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媤어머니 張禧嬪 沒落… 고추보다 매웠던 九重宮闕|週刊東亞

週刊東亞 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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媤어머니 張禧嬪 沒落… 고추보다 매웠던 九重宮闕

景宗의 元妃 단의왕후 惠陵

  • 이창환 상지영서대 造景學科 敎授 55hansong@naver.com 寫眞 提供·文化財廳, 서헌강, 이창환

    入力 2010-11-22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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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좁고 雅淡하게 照映된 惠陵의 陵園.

    惠陵(惠陵)은 朝鮮 第20代 賃金 警鐘(景宗, 1688~1724, 在位 1720~1724)의 元妃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沈氏(沈氏)의 單陵이다. 警鐘은 우리가 잘 아는 張禧嬪의 아들로, 단의왕후는 肅宗과 張禧嬪의 며느리다.

    惠陵은 朝鮮 最大 王族菱仁 京畿道 구리시 인창동의 검암산을 主山으로 하는 東九陵 안에 있다. 1408年 太祖의 健元陵(健元陵)을 造營하면서 始作된 東九陵은, 1855年 文鳥(純祖의 長男)의 首陵을 天障海 오면서 陵이 9個가 돼 東九陵으로 불렸다. 이곳은 朝鮮 王朝 500年 歷史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各種 陵園 樣式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代表的인 陵役이다.

    王室 混亂期에 入宮 黨爭 소용돌이 말없이 目擊

    惠陵은 健元陵을 中心으로 西쪽 稜線을 主脈으로 하며 東쪽을 바라보는 地形의 穴處에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稜線에는 玄宗의 崇陵(崇陵)이 있고 왼쪽에는 憲宗의 景陵(景陵)이 있다. 惠陵은 酉坐卯向(酉坐卯向)으로 西쪽에서 東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崇陵의 靑龍 끝 血脈이 맺힌 穴자리라고 할 수 있다. 祖父母人 玄宗과 明聖王后의 龍脈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는 形局이다. 形態는 龍脈의 血脈이 길지 않은 單類型(短乳形)이다.

    肅宗의 3男 6女 中 長男인 警鐘은 宮女였던 母親 희빈이 肅宗의 寵愛를 받아 낳은 아들이다. 肅宗은 大臣들의 反對를 무릅쓰고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潤을 原子(1689)로 冊封하고, 세 살이 되자 世子로 冊封했다. 그러나 仁賢王后 閔氏의 廢妃件과 復位事件 等 ‘甲戌獄事’와 仁顯王后의 甁에 連累된 희빈의 ‘무고의 玉’ 事件 等 宮室의 混亂期에 世子가 된 만큼 心的으로 큰 負擔을 안고 지내야 했다. 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媤어머니의 죽음을 目擊한 世子嬪 沈氏(단의왕후) 亦是 宮闕 生活이 便치는 않았으리라 斟酌할 수 있다.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東九陵에서 唯一하게 원(園) 形式인 惠陵. 端雅한 모습의 世子嬪 沈氏를 닮았다.

    단의왕후는 肅宗 12年(1686) 5月에 漢陽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靑松이고 朝鮮의 開國功臣 심덕부의 後孫으로 아버지는 심호(沈浩), 어머니는 高靈 朴氏다. 1696年 11歲에 9歲의 世子(景宗)와 婚姻했다.

    하지만 世子嬪 沈氏의 王室 生活은 順坦치 않았다. 媤어머니 희빈 張氏가 甲戌換局으로 王妃에서 빈으로 降等된(1694) 直後였고, ‘무고의 玉’(1701)으로 媤어머니가 死藥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世子嬪의 나이 16歲였다. 이 事件 以後 世子는 病에 시달렸고 後嗣도 얻지 못했다.

    沈氏는 어려서부터 外貌가 예쁘고 슬기롭고 총명하며 德을 갖췄다고 한다. 다섯 살 무렵 한여름, 觀察使였던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잠이 들면 부채로 파리를 쫓으며 곁을 지켰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洋弓의 對戰인 인현왕후, 인원왕후, 숙빈 崔氏, 명빈 朴氏를 잘 모시고, 아울러 희빈 張氏도 極盡히 모셨다. 病弱한 世子를 섬기는 데도 遜色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肅宗의 두 番째 繼妃인 인원왕후보다 한 살 위의 며느리였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夭折한 단의왕후의 喪禮 利用 희빈 張氏 復權 試圖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앙증맞게 彫刻된 惠陵의 세호.

    이러한 風波 속에서 沈氏는 世子가 王位에 오르기 2年 前인 肅宗 44年(1718) 2月 7日 幼時(酉時·저녁 9時頃)에 갑자기 病을 얻어 世上을 떠났다. 이때 朝鮮에는 癘疫(染病, 장티푸스)李 猖獗했고 肅宗과 世子가 敬德宮으로 急히 옮긴 記錄으로 보아 世子嬪의 病은 染病이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이때는 肅宗이 王位에 있긴 했으나 이미 男便인 世子가 淸淨을 하고 있었다.

    어질고 착한 世子嬪이 昇遐하자 媤아버지와 男便은 精誠을 다해 원(園)의 形式으로 陵域을 造成했다. 葬禮는 소현世子의 喪禮에 準해 擧行했다. 肅宗과 中宮殿(人員王后)의 喪服은 嘉禮(家禮)와 經國大典의 오복조(五服條)에 依據해 큰며느리의 上司인 朞年服을 입고 最高의 例를 갖추었다. 銘旌은 붉고 넓은 織布에 金色의 隸書로 ‘왕세자빈永久(王世子嬪靈柩)’라고 쓰려 했으나 肅宗이 ‘왕세자빈齋室(王世子嬪梓室)’로 고쳐 쓰게 했다. 施策(諡冊·죽은 者의 生前 行跡을 考慮해 임금이 내리는 稱號)은 대나무에 쓰고, 是認(諡印·죽은 者의 行跡을 적은 記錄)은 南陽의 玉으로 하고, 贈玉(贈玉)은 端川의 심청옥(深靑玉), 增白(贈帛·緋緞)은 高級으로 하고, 翣扇(發靷 때 永久 뒤에 세우는 祭具)과 萬張(輓章·죽음을 哀悼하는 글句)을 만들고, 宇宙(虞主)는 뽕나무로 만든 神主 代身 밤나무에 검은 글씨로 하도록 世子가 下令했다. 員의 立地는 明陵과 翼陵 사이 等 3곳의 산지 圖形을 본 뒤 肅宗이 直接 東九陵 崇陵 아래로 決定했다. 陵의 照映에는 僧軍 1000名이 1個月 동안 動員됐다.

    世子嬪의 喪禮 中 世子는 數年 前 死藥을 받은 희빈 張氏의 무덤을 印章里에서 옮길 것을 主張했다. 이는 아내의 상중을 利用해 어머니를 福券하려는 試圖였다. 以後 희빈 墓는 대빈묘로 昇格돼 京畿道 光州市 오포면 문형리에 天障했다가 1969年 다시 옮겨져 現在 西五陵 肅宗의 陵域 곁에 있다.

    喪中에 調整은 向後 世子의 再婚을 위한 揀擇을 考慮하여 士大夫 處女들의 婚禮를 禁했다. 이 渦中에 肅宗의 愛妾이며 연잉군(英祖)의 母親인 숙빈 崔氏가 世子嬪 승하 한 달 만에 世上을 떠났다. 肅宗의 슬픔은 더해가고 있었다. 貧窮의 臨終 두 달 만에 발인 時 百官들은 淺淡服(淺淡服·옅은 푸른色 옷)을 입고, 나머지 臣下와 儒生들은 素服 차림으로 都城 밖에 堵列해 魂魄거와 英語(靈轝)가 지날 때 俯伏(俯伏)하고 栽培했다고 한다.

    2年 뒤 警鐘이 王位에 오르자 世子嬪 沈氏를 단의왕후로 追尊하고 陵號를 惠陵으로 格上시키면서 肅宗의 明陵制度(續五禮儀)와 같이 文武石人, 望柱石 等을 雅淡하게 세웠다. 陵으로 格上시키면서 元妃의 陵을 잘 꾸몄을 만도 한데 雅淡하게 한 것에서 警鐘의 政治的 立地가 그리 단단하지 않았음을 斟酌할 수 있다. 警鐘은 임금이 된 後에도 病치레가 잦고 後嗣가 없어 不得已 배다른 동생 연잉군에게 稅制淸淨을 맡기는 等 賃金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단의왕후의 陵域에서도 이런 痕跡을 읽을 수 있다.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왼쪽)단의왕후처럼 端正하고 정갈한 樣式의 惠陵 丁字閣. (오른쪽)웃고 있는 惠陵의 武石人. 조각이 투박하고 質樸하다.

    東九陵 內 幽宅 中 가장 작은 陵園

    그래서 惠陵의 陵園은 東九陵 內 17分의 幽宅 中 唯一한 원 形式으로 가장 작다. 그러나 石物의 規模가 작아진 代身 事實的으로 描寫한 것이 特徵이다. 當時의 時代商人 實事求是의 뜻이 담긴 것이라 하겠다.

    惠陵은 比較的 낮은 丘陵에 造成됐으며, 陵域이 全般的으로 좁다. 曲牆 안의 封墳은 屛風石 없이 12칸의 欄干石만 둘렀고, 封墳 周圍에는 4雙의 潟湖와 夕陽이 交代로 配置돼 있다. 潟湖와 夕陽의 彫刻은 事實的이고 雅淡하다. 文石人은 173cm의 키에 눈을 치켜뜬 차가운 이미지이고 武石人은 文石人보다 約 10cm 큰 키에 耳目口鼻가 相當히 異國的인데, 特히 齒牙를 잔뜩 드러내놓고 웃는 모습이 印象的이다. 아마도 연잉군을 支持하는 石工이 만들지 않았을까 推測해본다. 文武石人의 코는 相對的으로 크게 表現돼 있다. 望柱石 亦是 다른 陵보다 훨씬 작은 規模로 만들었는데 彫刻된 세호의 左右 方向이 다르다. 그러나 세호의 모습이 앙증맞게 잘 表現돼 있다. 長明燈은 現在 터만 남아 있고 사라진 狀態다. 朝鮮 王陵 1500餘 個 石物 中 唯一하게 惠陵의 長明燈이 滅失됐다. 아쉽다. 原形을 찾는 作業이 時急하다. 陵寢 下溪 오른쪽 언덕에 묻힌 石物이 무엇인지 發掘해보면 어떨까? 長明燈을 거꾸로 처박아놓은 것 같다. 무슨 緣故가 있는 것은 아닌지? 紅箭門과 丁字閣은 1995年 새로 復元한 것이다. 惠陵의 禁川橋는 보이지 않는다.

    景宗과 繼妃 선의왕후의 義陵(懿陵)은 서울市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王과 王妃의 封墳을 한 언덕에 앞뒤로 配置한 動員上하봉(同原上下封) 陵이다.

    달밤의 때죽나무

    陵園을 밝히는 數百, 數千 송이 하얀 꽃무리


    시어머니 장희빈  몰락… 고추보다 매웠던 구중궁궐

    흰色 꽃을 피우는 때죽나무.

    때죽나무는 여름에 도토리 알처럼 생긴 열매를 절구에 찧어서 갯가에 풀면 고기들이 痲醉돼 떠오르는 것을 보고 고기가 ‘떼로 죽는다’는 뜻에서 때죽나무가 됐다. 때죽나무는 우리나라 全國 山野의 陽地에 自生하는 落葉闊葉喬木으로 키는 10m 程度 자라며, 가지가 많은 便이다. 濕氣와 若干의 陰地에서 잘 자라 王陵에서는 소나무 밑이나 상수리나무(도토리나무) 밑에서 볼 수 있다. 5~6月에 鐘 模樣의 흰꽃이 아래로 흐드러져 피며, 나무 한 그루마다 數百 數千 송이의 꽃이 피어 달밤에 보면 흰色 초롱꽃이 陵園을 밝히는 것 같다. 特히 5~6月은 잔디가 푸르게 陵園을 덮고 있는 때라 더욱 그 멋을 느낄 수 있다. 흰色과 綠色은 補色對比 現象을 일으켜 色感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鐘 模樣의 銀色 열매는 毒性이 있다. 漢字 이름으로 齊墩果(齊墩果)라 하는데 언덕에 가지런한 열매라는 뜻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野말리(野茉莉·물푸레나뭇科로 여름에 흰꽃이 피며 香氣 나는 植物), 安息香(安息香·마음을 便安하게 해주는 香)이 있다. 陵域이 선대 王과 王妃의 陵寢 空間임을 考慮할 때, 先王이 現世 政治의 고단함을 잊고 事後에 便히 쉬라는 槪念에서 陵園 꽃으로 評價돼 朝鮮時代에도 人爲的으로 심어서 管理한 것으로 보인다. 5~6月 달밤 先王의 庭園에 흐드러지게 핀 때죽나무 꽃이 神의 庭園을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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