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文化遺産을 모으고 保存하는 일은 人類 文化의 未來를 위한 것
,
우리 모두의 時代的 義務다
.”
國立中央博物館
(
서울 龍山區
)
에서 만나볼 수 있는 展示
‘
어느 蒐集家의 招待
’.
觀覽客이 展示場에 들어서자 實際 蒐集家의 집에 招待된 것처럼 隱隱한 茶 香氣가 물씬 풍겼어
.
‘
文化遺産 蒐集은 우리의 義務
’
라고 主張한 이 蒐集家의 正體는
?
바로 故
(
故
·
世上을 떠남
)
李健熙 會長
.
삼성그룹의 會長으로서 三星을 世界的인 一流 企業 班列에 올려놓은 그는 生前에 文化遺産 蒐集家로도 有名했지
.
그가 企業 經營 過程에서 내세운
‘
超一流
(
一流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
)’
哲學은 文化財와 美術品 蒐集에도 오롯이 反映됐어
.
生前 이건회 會長이 正確히 어떤 作品을 蒐集했는지에 對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
그가 世上을 떠난 뒤 遺族
(
남은 家族
)
들이 그의 蒐集品
2
萬
3000
餘 點을 寄贈하기로 하면서 謙齋 鄭敾
,
李仲燮
,
金煥基
,
클로드 모네
,
파블로 피카소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等 世界的인 作家들의 作品이 世上에 公開된 거야
.
8
月
28
日까지 열리는 이番 展示
.
先史時代 土器 作品부터 現代 繪畫까지 無慮
295
건
355
點에 達하는 李健熙 會長의 寄贈品들을 만나볼 수 있어
.
글
·
寫眞 便裔胄 記者
[
常識
UP]
故 李健熙 三星그룹 會長
故 李健熙 三星그룹 會長.동아일보 資料寫眞
故 李健熙 會長은
1987
年 三星그룹 會長으로 就任해 三星을 世界的 企業으로 키워낸 企業人
.
創業主 이병철 會長의 뒤를 이어 三星그룹 會長 자리에 올랐어
.
그는
1993
年
“
아내와 子息 빼고 다 바꾸라
”
는 一名
‘
新經營 宣言
’
을 하며 現在의 三星을 일궈냈지
.
하나를 만들어도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硏究開發에 邁進한 結果 삼성전자는 半導體
·
스마트폰
·TV
等의 分野에서 世界 一流 企業으로 자리 잡았어.
○
모네가 사랑했던 庭園과 修鍊
클로드 모네
(1840~1926) ‘
修鍊이 있는 蓮못
’(1917~1920).
國立中央博物館 提供
이番 展示에서 公開된
‘
修鍊이 있는 蓮못
’
은 프랑스 出身 畫家 클로드 모네가 그린 作品
.
모네는
1883
年 파리 近郊 지베르니에 定着해 蓮못이 있는 庭園을 가꿨어.
“
庭園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名作이다
”
라고 말할 程度로 庭園을 사랑했지
.
이 庭園을 背景으로
250
餘 點의 修鍊 聯作
(
하나의 主題로 여러 가지를 그린 그림
)
을 만들어
.
이 作品은 이番 展示에서 最初로 公開됐는데
,
모네의 修鍊 聯作은 世界的으로도 認定받아
.
모네가 老化로 視力이 떨어진 後에 그린 것이라 細部的인 表現은 덜하지만 그의 修鍊 聯作이 주는 平穩함은 充分히 느낄 수 있지
.
모네는 印象派의 創始者
.
印象派는 같은 場所에서 瞬間瞬間 빛에 따라 變하는 風景을 그렸던 畫家들을 일컬어
.
印象派의 名稱은 모네가
33
歲 때인
1873
年에 선보인
‘
引上
:
해돋이
(1872)’
에서 由來됐지
.
그림이 展示된 空間에선 印象派 音樂의 創始者라고 불리는 클로드 드뷔시
(1862~1918)
의
‘
亞麻빛 머리의 少女
’
가 흘러나와
.
觀覽客의 발아래에서 修鍊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바닥 空間엔 미디어 아트도 適用됐어
.
그림과 音樂을 鑑賞하며 展示 空間에 서 있으면 마치 모네의 政院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걸
?
○
韓國人의 氣像을 담은 황소
李仲燮
(1916~1956) ‘
황소
’(1953~1954)
노래
‘
韓國을 빛낸
100
名의 位인
’
中 마지막
100
番째 人物이 누굴까
?
바로 韓國人이 사랑하는 畫家 中 한 名인 李仲燮이야
.
故 李健熙 會長 亦是 李仲燮의 作品을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어
.
그의 遺族이 國立현대미술관에 寄贈한 美術品 總
1488
點 中 李仲燮의 作品만
104
點에 達했을 程度
.
韓國 近代美術品들 가운데 가장 有名한 作品이자 李仲燮의 代表作으로 꼽히는
‘
황소
’
와 오랜 時間 實物을 볼 수 없었던
‘
흰소
’(1953~1954)
도 包含됐지
.
소는 忍耐와 끈氣를 象徵해
.
이番에 展示된
‘
황소
’
는 日帝强占期와
6·25
戰爭을 거치며 日常生活이 疲弊해졌어도 默默히 앞을 向해 나아가는 韓國人의 모습을 表現했어
.
큰 눈을 가진 황소가 붉은 背景 속에서 입을 벌린 채 부르짖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떤 느낌이 들어
?
○
百姓의 말에 귀 기울인 實學者 丁若鏞
정약용
(1762~1836) ‘
정효자展
?
貞夫人展
’(1814).
國立中央博物館 提供
‘
열두 살에 아버지가 病이 드니 孝子는 이슬을 맞아가며 하늘에 祈禱하여 病이 낫게 하였다
.’
‘
어찌 엿을 씹어 먹여 주고 아이 飯饌을 잘 챙겨주는 것만이 자애로운 어머니라 할 수 있겠는가
.’
이番 展示에서 最初로 實物이 公開된
‘
정효자展
’
과
‘
貞夫人展
’
에 실린 內容이야
.
特히
‘
貞夫人展
’
의 內容은 이番 展示를 통해 처음 公開됐지
.
‘
정효자展
’
과
‘
貞夫人展
’
은 朝鮮 後期 儒學者이자 實學者인 茶山 丁若鏞이 쓴 書藝 作品
.
丁若鏞은 朝鮮 後期 地方 官吏들의 不淨腐敗
(
바르지 못하고 墮落함
)
를 批判하면서 官吏들이 지켜야 할 指針을 담은
‘
牧民心書
’
를 썼어.
擧重器
(
무거운 物件을 들어 올리던 機械
)
를 發明하는 等 實生活에 도움이 되는 學問
,
卽 實學으로 百姓들의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고자 했지
.
‘
정효자展
’
과
‘
貞夫人展
’
은 丁若鏞이 한 百姓의 付託을 받고 쓴 作品으로 家族에 對한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어
.
丁若鏞은 天主敎를 믿는다는 嫌疑로
1801
年에 只今의 全南 康津郡으로 流配를 가게 됐어
.
그 流配地에서 그는 정여주라는 人物을 만났지
.
정여주는 丁若鏞에게
“30
歲에 世上을 떠난 아들
(
정관일
)
의 孝行
(
父母를 잘 섬기는 行實
)
을 記錄해달라
”
고 付託했어
.
아들의 孝行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自身은 글을 쓸 줄 몰랐기 때문.
丁若鏞도 流配地에서 家族들과 떨어져 지내고 있던 터라 家族에 對한 그리움에 共感했고 代身 글을 써주었어
.
이게 바로
‘
정효자展
’
이야
.
男便을 잃고 홀로 子女를 嚴格하게 키우던 정여주의 며느리에 對한 이야기는
‘
貞夫人展
’
에 담았어
.
두 作品 모두 百姓의 소리에 귀 기울였던 實學者 丁若鏞의 마음이 담겼고
,
그의 文體도 鑑賞할 수 있는 貴重한 作品
!
▶에듀東亞 便裔胄 記者
kuj0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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