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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迫害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辛酉迫害 (辛酉迫害)는 1801年 ( 順調 1年)에 發生한 朝鮮 天主敎 迫害 事件이다. 詩派 · 碧波 의 政治 鬪爭에서 詩派 除去를 오랜 宿願으로 한 僻派가 天主敎 彈壓을 名分으로 일으킨 事件이다.

時代的 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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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敎 傳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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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가 아닌 學問으로 받아들여진 天主敎는 [1] 保有論(補儒論)的 觀點에서 [2] [3] 實學이라는 흐름과 맞물려 學人들의 探究의 對象이 되었고 腐敗한 支配體制에 反撥한 民衆속으로 퍼져나갔다. [4] 北京에서 朝鮮 最初로 洗禮敎人이 된 이승훈 이 歸國한후 隱密히 信仰모임을 만들었으나 [5] 1785年에 刑曹에 摘發되며 儒生들의 거센반발이 있었다.( 明禮坊 事件 ) 이 事件으로 김범우 가 流配地에서 死亡하고 모임을 이끌던 李蘗 이 門中의 壓迫에 못이겨 自進하면서 '明禮坊共同體'는 瓦解되었다. 곧 組織이 再建되어 敎勢가 成長했으나 祭祀禁止라는 敎理속에 背敎者가 續出하였고, 이 敎理는 天主敎 彈壓의 좋은 名分이 되었다. 1787年 半會社件으로 天主學 書籍이 索出된후 불태워지고 彈壓의 强度가 漸次 增加하였다.

天主敎 彈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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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年 幣制奔走(廢祭焚主)로 불거진 珍山事件 으로 最初의 殉敎者가 생겼다. 以前에도 類似한 事件이 있었으나 村老의 無知한 所行으로 置簿되었다. [6] 그러나 今番 事件의 當事者가 南人이라는 理由로 黨爭으로 飛火되자 天主敎에 對해 寬大했던 貞操도 斷乎하게 對處했다. 1795年에는 隱密하게 活動하던 中國人 宣敎師 周文謨 逮捕作戰이 失敗하자 逃走와 潛行을 도운 信者들이 逮捕된후 殉敎하였다.( 乙錨泊해 ) 한便, 南人들이 이 事件에 連類된 疑惑이 있다는 老論 僻派의 攻擊으로 이승훈 은 流配되었고, 이가환 정약용 은 左遷되었다. [7] 逃走한 周文謨 神父는 강완숙 의 집에 숨어지내며 隱密하게 活動을 持續했다. 그의 傳敎活動으로 1794年에 4,000名이었던 敎人數가 1800年에는 1萬名을 肉薄하게 되었다. [8]

發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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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交撤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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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迫害 (1791年, 正祖 15) 以來 “正道(正道)인 留學은 ‘私學’(邪學)인 天主敎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天主敎에 對해서 穩健한 政策을 써 오던 正祖 1800年 8月 18日 ( 陰曆 6月 28日 ) 昇遐하였다. [9] 1800年 8月 23日 ( 陰曆 7月 4日 )에 順調 가 11歲의 어린나이로 王位에 오르면서 英祖 의 繼妃 정순왕후 垂簾聽政 始作으로 [10] 老論 碧波 가 政權을 掌握하였다. [11] [12] 以後 僻派가 정순왕후 를 움직이면서 四學嚴禁을 名分으로 南人과 詩派에 對한 肅淸作業을 始作했다. [13] [14] 1801年 2月 22日 ( 陰曆 1月 10日 ) 定順王后는 天主敎 嚴禁에 關해 下校를 내렸다. [15] 그 內容은 “天主敎 信者는 人倫을 무너뜨리는 私學(邪學)을 믿는 者들이니, 人倫을 威脅하는 禽獸와도 같은 者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開學하게 하고, 그래도 改悛하지 않으면 力率로 處罰하라”는 것이다. [16] 定順王后는 이 下敎에서 五家作統法 의 適用을 言及하였는 바, [17] [18] 다섯 집 中 한 집에서 天主敎 信者가 摘發되면 모두 處罰하는 苛酷한 緣坐制 를 豫告한 것이었다.

政治報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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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順王后는 아버지 김한구 와 함께 思悼世子 除去에 앞장섰던 탓에 [19] [20] 正祖의 卽位를 反對했었다. 1776年 正祖 가 卽位하자 그女의 집안은 沒落의 길을 걸었고 그女 또한 숨죽이며 지냈다. 1786年에 오라비 金龜柱 가 귀양地에서 死亡한 後로는 [21] 正朝와 南人들에 對해 怏心을 품게 되었다. [22] 이런 정순왕후 의 目標는 正祖 在位期에 成長한 男인 勢力에 對한 大大的인 肅淸에 있었다. [23] 政界에서 몰아내고 再起하지 못하도록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先王 正祖는 執權勢力인 老論 僻派를 牽制하기 위해서 南人을 重用하며 蕩平策을 펼쳤었다. [24] 正祖가 寵愛했던 進步的인 南人 少壯派들이 西學에 關心을 두고 天主敎에 가까운 者가 많았으니 이는 좋은 名分이 되었다. 天主敎에 對해 悠然한 立場을 標榜했던 先王 正祖 조차 1788年에 天主敎를 邪敎로 規定했었기 [25] [26] 때문에 老論 僻派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 定順王后의 下校直後 僻派의 領議政 심환지 와 攻西派 大司諫 목만중이 先鋒이 되어 南人, 詩派, 信西派를 잡아들이기 始作했다. [27]

南人肅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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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交撤廢는 빌미일뿐으로 最優先的인 目標는 先王 正祖의 寵愛를 받던 이가환 , 권철신 , 정약용 3人의 除去에 있었다. [28] 이가환 과 權哲身은 채제공 死後에 南人을 이끌고 있었고 丁若鏞은 南人을 이끌 次世代 走者였기 때문이다. 特히 李家煥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李家煥의 家門이 祖上때부터 있었던 老論 僻派와의 惡緣 때문이었다. 李家煥의 曾祖父 이하진은 弘文館 提學을 지냈는데 1680年 庚申換局 때 執權한 西人들에 依해 流配를 가서 2年뒤에 抑鬱하게 죽었다. [29] 또한 李家煥의 從祖父(從祖父) [30] 中 한 사람인 이잠(1660~1706)은 肅宗때 老論을 攻擊하다 杖殺당했다.

이런 집안 來歷은 그 동안 두고두고 攻擊對象이 될 程度로 老論이 가장 忌避하는 人物이 이가환이었다. [31] 또한 그는 當代에 第一가는 天才로 博學多識함이 東西洋의 學問에 막힘이 없었고 正祖의 寵愛를 받으며 要職을 두루거쳤고, 正祖가 生前에 오회連翹(五晦筵敎)를 통해 이가환 을 宰相으로 登用하겠다는 뜻을 내비친적이 있었다. [32] 李家煥이 1791年 珍山事件 直後 背敎하며 天主敎 彈壓에 앞장섰다는 事實을 老論 僻派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重要하지 않았다. 老論 僻派가 願했던 것은 이가환 이 天主敎를 버렸다는 證據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33] 이가환 권철신 은 모진 拷問 끝에 4月 8日에 獄死하였다. 屍身은 목을 벤後 길거리에 버려졌다. [34]

展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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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籠 摘發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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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迫害가 始作되자 정약종 은 이미 죽을 覺悟를 하고 있었으나 星霜과 敎理書籍, 周文謨 神父의 便紙等은 後代에 傳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좀 더 安全한 곳으로 옮겨 감추기로 하였다. 1月 19日에 이것들을 작은 冊籠(冊籠)에 넣어 나뭇짐으로 僞裝한후 머슴을 시켜 옮겨놓게 했으나 運搬途中에 密屠殺한 쇠고기를 運搬하는 것으로 誤認 받아 捕盜廳에 끌려가고 말았다. [35] 이 事件으로 豫想 밖의 所得을 얻은 調整은 彈壓에 拍車를 加하는 契機가 되었고, 곧 이승훈 , 崔昌賢 等 指導者級 人士들을 연이어 잡아들였다. 2月 11日(음)에 逮捕된 정약종 은 冊籠속의 內容物이 모두 自己 것임을 是認하였고 國文이 進行되자 調整에 依한 天主敎 迫害의 不當함을 抗辯하였다. [36] 丁若鍾은 1801年 2月 26日(음) 西小門 밖에서 이승훈 ·최필공· 최창현 , 홍낙민, 홍교만 等과 함께 殉敎하였다. [37] 丁若鍾의 아들 정철상度 拘束되었고 4月 2日(음)에 死刑에 處해졌다.

정약용 拘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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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籠 摘發 消息을 들은 丁若鏞은 마음에 準備를 하고 지내던중 2月 8日에 兄 丁若銓과 함께 電擊的으로 逮捕되었다. 國文章에서 但只 學問的 關心으로 天主敎를 接했을뿐이었기에 이미 1791年 珍山事件( 辛亥迫害) 以後 天主敎와 訣別했다고 自身을 辯護했다. [38] [39] [40] 지난 1797年에 天主敎徒로 誤解 받자 《自明疏》를 써서 反駁한적이 있었고 1799年에는 《策士方略》을 著述하여 背敎를 分明히 했었다는 事實等을 밝혔다. [41] 또한 天主敎 指導者인 권철신, 황사영 等을 告發하였다. [42]

天主敎信徒를 索出하려면, 믿음이 弱한 奴婢나 學童을 訊問할 것을 提案하기도 했으나 [42] 自身의 救命에 別般 도움이 되지 않은채 狀況이 不利하게 돌아가자 곧 諦念하였다. 朝鮮人 最初로 洗禮를 받은 後 天主敎 宣敎活動을 主導했던 이승훈 은 丁若鏞의 妹兄이고 [43] 天主敎 敎理 硏究會長人 정약종 은 셋째 兄이며 지난番 珍山事件 (1791年)을 일으킨 윤지충 은 外四寸이었다는 點이 不利하게 作用했다. [44] 그러던중 잡혀온 여러 信者들의 國文이 거듭될수록 丁若鏞의 背敎事實에 對한 證據들이 쏟아져 나왔다. [45] 분명한 物證들로 因해 丁若鏞과 丁若銓은 拘束된지 18日만에 減刑되어 流配 를 떠났다.

地方 敎會 彈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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迫害는 地方으로 擴大되어, 2月 9日(음)에 忠淸道 ‘內包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이 公州에서 拘束되었다. 그는 서울로 押送되어 國文을 받고 2月 26日(음) 死刑이 確定된후 公主로 다시 移送되어서 斬首되었다. 그外에도 地方에서 잡힌 많은 天主敎人들은 서울로 押送되었다가 各其 故鄕으로 다시 보내서 死刑에 處했는데 이는 一般 大衆에게 警覺心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46] 3月 13日(음) 驪州에서 5名, 양근에서 10餘名이 處刑되었고, 4月 2日(음)에는 최필제 等 6名이 處刑되었다. 全州에서는 3月(음)부터 迫害가 始作되었다. 柳恒儉의 家族들을 비롯한 200餘名이 獄에 갇히었는데, 大部分은 背敎하여 釋放되었다. 柳恒儉은 9月 17日 殉敎했고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家族들中 많은 이들도 殉敎했다. [47]

周文謨 殉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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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月 12日(음) 周文謨 神父가 自首하자 天主敎 彈壓이 다시 活氣를 띄었다. 周文謨 는 1795年에 密入國한 以來, 主로 서울에 있는 姜完淑의 집에 居處하면서 全校에 힘써왔다. 6年間 이어진 그의 隱密한 活動은 敎勢擴張에 큰 寄與를 했는데, 地方에도 내려가 內包의 이존창과 全州 柳恒儉의 집에서 머물면서 地方에서의 宣敎活動에도 힘썼다. [48] 周文謨 는 迫害가 全國的으로 벌어지자 居處를 여러番 옮겨 다녔으며 慶熙宮에 숨기도 했다. [49] 한때는 中國으로 脫出하기 위해 國境地域까지 갔으나 自身 때문에 天主敎人들이 苦痛을 받자 마음을 돌려 義禁府에 自首를 決心하였다. [46]

當時 朝鮮 朝廷에서는 中國 과의 外交 關係를 憂慮하여 追放令으로 減刑하자는 主張도 있었으나, [50] 死刑 으로 結論이 내려졌다. 周文謨 는 4月 19日(음)에 새남터 에서 殉敎했다. 그 이튿날에는 김건순, 김백순, 이희영 等이 西小門 밖 刑場에서 處刑되었다. 周文謨 를 6年間 獻身的으로 도왔던 姜完淑도 宮女 강경복, 문영인, 최인철, 김현우 等 8名과 함께 5月 24日(음) 西小門 밖 刑場에서 斬首되었다. 같은날 死刑言渡를 받은 고광성, 이국승, 윤점혜, 정순매 等 4名은 各其 故鄕으로 移送되어 處刑되었다. 周文謨 를 한 때 宮안으로 避身시킨 事實과 洗禮를 받은 일이 드러난 은언군 의 夫人 宋氏와 그의 며느리 申氏에게는 賜藥이 내려졌고, 그 餘波로 江華에 流配 中이던 은언군 (正祖의 異腹同生)에게도 賜藥이 내려졌다. [51]

黃嗣永 白書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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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月 29日(음), 黃嗣永이 逮捕되자 辛酉迫害는 새로운 局面에 들어섰다. 黃嗣永이 逮捕되었다는 消息이 傳해지자 朝廷 大臣들은 歡呼했다 하며 [46] 逮捕된 黃嗣永의 옷 속에서 發見된 密書를 읽고 모두 驚愕했다. 儒敎 知識人들인 朝廷 大臣들이 보기에 儒敎의 倫理에 어긋나는 天主敎를 믿는 黃嗣永이 臺박청래 곧 큰 배에 글을 잘 하는 선비와 軍士를 타도록 하여 宗敎의 自由를 要求할 것을 請願하고, 나라를 外國에 팔아 넘기려했기 때문이다. 黃嗣永은 祖上에 對한 祭祀를 偶像崇拜로 보아 禁止한 天主敎가 儒敎 倫理에 어긋나는 宗敎임을 알고 信仰을 버린 丁若鏞의 告發로 이미 2月11日에 逮捕令이 내려졌고 以後에도 여러次例 정순왕후에 依해 特別逮捕令이 내려졌으나, 7個月이 넘도록 그의 行方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사영 은 迫害가 始作되자 2月에 서울을 빠져나와 忠北 堤川 봉양면 배론(舟論)이라는, 土器를 만드는 天主敎 信者들의 마을에 가서 土窟속에서 숨어지냈다. [52]

숨어지내는 동안에 김한빈과 황심을 통하여 迫害狀況을 把握하여 資料를 整理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北京에 있는 구베아 主敎에게 보낼 密書를 作成하였다. 後날 《黃嗣永 白書》라고 불리우는 이 密書에는 周文謨 神父의 殉敎 事實을 비롯한 朝鮮에서 벌어지고 있는 迫害 狀況과 中國이나 西洋의 軍隊의 武力을 통해서라도 信仰의 自由를 찾아달라는 要請 等이 담겨 있었다. 黃嗣永은 11月 5日에 大逆罪로 西小門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陵遲處斬을 當했다. [53] 黃嗣永이 外勢의 힘을 빌어 宗敎의 自由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朝鮮 天主敎會는 '代役謀反의 賣國宗敎'라는 非難을 받게 되었다.

黃嗣永의 妻三寸이었던 丁若鏞과 丁若銓은 密書 作成의 背後로 指目되었고 流配地에서 逮捕되어 取罪를 爲해 서울로 押送되었다. 그러나 關聯證據가 나오지 않았고 老論 僻派內 意見이 갈리면서 [54] 極刑은 면하게 되었다. 丁若鏞은 康津, 丁若銓은 黑山島로 流配를 다시 떠났다.

土沙敎文(討邪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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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年 12月 22日(음)에 大王大妃 정순왕후 는 土沙敎文(討邪敎文)李 頒布하였다. [55] 衛正斥邪 (衛正斥邪) 라는 儒敎的 理念에 根據하여 天主敎를 邪學(邪學)으로 規定하고 辛酉迫害의 狀況 및 結果와 [56] 아울러 다시는 天主敎를 믿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는 趣旨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淸나라에 가는 使臣의 數를 200名 以內로 줄이고, 40日 以上 머물지 못하게 하는등 西學이나 西洋文物을 接觸할 수 없도록 嚴格한 鎖國政策을 쓰기 始作했다. [57] 12月 22日 以前에 罪를 지은자中 死刑을 宣告 받은 者를 除外하고 모두 釋放한다는 項目도 들어있다. 또한 邪敎를 믿는자는 嚴罰에 處하겠다는 言及을 했으나 이는 力率로 다스리겠다는 예전의 指示를 뒤엎는 것이었다. [58] 定順王后는 土沙校門을 發表한 뒤 더 以上 天主敎徒를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李家煥, 權哲身 等의 家族에게 刑罰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59] 이미 檢擧된 天主敎人들에 對한 處決度 해를 넘기기 前에 마무리 지을것을 命했다. 한便, 지난 1年間의 迫害로 約 300名 程度가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流配를 떠났다.

迫害 進行 日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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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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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敎 排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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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嗣永 白書》로 因해 私學이라고 規定한 朝廷의 立場을 그 證據를 통해 保障받게 되었고 天主敎는 賣國의 宗敎라는 烙印이 찍혔다. [61] '白書'의 內容이 알려지자 在野 儒生들은 朝廷에 天主敎를 聲討하는 글을 보냈고, 慶尙道와 全羅道에서는 서원 中心으로 天主敎 排斥運動이 세차게 일어났다. [62] 天主敎를 排斥하는 社會的인 雰圍氣가 形成되면서 天主敎에 對한 迫害는 더욱 거세어졌다. 民衆들의 意識속에 天主敎를 믿으면 敗家亡身한다는 생각이 퍼졌고, 天主敎徒를 '天主學쟁이' 또는 '西學쟁이'라 하며 손가락질하게 되었다. [63] 또한 反天主敎的인 雰圍氣에 便乘하여 天主敎와 西洋學問을 모두 排斥함으로 西洋에 對해 알지 못하게 됨에 따라 朝鮮의 自主的 近代化는 挫折되었고 그로 인해 植民地化의 原因이 되었다. [64]

冬至使 派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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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年 10月(음)에 派遣된 冬至使에게 天主敎 彈壓의 正當性을 說明하는 眞珠紗(陳奏使)의 任務도 附與했다. <황사영 白書>가 發覺된 以後 淸國人 周文謨 神父의 處刑 事實이 淸國에 알려질 可能性이 높다고 朝廷에서는 判斷하게 되었다. [65] 이에 朝鮮政府는 眞珠紗를 통하여 辛酉迫害 全般에 關한 淸國의 理解를 促求하고, 周文謨가 淸나라 사람임을 모르고 處刑했다고 거짓 解明하였으며, 더 以上의 彈壓이 없다는 點을 밝혔다. [66] 眞珠紗 조윤대 一行은 土沙校門과 함께 <황사영 白書>의 內容을 16行 922字로 縮小하여 淸國에 傳達했다. [67] 이 縮小本을 흔히 <街白書>(假帛書)라 하는데, 여기에는 朝鮮 朝廷에 不利한 內容은 削除했으며, 西洋 船舶과 軍隊 派遣을 要請한 事實을 적어 迫害의 正當性을 主張하였다.

天主敎의 擴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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彈壓으로 인해 朝鮮 天主敎會의 1世代 先驅者이자 指導者로 자리매김하던 周文謨 , 이승훈 ,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홍교만, 김건순, 等이 殉敎하였다. [68] 地方에서도 指導級 人士들이 多數 殉敎하였는데, 內包敎會의 使徒로 불리던 이존창과 全州敎會의 指導的 敎人이던 柳恒儉, 有關檢 兄弟가 殉敎했다. 이로써 朝鮮 天主敎會는 큰 打擊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天主敎徒들은 危險을 避하여 京畿道의 野山地帶나 江原道나 忠淸道의 山間地方, 太白山脈, 小白山脈의 깊은 山中과 溪谷에 숨어, 天主敎의 全國的 擴散을 促進하였다. 한便, 從來 知識人 中心의 朝鮮 天主敎會가 辛酉迫害를 전후하여 庶民社會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69]

정순왕후 退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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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淸作業 1年만에 調整은 老論 僻派로 채워졌다. 그런데 1803年(純祖 3) 여름에 큰 가뭄이 들더니 평양부와 함흥부에 큰 불이 났다. 그해 11月에 辭職樂器庫, 12月 13日에는 昌德宮 宣政殿, 仁政殿에도 큰 火災가 發生했다. [70] [71] 닷새後에는 長安의 종루 거리에서 다시 큰불이 났다. 百姓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亡한다거나 여우가 묵으면 어쩌구 저쩌구 하며 大闕을 向하여 손가락질을 했고, 낮은 벼슬아치들도 大王大妃를 두고 중얼거렸다. [72] 民心이 洶洶해지자 정순皇后는 1804年 1月에 垂簾聽政에서 물러났다. 純祖의 親政이 始作되자 丈人 김조순 이 得勢하여 僻派를 肅淸하고 安東 金氏의 勢道政治가 始作되었다. 辛酉迫害로 남인 詩派는 電滅하여 再起不能의 狀態에 이르렀고 [73] 이는 改革을 向해 나아가던 朝鮮의 歷史를 退步시켰으며 朝鮮의 政治가 黨派 中心에서 外戚 中心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7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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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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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27
  2. 儒敎의 限界性을 天主學으로 補完할 수 있다른 理論을 말한다.
  3. [네이버 知識百科] Ricci, Matteo (가톨릭에 關한 모든 것, 2007. 11. 25., 백민관) .....(天主實義, 1595)이라는 著書이다. 이 冊은 中國語로 썼는데...(중략)...그의 全校 方法은 西洋式의 하느님 槪念이 없이 天主敎와는 다른 宗敎意識에 가까운 祖上崇拜를 하는 中國人들을 이해시키려고 所謂 保有論的(補儒論的) 立場을 取했다.
  4. [네이버 知識百科] 辛酉迫害 [辛酉迫害] (두산百科)
  5. 이덕일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年 p346
  6. 민경배 <韓國基督敎會社>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5年 p62
  7. [네이버 知識百科] 乙錨泊해 [乙卯迫害]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8. 이덕일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年 p354
  9. 正祖實錄 (1805) 54卷, 正祖 24年 6月 28日 己卯 11番째記事
  10. 純祖實錄 (1838) 1卷, 純祖 卽位年 7月 4日 甲申 1番째記事
  11. 僻派는 定順王后의 親오라버니 金龜柱 (1786年에 死亡)가 主軸을 이루었다.
  12.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6> 한길사 2009.4.10 p31...定順王后는 7月 4日에 左議政 심환지를 領議政, 左議政에는 이시수를 임명하는등 人事를 斷行했다. 이는 國喪中에는 모든 定社, 特히 人事 措置를 中止하는 慣例를 깨는 措置였으며, 自身의 親姻戚과 老論 僻派 人士들로 調整을 채워넣었다. 人事斷行에 對해서 領議政 李秉模가 淸나라에 使臣으로 가 있어 國喪中에 三貢을 갖추어야 한다는 名分을 내세웠다.
  13. 민경배 <韓國基督敎會社>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5年 p64
  14. [네이버 知識百科] 自讚墓誌銘-集中本 - 1-9 [自撰墓誌銘-集中本] (與猶堂全書 - 詩文集 (산문) 16卷,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辛酉年(1801, 順調 1, 40歲) 봄에 태비人 定順王后가 諭示를 내려 西敎(西敎)를 믿는 사람은 코를 베어 滅種시키겠다고 警告하였다.
  15. 민경배 <韓國基督敎會社>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5年 p64
  16. 純祖實錄 (1838) 2卷, 純祖 1年 1月 10日 定해 1番째記事
  17. 민경배 <韓國基督敎會社>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5年 p65
  18.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熊進知識하우스 1996年 p459
  19. [네이버 知識百科] 정순왕후 [貞純王后] (두산百科).....親庭이 老論의 中心家門이었음에 비해 思悼世子는 小論에 기울어져 老論에게 批判的이었고, 그 內外가 어머니뻘인 自己보다 10歲나 年上인 데서 빚어지는 葛藤 때문에 1762年 영조가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役割을 했다고 傳해진다.
  20.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33
  21. [네이버 知識百科] 金龜柱 [金龜柱] (人名事典, 2002. 1. 10., 人名事典編纂委員會).....世孫(正祖)李 卽位하자(1776) 그는 黑山島에 귀양갔고(1779) 後에 減刑되어 羅州로 왔다가(1784년) 거기서 死亡했다.
  22.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32
  23.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53
  24. [네이버 知識百科] 珍山事件 [珍山事件] (두산百科)
  25. [正祖實錄] 正祖 12年 8月 2日
  26. 윤정란 <朝鮮의 王妃> 이街出版社 2003年 p219
  27. 임중웅 <王妃列傳> 선영사 2003年 p316
  28.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52
  29.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36
  30. 民衆書林編輯局 <엣센스 國語辭典> 民衆書林 1974年 p2056.....할아버지(祖父)의 男子兄弟로 6寸間이다.
  31.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36
  32.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26
  33.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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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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