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義培는
1795年
에
京畿道
龍仁
에서
天主敎
를 輕蔑하는 한
兩班
집안에서 태어났다. 丁義培는
過去 試驗
工夫를 마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結婚했지만, 얼마못가 아내가 世上을 떠났고, 子息 없이 여러 해를
홀아비
로 보냈다.
1839年
에 그는
앵베르
主敎
와
模倣
新婦
그리고
샤스탕
新婦
가
殉敎
하는 場面을 目擊하였다. 丁義培는
天主敎
를 異敎라고 생각하였지만, 커다란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
宣敎師
들을 보고 感動을 받았다. 그는
天主敎
書籍
들을 읽었으며, 天主敎가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確信을 가졌다. 그는
漢陽
으로 올라와서
洗禮
를 받았다.
1845年
에
朝鮮
에 入國한
페레올
主敎
는 그를
敎理
敎師
(會長)으로 임명했다. 敎理敎師 丁義培는 죽을 때까지 그의 義務를 매우 忠實히 遂行하였으므로,
다블뤼
主敎
는 그가
成人
의 삶을 살았다고 公言하였으며,
베르뇌
主敎
는
天國
에서 丁義培 會長과 함께 幸福을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丁義培는 敎友들과 豫備 信者들에게 模範이 되었으며,
丙子
들과
孤兒
들을 돌보았다. 그는 交友
피 카타리나
를 後妻로 맞았고, 일부러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子息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피 바오로
를 入養하였다. 피 바오로는 그들의 집에 살며
브르트니에르
新婦
에게
朝鮮말
을 가르쳤다.
丁義培 會長은 매우 剛한 意志力의 所有者로서 언제나 篤實한
天主敎
信者로 살았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尊敬했다. 그는 언제나
殉敎者
로 죽기를 願했다.
브르트니에르
新婦
는
미사
때마다 敎友들에게 그의 敬虔한 態度를 稱讚하곤 했다.
1866年
丙寅年에 迫害
가 勃發하자, 丁義培는 다른 사람들을 避身시켰지만, 自身은 避身하지 않았다.
1866年
2月 25日
에 그는
逮捕
되었는데, 그것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2歲였다. 그는 監獄에서 數 일을 네 名의
프랑스人
宣敎師
들과 함께 보냈다. 그는 極甚한 拷問 끝에
1866年
3月 11日
에
새남터
에서
斬首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