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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武公이 地下에서 痛哭한다|주간동아

週刊東亞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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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武公이 地下에서 痛哭한다

15代 宗婦 詐欺嫌疑 拘束, 家門의 恥辱 … 不動産 開發 同業했다 끝내 破局

  • 지명훈 동아일보 社會部 記者 mhjee@donga.com

    入力 2009-05-29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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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 모퉁이의 梅花 몇 가지 추위를 이기고 홀로 피었네….”

    唐宋 八大家인 王安石의 詩句는 마치 忠武公 李舜臣을 떠올리며 지은 듯하다. 嚴冬雪寒에 隱隱한 香氣를 뿜어내는 姿態와 꺾일지언정 屈服하지 않는 節槪가 그렇다. 世俗에 超然한 孤高함도 엿보인다. 그래서인지 5月20日 찾은 忠南 아산시 염치읍 顯忠祠 忠武公 古宅(古宅) 周邊의 梅花나무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年間 60餘 萬名이 찾는다는 顯忠祠. 本錢, 唯物觀, 靜慮 等 많은 遺跡과 遺物, 遺墟(遺墟·오랜 歲月에 쓸쓸히 남아 있는 옛터)가 있지만 그中에서도 古宅은 가장 有名稅를 탄다. 古宅 터 等이 法院의 競賣 賣物로 나와 한동안 뉴스의 焦點이었기 때문이다. 顯忠祠管理所 關係者는 “新聞에 난 故宅이 어디냐고 묻는 觀覽客이 많다”고 했다. 梅實은 여느 해 봄처럼 푸르렀지만 忠武公 家門에게 길게는 數年 동안, 짧게는 올봄 내내 매서운 ‘겨울’이었다. 家門의 代가 끊겼고 宗孫들은 訴訟에 빠져들었다. 古宅 터를 비롯한 遺墟가 競賣 賣物로 나오더니 及其也 마지막 宗婦(宗婦)가 詐欺嫌疑로 拘束됐다. 忠武公은 倭亂(倭亂)이라는 外亂을 막아냈지만 後孫들은 가란(家亂)이라는 內亂을 막지 못했다.

    家門의 悲運은 忠武公 15代 宗孫인 理財局 氏가 2002年 後嗣 없이 世上을 떠나면서 始作됐다. 門中은 代를 잇기 위해 再堂姪人 李喆鎔 씨를 養子로 들일 것을 재국 氏의 夫人(宗婦) 최선순(54) 氏에게 勸했다. 家族法 改正으로 濠洲 死亡 後 養子를 세울 수 없게 되자 재국 氏의 死亡申告까지 미뤘다.

    崔氏는 門中의 提案을 受容했지만 곧 養子 入籍을 撤回하는 罷養 訴訟을 提起했다. 養子를 들이는 條件으로 철용 氏에게 宗孫 財産 抛棄覺書를 要求했는데 門中이 이에 反對했기 때문. 法院은 崔氏의 손을 들어줬다. 改正된 家族法으로 보면 當然한 結果지만, 忠武公 家門의 代가 끊겼다는 宣言이나 다름없는 判決이었다.



    宗婦와 門中 財産 紛爭으로 얼굴 붉혀

    訴訟으로 깊어진 宗婦와 門中의 葛藤은 財産紛爭으로 이어졌다. 門中은 재국 氏가 死亡해 崔氏의 所有가 된 顯忠祠 및 周邊 土地 數만㎡에 對해 所有權을 돌려달라는 訴訟을 提起했다. 16件의 訴訟을 提起해 13件을 되찾았고, 崔氏가 이미 팔아버린 3件은 2億원의 돈으로 갚아야 한다는 判決을 받아냈다. 덕수 李氏 忠武公派 宗會 이재왕(65) 會長은 訴訟 背景을 이렇게 說明한다.

    “崔氏의 媤父母는 精米所와 顯忠祠 賣店을 運營해 財産을 많이 남겼다. 種膾도 兄님(재국 氏) 內外를 위해 土地를 提供했다. 男便이 死亡해 崔氏는 3萬餘㎡의 土地와 서울과 天安의 빌딩 等을 받았지만 그中 相當數를 팔았다.”

    崔氏와 재국 氏의 만남은 한 篇의 小說 같다. 재국 氏는 경기고를 卒業(52回)하고 연세대 法大에 入學했으나 2學年 때부터 精神疾患을 앓았다. 療養을 위해 全北 金堤의 한 寺刹에 머물던 1980年, 自身보다 열여덟 살이나 어린 崔氏를 만났다. 崔氏는 이 寺刹의 供養間에서 일하던 菩薩의 孫女.

    宗婦의 삶은 어떠했을까. 崔氏는 몇몇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27年間 宗家집 며느리로 살면서 말 못할 마음苦生을 했다”고 했다. 一部에서는 “子息도 없이 精神疾患을 앓는 男便을 수발하며 외롭게 살아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門中과 外部의 視線에서 自由로울 수 없는 忠武公 宗家집 며느리의 삶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推測도 나올 만하다. 하지만 門中 關係者들의 評價는 酷毒했다.

    “男便이 精神疾患을 앓기는 했지만 媤父母의 遺産과 宗會가 提供한 財産이 많아 生活은 豐足했다.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 男便 病看護하는 사람을 두고 살았다. 14代 宗孫까지는 年間 10番의 祭祀를 모셨지만 崔氏는 忠武公 할아버지 祭祀만 지냈다. 그마저 宗會에서 主管해 그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財産만 蕩盡했다.”

    崔氏는 한때 顯忠祠 隣近에서 商店을 했고 웨딩홀과 옷 가게, 化粧品 가게를 했다. 그러다 한덕우(61) 氏를 만나 不動産 開發事業에 손을 댔다. 매우 信賴하는 사이로 알려진 그와의 同業은 結局 두 사람을 破滅로 몰아넣었다.

    最近 두 사람을 詐欺嫌疑로 拘束한 大田地檢 天安支廳에 따르면 崔氏와 韓氏는 2003年頃부터, 開發이 豫定된 天安市 淸堂洞과 牙山市 탕정면 一帶의 土地를 買入해 建設社에 되파는 事業을 始作했다. 그러나 事業은 ‘돈 놓고 돈 먹기’가 아니었다. 쉬울 것 같던 처음과 달리 土地 買入費가 뛰고 建設社 資金難으로 事業이 遲延되면서 삐걱대기 始作했다. 檢察은 崔氏 等이 2005年 7月 李某(52) 氏에게 “내 땅에 根抵當을 設定하고 돈을 빌려주면 1年 後 倍로 불려주겠다”고 속여 5億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方式으로 2007年까지 2名에게서 모두 21億원을 받아 챙겼다는 것.

    檢察調査 結果 犯行 當時 崔氏는 數十億원의 債務가 累積돼 있었다. 犯罪는 犯罪를 낳았다. 돈을 갚을 길이 없자 李氏가 다니는 職場(大學)에 惡意的인 投書를 하는가 하면 李氏가 公金을 橫領했다고 虛僞 告訴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忠武公 古宅 터 等이 競賣로 나온 것도 이 過程에서 비롯됐다. 崔氏에게 7億원을 빌려줬다가 받지 못한 金某 氏는 崔氏 所有의 顯忠祠 境內外 9萬8000餘m²(7筆地) 땅에 對해 4月 競賣를 申請했다. 忠武公이 少年 時節부터 武科에 及第할 때까지 산 故宅과 武藝를 硏磨하던 활터 等이 競賣 賣物로 나왔다는 事實에 國民은 驚愕했다. ‘亂中日記’ 等 崔氏 所有의 忠武公 遺物이 暗市場에 賣物로 나왔다는 衝擊的인 主張이 뒤를 이었다. 顯忠祠管理所 等에 따르면 事業을 하는 全貌 氏는 “2008年 6月頃 崔氏와 韓氏가 忠武公의 遺物 130餘 點을 180億원에 사지 않겠느냐고 提案했다”고 主張했다. 賣物로 나왔다는 遺物은 ‘亂中日記’와 鉏間諜, 長劍(寶物 第326號), 玉露, 敎旨 等 顯忠祠와 晉州博物館 所藏品들. 忠武公 遺墟와 遺物이 崔氏 個人 所有로 돼 있는 것은 顯忠祠 聖域化事業을 벌이던 1960年代 末 14代 宗孫인 이응렬 氏가 宗會 代表 資格으로 이들 遺墟와 遺物 等을 國家에 貸與하면서 所有權을 移轉받았기 때문이다.

    全氏는 “崔氏가 遺物 目錄을 提示하며 買入을 提案해 遺物의 寫眞까지 찍었고, 이들 遺物의 處分 等 모든 權利를 韓氏에게 넘겼다는 委任狀도 봤다”고 말했다. 宗會 이재왕 會長도 “委任狀 寫本을 갖고 있다”며 혀를 찼다.

    債務 갚으려고 亂中日記를 賣物로?

    이에 對해 崔氏는 “全氏가 忠武公記念事業會와 關聯한 일을 도와준다고 해 遺物의 寫眞을 찍어 보여줬을 뿐”이라고 解明했다. 하지만 全氏의 主張이 더 說得力 있다는 게 周邊의 얘기다. 當時 崔氏와 韓氏는 不動産 開發事業이 難關에 부딪혀 債務에 시달리고 있었다. 檢察 關係者는 “崔氏가 말하는 忠武公記念事業會는 實體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忠武公 古宅 터 等은 5月4日 2次 競賣에서 덕수 李氏 풍암公派가 門中을 代表해 11億5000萬원에 落札받았다. 忠武公파는 門中 땅 一部가 地方自治團體의 英語마을 敷地로 編入돼 巨額의 補償金을 받은 풍암公派에 도움을 要請했다. 2次 競賣에는 文化財廳度 參與했고, 大田의 鷄龍建設 이인구 會長도 落札받아 國家에 寄附 採納하겠다는 意思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忠武公 門中은 “後孫으로서 忠武公을 욕되게 할 수 없다”며 直接 落札을 받았다. 門中은 訴訟을 통해 崔氏 所有인 遺物도 되찾아 顯忠祠에 寄贈하기로 했다. 落札받은 지 10日 뒤 論難의 한 축이던 崔氏와 韓氏는 士氣와 名譽毁損, 誣告 等의 嫌疑로 檢察에 拘束됐다.

    이番 事態는 忠武公의 精神을 敎訓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졌다고 봐야 한다. 順天鄕大 李舜臣硏究所 노승석 待遇敎授는 “亂中日記에는 미리 準備한다는 뜻의 ‘비(備)’字가 유난히 많고 忠武公의 承認(勝因)도 事前 對備 德分”이라고 했다. 하지만 文化財 當局은 顯忠祠 聖域化事業 때 顯忠祠 史跡地 全部를 國有化하지 못했고, 2006年에는 宗孫의 買入 建議가 있었으나 積極 나서지 않았다.

    盧 敎授는 “忠武公 遺物을 돈去來의 對象으로 봤다는 事實이 物質에 超然했던 忠武公의 精神과 距離가 멀다”며 梅花 같은 品格을 지닌 忠武公의 漢詩를 紹介했다.

    “貧窮과 영달은 오직 저 하늘에 달렸으니(窮通只在彼蒼天)/ 모든 일은 모름지기 自然에 맡기리라(萬事聊須任自然)/ 富貴함은 때가 있으나 홀로 차지하기 어려운 法(富貴有時難獨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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