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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아는 ‘못된’ 文化

‘眞實한 꾸중’은 어디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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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icle at a Glance

    韓國 사람들은 傳統的으로 稱讚에 弱하고 꾸중에 强했다. 꾸중은 사람을 鼓舞시키고 動機를 附與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便, 美國 사람들은 稱讚을 밥 먹듯이 한다. 成果가 좋지 않더라도 稱讚이 動機附與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果然 어느 쪽이 맞을까? 硏究 結果는 兩쪽 모두 틀렸음을 보여준다. 잘했을 때는 稱讚해주고, 못했을 때는 꾸중해야 더 나은 成果를 낼 수 있다. 언젠가부터 韓國에서도 美國처럼 稱讚을 많이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過度한 稱讚은 오히려 사람을 망칠 수 있다. 眞實한 꾸중을 할 줄 아는, 勇氣 있는 ‘꼰대’가 必要한 時代다.



    20年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瞬間이 있다. 新婚旅行을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나와 아내는 食卓에 앉아 아내가 3時間 30分 동안이나 準備한 첫 飮食을 마주했다. 김치찌개였다. 김치찌개를 보며 나는 설지만 아내는 相當히 緊張한 눈치였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국물을 떠서 맛을 봤다. 길어봐야 3秒를 넘기지 않는 時間이었지만 20年이 지난 只今까지도 그 瞬間을 記憶하고 있다. 맛이 없었다. 맛이 안 좋은 것이 아니고 그냥 文字的으로 맛 自體가 없었다. 平生 한番도 經驗해 보지 못한 맛이었다.

    그 3秒의 瞬間에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물끄러미 웃으며 期待에 찬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아내를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苦悶에 빠졌다. 나는 直感的으로 3個의 選擇肢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첫째는 김치찌개가 아주 맛있다고 善意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김치찌개에 對해서는 一言半句도 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김치찌개가 맛이 없다고 率直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 番째 選擇肢는 不可能했다. 그렇다고 세 番째 選擇肢가 可能한 것도 아니었다. 新婚 初부터 싸우고 싶지도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稱讚에 對한 수많은 敎育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稱讚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敎育이었다. 勿論 나는 김치찌개가 엄청 맛있다고 善意의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나는 그날 밥을 먹으며 재밌는 心理學 實驗 하나를 設計하게 됐다. 내 善意의 거짓말로 아내의 飮食 솜씨가 正말로 더 좋아질까 궁금했다. 發生할 수 있는 境遇의 數는 딱 3個뿐이었다. 첫째는 사람들의 믿음처럼 아내의 飮食 솜씨가 漸漸 더 좋아지는 境遇, 둘째는 사람들의 믿음이 無色하게 아내의 飮食 솜씨가 그 水準에 머무르는 境遇, 마지막 셋째는 (더 안 좋아질 것도 없지만) 아내의 飮食 솜씨가 漸漸 더 안 좋아지는 境遇였다. 나는 이 答을 찾아 지난 20年間 稱讚과 꾸중에 關해 硏究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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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稱讚과 꾸중에 對한 우리의 믿음

    只今도 書店을 돌아다니다 보면 稱讚의 效果에 關해서 力說하는 冊들이 많다. 한때 우리는 ‘서로 稱讚합시다’라는 口號를 내세우며 學校에서나 職場에서 全 國民이 稱讚하기를 練習한 때도 있었다. 왠지 사람을 처음 만나면 稱讚할 구석을 억지로라도 찾게 된다. 稱讚으로 對話를 始作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물며 어린아이를 만나더라도 첫 文章은 恒常 “野, 너 너무 예쁘게 생겼다”라고 해야 한다. “어머, 얼굴이 너무 좋아 보여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라는 말들을 우리는 첫 人事말의 慣用語처럼 使用한다. 하다못해 “와, 皮膚가 어떻게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하며 皮膚 狀態까지 召喚한다. 꾸중해야 하는 狀況에서도 우리는 稱讚을 먼저 하는 配慮(?)를 잃지 않는다. 稱讚을 무슨 萬病通治藥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稱讚의 內容이 事實이든 아니든 그리 重要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元來부터 이런 態度를 지녔던 건 아니다. 우리는 元來 稱讚과 距離가 먼 民族이었다. 稱讚을 亞父와 權謀術數로 생각했던 時節이 있었다. 그래서 只今도 稱讚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우리는 꾸중을 美德으로 생각하는 民族이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꾸중이라는 매를 들었다. 酷毒한 꾸중으로 사람을 바로 잡으려고 했고, 더 成長시키려 했으며, 일에 對한 動機를 올리려고 했다. 學校生活은 꾸중의 連續이었다. 꾸중은 敎育에서 가장 重要한 本質이었다. 집에서도 꾸중을 듣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가지 않을 程度였다. 子女를 꾸중한 擔任 先生님을 찾아가 어머니는 머리를 조아렸고 더 혼내 달라는 付託을 잊지 않았다. 職場 生活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꾸중과의 死鬪가 職場 生活의 核心이었다. 모르는 아이라 할지라도 洞네 어른들은 잘못된 아이를 꾸짖는 데 躊躇함이 없었다. 어른의 使命이었다. 꾸중은 사랑과 關心의 表現이었고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重要한 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꾸중을 우리 삶 속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집에서도, 學校에서도, 職場에서도 마찬가지다. ‘꼰대’라는 時代的 障壁 앞에서 꾸중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代身 稱讚이 亂舞하는 時代가 열렸다. 여러 가지 理由가 있겠지만 그 核心에는 美國 文化圈에 基礎를 둔 肯定心理學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肯定心理學의 本質은 버리고 껍데기만 輸入했다. 肯定心理學을 無條件 稱讚하기 或은 無條件 自身을 肯定的으로 바라보기로 解釋하고 適用했다. 꾸중에 힘들어하던 우리에게 肯定心理學은 그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過程을 통해서 우리는 꾸중에 對한 傳統的인 態度를 完全히 잃어버렸다.


    稱讚과 꾸중을 바라보는 韓國人과 美國人의 態度

    稱讚과 꾸중에 對한 東西洋의 差異는 아주 克明하다. 特히 美國 사람들은 稱讚을 밥 먹듯이 한다. 稱讚에 對한 單語들도 數없이 많다. Excellent! Fantastic! Great! Wonderful! Phenomenal! Outstanding! Impressive! Super! Very Good! Awesome! Extraordinary! Top-Notch! Brilliant! Remarkable! 이런 單語들이 日常의 삶에 녹아 있다. 이런 單語들을 使用하지 않고는 몇 文章도 말하기 어려울 程度다. 하지만 相對的으로 꾸중에 關한 單語는 別로 없다. 이런 態度에는 稱讚과 꾸중을 바라보는 美國人들의 哲學이 숨어 있다. 稱讚은 사람을 鼓舞시키고 動機를 附與한다고 믿는다. 비록 成果가 基準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꾸중에 對해서는 敵對的인 態度를 보인다. 꾸중은 動機를 잃게 한다고 믿는다. 비록 現實的이고 客觀的인 꾸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韓國 사람들은 傳統的으로 稱讚에 弱하고 꾸중에 强했다. ‘오케이!’라는 말은 아주 훌륭한 成果가 나왔을 때 쓰는 單語였다. 美國人 處地에서 생각하면 迫害도 너무 薄한 單語가 아닐 수 없다. 특별한 말이 없으면 잘했다고 생각할 程度였다. 이런 韓國人의 態度에도 美國人과는 다른 哲學이 숨어 있었다. 꾸중은 사람을 鼓舞시키고 動機를 附與한다고 믿었다. 비록 成果가 좋은 境遇라 하더라도 말이다. 最高 水準의 成果를 낼 때까지 꾸중이 이어졌다. 꾸중을 動機附與의 手段으로 使用했다. 하지만 稱讚은 動機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 水準에 滿足하며 懶怠해질까 봐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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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稱讚과 꾸중,
    뭐가 더 높은 成果를 豫測할까?

    美國 사람들은 成果가 좋지 않더라도 稱讚을 통해서 動機附與를 하려고 하지만 韓國 사람들은 (傳統的으로) 成果가 좋더라도 꾸중을 통해서 動機附與를 하려고 한다. 누구의 態度가 옳은 것일까? 美國 사람들의 믿음처럼 成果가 낮은 사람에게 “잘했다!”라고 稱讚하면 動機附與가 돼서 그다음 課題에서는 더 높은 成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韓國 사람들의 믿음처럼 成果가 높은 사람에게 “잘하지 못했다!”라고 꾸중하면 더욱 動機附與가 돼서 그다음 課題에서 더 높은 成果를 얻을 수 있을까?

    이 質問에 對한 科學的 答을 얻기 위해서 筆者는 心理學 實驗 하나를 實施했다. 1 實驗 參與者를 募集한 後 10問題로 構成된 數學 試驗을 치르게 했다. 그 後에 試驗을 잘 본 사람들을 두 그룹을 나눠서 한 그룹에는 “試驗을 아주 잘 봤다”라는 稱讚을 했고 다른 그룹에는 “試驗을 잘 못 봤다”라는 꾸중을 했다. 試驗을 잘 못 본 사람들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그룹에는 “試驗을 아주 잘 봤다”라고 稱讚했고 다른 그룹에는 “試驗을 잘 못 봤다”라는 꾸중을 했다. 그 後에 모든 實驗 參與者에게 다른 試驗 하나를 더 치르게 했다. 稱讚과 꾸중이 그다음 試驗에 어떤 影響을 끼치는지를 把握하기 위해서였다. 結果는 어땠을까? 韓國人의 믿음처럼 試驗을 잘 본 사람들이 꾸중을 받았을 때 두 番째 課題에서 더 높은 成跡을 얻었을까? 美國人의 믿음처럼 試驗을 잘 못 본 사람들이 稱讚을 받았을 때 두 番째 課題에서 오히려 더 높은 成跡을 얻었을까?

    데이터를 分析하고 깜짝 놀랐다. 먼저 試驗을 잘 못 본 사람들의 圖表(A)를 보면 美國人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試驗을 잘 못 본 사람들에게 稱讚을 하면 꾸중할 때보다 두 番째 課題에서 成績이 더 낮았다. 誇張된 稱讚은 動機를 附與하기는커녕 오히려 動機를 떨어트렸다. 거짓된 稱讚에 滿足하고 安住하며 努力하지 않은 結果였다. 하지만 試驗을 잘 못 본 사람들을 꾸중했을 때는 成績이 더 높아졌다. 결론적으로 試驗을 못 본 사람들에게는 꾸중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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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試驗을 잘 본 사람들은 어땠을까? 圖表(B)를 보면 韓國人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試驗을 잘 본 사람들을 꾸중하면 稱讚할 때보다 두 番째 課題에서 成績이 더 낮았다. 非現實的인 꾸중은 動機를 附與하기는커녕 오히려 動機를 더 떨어트렸다. 誇張된 꾸중을 듣곤 抛棄를 해버리고 努力하지 않은 結果였다. 하지만 試驗을 잘 본 學生들을 稱讚했을 때는 以後 成績이 더 높아졌다. 결론적으로 試驗을 잘 본 사람은 제대로 稱讚해야 한다는 뜻이다.

    結論은 意外로 簡單하다. 잘했을 때는 잘했다고 이야기하고, 못했을 때는 못했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現實을 直視하고 適切한 準備와 努力을 하게 된다. 그것이 成果를 올리는 唯一한 길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自明한 事實이지만 現實에서는 豫想外로 이런 法則들이 잘 實現되지 않는다. 韓國人과 美國人은 各其 다른 方法으로 일에 對한 動機를 附與하려고 한다. 美國人은 稱讚의 힘을 過信해 잘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稱讚해 일에 對한 動機를 끌어올리려고 한다. 좋은 試圖인 것처럼 보이지만 結局 그런 接近은 字만을 불러오고 낮은 成果로 마무리된다. 韓國人의 믿음도 틀린 것은 매한가지다. 韓國人은 傳統的으로 꾸중의 힘을 過信해 잘한 사람들에게도 꾸중해 일에 對한 動機를 더 올리려고 한다. 지혜로운 方法처럼 보이지만 結局 그런 接近은 抛棄를 불러오고 낮은 成果로 마무리된다.

    事實은 事實대로 말해야 한다. 피드백은 正確하고 現實的일 때 效果가 훨씬 더 좋다. 動機를 높이기 위해서 잔머리를 굴려서 잘한 사람에게 못했다고 다그치거나 못한 사람에게 잘했다고 하는 건 더 낮은 成果를 招來할 뿐이다. 아쉽지만 언제부턴가 東西洋을 莫論하고 많은 사람이 바른말을 하는 데 많은 負擔感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왠지 더 稱讚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더욱더 꾸중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科學的 眞實은 如前히 現實的이고 客觀的인 피드백에 무게를 두고 있다. 稱讚이 正當할 때는 稱讚을 해야 하고 꾸중이 正當할 때는 꾸중해야 한다. 그래야 더 높은 成果를 期待할 수 있다.


    한 사람의 人生을 가장 쉽게 망치는 方法

    한 사람의 人生을 가장 쉽게 破壞할 方法이 있다. 法的으로나 倫理的으로 아무런 問題가 되지 않게 말이다. 더 나아가 좋은 이미지까지 남기면서. 答은 바로 過度한 稱讚, 正當하지 않은 稱讚을 하는 것이다. 非現實的인 稱讚일수록 좋다. 筆者가 進行한 수많은 硏究 中에서 한 가지의 實驗 結果만 共有했지만 只今까지의 모든 硏究를 綜合해 봐도 같은 結果가 導出됐다. 過度하고 非現實的인 稱讚은 成果를 떨어트리고, 成就動機를 낮추며, 自己 不具化 現象을 誘導할 뿐 아니라 憂鬱 程度까지 높인다. 成功하고 幸福하게 사는 것이 大部分의 사람이 人生에서 願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稱讚보다 더 致命的인 것이 없다.

    勿論 過度한 꾸중도 같은 結果를 招來한다. 非現實的인 꾸중을 하면 된다. 正當하지 않은 꾸중을 하면 된다. 그런 꾸중을 받은 사람은 삶에서 重要한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요즘같이 肯定心理學이 판을 치는 世上에서 過度한 꾸중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꾸중에 對한 重要한 事實 中 하나는 現實的이며 正當한 꾸중은 成果를 오르게 하고 成就動機를 올린다는 事實이다. 現實的인 꾸중은 꼭 必要하고 한 個人의 成果와 精神 健康에 큰 도움이 된다. 꾸중해야 할 때 꾸중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發生할까? 成果가 떨어지고 成就動機가 낮아지며 自己 不具化 現象을 보이고 높은 憂鬱症을 經驗하게 된다. 우리 時代에 꼭 必要한 것은 過度한 稱讚이 아니고 現實的이고 客觀的인 꾸중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꾸중을 버린 지 오래다. 過度한 稱讚만 남아 사람들을 昏迷케 할 뿐이다.


    稱讚과 꾸중으로 造作되는 사람들

    眞實한 꾸중이 必要할 때 오히려 稱讚하는 사람이 많다.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은 理解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稱讚이 相對方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正當하지 않은 稱讚을 動機附與의 手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動機附與는커녕 成果를 낮출 수 있다. 稱讚을 많이 하면 사람이 幸福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進行한 硏究를 綜合해 보면 全혀 그렇지 않다. 훨씬 더 憂鬱하고 不幸한 삶을 살 確率이 높다. 그 稱讚이 正當하지 않고 過했다면 말이다. 稱讚은 稱讚할 만할 때 해야 한다. 現實的이고 客觀的인 稱讚만이 意味가 있다. 稱讚을 萬病通治藥처럼 使用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멘탈이 漸漸 弱해지고 삶에 對한 動機를 잃어가고 있다.

    잘못된 稱讚으로 아이들을 쉽게 操作할 수 있다. 하지만 造作은 오래가지 않는다. 언젠가는 結局 實體가 없으므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現實性을 强調하는 피드백이 너무 메마르고 人間味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正當하지 않은 稱讚이 오히려 人間味가 없다. 조잡스러운 造作일 뿐이다. 平生 操作할 수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現實이라는 巨大한 市場과 壁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 그 障壁에서 견딜 수 있는 造作은 없다. 課長되면 誇張될수록, 正當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람들이 겪어야 할 苦痛과 아픔은 커질 것이다. 誇張된 稱讚은 사랑도 아니고 配慮도 아니다. 그냥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어설픈 利己心日 수 있다. 그 利己心이 채워질 수만 있다면 그래도 半은 成功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利己心도 絶對 채워질 수 없다. 現實性 없는 稱讚은 누구나 空虛한 말임을 얼마 가지 않아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稱讚하고 꾸중하는 게 重要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當場 必要한 것은 眞實한 꾸중일 수 있다. ‘꼰대’라는 이름으로 꾸중이 사라지는 只今이 안타깝다. 肯定이 더 必要한 때라고 외치지만 現實性 없는 肯定은 於此彼 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正當하지 않은 꾸중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런 꾸중의 아픔은 이미 充分히 經驗했다. 이제는 그런 꾸중을 反復해서는 안 된다. 客觀的이고 現實的인 꾸중을 하자는 것이다. 正當한 꾸중이 없어 弱해져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안타깝다. 이 危機를 無限한 肯定과 稱讚으로 덮으려는 努力은 더욱더 안타깝다. 더 깊은 수렁으로 사람들을 引導하기 때문이다. 眞實한 꾸중이 사랑이고 配慮다. 眞實한 꾸중 없이는 成長도 發展도 不可能하다. 眞實한 꾸중이 멘탈을 더 剛하게 하고 어려운 試鍊과 아픔을 헤쳐 나가게 한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爲해서 勇氣를 낼 때다. 좀 더 眞實한 꾸중으로 사람을 對해야 한다. 좀 더 큰 勇氣를 낼 수 있다면 ‘眞實한 꼰대’價 되면 좋겠다. 이들이 함께 사는 世上에서 꼭 必要한 사람이 아닐까.


    어떻게 適用할까?

    많은 사람은 眞實한 꾸중을 하는 데 두려움과 憂慮를 느낀다. ‘쓸데없이 꾸중했다가 關係가 깨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다. 特別히 關係 中心的인 우리나라의 境遇 이런 憂慮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事實이다. 또 하나의 憂慮는 ‘꾸중한다고 쟤가 듣기나 하겠어?’ 하는 생각이다. 勿論 많은 사람이 꾸중을 眞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끝나기만 기다리는 게 꾸중이다. 속으로는 꾸중하는 사람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이런 憂慮는 半은 맞고 半은 틀린 생각이다. 꾸중한다고 모든 關係가 다 깨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꾸중을 拒否하는 것도 絶對 아니다. 이 갈림길은 꾸중하는 사람의 態度에 달려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勇氣를 내 꾸중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親舊든, 職員이든, 同僚든, 食口든 相關없다. 꾸중받는 瞬間에는 마음이 서운할 수 있지만 時間이 지나면 當身의 꾸중에 感謝할 것이고 關係가 오히려 더 좋아질 것이다. 아끼는 마음 없이 꾸중하면 아마도 當身의 꾸중을 듣는 척만 할 것이고 關係도 더 안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까진 없는 狀況이더라도 이 世上 누군가는 이런 役割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바른말을 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버리는 것과 別로 다르지 않다.

    다시 한番 强調하건대 勇氣 있는 꼰대가 必要한 時代다. 그런데 누가 이런 役割을 할 수 있을까? 公的인 機關에서 公式的인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事實 그런 일을 하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企業의 代表든, 人事를 擔當하는 任員이든, 部長이든, 팀長이든, 先生님이든 相關없다. 얄팍한 人氣몰이를 위해서 眞實한 꾸중을 避하고 意味 없는 稱讚과 좋은 말만 날린다면 이것보다 利己的인 마음이 따로 없다.
    • 김영훈 | 연세대 心理學科 敎授

      筆者는 社會心理學者이자 文化心理學者이다. 美國 사우스플로리다대에서 學事, 아이오와대에서 碩士, 일리노이대에서 社會心理學 專攻으로 博士 學位를 받았다. 2012年 연세대 心理學科 敎授로 赴任한 뒤 2013年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특훈敎授’에 選定 및 任命됐고 2015年 아시아社會心理學會에서 ‘最高의 論文賞’을 受賞했다. 著書로는 『차라리 利己的으로 살 걸 그랬습니다』 『努力의 背信』이 있다. 三星, LG, 司法硏修院, 超·中·高等學校 學父母 硏修 等 各種 企業과 公共機關에서 稱讚과 꾸중에 關한 講演을 하고 있다.
      younghoonki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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