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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法改革” … 외로운 10年 鬪爭|週刊東亞

週刊東亞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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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法改革” … 외로운 10年 鬪爭

  • 정호재 記者 demian@donga.com

    入力 2003-07-03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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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개혁” … 외로운 10년 투쟁
    ”어이할꼬 어이할꼬, 이 많은 司法 被害者를 어이할꼬…. 變하지 않는 法曹界는 또 어이할꼬.”

    나긋나긋한 말씨, 어딘지 民謠가락을 닮은 목소리에 ‘司法改革’ 主張을 싣고 있는 在野 法曹人이 있다. 慶州 땅에 묻혀 지내 ‘농사짓는 辯護士’라는 別稱을 얻은 申平 辯護士(47)가 바로 그 主人公.

    그는 召命을 附與받았다는 評을 들을 程度로 뼛속까지 判事였고 그 亦是 判事를 ‘天職’으로 여겼다. 誠實한 性品에 집안까지 좋은 그의 人生은 누가 봐도 坦坦大路였다. 勿論 1993年 여름까지의 얘기다. 現在 그는 判事가 아닌 在野 法曹人日 따름이다. 滿 10年間 그는 農事꾼의 모습과 우리 社會에 蔓延한 ‘緣故主義’에 對抗하는 鬪士의 모습을 同時에 보여왔다.

    判事란 至極히 외로운 職業이다. 數千張에 이르는 訴訟資料를 밤새 읽으며 홀로 眞實을 가려내야 한다. 문득 自身의 입만을 바라보는 두 사람, 或은 數千名의 人生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自身과의 싸움이기에 便한 길로 가고픈 誘惑에 시달린다.

    判決 하나에 事件 當事者의 人生은 天國과 地獄을 오가지만 그 누구도 判事에게 華麗한 照明을 비추지는 않는다. 判事는 그저 默默히 冷徹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다시 새로운 被告人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理想的인 얘기일 뿐이다.



    “判事는 判決이라는 神聖한 義務를 遂行하지만, 日常으로 돌아오면 判事 亦是 한 사람의 職場人이고 自身의 欲望을 좇는 한 마리의 動物인 게 世上事의 攝理죠.”

    93年 司法府 批判했다 法服 벗어

    고인 물은 썩는 法. 位階秩序를 生命으로 여기는 法官 社會의 閉鎖性은 內部批判을 源泉的으로 막아왔다. 이런 硬直된 大韓民國 判事 社會를 바꿔보고자 했던 그는 結局 天職인 ‘判事職’을 박탈당했다. 그 心情을 누가 理解할 수 있을까.

    조용해 보이는 申辯護士는 10年 間의 判事生活을 熱情으로 버텨냈다. 남들은 쉬러 가는 日本硏修 期間에도 그는 오로지 工夫만 했다. 그는 大槪의 公務員이 싫어하는 地方 發令 또한 조용해서 工夫하기 좋다며 오히려 반긴 特異한 村사람이다. 그러나 判事에게는 끊임없는 誘惑이 따랐다. 그 亦是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한 마리의 動物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무슨 成人 君子겠습니까. 다 똑같은 사람이지요. 任用 初期 늙은 辯護士가 封套를 가져왔던 때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勿論 拒絶했지요. 唐慌하던 辯護士의 눈빛을 아직도 記憶합니다.”

    그는 結局 그 封套를 받아 들었다. 한番 받아들인 ‘慣行’은 自然스럽게 習慣이 됐다. 한동안 罪責感 없이 ‘떡값’을 받기 始作했다. 文化란, 環境이란 或은 權力이란 그토록 무서운 法이다.

    “한番은 때가 됐는데 封套를 가져오지 않는 이가 있었습니다. 瞬間 火가 치밀더군요. ‘아니, 이 子息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데 다음 瞬間 正말 거짓말같이 다른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아, 내가 왜 이럴까?’”

    그때부터 그는 同僚 法曹人들을 批判的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軍隊 內務班보다 더한 숨막히는 位階秩序와 公公然히 行해지는 接待. 權力에 줄을 댄 ‘政治判事’부터 判事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程度로 特定 業體를 봐주는 ‘拷問判事’까지…. 人脈과 學緣 地緣으로 얽히고설킨 大韓民國 司法府는 正義의 便이 아닌, 司法府 自身과 權力의 便이었다. 처음부터 鬪士인 사람은 없는 法. 그는 自身이 法曹改革의 물꼬를 트는 자그마한 役割을 하기를 願했을 뿐이다.

    “사법개혁” … 외로운 10년 투쟁

    隣近 新羅初等學校 運營委員長을 오래 맡아온 申辯護士를 洞네 아이들은 잘 따른다.

    只今으로부터 10年 前인 93年 5月27日 그리고 6月10日, 그는 司法改革의 念願을 담은 두 篇의 글을 한 言論에 寄稿했다. ‘法官 組織의 過度한 官僚化 階級化는 司法府 萬惡의 根本’이라는, 只今으로서는 常識으로 받아들여지는 內容의 글이다.

    이에 大法院에 계신 ‘윗분’들은 말 그대로 激怒했다. 그해 8月 그는 再任用되지 못한 判事라는 ‘가시冕旒冠’을 써야 했다.

    하지만 그를 憤怒케 한 것은 判事職 剝奪뿐이 아니다. 그의 言路를 막아버린 司法府의 非民主性, 自身의 家族史와 過去의 恥部를 造作하는 卑劣함, 서슴없이 ‘王따’시키는 社會의 封建性에 그는 더 以上 버텨내기 힘들었다. 結局 그는 周圍의 모진 視線을 堪耐해가며 自身이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慶州에 定着했다.

    以後 國會 法査委에서는 그의 再任用 脫落을 두고 國政監査가 열렸고, 2000年에는 民主化補償 審議委員會에까지 上程되어 ‘申平 波動’에 對한 結論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아직도 司法府의 亡靈은 幽靈처럼 엉겨 붙어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고 있다.

    그는 大邱에서 7男妹의 막내로 태어났다. 나이 많은 兄들 德에 일찍 글과 思想에 눈떠 早熟한 어린 時節을 보낸 그는 文學과 歷史에 關心을 보였으며 엘리트 코스인 경북중 경북고에서 늘 1等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로움을 追求하던 그에게 法學이란 學問은 참을 수 없을 程度로 무거웠다.

    “술을 한盞 먹어야 法學冊을 볼 수 있을 程度로 法學을 끔찍이 싫어했지요.”

    오히려 그에게는 學者가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期於이 助敎生活을 해낸 特異한 司法考試生이었다. 以後 碩士와 博士課程은 勿論, 日本에서까지 憲法學과 名譽訴訟에 對해서 集中的으로 工夫했을 程度로 工夫에 愛着이 큰 判事였다. 結局 그는 ‘憲法’으로 博士學位까지 받았다. 신명나게 걸어온 判事의 길. 그 有名한 司試 23回, 강금실 法務部 長官, 金宗壎, 강신섭 辯護士 等이 그와 함께 判事의 길을 걸은 動機들이다.

    昨年 市民團體 結成 法曹界 壓迫

    한 가지 特異한 것은 그의 이름이다. 그는 26살 때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自身이 願하는 生을 살고 싶다는, 삶에 對한 意志의 表象인지 물어보아도 쉽게 對答하지 않는다. 代身, “평(平). 平民처럼 平平하고 반듯하게 살고 싶어 이런 이름을 붙였지요. 그런데 聲明學에 따르면 그리 좋은 이름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고 웃어 넘긴다.

    그는 88年 大邱地方法院 慶州支院에서 일을 하면서 慶州와 緣을 맺었다. 그는 平生 慶州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別채에 ‘財經當(在慶堂)’, 慶州에 살다, 或은 즐거움이 있다는 이름을 붙인 건 이런 意志의 表現이다.

    멋과 風流를 좋아하기에 이름을 올려놓은 慶州 地域 學術, 文藝 團體가 헤아리기 어렵다. 敎授職까지 遂行하느라 돈 되는 辯護士 일에 專念하기가 어렵다. 憲法과 名譽訴訟을 專攻한 그에게 어울릴 만한 굵직한 事件이 없는 것도 地方에 사는 代價다. 그러나 男便과 세 아이의 아빠로서 제 役割을 하기에 더없이 幸福하다. 그에게는 慶尙道 男子 特有의 무뚝뚝함이 배어 있지만 家族에 對한 한없는 사랑이 물씬 풍겨난다.

    그러나 地方에 있다고 서울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를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 그는 이미 昨年 ‘司法改革國民連帶’를 발족시키며, 平生 司法改革의 외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4月에는 大邱에서 司法改革을 主題로 세미나를 開催하며 法曹 三輪, 特技 司法府를 壓迫하기 始作했다. 非理 判事가 公公然히 제 欲心을 채우며 懶怠한 法官生活을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司法改革 위해 司法 首腦部가 먼저 退陣하라”고 외치는 그의 모습에서는 殉敎者의 崇高함이 배어나온다. 그러나 攻擊당하는 이는 默默不答이다. 이제는 狀況이 逆轉된 셈이다.



    “直接選擧制度와 陪審員制度는 民主主義의 2代 기틀이지요. 그러나 ‘無缺點注意’ 神話를 信奉하는 우리 司法府는 陪審員制度를 拒否하고 있습니다. 또한 法官懲戒委員會조차 없이 非理判事를 감싸주는 곳이 바로 大韓民國 司法府입니다.”

    5月22日, 서울地方法院에서는 문흥수 判事를 비롯한 26名의 少壯判事들이 司法改革을 主張하고 나섰다. 變化를 拒否하는 序列主義와 成績에 依해 昇進이 決定되는 構造를 問題삼고 나선 것. ‘申平事件’이 일어난 지 10年 만이다. 그는 勇氣를 낸 判事들이 너무나 고맙다.

    “한 知人이 그러더군요. 가만히 있기에는 自身이 너무나 卑怯하게 느껴진다고…. 良心을 지키고픈 判事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現 司法 現實은 이제 變해야 합니다. 萬惡의 根源인 緣故主義가 司法府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以上 우리나라의 民主主義는 永遠히 半쪽짜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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