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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慶州 邑城 城壁 50m|週刊東亞

週刊東亞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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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慶州 邑城 城壁 50m

防禦用으로 祝聖 日帝時代 大部分 헐려 … 城 한가운데 東軒 位置 큰 고을 證言

  • 도도로키 히로시/ 崇實大 日本學科 講義敎授 hstod@hanmail.net

    入力 2005-07-07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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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月17日(新築)맑음.경주에 닿았다.

    반갑다! 경주 읍성 성벽 50m

    同景觀.

    永川에서 慶州까지의 旅程은 中央線 汽車길 및 京釜高速道路와 나란히 간다. 早晩間 京釜高速鐵道도 加勢할 것이다. 예나 只今이나 交通의 大動脈인 것이다.

    낮에 冒良驛에서 쉬는데 영일縣감 조경보, 下양현감 이귀영, 淸道郡수 履修가 보러 왔다.

    冒良驛은 只今도 中央線 驛 이름으로 남아 있다. 普通 通信社 等 高位 旅行者는 冒良驛을 點心 場所로 여겼다. 그렇게 하면 慶州 邑城에 늦지 않은 時間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反面에 一般 旅行者들은 只今의 건천읍人 ‘件千點’이라는 酒幕村을 利用했다.

    저녁에 慶州에 들어가니, 주수(使道) 이해중이 安東市館(試官)이 되어 고을에 있지 않으므로 섭섭했다. 令狀 홍관해가 들어와 뵈었다.



    慶州는 通信社 經路 中 忠州나 安東과 비슷한 重要性을 가진 大邑으로 으레 2, 3日 머물다 가곤 했다. 趙曮의 境遇는 地帶를 맡아야 할 府使가 不在中이어서 그냥 잠만 잔 것이다.

    慶州驛과 西部市場 사이에 位置

    慶州는 말할 것도 없이 新羅 千 年의 古都(古都)다. 國內外에서 찾아오는 旅行客이 慶州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古代 慶州의 모습일 것이다. 朝鮮時代 慶州는 新羅 時節과는 全혀 달랐다. 勿論 상주나 忠州처럼 由緖 깊은 大邑으로서 周邊 고을보다 높은 品格을 維持하고 있었지만, 그 옛날 慶州와는 比較가 되지 못했다.

    統一新羅時代의 都市構造에 關해서는 餘他 論文들이 發表되었고, 또 學者에 따라 意見이 갈라지고 있기도 하다. 서울民俗博物館이나 國立慶州博物館에 展示되어 있는 模型과 같은 規模의 都市였다면, 朝鮮時代 慶州는 新羅時代의 10分의 1도 안 되는 것이다.

    朝鮮時代 慶州 中心에는 慶州 邑城이 있었다. 이는 只今 瞻星臺 쪽에 痕跡이 남아 있는 月城과는 別途의 性으로, 粤省이 언덕 위에 있는 것과 달리 平地에 있었다. 邑城의 位置는 只今의 慶州驛과 西部市場 사이였고, 正四角形이지만 잘 보면 위쪽(北쪽)이 若干 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邑城 둘레는 4075尺이며 四方으로 門이 있었고, 城 안에 우물이 86個 있었다. 日帝가 製作한 指摘原圖를 보면 적어도 26個所의 치(雉·防禦하기 쉽도록 城壁을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 것)가 確認되고, 城 밖에는 垓子(垓字·性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있는 等 防衛 爲主의 設計였음을 알 수 있다. 城門들을 起點으로 東西南北 대로가 十字形으로 構成되어 있었다.

    반갑다! 경주 읍성 성벽 50m


    반갑다! 경주 읍성 성벽 50m

    南門 밖에서 東軒 터로 옮겨진 慶州 鐘閣.

    慶尙道 邑城 中에서는 큰 便이었지만 亦是 新羅時代와 比較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邑城은 舊韓末부터 日帝時代에 걸쳐서 大部分 撤去되었는데 東쪽 城壁만 50m假量 남아 있다. 最近 城壁에 붙어 있었던 民家들이 撤去돼서 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해冬至도’를 보면 邑城 한가운데에 東軒이, 東南쪽 모퉁이에는 客舍가 있었다. 東軒은 地方官 等이 常住하며 政務를 執行하던 地方行政 機關이고, 客舍는 中央 權力을 代身하는 建物이었다. 그래서 歷史가 짧은 고을의 境遇, 客舍가 고을 中心에 있고 東軒은 그 옆에 붙어 있는 印象을 주는 곳이 많다. 지난番에 찾아간 의흥이나 신녕이 그 例다. 그러나 이곳 慶州와 尙州, 忠州 等 古代로부터 歷史를 간직해온 ‘大邑’에서는 客舍는 구석에 있고 東軒이 가장 좋은 ‘明堂자리’를 차지했다. 斟酌컨대 高麗時代 以前, 아직 中央보다 地方 豪族들의 힘이 셌던 時節 空間構造가 朝鮮時代에도 그대로 維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客死인 同景觀(東京館·東京은 慶州의 別稱)은 日帝時代에는 博物館으로 利用되었다고 한다. 只今 客舍 자리에는 조흥은행이 들어서 있다. 東軒 자리는 오랫동안 郡廳으로 使用돼오다 只今은 慶州文化원이 되어 있다. ‘第僧正’과 ‘진남루’는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고, 南門 밖에 있었던 鐘閣은 안으로 들여왔다. 鐘閣은 서울 普信閣과 마찬가지로 門이 열리고 닫히는 時間을 알려주었다.

    只今 邑城은 空洞化(空洞化)로 빈터가 많고 人氣尺度 드물다. 17萬名이 사는 이 都市의 繁華街가 郊外로 빠져나간 지 오래다. 郊外로 나가면 새 아파트도 많고 割引店까지 있으니 當然한 일이다. 歷史都市로서 建築規制를 한 것이 한 理由가 되었을 것이다. 已往 이렇게 된 거, 邑城을 좀더 事實的으로 復元해 慶州 觀光의 또 하나의 核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暫時 머리를 스쳤다.

    이날은 80里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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