺의 對象을 生産하는 것이고 (作家의 境遇), 또 다른 하나는 이미 生産된 對象을 知覺하는 것이다 (觀客의 境遇). 다른 이의 知覺 對象을 生産하기 위해서는 나 自身이 于先 그 對象을 반드시 知覺해야하기 때문에 後者는 前者를 包括하는 槪念이기도 하다.3 遲刻하기는 一種의 物質的 勞動으로 理解할 수도 있다. 遲刻하기와 物質的 勞動 모두 다 (1) 人間이 自身의 몸으로 (2) 自然과 대면하여 (3) 무엇인가 生産해내는 行爲라는 點에서 本質的으로 同一하다. 우리는 對象을 知覺함으로써 知覺片鱗, 卽 知覺된 것percept을 生産해낸다. 따라서 記號生産의 첫 番째 三者關係는 `物質(記號原料)--遲刻하기--지각편린'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作品이 眞正한 藝術的 價値를 지니려면 어떠한 形態로든 作家 以外의 다른 사람들에 依해 知覺되고 評價되어야만 한다. 卽 하나의 記號는 반드시 `社會的 知覺片鱗'을 生産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 主觀的이고도 個別的인 知覺片鱗은 `記號化하기signifying' 라는 人間의 行爲에 依해서 비로소 `記號'가 된다. 그리하여 記號現象의 두 番째 三者關係는 `知覺片鱗--記號化하기--기호'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記號는 `解釋하기'에 依해 그 意味, 卽 `解釋體interpretant'를 實現해 낸다.4 따라서 記號現象의 세 番째 三者關係는 `記號--解釋하기--해석체'이다. 記號現象의 세 가지 三者關係度 모두 商品生産의 境遇처럼 `物質的 對象--人間의 行爲--生産된 것'이라는 同一한 構造를 갖는다.

여기서 첫 番째, 두 番째 하는 것은 說明의 便宜를 위한 區分일 따름이지 記號現象이 꼭 그러한 順序에 따라 次例次例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一般的으로 美術을 包含한 一般的인 記號 生産 過程은 오히려 세 番째 關係인 `記號--解釋하기--해석체'부터 遂行된다. 다른 사람들(觀客)에 依해 어떻게 解釋될 것인가 하는 것을 解釋하는 過程을 거친 다음에, 記號化하기에 依해 記號로 生産될 수 있는 知覺의 對象을 만드는 것이다. 講義室에서 漆板에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의 過程을 거친다. 先生이 어떤 單語를 써야 學生들이 제대로 理解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나서, 그 單語를 어떤 크기와 形態로 써야 講義室에 있는 學生 모두가 읽을 수 있을까를 決定한 後, 實際로 손과 팔을 움직여서 글을 쓰는 境遇, 記號生産은 세 番째, 두 番째, 첫 番째의 三者關係를 各各 거쳐서 이루어진다.

交通 信號燈을 例로 들자면, 빨간 불을 知覺하는 것이 첫 番째 段階에 該當하고, 그것을 信號燈으로 把握하는 것이 두 番째 段階이며, 그것으로부터 `멈춤'이라는 意味를 알게되는 것이 세 番째 段階이다. 여기서 우리는 빨간 불을 보고 그것을 파란 不過 관련시켜 (事物과 事物 사이의 關係) 그 사이의 일정한 因果 關係를 樹立할 수도 있고, 또 빨간 불을 自身의 특정한 經驗과 결부시켜 새로운 메타포를 創造할 수도 있다. 卽 自己 自身만의 個人的인 知覺片鱗(經驗)을 社會的인 知覺片鱗으로, 卽 남을 위한 知覺片鱗으로, 말하자면 交換 可能한 知覺片鱗으로 再生産해내는 것이 곧 記號化하기이며, 文學이나 藝術은 모두 本質的으로 이러한 記號化하기의 屬性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記號化하기, 卽 "sign-ifying"은 무엇인가를 記號sign로 만들어내는 行爲를 가리킨다. 言語라는 材料를 가지고 그것을 日常的 言語脈絡과는 全혀 다른 記號體系에 편입시켜 새로운 記號로서 再生産하는 것이 文學이며, 마찬가지로 우리 周圍에 있는 일정한 材料(媒體)를 일정한 記號體系에 편입시켜 새로운 意味를 갖게 하는 行爲가 곧 美術이다. 이러한 "記號化하기"야말로 렘브란트에서 뒤샹에 이르기까지 모든 形態의 美術創作行爲에서 發見되는 共通的인 屬性이다.


II. 美術 作品 生産의 三重三角形 모델과 現代 美術의 意義

이제 美術 作品 生産 過程을 위한 三重三角形 모델을 살펴보도록 하자. 一般的인 記號와 마찬가지로 大部分의 美術 作品의 生産 亦是 세 番째 段階부터 이루어진다. 作家는 어떤 形態와 色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解釋'되어 어떠한 意味 (美的 感興)를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생각한 後, 그러한 意味를 生産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作品이어야 하는지를 決定하여, 그러한 作品을 만들어낼 수 있는 美術 原料를 求해다가 生産하는 것은 典型的인 作品活動 過程이라 할 수 있다.


<도표 2=""> 美術 作品 生産의 三重三角形 모델

觀客은 勿論 첫 番째 段階부터 始作한다. 展示場을 찾아가 作品을 마주하는 瞬間, 觀客은 一旦 作品이라는 對象을 "遲刻"하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觀客은 自身이 遲刻한 것(知覺片鱗)을 하나의 作品으로 받아들여 記號化한다. (이때, 作品 以外의 것, 예컨대 마루바닥, 展示場의 天障이나 壁, 家具, 什器, 照明器具 等은 記號化의 對象에서 除外되어야만 한다. 卽 作品以外의 것들은 비록 遲刻되기는 하지만 作品으로 記號化되지는 않는다.) 그 다음에 鑑賞하기appreciating라는 行爲가 뒤따르며, 그 結果 일정한 美的 感興Aesthetic Satisfaction을 얻게 된다.

<도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觀客은 作品을 鑑賞하기 前에 遲刻하기와 記號化하기라는 過程을 거쳐야만 한다. 앞사람의 머리에 가려 作品이 안 보인다든지 (遲刻하기의 失敗), 槪念 美術的 作品의 하나로 展示된 椅子를 作品으로 把握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作品이 아닌 展示場의 家具들이나 壁에 얼룩진 것들을 作品으로 받아들인다든지 하게되면 (記號化하기의 失敗) 제대로 된 感傷은 이루어질 수 없다. 現代 美術 以前의 時期에 觀客과 作家 사이에는 遲刻하기와 記號化하기라는 行爲를 當然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一種의 暗默的인 契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觀客이 아무 不便 없이 作品을 知覺하고 記號化할 수 있도록 作品을 만들어 주는 것이 作家의 義務로 看做되었다. 예컨대 繪畫의 境遇는 一定한 프레임 안에 作品을 가두어 놓아 作品을 둘러싼 主義의 環境 (壁이나 家具 等)으로부터 作品을 뚜렷이 區別함으로써 觀客들이 아무 不便 없이 쉽게 作品을 作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記號化할 수 있도록) 하였고, 彫刻 作品은 흔히 壇上 위에 올려놓아 다른 物的 對象들과 뚜렷이 區別시킴으로써 作品임을 今方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時期의 觀客의 能動的 役割은 鑑賞하기 (記號生産의 세 番째 段階)에 限定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世紀에 들어서면서 現代 美術은 觀客에 보다 많은 것을 要求하기 始作하였다. 觀客에게 鑑賞하기(세 番째 段階)에 머물 것이 아니라 記號化하기의 過程 (두 番째 段階)에도 積極 參與해줄 것을 要求하기 始作한 것이다. 미니말리즘이나 슈퍼마티즘, 構成主義, 레디메이드, 槪念美術, 옵틱 그리고 最近 室內外의 環境彫刻에 이르기까지 現代 美術의 여러 흐름에서 共通的으로 發見되는 것은 "이러 저러한 것이 藝術作品이다"라는 旣存의 固定觀念에 끊임없이 挑戰한다는 事實이다. 따라서 觀客은 恒常 새로운 것, 只今까지는 美術作品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을 記號化하여 作品으로 받아들일 것을 끊임없이 要求받고 있다. 예컨대 레디메이드 作品으로 展示된 便器는 그것을 日常生活 속에서의 便器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卽 하나의 藝術作品으로 記號化할 것을 要求한다. 作家는 그것을 記號化할 수 있도록 하는데 最小限의 도움 (便器를 展示場에 옮겨 놓는 것)만을 觀客에게 줄뿐이다. 이처럼 모더니즘 系列의 많은 作品들은 觀客에게 鑑賞하기뿐만 아니라 記號化하기라는 二重의 役割을 要求하고 있다. 이러한 要求는 勿論 觀客에 對한 信賴를 基盤으로 한다. 作品을 作品으로 뚜렷이 記號化해주지 않아도 觀客들 스스로가 이를 作品으로 記號化할 能力이 있다는 信賴가 있어야만 作家들은 觀客에게 이러한 要求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遲刻하기: 觀客에 對한 最大限의 要求와 信賴

只今까지 大部分의 現代 美術은 觀客에게 記號生産의 두 番째 段階인 記號化하기의 努力까지는 要求하였지만, 가장 基本的인 遲刻하기(첫 番째 段階)를 積極的으로 要求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쉽게 知覺될 수 있는 것을 觀客에게 提供하는 것은 作家의 基本的인 義務로 여겨져 온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最近 美國의 몇몇 作家들의 作品은 (意圖하였던 意圖하지 않았던 間에) 觀客의 보다 積極的인 遲刻하기의 努力을 要求하고 있는 듯 하다.


예컨대 풍선껌을 約 6미터 假量 길게 늘여서 한쪽 끝은 天障에 붙이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 붙여둔 톰 프리드만의 作品(無題, 1995)을 보자. 天障과 바닥에 붙어있는 껌 덩어리는 겨우 보이지만 그 中間에 가느다란 실처럼 보이는 部分은 하도 얇아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觀客의 立場에서 보자면 一旦 鑑賞하기와 記號化하기는커녕 첫 段階인 遲刻하기조차 쉽지 않은 그러한 作品이다. 觀客은 이 作品의 鑑賞과 記號化하기에 앞서 細心한 注意를 기울여 一旦 遲刻하기에 成功할 것을 要求받는다. 흔히 미니말리즘의 패러디로 일컬어지는 프리드만의 작고도 微細한 다른 作品들 (어린이用 장난감 찰흙人 "플레이-道"로 빚은 파리나 캡슐에 든 感氣藥 模型 等) 亦是 너무 작고 섬세해서 觀客의 積極的인 遲刻하기의 努力을 要求한다. (그러나 톰 프리드만은 日常生活에서 흔히 볼 수 있는 雜동사니를 利用해서 作品을 만드는 作家로 더 잘 알려져 있다. 卽 그의 作品이 일정한 記號化하기를 要求하고 있다는 事實에 主로 論議의 焦點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事實 그가 장난감 진흙으로 만든 검은 파리 한 마리는 하얀 石膏의 모퉁이에 앉아 있어서 쉽게 "發見"된다. 다만 그것은 크기나 생김새가 너무도 眞짜 파리 같아서 觀客이 그것을 作品으로 記號化하기 어렵다는 程度이다. 이런 點에서 톰 프리드만은 觀客의 遲刻하기에 積極的으로 挑戰하고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只今은 環境彫刻作家로 더 잘 알려진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의 1970年代 作品들 ("表現할 수 없는 것the unrepresentable"의 表現을 試圖했다고 일컬어지는) 또한 觀客들 스스로 遲刻하기의 過程을 깨닫게 해주는 側面이 있으며, 로버트 라이만Robert Ryman의 白色 모노크롬 系列의 作品들도 觀客의 보다 積極的인 遲刻하기를 要求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作品들 亦是 觀客의 遲刻하기 過程에 對한 具體的인 問題意識을 가지고 生産된 것들이라 보기는 어렵다.


寡聞한 탓이겠으나, 筆者가 아는한 只今까지 觀客의 積極的인 遲刻하기의 努力을 意圖的으로 要求하는 一連의 作品을 發表하는 作家는 國內外를 莫論하고 單 한 사람뿐이다. 그는 우리 나라의 젊은 作家인 김용철이다. 筆者가 보기에 김용철은 記號生産의 첫 番째 段階인 遲刻하기의 過程을 話頭로 삼아 觀客에게 遲刻하기-기호화하기-감상하기의 세 段階의 "作業"을 同時에 要求하고 있는 唯一한 作家이다. 김용철은 이미 國內外의 몇몇 評論家들로부터 그 可能性을 높게 評價받은 바 있는 30代의 젊은 作家이다.5 <아트인 아메리카="">의 칼럼니스트 一理露語 하트니Eleanor Hertney는 김용철을 톰 프리드만, 리차드 터틀, 아그네스 마틴 等과 類似하다고 評했지만, 김용철의 作品은 처음부터 計劃的으로 觀客의 遲刻하기에 挑戰한다는 點에서 根本的인 差異點을 지니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不拘하고 그의 變身은 놀라운 데가 있다. 1994年 美國 펜실베니아 大學으로 留學 가기 以前의 김용철의 作品은 大部分 大理石과 靑銅, 石膏, 철 鎔接 等을 利用한 大規模의 雄壯한(?) 것들이었다. 特히 뛰어난 描寫力을 보여주는 커다란 素描와 함께 提示되는 거친 石膏와 鐵骨로 이루어진 大規模의 作品들이 이 時期 김용철 彫刻의 特徵이라 할 수 있다. 그 느낌은 한마디로 우렁차다. 크고 自信感 있는 목소리로 自身의 메시지를 剛하게 傳達하려 한다는 點에서 그것은 雄辯이다. 最近에 "속삭이는 듯 조용한" 作品들과 比較해 본다면, 이 時節의 김용철의 作品들은, 南大門 市場의 장사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골라 골라"하면서 큰 소리로 自身을 팔려한다는 點에서, 獨特하고 커다란 音聲으로 注意를 끌려한다는 點에서, 그냥 지나치려는 손님(觀客)을 絢爛한 몸짓(리듬 있는 拍手와 발구름)으로 半强制로 끌어당기려 한다는 點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이 時期의 김용철은 遲刻하기와 記號化하기는 全的으로 作家의 몫이라는 信念 아래 觀客에게는 但只 "感傷만 할 것"만을 要求했다고 할 수 있다.


美國과 英國에서의 留學 生活을 마치고 歸國한 後 처음 갖는 올해의 一連의 個人戰에서 김용철은 全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于先 그는 더 以上 큰 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들릴락 말락 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주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이기 때문에 觀客은 스스로의 숨소리마저 죽이고 作家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自發的으로 努力해야만 한다. 이런 點에서 김용철의 이番 作品들은 鑑賞하기와 記號化하기뿐만 아니라 記號生産의 첫 段階인 遲刻하기의 過程에도 觀客이 積極的으로 介入할 것을 要求하고 있다. 被動的이며 內心 外面하고 싶어하는 觀客을 莫無可奈로 붙들려 하거나 커다란 목소리로 作家의 主觀을 一方的으로 强要하는 "巨創한" 現代 美術에 길들여진 요즈음의 觀客들에게 김용철의 作品은 新鮮한 衝擊이다. 그의 作品들은 겨우 知覺된다. "보일락 말락"하는 것들이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하는 것은 全的으로 觀客이 얼마만큼 自發的으로 知覺하고자 努力하는데 달려 있다.


IV. 김용철의 作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6

김용철 作品이 設置된 展示場에 들어서는 瞬間 觀客들은 于先 唐慌하게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無言인가 새로운 것, 日常 生活에서 볼 수 없는 藝術的인 어떤 것을 만나리라는 期待와 설렘은 虛妄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네... 뭐가 잘못 됐지?"라는 會議, 絶望, 挫折, 失望이 바로 作家가 一次的으로 意圖하는 바다. 이러한 疑問과 當惑感을 觀客 스스로가 克服하기를 김용철은 期待한다. 이러한 意味에서 그의 作品은 觀客에 對한 대단한 信賴를 바탕으로 한다. 觀客 스스로가 自身의 挫折을 克服하고, 被動的인 姿勢에서 脫皮하여 能動的으로 무엇인가 찾아 나서는 積極性을 回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그의 作業의 出發點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分明 무엇인가 있으리라는 漠然한 믿음으로 좀 더 注意力을 집중시키는 觀客에게 김용철의 作品은 徐徐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積極的인 遲刻하기의 努力을 기울이는 觀客은 하얀 壁에 垂直으로 꽂혀 있는 젓가락 크기 程度의 가냘픈 대나무 조각을 發見하게 된다. 좀 더 周圍를 둘러본다면 그는 展示場 壁에 한 두 個씩 꽂혀 있는 얇은 대나무 젓가락(?)들을 몇 個 더 發見하게 될 것이다. 優先은 대나무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보다 더 注意 깊은 觀客이라면 그 가냘픈 대나무 끝에 하늘하늘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正六面體를 또한 發見할 수 있다. 透明한 낚싯줄을 꼬아서 만든 자그마한 이 立體는 空氣의 흐름에 따라 恒常 섬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치 풀잎 끝에 매달린 아침이슬처럼 今方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애처로움마저 지니고 있다. 筆者는 이 作品들을 鑑賞, 아니 發見해내는 觀客들의 얼굴을 有心히 살펴본 적이 있다. 이 透明한 立體를 發見하는 瞬間 모든 觀客들의 얼굴에는 恒常 잔잔한 微笑가 어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무엇인가를 發見하고 成就한 者의 만족스런 表情이며 또 무엇인가를 깨달은 者의 微笑이기도 하리라.

김용철의 이 作品은 "知覺이란 能動的 行爲다"라는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7의 基本 命題를 直接 보여준다. 佛蘭西 哲學者이자 美學者인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서로의 知覺片鱗을 記號로서 生産해내고 이것을 交換함으로써 서로를 理解하는 過程이다. 그는 모든 藝術作品이 生産-交換-消費되는 過程 亦是 一種의 커뮤니케이션이라 보았다. 그런데 藝術을 包含한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出發點은 "遲刻하기"이다. 他人에 依해 知覺될 어떤 것을 生産하는 것이 곧 記號의 生産이며, 그렇게 生産된 記號의 交換이 곧 커뮤니케이션 過程이며, 그렇게 交換된 記號를 知覺하여 그 意味를 把握하는 하는 것인 곧 解釋의 過程이다.

藝術의 모든 材料 (媒體)는 따라서 人間의 몸에 依해 知覺될 수 있는 物質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藝術의 가장 基本的 前提에 正面으로 挑戰하는 것이 바로 김용철의 作品들이다. 그는 처음부터 눈에 잘 안 띄는 材料로 무엇인가 記號를 만들겠다는 意志를 갖고 있다. 이는 分明 藝術과 커뮤니케이션 過程의 基本的 前提에 對한 挑戰이라 할 수 있다. 實際로 大部分의 觀客들은 김용철의 作品의 一部만을 보고 많은 部分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용철의 다른 作品은 보다 쉽게 눈에 띈다. 그것은 커다란 검은 종이 한 張이다. 아니 한 張의 검은 종이처럼 보인다. 能動的으로 무엇인가 發見해보려는 觀客은 그러나 검은 종이 위에 무언가 한 두個의 자국이 난 것을 發見하게 된다. 仔細히 보면 그것은 자그마한 正六面體의 幾何學的 模樣들이다. 검은 종이에 鐵筆로 자국을 내어 논 것이다. 한 두 個의 正六面體를 發見한 觀客이 거기서 滿足하지 않고 "探究"를 繼續한다면 그는 곧 검은 종이가 數萬 個의 자그마한 正六面體들을 뒤덮여 있음을 發見하게 된다. 아무리 注意 깊은 觀客이라도 그 數萬 個의 正六面體를 모두 다 "遲刻"한다는 것은 애初부터 不可能해 보인다. 그보다 더 注意 깊은 觀客라면 그 검은 종이가 元來부터 검은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鉛筆로 色漆한 것이라는 事實 또한 發見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8

메를로 퐁티는 人間이 事物을 知覺한다는 것은 世界에 對해 能動的으로 "일"을 하여 무엇인가를 生産해내는 過程이라 보았다. 내가 只今 붉은 꽃을 보고 그것을 薔薇라 遲刻했다고 하자. 이때 나는 눈을 통해 받아들인 感覺資料 (붉은 꽃)를 그저 單純히 被動的이고도 받아들여 自動的으로 "薔薇"라고 反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只今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經驗과 이 社會가 내게 주는 文化의 총체성에 基盤하여 내 눈이 받아들인 感覺資料에 能動的으로 일을 함으로써 "薔薇"라는 知覺片鱗(percept)을 生産해내는 것이다. 김용철의 "검은 종이"는 觀客의 遲刻하기가 作品에 對해 能動的으로 하는 "일"을 하여 一定한 知覺片鱗을 生産해내는 過程이라는 메를로 퐁티의 命題를 그대로 體化한 것이라 볼 수 있다. 觀客들은 各其 얼마만큼 成功的으로 遲刻하기를 遂行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어느 觀客은 커다란 검은 종이만을 볼뿐이며, 다른 觀客은 검은 종이 위의 異常한 自國 몇 個만을 볼뿐이고, 또 다른 觀客은 검은 종이와 無數히 많은 正六面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注意 깊은 觀客 몇 몇은 검은 종이의 검은 色이 事實은 하얀 종이 위에 鉛筆로 漆해진 것이라는 事實마저 發見해낼른지도 모른다.

觀客이 얼마만큼 積極的으로 作品에 注意力을 기울이냐에 따라 各各의 觀客들은 各其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卽 同一한 對象 (오브제)로부터 各其 다른 知覺片鱗을 生産해 내는 것이다. 觀客들은 自身이 生産해 낸 知覺片鱗에 따라 全혀 다른 方式으로 그 對象을 記號化하고 鑑賞하게 될 것이 分明하다. 卽 김용철의 作品은 觀客의 參與의 程度에 따라 全혀 다른 意味를 지닌 것이 되고 만다. 이런 點에서 김용철의 作品은 觀客과 作品 사이의 相互作用에 基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感想을 위한 세 段階 記號生産의 모든 過程이 作品과 觀客의 相互作用에 依해서 決定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點은 作品의 相互作用性이 但只 컴퓨터나 비디오 等의 人爲的인 電子 裝置의 도움에 받은 作品(예컨대 게리 힐의 1995年 베니스 비엔날레 受賞作 位더쉰Withershins 等)의 專有物이 아니라는 點을 克明하게 보여 준다는 點에서 또 다른 意義를 지닌다. 하얀 종이를 鉛筆로 色漆하여 검은 종이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철의 作品은 勞動 集約的이다. 좀 더 正確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많은 時間과 勞動을 들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作品을 만들어낸다는 點에서 그의 作業은 相當히 勞動非效率的이며, 非(非)資本主義 敵이다. 生産되어 나오는 것들은 "미니멀"해보이지만, 그것을 위해 드는 時間과 勞動은 "맥시멀"하다는 것이 그의 作業의 特徵이다. 數千 張이 넘는 종이를 한 張 한 張 풀漆하여 붙여서 하나의 기둥처럼 쌓아 올라가는 作品에서도 이러한 "勞動肥效率性"을 發見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勞動肥效率性을 가장 克明하게 보여주는 作品은 굵은 통나무의 한 쪽을 繼續해서 얇게 깎아내어 실처럼 얇게 만들어낸 作品들이다. 直徑 20 cm가 넘고 길이는 2미터 假量 되는 통나무나 두께 10cm 以上에 亦是 길이 2미터 程度의 나무板의 한 쪽을 漸次 얇게 깎아서 젓가락 굵기, 이쑤시개 굵기에서 마침내 머리카락처럼 얇아지는 作品들이다. 수 없이 많은 끌질과 칼질이 必要하지만, 單 한番의 失手로 얇은 部分을 부러뜨리기라도 한다면 다시 새 통나무와 마주 앉아 처음부터 作業을 다시 始作하여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鉛筆로 色漆하기나 통나무 한쪽을 얇게 깎아나가기 等의 作業은 대단히 自己 否定的이며 逆說的인 作業이다. 作業할수록 自身이 해 놓은 作業은 눈에 안 보이고, 작아지고, 懦弱해지고, 섬세해지고, 微細해진다. 莊嚴하고 雄壯한 努力이 가냘프고 纖細한 結果를 낳는다. 이러한 作品을 마주하고 있자면, 우리의 視線은 自然히 가장 얇은 끝에 머물게 된다. 그 極端의 微細한 "머리카락 끝"같은 部分이야말로 김용철의 또 다른 形態의 속삭임이다. 하늘하늘 臺는, 今方이라도 부러져버릴 것 같은, 漸次 微細함의 極致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나무의 그 끝은 있음과 없음이, 物質과 非物質이, 勞動과 精神이, (들뢰즈와 街따리가 말하는) "連續과 切斷"9이,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李 만나서 和解하는 接點인 것이다.

김용철의 作品의 또 하나의 特徵은 처음부터 展示場 그 自體를 作品의 一部로 삼고 있다는 點이다. (따라서 그는 觀客에게 遲刻하기뿐만 아니라 많은 記號化하기의 努力도 要求하고 있다.) 知覺이 곧 參與라는 것, 知覺을 통해 人間은 世界와 關係를 맺으며 나아가 世界의 一部가 된다는 메를로 퐁티의 哲學을 우리는 김용철의 作品을 통해 어느 程度나마 直接 經驗할 수 있다. 觀客과 單純히 對面하기보다는 觀客과 作品을 하나의 空間으로 묶어 내려는 試圖를 담고 있다는 點에서 김용철의 一連의 作品은 環境主義 彫刻과도 共通點을 지닌다. 하얗게 漆해진 4面의 壁과 天障, 그리고 바닥은 바로 作家와 觀客이 交感을 이루는 六面體의 空間인데 이 六面體는 대나무 끝에 매달린 작고 透明한 正六面體에, 검은 종이 위에 痕跡으로 남아있는 六面體에, 그리고 漸次 녹아가면서 그 모습을 喪失하는 거울 위의 바셀린 덩어리에 投影되어 있다. 筆者는 대나무 끝에 매달린 이 透明한 立體를 바라보며 우리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 눈송이를 떠올렸다. 가볍고 섬세한 눈송이. 언뜻 보면 그저 하얀 덩어리이지만 仔細히 들여다보면 섬세하고 幾何學的인 무늬를 간직하고 있는 눈송이. 後 불면 가볍게 날아가 버리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透明하게 녹아 없어지는 눈송이. 그런데 김용철의 어떤 作品들은 實際로 녹아 없어진다. 形體를 만들어내기 대단히 어려운 바셀린 덩어리로 만들어진 幾何學的인 形體들은 (亦是 大部分 正六面體이다) 時間이 지나감에 따라 천천히 스스로 녹아 없어진다. 스스로를 破壞함으로써 非物質化를 追求한다는 點에서 김용철의 바셀린은 腸 틴겔리Jean Tinguely의 作品 "뉴욕시에 敬意를" 이나 "世上의 마지막에 關한 硏究"와 같은 脈絡에 서 있다. 그러나 김용철과 틴겔리의 根本的인 差異는 틴겔리의 作品들은 巨大하게, 큰 소리를 내며, 와장창 무너져 내리거나 一瞬間에 暴發해버리는데 反해서, 김용철의 作品은 소리 없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녹아 내리듯 消滅된다는 點에서 다르다.

미니말리즘은 單純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말하려 했지만, 김용철의 作品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고, 表現할 수 없는 것을 表現하려하며, 非物質的인 것을 物質을 통해 나타내려 한다. 沈默을 이야기하려 한다. 아니, 沈默을 그저 중얼거리듯 속삭인다. 이러한 속삭임을 통해 김용철은 觀客에게 鑑賞하기와 記號化하기 뿐만아니라 知覺하기라는 세 가지 "作業"을 모두 忠實히 遂行해줄 것을 要求한다. 이런 點에서 김용철의 作品은 觀客에게 새로운 (어쩌면 가장 重要한) 役割을 附與하고 나아가 觀客-作品-作家의 關係를 새로 定立하려는 試圖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最大의 時間과 努力을 投資해서 最小의 것을 얻으려는 逆說的이고도 고통스런 作業을 이 젊은 作家가 얼마나 繼續 堪當해낼 수 있을지를 우리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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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重三角形 모델은 記號現象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繼續되는 無限性"과 그 三者 關係를 强調하는 記號學者 퍼어스의 論議와 움베르토 에코의 記號學理論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仔細한 것은 졸고 "From commodity production to sign production: A triple triangle model for Marx's semiotics and Peirce's economics," Presented at the annual conference of Speech Communication Association, Miami, FL, 1993 參照. 記號生産過程에 對해서는 졸고 「`來日의 神話'를 오늘 이야기하는 즐거움」, 『文學과 社會』, 文學과 知性史, 1996年 參照.

2) Eco, Umberto. A Theory of Semiotic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6.

3) 다시 말해서 記號生産者는 記號를 生産하는 過程 속에서 自身의 嗜好의 意味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解釋하기 마련이며, 作家는 自身이 生産하는 作品의 가장 첫 番째의 觀客일 수밖에 없다.

4) "解釋體"는 記號學者 퍼어스의 獨創的인 槪念인데, "畿湖가 人間의 精神에 對해 生産해내는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解釋體의 意味에 對해서는 『論理와 推理의 記號學』, 움베르토 에코 外 지음, (人間사랑, 1994), 45-47쪽 參照.

5) 김용철은 弘益大學校 彫刻課와 同 大學院을 卒業한 後 美國으로 건너 가 펜실베니아大學 美術大學院에서 조각으로 MFA를 取得했으며, 그 後 英國文化院 奬學生으로 選拔되어 槪念美術傾向이 强한 런던 골드스미스 스쿨에서 人間의 欲望과 非物質化(Dematerialization)에 對해 關心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닉 드빌과 크레이그 마틴에게서 師事하였다. 1992年以來 인데코와 갤러리 2000 等에서 6回의 個人展을 가졌으며, 特히 1993年에는 프랑스文化院 招請 特別 個人展을 가진바 있다.

6) 事實 김용철의 作品들에는 어떠한 題目도 없다. 團地 論議의 便宜上 일정한 傾向을 보여주는 그의 最近 作品들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 부르기로 하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지각의 현상학="">의 著者 메를로 퐁티의 또 다른 冊題目에서 따온 것임을 아울러 밝혀둔다.

7) Merleau-Ponty, M.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by Colin Smith.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2.

8) 鉛筆로 커다란 하얀 종이를 가득 매웠다는 點에서 김용철의 "검은 종이"는 수 없이 反復되는 線 그리기를 보여주는 솔 르윗Sol LeWitt의 作品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繼續 反復되는 線 그리기를 통해 스스로 그린 線들을 모두 否定하고 結局에는 검은 종이 하나를 生産解雇 있다는 點에서 김용철은 솔 르윗과 根本的으로 다르다.

9) 『앙띠 오이디푸스』, 쥘즈 들뢰즈와 펠릭스 街따리 지음,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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