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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元 10年 맞는 淸溪川 다시 보기|주간동아

週刊東亞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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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元 10年 맞는 淸溪川 다시 보기

2年 3個月 만에 끝난 大工事…都市를 움직이는 스펙터클의 政治學

  • 定石 서울시립대 都市工學科 敎授 jerome363@uos.ac.kr

    入力 2015-09-14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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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復元事業이 끝난 後 청계천 모습.

    漢江 없는 서울을 想像할 수 없듯, 淸溪川 없는 서울 또한 想像하기 힘들다. 北쪽 白堊과 南쪽 목멱에서 흘러내린 물은 개울을 이뤄 都城의 가장 낮은 곳 청계천에서 만났고, 이렇게 모인 물은 다시 東쪽으로 都城 한복판을 가로지른 뒤 중랑천과 어우러져 漢江으로 흘렀다. 韓江이 漢陽都城의 바깥물(外數)이라면 청계천은 안물(內需)이고 또한 明堂水(明堂水)였다.

    朝鮮時代 청계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史料에 따르면 建國 初期부터 청계천을 둘러싼 論爭이 있었다. 청계천을 깨끗하고 맑게 維持할지 아니면 都城의 生活쓰레기를 排出하는 通路로 쓸 것인지에 關한 論難이었다. 이 論爭은 아마도 現實的인 理由로 쉽게 整理된 듯하다. 청계천을 깨끗하게 維持하려고 都城 안을 쓰레기로 넘치게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結局 청계천은 漢陽都城 사람들이 먹고, 싸고, 쓰고 버린 것을 담아내는 巨大한 쓰레기 排出口이자 下水溝 구실을 했다.

    우리나라 河川이 大槪 그렇듯 청계천도 四時四철 물이 가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乾期에는 물이 찰랑찰랑 흐르거나 말랐을 테고, 여름철 비가 내릴 땐 콸콸 차올랐을 것이며, 暴雨가 내리면 種種 汎濫했을 것이다. 그래서 청계천을 잘 管理하는 건 歷代 임금들에게 아주 重要한 宿題였다.

    近代化의 그림자

    太宗은 1411年(太宗 11年) 開川都監(開川都監)을 設置하고 이듬해 1月부터 한 달間 約 5萬 名을 動員해 청계천 바닥을 깨끗이 整理했다. 世宗은 1441年(世宗 23年) 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도록 水標를 設置했다. 영조는 1759年(英祖 35年) 濬川司(濬川司)를 設置한 뒤 다음 해 두 달間 無慮 21萬 名을 動員해 淸溪川 兩側에 石築을 쌓고 大規模 浚渫事業을 했다. 개川 바닥에서 퍼낸 흙으로 隣近에 加算(假山)이 만들어졌고, 오갈 데 없는 乞人들이 이곳에서 땅窟을 파고 生活했다고 한다. 이들에게 뱀을 잡아 팔 權利가 附與돼, 이때부터 뱀 잡는 사람을 땅꾼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傳해진다.



    加算만 생긴 게 아니다. 오랜 歲月 反復된 淸溪川 汎濫과 浚渫의 結果로 漢陽都城 바닥도 漸漸 높아졌다. 서울 都心部 땅을 파면, 地表面에서 地下로 내려갈수록 各 時代의 遺物이 層層이 묻혀 있는 것도 이런 理由에서다.

    그런데 解放 後 近代 都市를 만드는 過程에서 청계천은 콘크리트 덮개 안에 갇히게 된다. 청계천 覆蓋(覆蓋·더러워진 河川에 덮개를 씌워 보이지 않게 하는 일) 事業의 結果다. 1958年 청계천 覆蓋事業이 처음 始作됐고 61年 東大門運動場까지, 77年에는 新畓鐵橋까지 ‘뚜껑’李 씌워졌다. 覆蓋된 淸溪川 위로 高架道路가 建設됐는데 1967年 始作돼 71年 여름 完工된 청계高架道路는 우리나라 近代化의 象徵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80年代와 90年代가 흘러갔다.

    청계천 復元 이야기가 나오기 始作한 것은 1990年代 秒였던 것 같다. 所重한 歷史文化遺産을 더는 放置하면 안 된다는 歷史學者들의 목소리와, 膣式 地境인 청계천이 숨을 쉬고 볕을 보게 해야 한다는 環境論者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부터다. 마침 청계高架道路의 安全 問題가 深刻해 撤去해야 한다는 主張이 나왔고, 駐韓美軍에게는 청계高架道路 通行禁止令이 내려졌다는 所聞도 입에서 입으로 번져갔다.

    이런 狀況에서 故(故) 박경리 先生을 中心으로 ‘淸溪川살리氣硏究會’(硏究會)가 結成됐고, 2000年 9月 初 이틀間 江原 原州 土地文化館에서 第1回 청계천 살리기 심포지엄이 열렸다. 當時 서울施政開發硏究院에 勤務하던 筆者도 이 모임 初期 멤버였다. 硏究會는 이듬해 다시 세미나를 開催해 청계천 復元을 公論化했는데, 이 論議는 2002年 民選3期 서울市長 選擧와 맞물리면서 생각지도 않은 急물살을 탔다.

    硏究會에서는 청계천 復元을 20年, 30年 程度 긴 呼吸을 갖고 차근차근 推進할 課題로 여겼다. 그러나 當時 서울市長 候補들, 그中에서도 이명박 候補는 생각이 달랐다. 청계천 復元을 核心公約으로 내건 그는 서울市長에 當選한 뒤 2002年 7月 就任 直後부터 準備 作業에 들어갔고, 이듬해 7月 1日 청계高架道路 撤去를 始作으로 本格的인 復元을 始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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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復元工事가 始作된 지 한 달, 撤去 中인 청계高架道路 工事 現場(왼쪽)과 1890年 무렵 청계천邊.

    아쉬운 歷史文化·環境生態 復元

    청계천 復元事業은 以後 많은 論難과 陣痛을 겪으며 進行됐다. 가장 큰 爭點은 歷史文化 復元과 環境生態 復元 問題였다. 청계천이 다시 열리면 아스팔트 아래 오랜 歲月 묻혀 있던 광통교와 奬忠壇公園 쪽으로 옮겨져 있던 水標橋가 제 位置로 돌아오고, 오간수교와 石築 遺跡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期待한 專門家들은 歷史 遺跡의 原位置 復元이 霧散된 데 憤慨했다. 結局 2004年 9月 청계천復元市民委員會에서 集團辭退하면서 剛하게 異議를 提起했지만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環境生態 復元 亦是 마찬가지였다. 청계천 上流 池川을 復元해 自然河川이 되도록 하는 式의 復元 代身 漢江에서 끌어온 물과 地下水를 청계천을 통해 흘려 보내는 人工河川 方式의 復元이 決定되고 말았다.

    結局 이명박 當時 市場의 公約대로 2005年 10月 1日 이른바 청계천 復元事業은 마무리됐고 開通式이 열렸다. 事業 始作 2年 3個月 만에 大工事가 끝난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10年이 흘렀다.

    지난 10年間 청계천과 그 周邊에는 많은 變化가 있었다. 아스팔트로 덮이고 高架道路까지 그 위로 지나가 그늘진 응달 같던 청계천은 이제 市民과 觀光客이 즐겨 찾는 都心의 名所가 됐다. 청계천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周邊 建物의 用途도 자연스럽게 바뀌어왔다. 땅값과 建物 賃貸料도 올랐을 테고, 自動車와 步行者의 通行量과 動線 또한 적잖게 달라졌을 것이다.

    청계천 復元을 肯定的으로 評價하는 사람이 있고, 또 매우 否定的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 나름의 觀點과 根據를 갖고 評價하는 것일 테니 尊重해야 할 일이다. 다만 청계천 프로젝트를 통해 깊이 생각해봤으면 하는 게 있다. 都市에서 種種 벌어지는 이런 大型 프로젝트 속에 숨어 있는 ‘스펙터클의 政治學’이다.

    市民은 都市에 關한 主要한 일이 매우 客觀的이고 合理的으로 決定될 것으로 믿는다. 專門家의 緻密한 硏究와 分析을 통해 만들어진 가장 理想的인 政策이 採擇되고 執行될 것으로 期待한다. 그러나 現實은 正反對다. 政治가 오히려 都市를 支配한다. 大衆의 感受性과 눈높이를 銳利하게 읽고 파고든 사람이 市場도 되고 大統領도 된다는 것이 그걸 證明한다. 都市는 結局 政治다. 當身이 좋은 都市를 願한다면 그만큼 當身도 政治的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政治的으로 判斷하고 政治的으로 行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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