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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科學革命의 背景 : 동아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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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N사피엔스]科學革命의 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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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學者 유발 하라리는 그의 力作 《사피엔스》에서 人類歷史의 進路를 形成한 세 個의 革命을 提示했다. 첫째는 約 7萬 年 前의 認知革命, 둘째는 約 1萬2000年 前의 農業革命, 그리고 셋째는 約 500年 前의 科學革命이다.


時間 尺度를 조금 줄여 西洋의 近代를 출현시킨 要因으로 르네상스, 宗敎改革, 科學革命을 꼽는 이들도 있다. 어떤 基準을 適用하든 科學革命이 人類의 歷史에서 至大한 變曲點을 만들었음은 누구나 否認하기 어려울 것이다.


科學革命이란 西유럽에서 近代科學이 胎動하여 形成되기까지의 一連의 過程을 일컫는다. 時期로는 大體로 코페르니쿠스가 《天球回轉에 關하여》를 出版한 1543年부터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出版한 1687年까지에 該當한다. 무슨 놈의 革命이 無慮 144年에 걸쳐 일어나느냐 하고 反問할지도 모르겠다. ‘革命’하면 우리가 쉽게 머릿속에 떠올리는 政治的인 激變이나 急激한 社會變化의 이미지에 빗대 보면 144年은 分明 긴 時間임은 맞다. 그러나 하라리가 提示했던 7萬 年이라는 타임 스케일을 생각해 보면 144年은 대단히 짧은 時期이다. 비슷한 用例人 産業革命의 境遇를 보더라도 1次 産業革命의 時期는 18世紀 中盤에서 19世紀 初盤까지 大略 50~60年 程度를 잡는다. 따라서 産業革命이나 科學革命은 政治革命에 비해 그 時期가 좀 길더라도 ‘革命’이라는 말을 許容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싶다. 


이런 人類史的 빅 이벤트가 있으면 사람들은 普通 그게 어떻게 可能했는지 따지기 좋아한다. 社會的 背景이니, 內外的 要因이니 하면서 말이다. 가르치는 立場에서는 試驗問題로 出題하기에 安城맞춤이다. 먼저, 科學革命이 일어난 첫째 社會的 背景으로는 宗敎改革이 꼽힌다. 루터의 宗敎改革은 1517年에 있었다. 宗敎改革 自體가 유럽社會에 엄청난 影響을 미쳤지만 어쨌든 그 結果로 敎會의 權威가 무너지는 等 基督敎의 社會的인 位相에 큰 變化가 일어나게 된다. 中世 千 年을 支配해 온 宗敎인만큼 基督敎의 位相이 變한다는 건 事實 例事일이 아니다. 時期的으로도 16世紀에 접어들면 르네상스度 막바지로 치달을 때이다. 루터의 宗敎改革이 始作된 지 10年 뒤인 1527年에는 神聖로마帝國軍이 로마에 侵略해 이른바 ‘로마掠奪’을 일삼기도 했었다.

 

當時 敎皇이던 클레멘스 7世를 지키기 위해 스위스 近衛隊가 마지막 1名까지 壯烈하게 싸우다 戰死한 것으로도 有名하다. 《天球回轉에 關하여》가 나온 것이 이로부터 16年 뒤이다. 갈릴레오의 宗敎裁判을 紹介할 때에도 말했듯이 舊敎와 新敎의 對立은 敎皇에게 多少 强勁한 立場을 取하도록 强制하기도 했었고 갈릴레오는 그 直擊彈을 맞았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自身의 望遠鏡 觀測 結果들을 土臺로 聖經의 말씀이 實際 自然現象과 完全히 一致할 必要는 없다고 말할 程度가 되었으니, 聖經 句節에 完全히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思惟가 知識人들 사이에 퍼지기 始作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구텐베르크의 인쇄소 풍경을 그린 19세기 그림. 구텐베르크는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발명해 전 유럽에 인쇄술을 퍼뜨렸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구텐베르크의 印刷所 風景을 그린 19世紀 그림. 구텐베르크는 西洋에서 처음으로 金屬活字를 發明해 全 유럽에 印刷術을 퍼뜨렸다. 게티이미지뱅크 提供

科學革命을 孕胎한 둘째 背景으로는 印刷術의 發達을 들 수 있다. 구텐베르크가 金屬活字를 만든 것이 1450年 무렵이다. 韓國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듯이 高麗時代에 直指心體要節을 金屬活字로 찍은 것이 1377年으로 구텐베르크보다 70年 以上 앞선다. 그러나 高麗의 金屬活字가 世上을 바꿀 程度로 큰 影響力을 發揮한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理由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高麗의 活字가 大量印刷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大量印刷에 適合하지 않은 데에는 종이, 活字의 耐久性, 文字 自體의 限界 等이 作用했다. 假令 알파벳은 文章符號를 다 包含하더라도 活字의 種類가 數十 個에 不過하다. 이에 비하면 漢字는 確實히 不利하다. (反面 한글은 越等히 有利하다.) 正祖 때의 活字인 丁酉字의 境遇 無慮 15萬 個의 活字가 한 세트를 構成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가 金屬活字를 만든 契機는 사람들에게 免罪符를 大量으로 찍어서 配布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金屬活字를 만들고 난 뒤에는 聖經이라고 하는 훨씬 더 큰 事業아이템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金屬活字는 루터가 敎會의 免罪符 濫發을 批判한 95個組 反駁文을 大量으로 찍어내 撒布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敎會의 免罪符는 最小 두 番 金屬活字와 因緣을 맺었다. 한 番은 免罪符를 大量으로 팔아먹기 위해서, 다른 한 番은 그 免罪符 장사가 잘못되었음을 反駁하기 위해서. 宗敎改革 以後 10年 동안 루터의 著述은 600萬 部가 팔렸다지만.


비슷한 時期였던 朝鮮에서는 冊을 많이 찍어야 數百 卷 程度였다. 出版物을 大量으로 찍어낼 수 있으면 그만큼 知識의 電波가 빠르고 폭넓게 進行된다. 이를 통해 넓은 地域의 同時代 사람들이 하나의 컨센서스를 만들 수도 있고 本格的인 言論이 登場할 수도 있다. 人間 認識의 急激한 發展에 印刷術이 미친 影響은 아무리 强調해도 지나치지 않다. 


科學革命의 基準이 되는 1543年이나 1687年이 各各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의 著作이 出版된 해라는 點 自體가 印刷術의 發達이 科學革命에 直間接的으로 影響을 미쳤음을 傍證한다. 갈릴레오가 쓴 ≪두 體系의 對話≫는 初版으로 無慮 千 部나 찍었다. 요즘도 과학책을 내면 普通 初版으로 2千 部 程度를 찍는데, 韓國의 讀書市場에서는 初版을 다 消化하기도 힘든 實情이다. 


科學革命의 셋째 背景으로 技術 丈人을 優待한 點을 꼽을 수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엔지니어 優待 程度 될까? 技術者가 賤待받기는 東西洋을 莫論하고 別 差異가 없었다. 다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中世 暗黑期 동안 賤待받던 技術 匠人들을 再評價하게 되고 이들의 社會的 地位도 向上된다. 技術 丈人 出身의 代表的인 人物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들 수 있다. 르네상스 時代를 代表하는 天才인 그는 말 그대로 빈치 마을의 어느 攻防 出身 레오나르도였다.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수많은 攻防出身 天才들이 르네상스 時代를 華麗한 作品으로 수놓으면서 이들에 對한 사람들의 認識, 그리고 自身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認識도 바뀐다. 그 結果 道具의 開發과 改良, 이를 利用한 觀測과 實驗이 科學革命의 土臺를 쌓게 된다. 케플러의 法則이 導出된 것은 앞선 世代였던 브라헤의 훌륭한 天文觀測 機構를 活用한 厖大하고도 꼼꼼한 觀測 資料가 있었기에 可能했다. 갈릴레오는 自身이 손재주가 좋아 直接 苦杯率 望遠鏡을 만들었고 各種 實驗器具를 直接 製作해 定量的이고 數學的인 自然의 法則을 追求하자고 했다. 道具의 開發과 實驗은 近代的인 化學이 誕生하는 데에도 (勿論 鍊金術을 거치기는 했으나) 큰 役割을 했다. 

 

각 분야의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모습이다. 동아사이언스DB
各 分野의 科學者와 엔지니어의 모습이다. 동아사이언스DB

技術 丈人의 淵源은 저 멀리 헬레니즘 時節의 아르키메데스까지 올라간다. 浮力의 原理와 ‘유레카’로 有名한 아르키메데스는 最初의 修理物理學者이면서 機械工學者로 꼽힌다. 아르키메데스는 自身의 數理的 知識을 活用해 起重機와 펌프, 軍艦 等 實生活에 直接 適用할 수 있는 物件들을 設計하고 만들었다. 르네상스 時期 그리스와 로마 文明의 再發見을 通해 다시 照明된 人物 中에는 아르키메데스도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事例는 르네상스 時代 技術 丈人들에게도 肯定的인 影響을 끼쳤다.

 

여기서도 印刷術은 큰 힘을 發揮했다. 自己들만의 專門知識을 實用書로 펴내기도 하고 이를 敎材로 匠人들에 對한 專門敎育도 可能해졌다. 스스로 自負心을 갖게 된 匠人들은 自己들만의 敎育體系(技術 또는 藝術 아카데미)를 만들어 人材를 길러내기도 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런 사람 中 한 名이었다. 日本의 科學史家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르네상스와 科學革命期 中間의 16世紀에 注目해 따로 ‘16世紀 文化革命’이라는 時期를 區分하기도 한다. 이 時期의 重要한 特徵이 바로 技術 匠人들이 現場에서 蓄積한 專門的인 知識과 技術로 武裝해 목소리를 내기 始作했고 이들과 傳統的인 知識人들이 相互接近하면서 知識 世界의 새로운 地形을 이루었다고는 것이다. 要컨대 17世紀 科學革命은 16世紀 文化革命이 있었기에 可能했다는 論理이다. 


科學革命의 넷째 背景을 꼽자면 새로운 思惟方式의 登場을 들 수 있다. 서로 相反된 接近法을 들고 나온 英國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代表 走者들이다. 갈릴레오와 거의 同時代를 살았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新論理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三段論法을 批判하며 歸納法이야말로 새로운 知識을 얻는 참된 方法이라고 主張했다. 먼저 아무런 偏見 없이 中立的인 態度로 觀察과 實驗을 통해 데이터를 蒐集한다. 그 다음, 이로부터 歸納的으로 一般化된 法則을 이끌어낸다. 이로부터 새로운 結果를 豫測하고 다시 實驗을 통해 檢證한다. 近代科學이 成立되는 過程을 좀 誇張해서 말하자면 古代와 中世 2千 年을 支配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世界를 깨부수는 過程이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三段論法을 拒否하며 實驗의 重要性을 强調한 것은 그래서 意味가 있다. 베이컨의 가르침에 가장 잘 맞는 事例로는 케플러의 行星法則이 있다.  다만 科學의 歷史를 돌아보면 科學은 歸納의 方法으로만 發展하지 않았다. 오히려 歸納法이 作動한 事例는 極히 드물 程度이다. 또한 베이컨은 經驗主義者답게 數學의 價値도 낮게 評價했다.


自然이라는 冊은 數學이라는 言語로 쓰여 있다고 말했던 同時代의 갈릴레오가 무척 섭섭했을 것이다. 베이컨은 사람을 誤謬에 빠지게 하는 네 가지 나쁜 習慣을 네 가지 偶像으로 表現했다. 種族의 偶像은 人間 感覺과 理性의 不完全함을, 洞窟의 偶像은 個人的 偏見을, 市場의 偶像은 言語의 誤濫用을, 劇場의 偶像은 特定 體系(아리스토텔레스의 哲學 같은)에 對한 盲信을 뜻한다. 


베이컨의 또 다른 著作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에는 國家가 支援하는 學術機關人 ‘살로몬의 집’이 나온다. 想像 속의 섬인 아틀란티스는 베이컨 式의 理想主義 社會를 그리고 있다. 살로몬의 집은 말하자면 科學者들의 자유로운 硏究機關으로 後날 英國의 王立學會 같은 科學團體의 原形이 되었다. 


베이컨보다 한 世代 뒤에 태어난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近代 哲學의 創始者로 불리는 數學者이자 哲學者이다. 데카르트의 認識論은 베이컨과는 正反對로 演繹的이다. 그의 代表著作인

《方法敍說》에 드러난 思惟方式은 方法論的 懷疑論으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哲學의 確固한 基礎를 세우려면 모든 것을 疑心하는 것에서부터 始作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疑心해 나가는 過程에서 最終的으로 限界에 到達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繼續해서 疑心하는 自己 自身의 存在이다. 이때 나라는 存在는 物質的인 肉體라기보다 思惟하는 精神으로서의 나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存在한다.”는 偉大한 命題가 成立한다. 


人間의 不確實한 感覺經驗은 데카르트의 會議를 빠져나갈 수 없다. 感覺經驗보다 더 重要한 것은 精神 또는 理性의 活動이다. 그 中에서도 가장 믿을만한 것은 幾何學的 公理 같은 數學的인 知識이다. 卽, 더 以上 疑心할 수 없는 생각하는 存在로서의 나로부터 始作해 數學에 土臺를 둔 明澄한 知識 體系를 쌓아 올리면 確固한 哲學體系를 構築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哲學은 베이컨과 正反對라 한 쪽의 長點이 다른 쪽의 短點이 되는 그런 相補的인 짝과도 같다. 科學 活動이란 참 複雜 微妙해서 베이컨 式의 歸納注意만으로도 데카르트 式의 演繹注意만으로도 說明하기 어렵다. 베이컨과 데카르트 以後로도 英國은 大體로 經驗主義나 歸納注意가 得勢를 하고 大陸의 프랑스는 數學 中心의 年逆主義가 發展한 것은 興味롭다. 數學者로서의 데카르트는 座標系를 導入해 解析幾何學을 創始했다. '데카르트 座標系'는 只今도 가장 흔히 쓰이는 座標系이다. 그냥 幾何學이라고 하면 한 마디로 말해 主로 그림만으로 數學 問題를 푸는 方式이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꼭 이런 方式이다. 解釋機하란 圖形의 各 要素에 座標를 附與해 代數的으로 數學問題를 푸는 方式이다. 그의 後孫들은 18~9世紀 프랑스에서 뉴턴力學을 數學的으로 優雅하고 세련되게 다시 整理하기에 이른다. 現實感覺을 重要하게 여겼던 아리스토텔레스를 克服하려면 亦是나 數學이 제 役割을 해야 한다. 相對的으로 스승이었던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그랬듯이, 수학의 言語로 宇宙를 보려고 했었다. 以後의 世上은 弟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千年王國이었다고 해도 過言은 아니다. 그 渦中에 아리스토텔레스 體制를 代身할 패러다임으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代案은 바로 플라톤이었다. 아주 後代人 르네상스 時節에 다시 플라톤주의가 復興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體制에 對한 反撥이었고 數學的 秩序로 世上을 理解하려는 努力이 主要한 흐름이었다. 


只今 우리가 科學하면 떠올리는 가장 代表的인 이미지는 實驗과 數學이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이 두 心象에 對한 援助 格에 該當하는 人物이라고 할 수 있다. 科學革命期의 한가운데에 이 둘이 存在했었음은 아마도 偶然이 아닐 것이다. 

 

※參考資料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최채기, 金屬活字는 帝王의 象徵物, 苦戰散策474(2016.2.1.).
-야마모토 요시타카, ≪16世紀 文化革命≫(남윤호 옮김), 東아시아.
-야마모토 요시타카, ≪科學革命과 世界觀의 轉換≫(김찬현 縛鐵은 옮김), 東아시아. 
-버트란드 러셀, ≪西洋哲學史≫(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筆者紹介 

이종필  粒子理論 物理學者. 建國大 尙虛敎養大學에서 敎養科學을 가르치고 있다. 《神의 粒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科學에세이》, 《物理學 클래식》, 《이종필 敎授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相對性理論 講義》,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速度로 理解하는 相對性理論》을 썼고 《最終理論의 꿈》, 《블랙홀 戰爭》, 《物理의 定石》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連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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