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史時代에서 三國時代까지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仁川은 우리 民族의 歷史가 동틀 무렵, 이미 韓半島 西海岸 地域의 中心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江華島를 비롯한 仁川地域 곳곳에서 舊石器를 使用하던 사람들이 살기 始作하였고, 이들의 社會的 文化的 遺産은 新石器·靑銅器時代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蓄積·擴張되어 紀元 前 1世紀 頃에는 ‘彌鄒忽(彌鄒忽)’을 建設하도록 하는 基盤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世界文化遺産으로 指定된(2000) 强化 고인돌 遺跡을 비롯하여 仁川 地域 여러 곳에서 發見되는 고인돌들은 이를 말하고 있다. 檀君(檀君)의 有香(遺香)李 江華島 곳곳에 傳하고 있는 것도 決코 우연한 일이 아니겠다.

그러나 漢江 中流에서 백제가 勢力을 떨치고, 高句麗의 平壤 天道 以後 이루어진 南進政策으로 仁川地域社會는 漸次 그 獨自的 勢力을 잃어 갔다. 이들 두 勢力의 伸張에 밀려 더 以上 西海岸地域의 中心勢力으로 成長하지 못하고 끝내 百濟의 平凡한 軍·縣으로, 이어서 高句麗의 軍·縣으로 編入되어 간 것이다. 백제의 支配 下에서 仁川地域은 對外交通의 窓口가 되었는데, 高句麗와는 달리 海上으로 中國과 交通할 수 밖에 없었던 백제가 그 首都를 忠淸道 公主로 옮길 때까지 100餘 年 동안 陵허대(凌虛臺 : 연수구 옥련동)를 港口로 하여 中國과의 交通을 取한 것이었다.

以後 大同江과 원산만을 連結하는 地域까지 그 領土를 넓힌 新羅는 中國과의 海上交通의 據點을 당항성으로 하였다. 그리고 仁川地域에는 軍陣[軍鎭 : 혈구진(穴口鎭)]을 設置하여 外侵의 防禦와 함께 海上交通의 安全을 期하는 軍事基地로 삼았다. 仁川地域社會가 이番에는 軍事的 要衝地로 浮上되는 變化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