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識人과 虛僞意識’(1977), ‘民衆과 知識人’(1980) 等으로 韓國社會의 참知識人上 만들기에 앞장섰던 한완상 總長(上肢帶). 그가 ‘다시 韓國의 知識人에게’(당대)를 쓸 수밖에 없었던 理由는 무엇일까.
그 答을 얻으려면 冊의 맨 마지막 章부터 들춰보아야 한다. ‘年報-외롭고 苦難에 찬 社會醫師의 길’에서 그는 스스로 꿈을 完成하지 못한 社會意思라고 告白한다. 그는 個人疾病을 고치는 醫師가 아니라 社會 全體나 集團, 歷史의 病을 고치는 큰 醫師가 되고 싶어 大學에서도 ‘社會學’을 擇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軍隊時節 士兵들의 月給을 搾取하는 非理를 告發하고 酷毒한 精神的, 肉體的 代價를 치른 것을 始作으로 그의 삶은 抵抗과 苦難의 連續이었다. 特히 그를 挫折케 한 것은 93年 副總理 兼 統一院 長官 在職時節이었다. 民族分斷이야말로 韓國社會의 가장 무서운 疾病菌이라고 생각한 그는, 長官 入閣을 社會醫師 노릇을 本格的으로 할 수 있는 最高의 機會로 여겼다.
하지만 期待가 큰 만큼 挫折의 골도 깊었다. 南北의 强勁 冷戰 勢力들로부터 挾攻을 當하고 中途下車했을 때 “몸은 政府綜合廳舍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70, 80年代 들판의 한가운데서 외롭게 떨던 때보다 더 외롭고 괴로웠다”고 述懷한다.
김대중 政府가 强勁派들의 反對 속에서도 一貫되게 햇볕政策을 推進하고 드디어 오는 6月 南北頂上會談 開催가 發表되는 즈음 그의 感懷는 새로울 수밖에 없다.
한總長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知識人의 役割과 實踐性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아무리 世上이 바뀌었다해도 知識人들의 現實批判 意識과 實踐이야말로 우리社會를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끄는 滋養分이라는 事實에 變함이 없다는 것이다. 結局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問題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