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傾聽, 委任, 人材 經營, 케이스 스터디 , 600年 前 世宗은 ‘經營學의 敎科書’ | 리더십 | DBR
Top

SR1. 世宗 專門家 박현모 敎授 인터뷰

傾聽, 委任, 人材 經營, 케이스 스터디
600年 前 世宗은 ‘經營學의 敎科書’

  • 전체 메뉴보기 메뉴 닫기
  • 이벤트
  • 顧客센터
  • DBR SNS
  • PDF 다운로드
  • 폰트 사이즈 조절
  • 스크랩

    스크랩

    메모入力

  • Article at a Glance
    朝鮮 建國 以來 只今까지 가장 有能했던 王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只今 이 時代 企業人들에게 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다. 于先 그는 ‘討論의 君主’로 불릴 만큼 會議에서의 成果에 執着했고 疏通을 重視했다. 世宗이 卽位하자마자 한 첫마디가 바로 ‘議論하자’였다. 會議를 통해 成果를 내기 위해 世宗은 至毒할 程度로 ‘傾聽’했는데 그 過程을 들여다보면 傾聽이란 리더의 德目이 아니라 事實上 ‘能力’이라는 걸 알 수 있다.

    世宗은 또한 至毒한 實用主義者로서 ‘理論的 프레임’의 陷穽에 빠지지 않고 實際 事例 硏究를 통해 現實에서 實現 可能한 政策을 生産해냈다. 그리고 協力이 必要하고 創意的 아이디어가 必要할 때마다 一種의 TF팀인 ‘도감’을 만들어 빠르게 實行했고 成果가 나면 받아들였다. 그의 會議法, 疏通法, 實行法, 人材 經營은 實際로 只今 當場 企業에 適用 可能한 것들이기도 하다.

    編輯者 註
    이 記事의 製作에는 東亞日報 未來戰略硏究所 인턴硏究員 남정희(高麗大 經營學科 4學年) 氏가 參與했습니다.

    ‘潛龍’ ‘大權’ ‘主君’.  如前히 大韓民國 言論 政治 記事에 자주 登場하는 單語들이다. 現代社會의 ‘大統領’을 傳統社會의 王에 比喩해 思考하고 말하다 보니 나오는 表現들이다. 言論뿐 아니라 여러 政治評論家, 甚至於 學者들까지 習慣的으로 이런 比喩와 表現을 쓴다. 하지만 王政時代의 絶對君主와 民主正義 大統領은 嚴密하게 보면 잘 매칭되지 않는다. 基本的으로 選出과 承繼의 過程이 完全히 다른데다 아무리 大統領이라 할지라도 ‘權力의 集中度’가 웬만한 獨裁國家가 아니면 王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只今 時代 王과 가장 비슷한 狀況의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韓國 企業들의 오너 CEO일 것이다. 오너 經營者의 境遇 任期가 定해져 있지 않고, 자칫하면 아예 牽制를 받기가 어려워지며, 人士나 經營 關聯 決定에 있어서 事實上 全權을 휘두를 수 있다는 點에서 그렇다. 꼭 오너 經營者가 아니어도 엄청난 權限이 集中되고 組織(國家 或은 企業)의 興亡이 리더의 能力에 따라 完全히 달라질 수 있다는 點에서도 王과 CEO의 類似點이 있다. 卽, 聖君이 亡해가던 나라도 부흥시키고 暴君이 富强한 나라도 沒落시켰듯 現代에도 有能한 經營者는 沈沒하던 企業을 다시 살려내기도 하고, 無能한 經營者는 잘나가던 企業도 那落으로 떨어뜨린다.

    朝鮮 建國 以來 只今까지 가장 有能했던 王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只今 이 時代의 政治人보다 오히려 企業人들에게 示唆하는 바가 더 커 보인다. 世宗 卽位 600周年을 맞아 經營專門誌 DBR이 여름休暇 스페셜 리포트로 ‘世宗 리더십’을 다루게 된 理由다.

    世宗이라는 人物은 그러나, 大韓民國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爲人이자 많은 리더가 ‘롤모델’로 삼고 있기에 함부로 다루기도 어렵다. 當場 인터넷 書店에서 世宗과 關聯한 리더십 書籍만 檢索해 봐도 數十 卷은 今方 찾아낼 수 있을 程度이며, 이미 많은 드라마와 映畫, 文學作品 等에서 ‘事實 半, 허구 半의 캐릭터’로 登場한 바 있어 모두가 ‘웬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人物이기도 하다. 그러나 正말 제대로 ‘實錄’을 비롯한 公式的 歷史 記錄에 基盤해 世宗의 한마디, 한마디를 探究하고 當時 權力 關係와 人物 關係, 國際 關係의 脈絡 안에서 分析하고 硏究하며 論文과 冊을 쓴 ‘眞짜 世宗 專門家’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DBR은 그런 少數의 ‘眞짜 專門家’ 中에서 自他 公人 ‘世宗 덕후’ 박현모 여주대 敎授를 만났다. 朴 敎授는 漠然한 리더십 講演을 넘어 다양한 方法의 講義와 컨설팅을 통해 實際 世宗의 人材 選拔과 育成法, 懷疑方法 等을 企業에 傳해주고 있는 國內 世宗 硏究의 代價다. 그와의 인터뷰를 一問一答 形式으로 整理했다.

    37

    ‘討論의 君主’, 會議와 傾聽에 對한 執念
    世宗이 卽位하자마자 처음 한 말, 卽 就任 一聲은 “議論하자!”였던 걸로 안다 . 1
    그렇다. 臣下들에게 ‘討論의 君主’로 불리던 임금다운 就任 一聲이다. 議論하면서 智慧를 收斂해 決定을 내렸기에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 政策으로 삼았고, 그랬기 때문에 言語, 軍事, 科學, 醫學 等 수많은 分野에서 燦爛한 業績이 나왔다. 世宗만큼이나 韓國人들에게 尊敬받는 王인 正祖의 첫 한마디가 “寡人은 思悼世子의 아들이다!”였던 것과 比較해보면 두 임금이 卽位한 時點의 政治 環境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于先 그 意味를 생각해보자. 世宗은 아버지(太宗 李芳遠) 世代 或은 할아버지(太祖 李成桂) 世代와는 完全히 달라진 狀況을 맞이했다. 太祖와 太宗의 ‘創業의 時代’에 必要한 指導者의 德目과 水星의 時代에 必要한 德目은 다를 수밖에 없다. 世宗 卽位 以前까지는 事實上 ‘馬上(馬上)’에서 일하는 時代였다.

    進擊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目標를 잡아야 한다. 戰鬪에서 勝利하면 戰利品을 챙기고 나눠준 뒤에 다시 挑戰하는 時期다. 企業으로 치면 初期 創業者들이 한참 하나하나 아주 挑戰的인 目標를 完遂해가면서 企業을 키우는 時期인 셈이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서 一絲不亂하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런데 戰爭이라는 건 元來 專門家의 眼目을 平凡한 이들이 따라갈 수 없다는 特徵이 있다. 勿論 當時 最高 戰爭 專門家는 누가 뭐래도 李成桂였고 가장 뛰어난 參謀는 李芳遠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水星의 時期’로 들어서는 世宗은 全혀 다른 리더십을 發揮할 수밖에 없었다. 世宗은 ‘切實剛直’하게 臣僚들이 意見을 開陳해주길 願했다. 예전 戰場에서의 會議와 달리 經驗 많은 官僚가 各自 主人意識을 갖고 國政을 苦悶하길 願했다는 얘기다. 왜 그랬을까? 只今의 視角에서 보면 世宗 時期는 ‘壽城乙 넘어 復興을 하기 始作하는’ 時期지만 世宗이 卽位했을 當時에는 全혀 그런 狀況이 아니었다. 實錄에도 高位官僚부터 百姓들까지 ‘이 朝鮮이 얼마나 갈까’ 疑問을 품는 場面이 많이 나온다. 이만주라는 女眞族 族長이 明과 葛藤 中이었고, 우리에게 被害가 오고 있었으며, 칭기즈칸의 後裔 몽골族은 種種 베이징까지 밀고 내려오면서 繼續 戰爭을 일으켰다. 그 過程에서 明나라 永樂帝가 戰死하기도 했다. 不安定한 北方 環境 속에서 國內的으로도 當時 東아시아 全體가 一名 ‘小氷河期’를 겪으면서 ‘먹거리 不足’에 시달렸다.

    ‘小氷河期가 實在했느냐’는 事實 現在 論難의 餘地가 있지만 大氣根의 時期였다는 건 確實하다. 不安한 對外環境 속에 東아시아 全體가 겪던 食糧難은 異民族의 ‘掠奪’을 觸發하는 等 惡循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世宗에게는 自身이 키운, 自身과 함께해 온 臣下보다는 個國 때부터 내려온 功臣들만 周邊에 있는 잔뜩 狀況이었다. 賃金 個人의 政治的 運身의 幅이라는 觀點에서는 事實 좋지 않은 狀況이었다. 막 企業을 이어받은 3歲가 할아버지와 함께 創業했던 社長團과 같이 앉아 懷疑하는 狀況과 類似했다. 이 狀況에서 世宗은 對內外的 難題를 푸는 데 그들의 ‘經綸’을 제대로 活用하고자 마음먹었고, 아니 어쩌면 그게 自身이 處한 狀況을 突破할 수 있는 唯一하면서도 가장 올바른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뛰어난 臣下, 엄청난 經綸을 가진 臣下들이 意見을 마음대로 開陳할 수 있는 ‘會議’를 國家 經營의 中心에 두고자 했다.


    38

    그래서 世宗은 어떤 會議를, 어떻게 했는가?
    世宗이 ‘自身이 主導하는’ 會議를 本格的으로, 그리고 제대로 하기 始作한 건 軍事權을 갖고 있던 象王 太宗이 世上을 떠난 以後였다. 一種의 ‘王 인턴십’ 期間이 끝난 以後다. 太宗 事後, 在位 5年 次부터 世宗의 리더십이 眞짜 試驗臺에 올랐다. 그런데 이 해에 世宗은 가장 많은 競演을 연다. 2 이때 競演은 只今 時代에 맞게 表現하자면 ‘세미나式 御殿會議’다. 于先 古典 텍스트를 놓고 對話를 始作한다. 다들 過去 試驗에 合格한 사람들이니 한두 番은 봤을 內容이다. 그렇게 古典 속 內容을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그 內部의 事例를 끄집어내 當時 朝鮮이 直面한 課題와 連結한다. 리더십의 試驗臺에서 老鍊하고 經驗 많은 官僚들의 ‘經綸’의 도움을 받아 일을 成功으로 이끌었다는 얘기다. 世宗 15年과 19年, 파저강 3 討伐을 둘러싼 두 次例의 論爭, 特히 첫 番째 討伐을 두고 競演에서 벌인 뜨거운 討論 過程은 集團的 智慧를 모으는 過程 그 自體였다. 여러 硏究에 따르면, 當時는 原名 交替의 波動이 如前히 남아 있던 時期였다. 파저강 一帶에 이만주라는 族長이 이끄는 女眞族이 持續的으로 鴨綠江을 건너 中江鎭을 넘어와 女聯 地域을 掠奪하면서 그 征伐의 必要性이 提起되고 있던 狀況이었다. 當時 朝鮮 立場에서는 말 그대로 ‘進退兩難’이었다.

    내버려두면 邊方의 百姓이 살기 어렵고, 攻擊하러 國境을 넘어가자니 明나라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遠征戰爭이 가진 危險性도 큰 狀況. 1次 討伐을 앞두고 거의 30次例가 넘는 會議를 進行한다. 모든 可能한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고 各各의 對應策을 다 만든다. 이 過程에서 現場 指揮官인 최윤덕에 對한 說得도 이뤄진다. 崔潤德은 當時 最高의 名將이었지만 直接 邊方에 나가 있었기에 女眞을 치러 江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危險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戰鬪를 해야 할 그곳은 ‘아홉 그루의 나무를 베어야 겨우 別 하나를 볼 만큼 우거져 있는 적진’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敵과 싸워 勝利는커녕 自身과 兵士들의 목숨이나 扶持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狀況이었다. 하지만 細心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點檢하는 過程에서 최윤덕度 說得이 된다. 明나라의 確固한 支持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勿論이고 여러 情報라인을 통해 餘震의 現 狀況이 어떠하다는 것 等 多樣하고 客觀的인 情報가 綜合的으로 모였다. 世宗은 여러 分野의 專門家와 關聯者들이 綜合한 知識을 알려주며 최윤덕에게 ‘全的인 權限 委任’乙 約束한다. 그리고 調整(政府)의 모든 智慧를 모아준다. 江을 건널 때, 奇襲 攻擊을 敢行할 때 直面할 수 있는 危險 要素와 物資 供給과 調達 方法 等이 모두 會議에서 論議되고 決定된다. ‘에러를 最少化하는’ 데 目的을 두고 ‘實質的’人 會議가 이뤄졌고 파저강 討伐은 大成功을 거둔다.

    現在로 돌아와보자. 韓國의 많은 企業이 最近 ‘會議에 對한 會議’에 빠져 있다. 時間만 잡아먹고 實際 成果를 내지 못하는 組織 內 會議에 對한 懷疑論이 거세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正말 ‘會議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對해 배워본 적이 있나? 事實 없다. 옛날 學級會議 하던 거 말고 會議에는 어떤 種類가 있고, 目的에 따라 어떻게 달리해야 하는지, 實際 어떻게 進行하고, 어떻게 結果를 내야 하는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냥 先輩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한 게 全部다. 그러니 ‘會議에 對한 懷疑論’이 나오는 거다. 只今 우리나라 企業 內에서 벌어지고 있는 會議의 大部分은 ‘수사반장式 會議’다. 나도 어디에선가 들은 表現인데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 딱 事件이 터지면 리더가 會議를 召集한다. 簡單히 狀況에 對한 브리핑을 듣고 各自 뭘 할지 定해주고 끝난다. 一種의 戰時 狀況 會議 스타일인데 그런 게 必要할 때도 있지만 戰略을 苦悶하고, 革新을 하고, 完全히 새로운 經營 環境에서 方向을 다시 잡아야 하는 會議마저 그렇게 進行하면 안 된다. 勿論 世宗도 恒常 ‘세미나式 御殿會議’, 卽 競演만 한 건 아니다. 示唆懷疑라고 하는 政務會議, 卽 그때그때 狀況 報告받고 빨리빨리 指示하는 會議도 많이 했다. 그래야 일이 進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創意的 아이디어’ ‘論難이 있을 만한 政策의 決定과 補完策 마련’ 等을 놓고는 最大限 智慧를 모을 수 있는 方式의 會議를 進行한다. ‘경연식 會議’는 그런 面에서 現在 急變하는 經營 環境에서 다양한 革新 아이디어가 必要한 企業人들에게 꼭 必要한 會議 方式이다. (그림 1) CEO나 오너가 直接 主宰하는 會議가 經營 理論과 케이스 스터디 속에서 進行이 되고 最高 經綸을 가진 任員들과 外部 專門家들의 다양한 提言 속에 進行되는 것, 그 過程에서 CEO가 뭔가 自身의 생각을 一方的으로 傳達하기보다 傾聽을 하다가 最高의 아이디어를 잡아내고 以後 決斷을 내리는 것. 이게 바로 世宗式 會議, 경연식 會議다. 成果 創出型 學習 懷疑라고 할 수 있다.

    40

    自然스레 ‘傾聽’ 얘기가 나온 것 같다. 世宗이 會議 進行의 키워드는 ‘自身의 弱點 드러내기’와 ‘傾聽’이었다고 들었다.
    맞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亦是 그 自體가 世宗의 ‘老鍊함’을 보여준다. 世宗은 經綸 있는 臣下들, 現場을 잘 아는 實務者들이 ‘沈默’하는 것만큼 危險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企業 諮問하러 가보면 社長 혼자 떠들고 있고 다들 받아 적고 있거나 고개 끄덕이고 있는 企業은 決코 잘되지 않더라. 經綸 있는 任員들, 現場을 아는 實務者와 專門家들이 마음껏 입을 열고 떠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世宗은 아마도 ‘會議에서의 沈默’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 같다. 繼續되는 會議에서 緊張感을 불어넣는 것도 世宗이 참 잘했던 것 中 하나인데 앞서 言及한 파저강 討伐에서 結局 勝戰譜가 들려왔는데 기뻐할 새도 없이 “勝利했으나 두렵다”고 말한다. 9個 部隊로 나눠 時間을 맞춰 奇襲을 했고 正말 딱 成功했는데 萬若 한두 個 變數가 틀어졌다면 失敗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났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當場에는 큰 勝利를 거뒀지만 女眞族이 復讐心을 품고 다시 뭉쳐서 威脅할 境遇도 떠올랐을 거다. 가장 陶醉돼 있을 때 오히려 리더로서 組織 全體에 危機感을 불어넣은 것이다. 기쁨에 들뜨지 말라고 警告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以後의 對處方案에 對해 ‘말해보라’고 한다. 本人의 두려움과 弱함을 보여주면서 다시 ‘警覺心’을 일깨우고 곧바로 다시 ‘傾聽’ 모드로 들어가는 方式이다. 그런데 내가 『世宗實錄』을 읽으면서 깨달은 事實이 하나 있다. 우리는 흔히 傾聽을 ‘리더의 德目’이라고 한다. ‘傾聽하는 리더’라는 말 自體가 事實 宏壯히 近似하다. 그런데 實錄을 읽으면서 내가 깨달은 건 傾聽이 리더의 ‘德目’이 아니라 ‘能力’이라는 事實이다. 傾聽하는 리더가 되려면 세 가지 下位 能力이 必要하다. 첫째는 ‘忍耐力’이다. 누군가의 얘기를 繼續 眞摯하게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自身보다 地位가 낮은 사람일 境遇에는 더욱 그렇다. 이미 리더가 아는 얘기를 할 때도 있고, 리더 생각에 別로 重要하지 않을 얘기를 구구절절하게 떠들 때도 있다. 이때 介入하거나 말을 遮斷해버리면 다시는 그들로부터 重要한 얘기를 들을 수 없다. 그렇게 忍耐力을 갖고 얘기를 듣다가 보면 어느 瞬間 分明 斬新하고 뛰어난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있다. 이걸 집어내는 能力, 이게 바로 ‘傾聽의 리더십’이 成立하기 위한 두 番째 能力 ‘分別力’이다. 그다음에 必要한 能力은 무엇일까. 바로 ‘委任力’이다. 좋은 意見이 나왔으면 그 意見을 實行할 專門家와 關聯者를 定해 徹底하게 委任하는 거다. 整理해보면, 참고 듣는 忍耐力, 좋은 意見을 놓치지 않는 分別力, 믿고 맡기는 委任力 이렇게 3가지 能力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게 ‘傾聽’이라는 ‘리더의 能力’이다.

    委任, 現場, 人材, 그리고 ‘知識經營’
    世宗은 現場에서 直接 實務者 或은 企業으로 치면 ‘顧客’人 百姓과 대면해 疏通하는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내가 쓴 『世宗의 敵솔力』이라는 冊의 첫 腸이 ‘文魚農夫(農夫에게 물었다)’라는 사자성어로 始作한다. 世宗 7年, 가뭄이 아주 極甚했고 官僚들은 問題를 解決하러 뛰어다니기보다 몸을 사리며 ‘地方勤務’를 꺼리는 行態를 보이고 있었다. 世宗은 隨時로 밖으로 나가 農地를 둘러봤고 둘러보다 ‘벼가 잘 자라지 못하는 곳’을 發見하면 農夫에게 直接 그 理由를 물었다. 들판의 農夫에게 王이 直接 다가가 무엇이 가장 어려운지, 어떤 것을 도와주면 좋겠는지 묻고 傾聽했던 셈이다. 그것도 恒常 扈衛軍官 한 名만 帶同한 채였다. 주눅 들지 않은 채로 率直하게 問題點을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世宗은 農事나 稅金 整備 等 現場에 答을 물어봐야 하는 問題와 專門家들끼리 論議해야 할 問題, 卽 訓民正音 創製나 北方 領土 開拓 等의 問題를 잘 區分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가뭄에, 官僚들이 별다른 對策 없이 몸을 사리기 始作할 때 왜 그렇게 現場을 돌았는지는 잘 생각해볼 必要가 있다. 王이 直接 行次해 뭔가를 묻고 다닌다는 게 어떤 意味겠는가. 그게 그 當時 朝鮮에서 王이 關心 갖고 있는 가장 重要한 問題라는 뜻이다. 가뭄에 農事짓는 사람을 자주 만나러 다니는 件, 全體 官僚社會에 ‘只今 모두 이 問題에 神經 써라’고 警告하고 알려주는 것이다. 李는 平素 百姓에 對해 世宗이 얘기하던 것과 一脈相通하는데 世宗은 農業을 그 어떤 賃金보다 重視했고 늘 “나라는 百姓을 根本으로 삼고, 百姓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卽 밥이 하늘이다”라는 文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쨌든 아무리 世宗이라고 해도 直接 모든 問題의 解法을 내려고 하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世宗은 直接 現場에 가서 現場이 어떤지를 보되 結局은 各 고을의 守令이 일을 잘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現場에서 問題를 把握한 以後 360餘 곳의 各 고을에 守令을 派遣할 때마다 直接 그들을 불러 ‘親見’하고 當付했다. 이렇게 고을에 守令을 派遣할 때마다 불러서 ‘解決해야 할 問題’와 ‘關心 가져야 할 것들’에 對해 當付하고 말한 임금이 朝鮮時代 통틀어 거의 없다. 이미 자주 現場을 訪問해 百姓의 苦衷을 알고 있었기에 큰 틀에서, 그러나 아주 本質的이고 核心的인 當付와 指示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當然하게도 守令이 바뀌면 前任者는 世宗에게 와서 自身이 實際로 임금의 뜻을 잘 實踐했는지 報告해야 했다.

    結局 ‘現場 經營’ 얘기는 ‘委任’에 對한 苦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國家든, 企業이든 結局 經營의 核心은 ‘委任’이 아닐까 싶다. 實錄을 보면 世宗 時代에도 ‘委任’을 놓고 엄청난 論爭이 벌어진다. 내가 『世宗實錄』을 數次例 正讀하면서도 恒常 ‘委任 論爭’은 眞짜 寶石 같은 部分이라고 생각했다. 世宗 卽位 直後 얼마 안 돼 金點과 허조가 아주 세게 論爭을 벌인 적이 있다. 김점은 有力한 外戚이었고, 허조는 士大夫 出身의 典型的인 엘리트 官僚였다. 世宗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싸우다시피 하는데 그 싸움의 爭點이 바로 ‘왕이 委任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였다. 一旦 김점은 中國의 皇帝처럼 王이 모든 것을 總覽해 하나하나 챙겨야 한다고 主張했다. ‘大國인 中國도 그렇게 한다(실제 어떤知와는 關係없이)’는 게 核心 메시지였다. 그런데 허조는 이것에 극렬히 反對했다. 허조는 “中國으로부터는 배워야 할 것도 있지만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며 “王의 役割은 일을 잘하는 人材를 잘 찾아내서 믿고 맡기는 것”이라고 主張했다. 三星의 故 이병철 會長의 HR 原則이라고 하는 ‘의심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疑心하지 말라’는 얘기가 바로 여기에서 허조에 依해 繼續 引用된다. 내가 알기로 이병철 會長도 『世宗實錄』에서 이를 따왔다. 世宗은 우리가 알다시피 허조의 立場에 同意했고, 最高의 人材를 찾아내 그에게 믿고 맡기는 方式을 따른다. 앞서 파저강 討伐에서 勝戰譜를 알린 최윤덕에게도 徹底하게 委任했고, 以後 北方開拓을 이룬 김종서에게도 그랬다. 甚至於 누군가 金宗瑞를 謀陷瑕疵 “의심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疑心하지 말아야 한다”고 正確하게 되뇌며 金宗瑞를 保護했다. 音樂과 關聯해서는 朴堧한테 全部 다 委任을 하고, 大日本 外交는 當時 最高 專門家인 이예에게 一任한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委任이 事實 쉬운 게 아니다. 企業 自刎을 하다 보면 많은 CEO나 任員이 委任을 힘들어한다. 내가 볼 땐 이건 當然한 防禦本能이다. ‘내가 委任해준 사람이 失手하면 어떡하지?’ ‘내가 統制할 수 없는 狀況에서 일이 틀어지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하는 건 本能에 가까운 일이라는 意味다. 그러나 元來 經營은 ‘冒險’이다. 人材를 쓰는 것은 가장 큰 冒險이다. 繼續 委任하지 않고 細部的인 指示만 하면 人材는 育成할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리더는 뭘 해야 할지 答이 나온다. 人材를 選拔하는 能力, 알아보는 眼目, 育成하는 能力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自然스레 世宗의 ‘人材 經營’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世宗이 어떻게 人材를 拔擢해 活用했는지를 얘기하기 前에 世宗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던 ‘敏感性’과 ‘柔軟性’에 對한 얘기를 暫時 하는 게 좋겠다. 그 두 가지가 結局 人材를 選拔하고 그들에게 適切히 委任해 全體的인 經營을 이끄는 데에 重要한 役割을 하기 때문이다. 世宗은 스스로 眼目이 흐려지지 않는지, 自身의 思考에 問題가 생기진 않았는지 끝없이 點檢했다. 自己를 늘 觀察했다는 얘기다. 스스로를 돌아보다가 ‘내가 요새 많이 혼란스럽다. 나 自身을 아직까지는 節制할 수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爆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이걸 臣下들과 側近들에게 말해준다. 보고 있다가 自己가 統制를 못하는 狀況이 되는 것 같으면 옆에서 指摘해달라고 하는 거다. 도와달라고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冊을 읽으면서 繼續 省察한다. ‘이 皇帝는, 이 王은 이래서 亡했구나. 나도 그럴 수 있다’고 繼續 反省하는 過程이 나온다. 그러면서 ‘柔軟性’과 ‘敏感性’을 維持하려고 하는 거다. 어떤 분들은 ‘世宗이 그때 그 狀況이니까, 또 只今 우리가 한참 뒤에 보니까 대단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只今 이 時代에, 이 複雜한 環境에 두면 별다른 成果를 못 낼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決코 同意하지 않는다. 世宗 리더십의 核心은 ‘무엇을 이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 卽 方法論에 있다. 그 方法論은 너무도 强力하다. 그가 只今 이 時代에 태어나 리더가 된다면 亦是나 特有의 方法論으로 時代에 맞게 敏感性과 柔軟性을 갖고 經營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파저강 討伐의 崔潤德은 事實 ‘學識’은 不足했지만 뛰어난 勇猛과 武藝, 現場 指揮 能力이 있었다. 世宗은 金宗瑞로부터 그 强占에 對한 얘기를 듣고, 그를 拔擢했고, 나중에는 “可히 領議政도 될 만한 人物”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邊方의 最前線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將軍에게 最高의 信賴를 보낸 것이다. 崔潤德이 忠誠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理由다. 오랜 時間 領議政을 지내기도 했던 柳政鉉의 登用은 ‘短點’을 ‘長點’으로 發想의 轉換을 이뤄 成功한 代表的인 事例다. 柳廷顯은 事實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베풀 줄 모르고, 동산에 있는 과일도 모두 市場에 팔아서 조그마한 利益까지 計算했다’는 等의 記錄이 나온다. 甚至於 穀食이나 돈을 꿔 주고 利子를 받는 데에도 한 치의 溫情이 없어 百姓들 사이에서는 ‘領議政(柳政鉉) 長利는 죽을망정 絶對 꿔 쓰지 않겠다’는 말이 돌 程度였다. 世宗은 바로 그에게 나라 살림을 맡겨버렸다. 柳政鉉의 至毒한 緊縮財政은 世宗 初期 잇따른 凶年을 無事히 넘길 수 있는 原動力이 됐다. 官奴 出身 蔣英實의 登用이라든가, 缺陷이 많았던 黃喜 等을 結局 繼續 活用해 名宰相으로 만든 얘기 等은 뭐 이미 너무 有名하지 않은가. 4 人材 經營 얘기를 마치기 前에 集賢殿 얘기는 簡單하게나마 하는 게 좋겠다. 5 只今으로 치면 엄청난 싱크탱크(Think Tank)이자, 企業의 R&D센터이자, 同時에 經濟經營硏究所 같은 곳이다. 集賢殿에 뛰어난 人材를 모아놓고 끝없이 育成했던 것은 아마 大部分 알고 계실 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集賢殿은 決코 ‘世宗의 親衛隊’價 아니었다는 事實이다. 集賢殿은 ‘政治的 獨立性’이 아주 剛한 곳이었다. 世宗의 政策이나 意見에 反對하는 일도 많았다. 集賢殿 學士들은 “이 나라는 殿下의 調整이 아닌 辭職이 물려준 調整입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世宗의 政策을 正當化하고 合理化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討論하고 말 그대로 智慧를 모아가는 곳이었다. 御殿會議는 다 集賢殿에서 準備했다. 世宗이 볼 때 御殿會議는 그 國家의 水準을 보여주는 곳이었고, 御殿會議의 水準과 能力이 곧 國家 能力이었다. 只今 企業으로 치면 R&D 核心 人力과 經濟經營硏究所의 碩學들이 企業의 戰略會議에 參與해 重要한 案件마다 專門的인 識見을 알려주는 形態였다고 보면 된다. 甚至於 CEO나 오너의 政策에 反對까지 하면서 말이다.

    世宗은 ‘經學’이라고 하는 理論 프레임에서만 國家 經營을 論하지 않고 歷史書를 重視하면서 다양한 事例, 요즘으로 치면 ‘케이스 스터디’도 宏壯히 重視했던 것으로 보인다.
    儒敎에서는 基本的으로 ‘駐京溺死’의 國家 經營을 한다. 풀어 說明하면, 經學 卽 理論的 古典 텍스트를 基本으로 놓고 날개처럼 歷史를 工夫해 智慧를 얻고 國家를 經營한다는 거다. 그런데 世宗은 歷史를 통해 배우는 事例를 다른 王보다 더 强調했다. 注射翼鏡이라고 할까. 當時 碩學 中 한 名이었던 輪廻와 이를 두고 實際로 論爭을 벌이기도 한다. 實際 中國과 高麗의 옛 事例를 當時 朝鮮에 맞게 適用하는 것을 重視했던 世宗은 在位 7年 集賢殿의 선비들에게 모든 詐欺(史記)를 나눠주고 읽도록 했는데, 臣下 윤회가 反對하고 나섰다. 윤회는 傳統的인 留學과 儒敎政治論에 立脚해 “옳지 않다. 大體로 經學이 于先이고 私學은 그다음이 되는 것이니 오로지 私學만을 닦아서는 안 된다”고 主張한다. 그러자 이를 받아치는 世宗의 말이 壓卷이다. “내가 물어보니 臣下들이 옛 事例를 하나도 모르더라. 只今 선비들이 末路는 經學을 한다고 하지만 果然 經學이나 제대로 工夫하는지 疑問이다”라고 받아쳤다. 當時 世宗은 臣下들이 恒常 經典만 가지고 論하다가 現實, 卽 事例를 모르고 엉뚱한 얘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지 되물었던 셈이다. 世宗 立場에서 國家 經營에서 第一 重要한 건 實際로 存在했던 成功과 失敗의 事例이고 그 敎訓이었다. 經典이 提供하는 理論的 프레임은 그 事例를 現實에 適用할 때 一種의 가이드라인으로 使用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至毒하게 實用的인 생각이었고, 어찌 보면 그게 世宗 時代의 繁榮을 만든 바탕이었다. 世宗은 이렇게 歷史的 事實과 實際 事例를 重視하다 보니 그걸 記錄하는 것 또한 매우 重視했다. 鄭麟趾는 世宗에게는 親舊와 같은 臣下였고, 가장 信賴하는 ‘천재형’ 臣下였는데, 다른 모든 臣下가 ‘朝鮮의 曆法’을 만드는 데 失敗했고 거의 抛棄한 狀態에서 이걸 鄭麟趾에게 맡겼다. 結局 1年 만에 日蝕과 月蝕을 다 戒身하는 朝鮮의 달曆을 鄭麟趾가 만들어낸다. 엄청나게 稱讚을 하고 激勵한 뒤에 참으로 世宗다운 일을 한다. 곧바로 ‘只今까지의 經驗, 어떤 施行錯誤를 겪어서 只今까지 왜 失敗했고, 어떤 걸 克服했기에 結局 成功했는지’ 모든 것을 記錄해 白書로 남기라는 指示를 내린다. 세종이 가장 잘한 일, 가장 좋아한 일이 바로 이런 ‘白書 만들기’였다. 曆法을 整理한 『칠정산내편』과 『七政算外篇』, 醫學을 集大成한 『鄕藥集成方』과 農事 技術을 모은 『農事直說』도 이렇게 事例를 모아 白書를 펴내는 것에 對한 世宗의 執着이 만들어 낸 結果物이다. 이런 白書의 序文은 大部分 世宗이 口述하고 世子나 臣下 申叔舟가 쓰는 形態로 作成됐다. 이런 序文을 쭉 모아 보면 世宗이 理論을 바탕으로 事例를 硏究해 國家를 經營하는 하나의 프로세스가 보인다.

    어떤 프로세스인가?
    나는 그걸 ‘I3 U1’의 法則이라고 부르는데 整理하면 이렇다. 世宗은 解決해야 할 問題가 있으면 먼저 過去의 事例나 中國 等의 先進 事例를 가져와 模倣한다. Imitate다. 蔣英實 等을 시켜 中國의 科學機器들을 잘 보고 가져와 베껴 만들라고 한 게 바로 이런 거다. 그다음에는 그걸 實際로 適用해보면서 improve한다. 萬若 中國의 曆法이거나 中國의 科學器具라 朝鮮의 實情에 안 맞으면 그걸 맞게 발전시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力量을 바탕으로 invent를 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百姓들의 實生活에 쓰일 수 있도록 持續的으로 改良하고 普及한다. Utilize의 段階다. 世宗 時代 수많은 發展이 있었다. 農業의 發展이나 訓民正音 創製, 制度의 發展이 있었다. 內 個人的으로 訓民正音 創製만큼이나 높게 꼽는 건 ‘曆法’과 ‘天文學’의 發展인데 이게 곧 ‘朝鮮의 自體的인 時間’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世宗은 물時計, 해時計 만들어서 鍾路 거리에 내놓는다. 實際로 百姓들이 그 時間을 보고 生活에 도움을 얻으라고 한 것이다. 이런 實生活 適用이 없으면 뭐 하러 힘들여 開發했냐는 實用主義가 깔려 있다. 朝鮮의 曆法을 갖게 되자 달曆을 만들어 뿌리고, 農業白書를 만들어 普及한다. 法과 制度를 더 많이 배우게 하려고 苦悶하다가 結局 글字까지 만든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가 하나 잘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뜬금없지만 中國에 對한 ‘事大’와 關聯된 것이다. 要塞 世宗乙 貶下하면서 至毒한 事大主義者로 批判하는 境遇가 間或 보이는데, 高麗 末 以後 當時 明나라와 信賴가 完全히 깨진 狀態여서 世宗 時代에는 名義 信賴를 回復하는 게 매우 重要했다. 그런 面에서 世宗은 至極精誠으로 師大外交를 펼쳤다. 그런데 이게 한便으로는 어마어마한 實利였다. 그렇게 信賴를 쌓았기에 朝鮮의 曆法을 따로 만들고, 天文學을 발달시키고, 甚至於 스스로 글字까지 만들었지만 外交 關係에 問題가 생기지 않았다.

    ‘CEO 世宗’의 疏通과 經營
    世宗 時代를 工夫하다 보면 ‘허조’라는 人物이 가장 興味롭다.
    그렇다. 世宗의 永遠한 ‘惡魔의 辯護人’利子 ‘충성스러운 反對者’다. 世宗 時代엔 그런 臣下들이 많았지만 허조는 正말 대단했다. 허조를 繼續 重用했다는 게 어찌 보면 世宗의 偉大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受領告訴禁止法 같은 境遇 世宗은 百姓이 不當한 일을 當하면 守令을 告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허조는 극렬히 反對했다. 世宗은 그답게 期於이 集賢殿 學士들에게 指示하고 本人이 直接 뒤져가면서 中國에 分明 그런 게 可能했던 事例가 있었음을 찾아와 ‘그런 前例가 없다’는 허조에게 反論을 提起했다. 그렇게 어떤 政策이든 實際로 實行이 되든, 안 되든 長短點이 자연스럽게 論議가 됐고 方向이나 趣旨는 좋으나 副作用이 豫想되는 政策들은 修正 補完될 수 있었다. 허조와 같은 충성스러운 反對者들의 役割이 참 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은 反對者를 두는 건 正말 어려운 일이다. 只今 우리나라의 事例 하나를 들어보자. 내가 아는 敎授 中 한 大學의 A 敎授와 다른 大學의 B 敎授가 있다. 둘 다 經營學者다. A 敎授는 恒常 企業에 좋은 소리만 한다. 늘 편든다. B 敎授는 宏壯히 批判的이다. 우리나라 企業들은 죄다 A 敎授만 찾아간다. 이게 現實이다. 外部 敎授도 쓴소리하는 사람은 外面하는데 只今 企業 內部에서 쓴소리를 한다? 이건 不可能해 보인다. 그럼에도 抛棄하지 말고 努力해야 한다. 뭔가 制度化할 方法을 찾아야 한다. 王의 行動과 말을 記錄하는 史觀을 못 건드렸듯, ‘諫言’을 하는 선비를 건드리지 못했듯 뭔가 制度的으로 ‘쓴소리’와 ‘反對’를 保障할 方法을 찾아야 한다. 自身의 決定을 合理化하고 正當化하기 위해 敎授나 專門家에게 컨설팅을 주는 代身 批判的인 목소리를 차라리 돈 주고 사라고 말하고 싶다. 안 그러면 企業이 亡하는 건 瞬息間이다. DBR 같은 經營 專門指導 繼續 쓴소리해 줄 必要가 있다.

    自然스레 ‘世宗 時代’를 통해 只今의 韓國 企業들에 對한 助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恒常 놀라는 部分이다. 企業에서 世宗 硏究者인 나를 왜 자꾸 찾을까 생각해보면 그 리더십으로부터 배울 게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結論이 나온다. 要塞 모두가 ‘疏通’을 强調하고 있는데 眞짜 리더의 疏通이란 結局 世宗의 疏通이 아닌가. 反對者일수록 더 言路를 열어서 無條件 말하게 하고, 一方的인 指示가 내려가는 會議를 極度로 嫌惡하고. 世宗의 質問法 乃至 對話法에 그 疏通力과 柔軟性의 本質이 있다. 世宗의 對話法이랄까 거의 語套에 가까운 것을 한番 紹介해보겠다. 大韓民國 政治家는 勿論 CEO들이 이것만 좀 배워도, 리더들이 이것만 意圖的으로 따라 해도 眞짜 큰 發展이 있을 거다. 첫째는 ‘質問으로 말門 열기’다. 世宗의 會議에서 첫마디는 恒常 ‘어찌하면 좋겠는가’였다. 自身이 나름 答을 아는 것도 더 좋은 答을 듣기 위해, 더 나은 方法을 찾기 위해 恒常 물었다. 그다음에 어떤 意見을 臣下가 말하면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京義 말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러니 臣下들이 자유롭게 討論할 수 있었고 떠오르는 좋은 생각을 遲滯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對話를 繼續 促進하기 위해 世宗이 쓰는 세 番째 語法은 “나는 잘 모른다”였다. 그렇게 臣下들이 繼續 말을 하도록 誘導했다. 그리고 네 番째, 그렇게 쏟아져 나온 말과 말들을 連結했다. 卽, 本人도 머릿속에서 連結하고, 臣下들한테도 생각과 생각이 連結되도록 刺戟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적솔(앞장서 行함)’이라고 하는 리더십을 發揮했다. 이게 다섯 番째다. 卽, 좋은 아이디어를 果敢하게 實踐하도록 督勵하고 個人的 實踐이나 實行이 必要한 境遇엔 直接 했다. 整理해보자. 世宗의 疏通法은 첫째, 質問으로 말門을 열고, 首肯型 對答으로 追加 아이디어를 促進하는 것이었다. 세 番째로 謙遜한 傾聽을 통해 繼續 사람들이 말하도록 하고, 네 番째로 ‘連結하여 듣기’, 마지막으로 ‘實踐하기‘ 巡으로 進行하는 것이다. 어느 組織에서든 이걸 그대로 한番 따라 해보라. 내가 이끄는 世宗 卽位 600年 記念 事業하는 組織에서도 實行 中인데 생각보다 어렵다. 내가 繼續 이런 疏通法을 强調하는 데에는 理由가 있다. 나도 企業 關聯 諮問을 하고 프로젝트를 進行해면서 겪은 게 있기 때문이다. 한番은 國內 有數 大企業에서 디자인 經營 프로젝트를 도울 때였다. 3年 가까이 했는데, 나름 글로벌 企業인데도 專門家인 디자이너들이 어떤 안을 올리면 社長이나 任員들이 ’이거 버튼 位置 옮겨‘ ’안 예쁘잖아. 다시 해‘라고 하는 것에 衝擊을 받았다. 眞짜 디자인 專門家들의 얘기를 듣지도 않고 ’내가 높은 사람이니 내가 더 잘 안다‘고 錯覺하고 實際로 그걸 指示하고 있었다. 내가 더더욱 世宗의 會議法, 世宗의 疏通法을 퍼뜨려야겠다고 作定하게 된 契機이기도 하다. 世宗式 疏通 目標, 世宗式 會議를 할 때 會議 前 체크리스트와 會議 後 체크리스트가 무엇인지 最近에 心血을 기울여 整理하기도 했다. 企業에서 많이들 參考했으면 좋겠다.(그림 2)

    46


    마지막으로, ’CEO 世宗‘의 側面에서 企業人들에게 助言을 한다면?
    要塞 世宗 리더십이 脚光받으면서 ’CEO 世宗‘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게 그냥 그럴싸하게 갖다 붙인 말은 아니다. 眞짜 現代의 벤처事業家, 偉大한 經營者, 스타트업 CEO 같은 面이 있다. 革新的 리더로서의 面貌가 實錄에 꽤 많이 드러난다는 얘기다. 世宗이 TF팀을 엄청나게 많이 運營했고 實際로 TF에서의 多樣한 意見 交換과 實驗을 통해 成果가 나면 이를 公式 政策으로 採擇하곤 했다. 部處 間 境界를 뛰어넘어 協力을 이끌어내는 ‘도감(都監) 經營’이 바로 그것이다. 이 圖鑑은 設置 背景 自體가 常設 官署가 處理할 수 없는 事案이 있을 때 만들어지는 태스크포스(Task Force) 組織이었다. ‘일이 있으면 設置하고, 일이 끝나면 廢止하는[因事而置 事已則罷]’ 일 中心의 組織‘인데 世宗은 그때까지의 어느 임금보다 圖鑑을 자주, 그리고 效果的으로 運營한 것으로 나온다. 實錄에서 ‘도감’이라는 말을 檢索해보면 『太祖實錄』에 42件, 『太宗實錄』 153件이 나오는 데 비해 『世宗實錄』에는 無慮 235件이나 登場한다. 世宗은 첫째, 매우 重要해 緊急하게 解決해야 하는 事案, 둘째, 事案이 複雜해 여러 官署가 合坐해 處理해야 하는 事案, 셋째, 問題를 解決할 官署가 定해져 있지 않은 事案이 發生했을 때 TF, 卽 ‘도감’을 設置했다. 在位 8年(1426年) 都城 大火災事件 때 만들어진 ‘禁火都監(禁火都監)’을 例로 들어보자. 이건 一種의 消防防災 TF였다. 이는 나중에 正式 消防防災廳 같은 機關으로 變했다. 巡察을 할 때 木鐸을 쳐서 릴레이式으로 現在 狀況을 알리는 方式이 開發됐고 곧 適用됐다. 金屬活字를 製作할 때, 새로운 中國의 科學技術을 들여와 開發하고 발전시킬 때에도 이런 도감, 卽 TF는 繼續 만들어졌다. 理論팀과 技術팀의 協業으로 渾天儀 같은 天文 機構가 製作되기도 했는데 이 亦是 ‘協業을 위한 圖鑑’을 通해 이뤄졌다. 宮中音樂 革新을 위한 慣習都監, 宮闕工事를 맡은 宮闕都監, 王室葬禮를 맡은 國葬都監 等 世宗은 뭔가 協力이 必要하고 創意的 아이디어가 必要할 때마다 圖鑑을 만들어 빠르게 實行했고 成果가 나면 받아들였다. 整理해 보자. 늘 强調하는 世宗의 會議 經營과 疏通 經營을 數値로 한番 보자. 世宗의 意思決定은 會議를 통한 것이 63%, 命令이 29%였다. 反面 그의 아들인 世祖는 命令이 75.3%, 會議가 20.9%였다. 世宗은 强力한 王權을 가진 君主였지만 모든 決定을 臣下들과 議論해 내렸다. 世宗은 平均 生産量을 考慮하되 一定한 稅收를 얻을 수 있는 ‘公法’ 改革을 하기 前에, 卽 土地租稅 制度를 변화시키기 前에 17年 동안 討論했고 17萬 名의 一般 百姓으로부터 輿論을 모았다. 17年 걸려 만든 制度는 250年 가까이 持續됐다. 6 100年 企業도 만들기 어려운 世上에서 企業人들이 눈여겨볼 事例들이자 成果가 아닐까.

    고승연 記者 seanko@donga.com


    인터뷰이 紹介
    박현모 敎授 는 서울大 政治學科에서 ‘正祖의 聖王論과 警長政策에 關한 硏究’로 博士 學位를 받았다. 朝鮮 政治 硏究는 情調로 出發했지만 以後 世宗에 푹 빠져 世宗 硏究의 大家가 됐다. 2001年부터 2014年까지 約 15年間 韓國學中央硏究院 硏究敎授 및 責任硏究員으로 일했다. 現在는 여주대 敎授 兼 世宗리더십硏究所長을 맡고 있다. 2005年부터 ‘實錄學校’라는 市民講座를 열어오기도 했다. 著書로 『世宗처럼』 『世宗의 敵솔力』 等이 있으며 그 外 많은 論文과 著書가 있다. 2018年 世宗 卽位 600年을 맞아 各種 學術 行事를 企劃, 主管하고 있다.
    人氣記事
Good Content Service kocca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