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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4回 學兵과 日本의 ’고이소’總督 | 1965.04.06 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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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便 - 第4回 學兵과 日本의 ’고이소’總督
이철승 便
第4回 學兵과 日本의 ’고이소’總督
1965.04.06 放送
‘政界野花’는 65年 1月 4日부터 放送한 15分짜리 對談프로그램으로 70年 10月 5日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政界野花’의 元祖格이다. 이 프로그램은 光復 20年과 6·25戰爭 15年을 맞아 企劃한 것으로, 政界의 主要 人物들로부터 自敍傳的인 回顧談과 함께 政界의 뒷얘기를 들려줘 聽取者들의 人氣를 모았다.
- 오늘은 그 70番째 時間 學兵과 고이소 日本 總督에 對한 얘기를 前 民議員이었던 이철승 氏와 동아일보 政治部長 신동준 氏와의 對談으로 들으시겠습니다.

- 어젯밤에는 大槪 그 高麗大學에 계셨을 때 그 日帝 末期 學生들 動向에 對해서 얘길 들었는데요. 어땠습니까 그 學兵 李 議員 自身은 學兵에 나가셨던 건가요?

- 글쎄요. 뭐 强制로 끌려 갔었죠.

- 그때 그 景況을 좀 들려주실까요?

- 그 아시는바와 같이 學兵에 갈때 그 時代的 背景은 新 兄도 아시는바와 같이 1943年 그땝니다.

- 네.

- 그때는 벌써 伊太利가 無條件 降伏을 하고 또 카一路 宣言이 나와서 韓國의 獨立을 保障할 때 였습니다.

- 그런거 學校 學生들도 알고 있었댔나요?

- 全혀 모르고.

- 全혀 모르죠?

- 그 當時에는 這番에 말씀한 바와 같이 몇 몇 社會指導者나 道 몇 몇 敎授들을 통해서 暗示的으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 저녁 講義時間 끝나면 그런거 알아들으러 다니는 學生이 한둘 어느 半이든지 있습니다.

- 네. 그때는 어떤 분들이 大槪.

- 그 當時 新 兄도 아시는바와 같이 여훈영 氏가 한참 그런 方面에 알려져있고 우리가 尊敬하던 宋鎭禹 先生 또 인촌 金性洙 先生 또 學校에 있어서는 박흥채 氏다 안호상 氏다.

- 어저께 얘기했던.

- 네. 그런분들 社會 指導者 或은 敎育者로서 그런 분들이 거의 學生들을 뒤에서 暗暗裏에 影響力을 끼치고 있는 그런 勢力이었습니다.

- 네. 그 여훈영 氏 라든가 宋鎭禹 先生 같은 사람은 어떤 方法으로 學生들하고 接觸을 하셨댔어요?

- 그 예를들면 學兵 拒否運動이 나옵니다.

- 네.

- 우리가 그 동안에 志願兵이라든지 或은 供出制度라든지 이런거에 있어서는 別로 큰 抵抗이 없었습니다만은 學兵問題가 탁 나오니까 學生 뿐만아니라 民族 指導者들 全 民族이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 그랬지요.

- 그것은 神 兄도 아시는바와 같이 그 우리의 日本 사람들이 그 戰勢가 不利하니까 人的 資源을 最大 動員하는 方法 하나 그 다음에는 이 心臟部 民族 運動의 心臟部를 抹殺해버리자는 그런 것으로 하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이다 그러니 우리 學生들은 왜 우리가 그놈들 앞잡이로 가서 개죽음을 해야 할 것이냐 그 理由는 뭐냐. 이 問題 때문에 우리 先輩들 찾아가고 하루는 제가 仁村 先生 宅을 個송을 찾아 갔습니다. 가서 仁村 先生께 이 學兵制度가 實施 되었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습니까. 仁村 先生은 直接 그때에 보성전문 校長으로 있었어요.

- 네.

- 露骨的 얘기는 못하고 暗示로 宋鎭禹 先生 얘기를 해요.

- 네.

- 그리고 나는 널 父兄한테 工夫 가르치기로 해서 널 데려온거지 널 보고 粥으로 가는데 가라마라 할 資格은 없다 그리고 避해 버렸어요.

- 네.

- 그 내 宋鎭禹 先生 찾아 갔어요. 또 마침 제 三寸이 諸緣 國會議員 하시던 석자 주자 그 어른이 主로 그 社會主義 運動하는 분이나 또 民族主義 運動하는 분을 통해가지고 인제 저희들 指導를 했습니다. 그래서 學兵은 이건 반드시 拒否 運動을 시켜야 겠다 해서 그때사 陰性的인 學生運動이 組織化 하기 始作 했습니다.

- 組織이 있어서야 됐습니까

- 네.

- 어떤 方向으로.

- 예를들면 그때 그 서울大學 只今 서울大學 입니다. 그때 京城帝大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이혁기라고 하는 親舊가 나오고 또 명륜專門이라고 있습니다. 只今의 成均館 大學.

- 네.

- 또 高尙, 法典 이런 學校들이 全部 모여가지고 組織 했습니다.

- 네.

- 各 代表들이. 근데 學兵을 拒否運動을 하자. 已往에 끌려가서 죽는거나 拒否運動 해서 죽는거나 이차제의 三一精神을 받드는 좋은 契機가 되지 않냐. 方法은 3·1運動 때 東京 留學生들이 먼저 그 獨立宣言을 해가지고 先輩들 한테 마찬가지 方法으로써 이番 動機方案을 中心으로 해가지고 全國的으로 抵抗運動을 하고 反對運動을 하자.

- 네.

- 이래서 우리가 나누어서 社會의 先輩들을 찾아가기로 해서 여훈영 氏도 積極 學兵을 拒否해라. 宋鎭禹 先生도 積極 拒否해라. 그런 그 自身을 가지고 拒否運動을 했었어요.

- 네.

- 그랬더니 한쪽은 新 兄 아시는바와 같이 學兵을 勸誘運動 하는것이 大大的으로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요. 그때 그 누구...

- 只今 뭐 國民 總理 몇名 경방黨이다 한상영이다. 大當面 들었던 뭐 박중금이다.

- 네.

- 이런 사람들 親日派들 尹致昊 氏다. 總動員 해가지고 甚至於 文人인 최남선 詩나 李光洙 氏 까지도 學兵 勸誘運動으로 日本에 보내고 그래서 또 新聞 그러니까 學兵 勸誘運動은 强制的 方法으로 하고 한便은 또 痲醉的 方法으로 했습니다. 强制的 方法은 父母를 잡아 넣고 妻子를 잡아 넣고 强要 하는거 또 痲醉的 方法은 要塞 善心政治 한다는 式으로 말이에요. 술도 먹이고 그냥 돈도 주고 별 特惠를 다 주고 特權을 다 줘가지고 痲醉를 시켜가지고 그 不感症을 일으켜가지고 學兵運動을 支援하게 그런 運動이 벌어졌으나 初期에는 이것이 얼마 成跡을 내지 못했어요.

- 네. 저 直接 이 議員 한테 어떠한 工作이라도 왔댔어요?

- 아 우리집에 찾아다니구요. 우리 三寸을 잡을라고 그랬지만 나는 三寸이 서울에 있기 때문에 난 그 집에 숨어 있어도 난 걸리지 않았습니다.

- 네. 그러면 그러한 때 直接 當하신.

- 네. 하루는 우리가 組織을 해서 겨울放學까지 끌고 나갈라고 그랬더니 그 타이밍을 잘못 잡았어요. 좀 일찍이 露骨化 했으면 할건데 그래서 우리가 未安한데 한 學生 마침 只今 그 當時 혜화專門 입니다. 동국대학.

- 네.

- 그 代表가 없어서 그 代表를 하나 넣기로 했더니 그 代表가 어떻게 가가지고 自己 三寸한테 자랑스러워서 얘기한 模樣이에요.

- 아.

- 우리가 學兵 拒否運動을 이렇게 하고 있다.

- 음.

- 그래서 그 代表가 하루는 오더니 우리 三寸되는 사람이 文 氏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우리를 만나 보자고 한다. 고이소가 身分을 完全히 保障 할테니 한番 만나자고 한다.

- 아 고이소 總督 말이지요?

- 네.

- 그 當時 고이소는 이 學兵이 成跡을 올리느냐 못 하느냐에 自己 政治 生命을 ..있는 때였습니다.

- 네.

- 그래서 우리는 이거 큰일 났구나. 組織에 暴露가 되었구나. 거기서 解體하자.

- 네.

- 이런 사람과 그러면 한番 만나가지고 單板을 지어 對策을 세우자. 이런 그 두 勢力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門 氏라는 사람이 그 미스코시라고 하는데 只今 동아백화점 인가요?

- 그렇지요.

- 거기에서 點心을 하더군요. 그래서 고이소가 當身네들 만나서 充分히 얘길 듣고싶어 하니 거기 가서 얘기하면 되지 않느냐.

- 아.

- 이런 그 얘기를 듣고 우린 結論으로는 고이소를 만나기로 해서 孝子洞 終點에 午後 4時 그때 11月 末쯤 될겁니다. 그때까지 學兵이 3分의 1度 支援이 안됐는데 피알은 뭐 거의 다 支援되는 것 같이 피알韓 땝니다.

- 네. 그러니까 總督 官邸 只今 靑瓦臺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 그렇습니다. 그 當時 日本 놈 때에 제가 靑瓦臺 只今 總督 官邸에 간다는건 참 어마어마 했을 땝니다.

- 어땠습니까, 그때에.

- 只今 제 記憶을 더듬으면 들어가면 바른쪽 便에 그 리셉션 하는 큰 홀이 있지 않습니까?

- 只今도 있지요.

- 네. 거기에 인제 祕書 하나만 두고.

- 음.

- 거기서 혼자 남아 軍服을 입고 이가 빠졌는지 虎狼이 같이 생겼습니다. 虎狼이 上 입디다 고이소가.

- 네.

-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 주창은 왜 우리가 죽으러 가야 할거냐. 왜 더군다나 工夫하는 사람만 쓸어 갈거냐. 그래서 그 當時 하나는 맡았습니다 擔當을. 商科大學 다니는 사람 징코上 너는 銅尺이 우리나라 植民地로써 農村을 오늘날 零細化 해가지고 搾取한거 거기에 對해서 데이타를 가지고 攻擊을 해라. 또 한 사람은 너는 그 上級學校 入學 하는데 서울大學이다 官立學校다 入學 하는데 뭐 100代 1이나 50代 1이니까 그 뭐 못가는 얘기 어떤 사람은 뭐 日本 畏敬이 우리 참 우리를 못살게 彈壓하는 이야기 이런걸 全部 파트를 나눠가지고 抗議를 했습니다.

- 相當히 勇敢 했군요. 그 總督 앞에서 學生들이.

- 그 뭐 그때는 우리는 48人 役割을 해가지고 우리가 먼저 ..乙 두면 겨울放學에 우리 學生들이 삐라를 가지고 시골에 가서 이걸 돌려놓으면 先輩들이 여훈영 氏나 송진우 氏는 그 다음에 나오기로 順序가 이렇게 됐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탁 놓고 들어간거지요.

- 네. 그래 總督이 뭐라 그래요.

- 總督 얘기는 먼저 當身네들 얘기부터 해라 이거야. 우리 첫番에는 아주 거기서 獨立宣言이라도 하고 잡혀가기를 바라고 갔는데 이 놈이 能爛한 구렁이 같은 놈이라 먼저 1對 1로 答辯하지 않고 當身네들이 먼저 얘기하고 싶은걸 먼저 얘기해라.

- 全部 하라?

- 어. 그러면 내가 綜合的으로 얘기해주마.

- 네.

- 그러더니 우리 얘기를 듣고 나더니 껄껄 웃으면서 自己가 60平生 이런 말 듣기는 처음이고 이런 반가운 機會가 없었다. 그러면서 要旨는 우리가 맨날 듣던 얘기 내선 一切다. 근데 日本 사람들이 너무나 韓國을 差別 하는걸 이걸 解決하기 위해서 난 總督으로 나온거다. 그러니 이 앞으로는 民議員 選擧 까지도 所謂 衆議院 選擧

- 그렇지.

- 韓國 사람이 나오게 되고 完全히 韓國民의 朝鮮民族을 어떻게 處遇를 改善하느냐 하는 問題를 考慮하기 때문에 1層에서 3層 갈려면 뛰어 갈 순 없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합디다.

- 네. 學兵을 나가야 똑같은 大學生일 수 있다.

- 그러니까 너가 그런 證據를 보이고 한 피를 흘려야지 日本 사람 가면 되냐.

- 네.

- 그래서 인제 끝나고 저녁을 먹자고 待接을 하더군요.

- 아. 日本料理 였어요?

- 日本料理를 내놓고 저쪽房에 아주 잘 차렸습디다. 그래 우리는 먹지 말고 나가자.

- 네.

- 하다가 여기까지 나온 김에 다 끝내고 나가서 對策을 세우자. 근데 마침 제가 인제 좀 그때 過激한 얘기 나누는데 송진우 氏가 뒤에서 直接 指揮를 하고 있으리만큼 했더니 너는 어느 學校 學生이냐 나보고 물어요.

- 네.

- 나 보성전문학교 學生이다 그랬더니 음 그래? 아 金性洙 君은 참 물 샐 틈 없는 사람이야. 日本말로.

- 네.

- 그렇게 얘기를 합디다. 그래서 그때 얘기는 學校를 다 줄인다고들 그래요.

- 네.

- 그 뭐 그때 얘기에 세브란스度 없어지고 무슨 商科大學度 고상도 없어지고 또 法典도 없어질 때 그래 제 六感은 아직까지는 얘들이 보성전문 民族의 힘으로 만든 學校는 없앨 수가 없지 않겠느냐 이런 六感을 느꼈습니다.

- 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해서 學兵에 結局 나가시게 됐죠?

- 그래 내가 나와가지고 이사람이 身分保障을 完全히 한다고 그랬거든. 그래 景武臺 앞에 나와가지고 解體 宣言 했어요.

- 네.

- 그래놓고 여긴 麟蹄 暴露가 됐으니 이 다음에 提起 運動을 하자 해서 祕密裏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마침 成大 代表 李石基 氏는 西大門 刑務所에 잡혀가고.

- 아 저 요前 民議員 李石基 氏.

- 아니요. 그 李石基 아니에요. 只今 國軍 準備對 總司令官 해가지고 解放 後에 以北으로 간 사람입니다. 成大 代表 입니다.

- 네.

- 나는 20日날이 마감인데 內容的으로 닷새를 延期했던 模樣이에요.

- 네.

- 12月 20日이.

- 네.

- 安心하고 學校를 나가 봤더니 憲兵이 딱 지켜서서 그 支援해야 한다. 그래서 25日날 마감에 延期된 날 할수밖에 끌려서 學兵 갔습니다.

- 어디로 갔어요?

- 日本 오사카라는데를 가서 하마터면 죽을뻔 알았습니다.

- 그러면 學兵間 後의 얘기는 또 來日 또 듣기로 하겠습니다.

- 네.

(入力일 : 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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