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日本 상지대학 工夫하셨고, 以後에도 神父의 몸으로 獨逸 留學을 가신건데, 西洋을 처음 對했을 때 놀라는 것이 많았나요, 아니면 斟酌대로였나요?
A) 留學은 1956年에 갔습니다. 西歐와 東洋의 差異는 처음에 많이 느끼죠. 그러나 살다보면 익숙해지죠. 到着해서 처음 베르사유 宮殿에 갔을 때 받았던 衝擊이 있습니다. 以前에 프랑스 사람들이 韓國에서 우리보다 宏壯한 優越感을 느끼는 것을 보고 조금 不便하게 생각했었습니다. 파리에서 베르사유 宮殿 보니 그 優越感을 理解하겠더군요. 우리보다 1世紀 앞서서 都市文化라는 것을 갖고 있었구나. 그리고 規模가 宏壯히 크다는 것에 衝擊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르사유 宮殿을 觀光客으로 갔는데 이 사람들은 宮殿을 지을 때 루이 까토즈(14歲)가 專制政治를 폈는데, 國民의 피땀으로 지었을 것 아닙니까. 어쨌든 이만한 遺物을 남겨서 後代에게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先祖들은 亦是 國民을 잘 待接하지는 안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先祖는 무엇을 남겼는가? 外國 觀光客이라도 끌어들일 遺産을 남겼으면 좋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東方禮儀之國이라고 말하는데요. 그게 自負할 것은 아니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거기 가서 보니 남에 對한 尊重과 禮儀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고 生活化 되어 있더군요. 서로 따뜻하지 못하고 서로 탓하는 것을 物質文明으로 돌리는데 果然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Q) 유럽의 文明을 보면 首都와 沐浴湯 等 都市에 사는 사람들의 遺跡이 있죠. 一種의 삶의 文化인데 우리는 偉大한 사람이 죽은 痕跡뿐입니다.
A)生命을 中心으로 한 文化와 죽음을 中心으로 한 文化가 있다고 볼 때 우리의 文化는 죽음의 文化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祖上崇拜가 强調돼서 여기보다는 西歐에서 韓國이 제대로 보이더군요. 우리나라에 관계되는 冊을 보니까 놀란 것은 朝鮮時代에 祖上 祭祀가 中心的인 思想이었잖아요. 孝를 위해 祖上祭祀가 重要했고, 嫡子가 重要했죠. 아들이 없으면 兩者가 重要했겠죠. 兩者法을 보니 다양한 繼承 順序가 있더군요. 宏壯히 모든 境遇를 생각해서 細密하게 돼 있는 게 兩者法이더군요. 問題는 兩者 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죠.
英親王이 돌아가셨을 때 下棺式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 下棺式 보면 참으로 精密합니다. 下棺式을 하는데 下棺에만 한 時間 半이 걸립니다. 精確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禮法을 산 사람을 위해 했더라면 우리나라가 달라지지 않았겠나, 죽은 이를 위해 華麗하게 하는 것은 나라 全體가 進取的으로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못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導入한 遊學, 朱子學 탓일 수도 있고 우리가 輸入한 姿勢에도 問題가 있겠죠.
個人的으로 좋아하는 文句가 네루 印度 首相이 말한 "嫌惡로써 사랑한다(인도의 發見)"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마음 가득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逆說인데요. 印度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도 西洋을 많이 배운 힌두人인데, 우리에게도 西洋을 배운다는 意味, 그런 視角이 있었으면 합니다.
(入力일 : 200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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