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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光州 살아남은 者도 산 게 아니었다|주간동아

週刊東亞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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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光州 살아남은 者도 산 게 아니었다

民主化運動 自殺 被害者 ‘心理學的 剖檢’

  • 조용범 生命人權運動本部 共同代表·心理學 博士

    入力 2007-11-14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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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 살아남은 자도 산 게 아니었다

    5·18 光州民主化運動 當時 鎭壓軍이 한 市民을 連行하던 中 棍棒으로 毆打하고 있다.

    5·18 光州民主化運動 以後 27年이라는 歲月이 흘렀다. ‘光州事態’에서 ‘光州民主化運動’으로 이름이 바뀌고 特別法이 만들어져 被害者들에 對한 補償이 이뤄지고 있지만, 國家暴力에 依한 被害者들과 그 家族의 삶은 1980年 以前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直接的인 被害者 4360餘 名 가운데 負傷 後 死亡者가 370餘 名이었고, 이들 中 10.4%인 39名이 自殺(死亡原因 1位)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종남 氏, 24年間 貧困·拷問 後遺症·疾患 等으로 苦痛받다 스스로 生 마감

    國家가 政權 維持를 위해 市民에게 加한 拷問과 虐待, 殺人行爲로 인한 被害 硏究는 世界的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몇몇 硏究는 이런 외상(trauma)으로 인한 代表的 後遺症으로 身體的·神經的 苦痛, 外傷後 스트레스 障礙, 自殺을 꼽는데 韓國의 5·18은 이 같은 後遺症에 對한 報告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筆者가 代表로 있는 生命人權運動本部는 10月 末 5·18 民主化運動 自殺 被害者에 對한 ‘心理學的 剖檢’을 試圖했다. 5·18 拘束者로 收監生活을 했던 高(故) 이종남(假名) 氏에 對한 心理學的 剖檢은 當時 拷問과 虐待 後遺症이 李氏의 삶에 어떤 影響을 끼쳤으며, 그가 왜 自殺을 選擇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科學的으로 分析해 밝히는 것이었다.

    心理學的 剖檢은 1960年代 美國 로스앤젤레스 檢視官廳의 依賴로 처음 試圖된 것인데, 初期엔 死亡者의 死因을 正確히 糾明하기 위해 行해졌다. 卽 死亡診斷書에 死亡 類型이 自然死, 事故死, 自殺, 他殺 中 무엇에 該當하는지 判斷하기 위한 節次로 必要했던 것이다. 當時 心理剖檢 節次를 開發한 이는 現在 UCLA 名譽敎授로 在職 中인 美國 心理學者 에드윈 슈나이드먼(Edwin Shneidman) 博士로, 그는 自殺問題를 多面的이고 複合的인 現象으로 理解해 單純한 原因 分析만으로 自殺問題를 바라보는 것을 警戒한 代表的 學者이자 自殺豫防 運動家다.



    李氏의 心理學的 剖檢은 周邊 人物에 對한 인터뷰와 證言을 통해 社會 政治 文化的 情況을 包含한 多面的 分析方式으로 施行됐다. 故人은 5·18 當時 無辜한 사람들이 鎭壓軍의 暴力에 犧牲되는 것을 보고 民主化運動에 參與했다. 貨物運轉士였던 그는 運動 參與者를 위해 腐蝕을 나르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1980年 5月27日 自身의 집 近處로 親舊와 함께 避身하던 中 親舊는 鎭壓軍의 銃彈에 死亡했고, 本人은 개머리板으로 머리를 맞아 4個 以上 이가 빠졌다.

    5·18 광주 살아남은 자도 산 게 아니었다

    10月 末 열린 5·18 民主化運動 自殺 被害者에 對한 ‘心理學的 剖檢’ 關聯 討論會.

    이어진 拘束 調査過程에서는 다른 拘束者들과 함께 하루 20~120分씩 鈍器와 구둣발 等으로 無差別 毆打를 當했고, 持續的인 團體氣合과 顧問은 勿論 性器를 발로 짓이기거나 除去한다고 脅迫하는 等 性的 拷問까지 當했다고 그의 한 知人은 報告했다. 이 같은 身體的 傷害와 함께 拘束狀態에서 恒常 ‘暴徒 ○○○’라고 말하며 間諜임을 告白하게 했으며, 調査官들은 “너희들은 於此彼 죽을 놈들이다”면서 끊임없이 죽음에 對한 恐怖를 갖게 했다.

    數個月間 收監生活을 마친 뒤 李氏는 擧動이 매우 힘들고, 周邊 사람들조차 못 알아볼 程度로 야윈 狀態였다고 한다. 當時 對話가 不可能할 만큼 情緖的으로 鈍感한 反應을 보였는데, 말을 걸어도 對答하지 못하고 沈默하거나 回避했으며, 過度한 覺醒反應 等 외상後 스트레스 障礙 反應을 보였다. 또한 自己破壞的 行動을 보이기 始作했는데, 釋放 後부터 漫醉해 警察官이나 軍人들에게 是非를 걸고 凶器를 휘둘러 以後 數次例 矯導所에 收監됐다. 그는 5·18 以前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次例의 前科도 없었다.

    더불어 5·18 收監者라는 烙印으로 제대로 된 職業을 갖지 못했던 그는 結局 極貧生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딸을 남겨둔 채 結婚生活을 끝내게 된다. 90年代 後半 생긴 肝疾患은 肝硬化와 肝癌으로 發展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죽음에 對한 두려움을 자주 呼訴했다고 한다. 李氏는 2003年頃 술자리에서 靑酸加里를 입에 털어넣음으로써 첫 番째 自殺試圖를 했지만 失敗하고, 1年 뒤인 2004年 다시 麥酒에 靑酸加里를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父母 보살핌 못 받은 딸마저 家出 ‘苦痛 代물림’

    心理剖檢을 通한 故人의 自殺行跡(suicide career) 分析에 따르면 李氏는 生前 自殺의 代表 危險要因으로 꼽히는 經濟的 貧困, 失業, 拷問과 虐待 經驗, 外傷後 스트레스 障礙, 身體的 疾患, 술을 비롯한 藥물 濫用, 家庭生活 不在, 낮은 自尊感, 社會的 關係 斷絶, 죽음에 對한 恐怖 等에 露出돼 있었다. 代表的인 自殺 危險要因 30餘 個 中 17個 以上에 該當됐던 그는 結局 臨迫한 手術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恐怖心과 再婚한 夫人의 疾患 治療費에 對한 負擔感, 社會的 關係에서 疏外感을 느꼈고, 家族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利他的 마음狀態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結局 李氏의 自殺은 5·18 拘束調査와 拘禁過程에서 일어난 反人權的 暴力에 依해 觸發돼 以後 社會的으로 放置된 채 삶이 疲弊해진 데서 起因한 것으로, 國家와 社會의 責任이 크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그 같은 不幸이 81年 첫 結婚에서 얻은 딸에게 그대로 轉嫁됐다는 點이다. 初等學校 1學年을 마지막으로 아빠를 만나지 못한 딸은 外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貧困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高等學校 때 家出해 現在 遊興街를 轉轉하며 살고 있다. 5·18 國家暴力은 이렇게 다음 世代의 未來까지 破壞하고 있다.

    우리 社會는 5·18 生存者와 그 家族에 對해 무엇을 해야 할지 苦悶해야 한다. 이들의 삶이 回復될 수 있도록, 그리고 當時 事件의 證人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長期的인 社會保障 政策에 對한 硏究와 支援이 時急하다. 이 같은 努力만이 이 땅에서 다시는 權力에 依한 人權侵害가 일어나지 않고, 民主化運動에 獻身했던 분들이 영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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