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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민銀行 成功은 ‘거꾸로’ 戰略 德”|週刊東亞

週刊東亞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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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민銀行 成功은 ‘거꾸로’ 戰略 德”

“旣存 銀行과 反對로… 貧困退治 外 女性의 經濟參與 값진 成果”

  • 정현상 記者 doppelg@donga.com

    入力 2007-09-19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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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민은행 성공은 ‘거꾸로’ 전략 덕”
    世界 人口의 60%는 全 世界 所得의 6%로 生計를 이어가고, 世界 人口의 折半은 하루에 2달러 以下의 生活費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狀況에서 ‘거꾸로’ 가는 한 銀行이 가난을 救濟하는 同時에 資本主義의 새로운 未來를 열고 있다. 富者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歡迎받는 銀行, 女性이 差別받는 나라에서 男性보다 女性이 더 歡迎받는 銀行, 바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銀行이다.

    2006年 이 銀行은 創始者 무함마드 유누스(67) 總裁와 함께 노벨平和賞을 받았다. 無擔保 少額融資 制度인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救濟한 功勞다. 只今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韓國을 비롯한 世界 60餘 個國에 導入돼 가난한 사람들의 自活을 돕고, 그라민銀行에서 出發한 다양한 社會企業들은 地球村時代 資本主義의 代案으로 떠오르고 있다.

    때마침 유누스 總裁가 9月9日 韓國을 訪問했다. 지난해 그는 서울平和賞을 받기 위해, 올해엔 ‘世界女性포럼 2007’ 代表 資格으로 韓國에 왔다. 이番 訪問에선 ‘가난한 사람들의 貧困 退治와 人權 擁護에 앞장서고 女性들의 權益 伸張에 寄與한 功勞’로 이화여대에서 名譽哲學博士 學位도 받았다.

    10, 11日 이틀間 그를 만나고,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그의 大衆講演度 들었다. 世界女性포럼의 한 關係者는 “그의 講演을 들으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비전을 提示해주고, 女性으로 태어난 것을 感謝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白髮이 星星한데도 어린아이처럼 밝고 親切한 印象이다. 半平生을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어떤 善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그라민은행 성공은 ‘거꾸로’ 전략 덕”
    2007年 5月 現在 그라민銀行은 방글라데시 全域 2431個 支店에서 7萬8659個 마을의 貧困階層 720萬名에게 貸出을 해주고 있다. 擔保도 없이 貸出해주고 있지만 償還率은 98.85%에 이른다. ‘그라민(Grameen)’은 방글라데시語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라민銀行의 거의 모든 業務가 마을 債務者들 모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趣旨에 잘 맞는 이름이다.



    “요즘 그라민銀行을 성공시킨 가장 重要한 要因이 뭐냐라는 質問을 자주 받는다. 그럼 나는 銀行業務에 對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對答한다. 내가 銀行業務에 對해 알았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銀行規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꿈에서 만들었느냐고 묻는다. 事實 여러 施行錯誤를 거쳤다. 어떤 問題를 解決하기 위한 規則을 마련하지 못했을 때는 旣存 銀行들과 反對로 定하곤 했다.”



    貧困層에 擔保 없이 貸出해주는데도 98.85% 償還率 ‘奇跡’

    興味롭게도 그라민銀行은 貸出 時 ‘貸出者 16誡命’을 지킬 것을 要求한다. 여기에는 아이들을 교육시킬 것, 언제나 남을 도울 것 等이 包含돼 있다. 또 나름대로 貧困 指標도 만들어 모니터링하고 있다. 最小限 洋鐵지붕 집에서 살고, 끓인 물을 마실 수 있고, 하루 세 끼를 1年間 어려움 없이 먹을 수 있는 等 10個 指標가 充足되면 貧困에서 벗어났다고 判斷한다. 一般 銀行으로선 생각하기 쉽지 않은 指標들이다.

    “사람들은 自己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 思考가 열려 있지 않으면 바로 눈앞의 所重한 것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先入見에 影響을 받지 않아야 完全히 새롭고 創意的인 方式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 지난해 노벨賞을 받은 뒤 달라진 點이 많을 듯하다.

    “全 世界的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라민銀行의 趣旨에 關心을 갖게 됐다. 以前에는 事實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賞을 받은 뒤에는 사람들의 態度가 많이 달라졌다. 信賴를 갖고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그라민銀行이 門을 연 지 25年이 지났다. 방글라데시에는 어떤 變化가 있었나.

    “女性의 經濟活動 參與率이 높아지고, 與圈이 伸張돼 經濟成長의 原動力이 됐다. 그라민銀行 顧客의 97%는 女性이다. 우리가 女性에게 注目한 理由는 女性에 對한 貸出이 家庭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現在 趨勢라면 2015年까지 貧困率이 50% 낮아질 것이다. 幼兒 死亡率, 産母 死亡率도 印度 스리랑카 파키스탄보다 낮아졌다. 反面 人間開發指數는 높아지고 있다.”

    “그라민은행 성공은 ‘거꾸로’ 전략 덕”

    2006年 노벨平和賞 受賞 뒤 支持者들에게 둘러싸인 유누스 總裁(가운데).

    - 銀行을 運營하면서 어떤 點이 特히 어려웠나.

    “傳統 이슬람社會에서는 女性들이 主로 집 안에서 活動하기 때문에 그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女性들이 두려움을 갖는 理由는 自身의 能力을 發揮할 機會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貧困問題에 關心을 갖게 된 것도 女性(어머니) 때문이다. 比較的 裕福한 家庭에서 14名(5名은 幼兒期 때 죽음)의 아이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린 時節 어머니가 집에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자주 봤고, 이를 契機로 貧困 退治에 獻身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풀브라이트 奬學金을 받고 美國에서 留學한 그는 1969年 밴더빌트大學에서 經濟學 博士學位를 받았고, 미들테네시州立大學에서 經濟學科 助敎授로 在職했다. 그러다 72年 방글라데시 치타공大學의 經濟學科 敎授로 자리를 옮겼다.

    1974年 방글라데시에선 數萬名의 사람들이 飢饉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現實을 直視한 그는 大學 講義室에서 現實과 遊離된 高尙한 經濟學 理論들만 가르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 世上을 바꿔보겠노라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世上이 너무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방글라데시라도 바꿔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 亦是 너무 컸다. 그 다음엔 大學 옆 마을을 위해서라도 뭔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좀더 賢明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을은 내가 뭔가를 하기에 딱 適當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大學 옆 마을에서 한 女人이 自身이 만드는 모든 物品을 願하는 價格에 팔아야 한다는 條件으로 高利貸金業者에게 1달러도 안 되는 돈을 빌리는 모습을 보고 衝擊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奴隸商人들이 奴隸를 사는 일과 같았다.”

    그는 大學 옆 마을 組브라에서 高利貸金業者들에게 시달리는 被害者들의 名單을 만들었다. 被害者는 모두 42名. 그런데 被害金額은 總 27달러에 不過해 그는 다시 한 番 衝擊을 받았다. 結局 그는 自身의 주머니에서 이 돈을 꺼내 내놨다.

    다음 段階로 그는 大學 構內 銀行에 찾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貸出을 해달라고 要求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抛棄하지 않고 自身이 保證人이 되겠다고 나서, 가난한 사람들이 貸出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마이크로 크레디트’ 運動이 始作됐고, 1983年 그라민銀行이 設立됐다.

    그라민銀行은 몇 年 만에 急速度로 擴散됐다. 이 方式이 漸次 成功하면서 그에게서 한 手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86年에는 當時 美國 아칸소 州知事였던 빌 클린턴 前 大統領이 그를 招請했다.

    “처음엔 그의 眞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再次 要請해와 아칸소를 訪問했는데, 클린턴 夫婦가 그곳에도 少額貸出 方式을 導入하고 싶다고 말했다. 當時 시카고大와 하버드대 敎授들, 美國 銀行家들은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貧國의 方式이라 富國인 美國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主張했지만, 나는 이것이 貧國과 富國의 問題가 아니라 貧困層 自體의 問題이기 때문에 美國에서도 充分히 통할 수 있다고 主張했다. 美國에도 貧困層이 있고, 그들도 貸出을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以後 아칸소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始作돼 좋은 反應을 얻었고, 只今은 美國에서만 뉴욕 할렘街 等 700個 以上의 少額貸出 프로그램이 運營되고 있다.”

    “數萬 名 굶어죽는데 大學서 講義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라민은행 성공은 ‘거꾸로’ 전략 덕”

    그라민銀行에서 貸出받은 種子돈으로 家禽類를 키우고 있는 會員 집을 訪問한 유누스 總裁(왼쪽에서 두 番째).

    全 世界的으로 마이크로 크레디트 利用者가 1億名을 突破했고 그라민銀行度 名聲을 얻었지만, 그의 計劃은 더욱 커지고 있다.

    “最近 獨逸에서 열린 G8懷疑에 參加할 機會가 있었는데, 議長에게 아프리카 少額金融펀드를 創設할 것을 要求했다. 아프리카는 女性들이 對外活動에 積極的이기 때문에 이런 制度를 통해 빠르게 成長할 수 있을 것이다.”

    그라민은 銀行 外에도 貧困과 開發 等 다양한 問題 解決을 위해 그라민폰(携帶폰 會社), 그라민 요거트會社, 그라민 眼科病院, 그라민 재생에너지會社 等도 運營하고 있다. 利潤追求가 目標가 아닌, 公共 선(善)을 爲한 社會企業들이다. 世界化 時代에도 이런 社會企業體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世界化를 支持한다. 重要한 것은 올바른 世界化여야 한다는 點이다. 世界化는 100車線 高速道路가 全 世界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無料로 通行할 수 있는 高速道路라면 經濟强國의 大型 트럭들이 掌握하고, 방글라데시의 작은 人力車들은 모두 튕겨나갈 것이다. 모두에게 利益이 되는 世界化를 위해서는 交通法規가 있어야 하고 警察, 當局이 監視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强力한 多國籍 社會企業이 만들어져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國家에 큰 惠澤을 줄 것이다.”

    그는 物理學科 敎授인 아내 아프로地, 經營學을 專攻하는 둘째 딸과 함께 首都 다카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世界的인 銀行家들처럼 富裕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는 엉뚱한 質問에 그는 “가난을 救濟하려는 銀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잘살기를 바랄 순 없다”고 잘라 말했다. 큰딸 모니카 유누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活躍하는 오페라 歌手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希望을 위해 노래하라’라는 音樂인 NGO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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