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일은
1823年
에
忠淸道
紅酒
에서
天主敎
母胎 信者로 태어났다. 後日에 그는
慶尙道
聞慶
의 餘戶木骨에 定着하여
天主敎
共同體
의 會長으로 活動했다. 그는 生計를 위해
農事
를 지었다. 그는 結婚하여 몇 名의 子息을 두었다.
1866年
丙寅迫害
가 勃發했을 때, 그는 45歲였다. 그는 키가 컸고 긴 鬚髥을 갖고 있었다. 그는 素朴한 性品을 가진 篤實한
天主敎
信者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家門은 代代로
天主敎
를 믿었고, 여러 名의
敎理
敎師
를 輩出하였다. 이윤일은 그러한 家門의 傳統을 지키기 위하여 最善을 다하였다.
이윤일의 아들의 證言에 따르면,
1866年
11月 7日
과
12月 6日
사이에, 捕卒들이 그의 집을 襲擊하였을 때, 이윤일은 自身의 房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른
天主敎
人들을 찾는 捕卒들에게 이윤일은 自身은
天主敎
人이 맞지만, 이웃의 다른
天主敎
仁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날에, 이윤일의 家族 8名을 包含하여 30名 以上이
逮捕
되었다. 그들은 모두
聞慶
監獄
에 收監되었다. 館長이 不在中이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審問
棺이 없었음에도 不拘하고, 捕卒들은 이윤일을
拷問
했고 그의 모든 家産을 掠奪했다. 사흘 後에, 그들은
尙州
監獄
으로 移送되었다.
尙州
에서 이윤일은 9 次例의 酷毒한
刑罰
과
拷問
을 받았다. 매 次例마다, 그는 自身이
天主敎
信者임을 是認했지만, 自身과 함께 逮捕된 사람들 外에 다른 校友는 모른다고 말했다. 館長은 이윤일에게 背敎를 强要했지만, 이윤일은 强하게 拒否했다.
尙州
館長은
審問
을 끝내고, 70 餘名의
天主敎
燐을 세 무리로 나누었다. 첫番째 無理는 子息이 있는 사람들과 背敎한 사람들, 두番째 無理는 背敎를 拒否한 20餘名, 세番째 無理는 이윤일과 같은
天主敎
共同體
의 指導者들로 構成되었다. 館長은
漢陽
에 있는
攝政
者
흥선大院君
과 相議한 끝에
1967年
1月 4日
그들에게
死刑
을 宣告하였다.
天主敎
人들은 다시
拷問
을 받았고
大邱
監營
으로 移送되었다.
大邱
로 떠나기 前, 이윤일은 행복해하며 그의 子息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只今
殉敎者
가 되려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서 充實히
하느님
을 崇拜하고,
어른
이 되면 나를 따라오거라."
이윤일은 同僚 收監者들에게도 模範을 보였다. 그는 熱心히
祈禱
하며 敎友들이 信仰을 지킬 수 있도록 그들을 激勵했다.
1867年
1月 21日
, 그는
大邱
南門 밖 關德房으로 押送되었고, 마지막
食事
를 하였으며, 自身이 가진 모든
돈
을
망나니
들에게 주었다. 이윤일은 結局
斬首
되어
天國
의 榮冠을 썼다. 그때 그의 나이는 45歲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